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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포구기행

[포구기행](2) 강화 더리미 /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 이승철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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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기행](2)강화 더리미

 글·사진 김지환기자 kjh1010@kyunghyang.com
 
ㆍ‘만선의 욕심’ 던져 버린 무욕의 어부들

강화도와 김포시를 잇는 강화대교는 좁고 세찬 강화해협의 물살 위에 놓여있었다. 다리에 오르자 양 옆으로 갯내음을 풍기는 염하(鹽河, 해협의 모습이 강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가 눈에 들어왔다. 염하를 가로질러 400여m를 더 달리자 절단된 아스팔트 위로 선원면 신정리를 알리는 표지판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길게 이은 대열에서 빠져 차를 다시 뒤로 돌린 뒤 오른쪽 좁은 2차로를 달려야 찾을 수 있는 길이었다.

강화도를 잇는 다리들이 늘어나자 더리미 앞 염하(鹽河)는 물골이 바뀌었다. 이 곳을 찾던 사람들도 점차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갑곶교의 짧은 다리를 건너 100m를 조금 더 달리자 강화대교 위에서 내려다 본 염하의 세찬 물줄기가 가까이 보였다. 일직선 길을 따라 5분여를 더 가자 목적지인 선착장이 있었다.

수백여 년 전 세곡선(稅穀船, 나라에 바치는 곡식을 싣는 배)의 뱃길은 예전 그대로 흐르고 있었지만 번성했던 과거는 기억 속에만 남은 듯 했다. 40여 년 전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섬과 육지를 오가던 배들은 온데간데 없고 이젠 드문드문 심어진 나무들만 그 흔적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염하의 거친 물살을 이기고 올라온 도톰하게 살이 찬 물고기들은 예전만 못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느껴졌다.

분단 후 임진강을 드나들며 만선의 기쁨을 누렸던 배들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지척인 이곳 더리미 선착장에 그물을 내려놓았다. 그물 가득 한 고기떼 이야기는 이제 은퇴한 어부의 무용담이 돼 과거의 풍요를 짐작케 할 뿐이다.

선착장 입구에 들어서 시멘트 바닥을 지나가자 철망으로 만든 출입문엔 ‘관계자 외 출입금지’란 푯말이 조그맣게 보였다. 어구 도난을 막기 위해서가 아닐까 짐작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관광객들의 쓰레기”때문이었다. 10여 년 전부터 고기잡이로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이곳 선주들이 하나둘씩 모여 배이름을 따 작은 횟집을 만든 뒤부터 생긴 일이었다.

“밀물과 썰물 흐름에 장단을 맞추던 고기떼 들은 이제 자취를 감췄어, 물이 돌면서 빈 그물만 올라오더니 이제는 관광객들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내느라 정신이 없지.” 해성호 선장 구현회씨(60)는 개펄위에 힘없이 늘어앉은 자신의 낡은 배를 바라보며 하소연 했다. 더리미에 남은 선주는 모두 13명. 구씨는 “고기가 많을 땐 어선들이 25척이 넘었지만 모두 옛날 얘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선착장 앞 개펄엔 소금기 먹은 염하의 거친 물살을 새긴 듯 새빨갛게 녹이든 멍텅구리 배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곳 어민들은 수명을 넘긴 배들을 싼 값에 사들여 더 이상 못쓸 때까지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했다. 북쪽으로 어장이 풍부한 임진강이 가로 막혀있고 어로구획제한으로 남쪽까지 막히면서 어획량이 크게 줄어든 까닭이었다.

더리미 어민들은 무거운 욕심을 모두 염하(鹽河)에 던져 버리고 동력없는 멍텅구리배에 삶을 의지한 채 그물을 걷는다.

출항을 하루 앞두고 배를 점검 나온 소래호 선장 조경재씨(56)는 “전엔 이곳도 어촌계장이 있을 만큼 어업이 활발했지만 지금은 축소돼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조씨는 더리미에서 30여년 배를 탄 진흥3호 선장 조영재씨(70)의 3형제 중 막내동생으로 육지에서 직장을 잃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순풍호 선장 김기덕씨(58)도 “여기서는 절대 혼자가 없어, 동력이 없기 때문에 물 위에 배를 띄우려면 이곳 선주들 모두가 함께 나와 품앗이를 해야 돼”라며 말을 이었다. 김씨 말대로 200m 앞에 보이는 염화 한가운데 자리잡은 4척의 배들 모두 어민들이 밧줄을 당겨 물위로 올려놓은 것들이었다.

김씨는 “육지에선 비록 직장을 잃었지만 더리미를 온 뒤 도시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여유를 찾았다”고 말했다. 이제는 아들(김진남·29)과 함께 고기를 잡는 유일한 부자(父子) 어부가 돼 더리미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 선주들은 배를 띄우기 전에 우선 제비뽑기를 한다. 정해진 어획량을 다툼 없이 공평하게 나눠 갖자는 취지에서 도입했다고 한다. 이들은 한명씩 뽑힌 번호순서대로 배를 끌고나가 차렷자세로 이어져 그물을 바닷물에 내린다.

염하 한 가운에 배를 띄우고 닻을 내리면 작은 소형모터가 달린 보트를 타고 다니며 잡은 물고기를 옮기는 방식이었다.

거친 물살을 이겨낸 어종은 예상 밖으로 풍부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새우였다. 다른 지역과 달리 검지 크기의 알찬 ‘중화새우’가 잡히는 이곳은 절여서 비싼 값에 모두 외지로 판매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새우 뿐만 아니라 계절이 바뀌듯 다양한 어종들이 그물에 올라온다. 4월이 되면 실뱀장어를 그물에 담아 한바가지에 몇만원씩 비싼값을 불러 양식장에 팔아 넘긴다. 5·6월이면 복어, 농어 등 잡어를 잡아 선착장 앞 선주들이 운영하는 비닐천막으로 만든 횟집에서 주민들과 관광손님들을 상대로 모두 팔아버린다.

그래서 이곳은 철에 따라 종류를 달리하는 횟감이 상에 오르고 선착장 앞이 붐비기 시작하는 시기도 계절별로 나뉘고 있다. 주어종이 새우인데도 불구하고 더리미가 장어마을로 더 유명한 까닭은 이곳에서 잡히는 자연산 장어가 워낙 맛이 좋은데다 구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양이 점차 줄면서 높은 가격에 약용으로만 거래되고 있다.

농부들이 해를 보고 한해 농사를 결정하고 준비한다면 어민들은 달과 바람에 의지해 한해 바닷일을 점친다. 진흥3호 선장 조씨는 “고기잡이를 하기 전엔 경력이 많은 어부들이 선착장 앞에 나와 온몸으로 바람을 살핀다”며 “물때를 알아보고 그날 그물에 오를 고기의 양을 짐작한다”고 말했다.

만선을 바라는 어부들의 마음이야 한결 같겠지만 이곳 더리미 어민들은 욕심을 버린 듯 보였다. 무동력 어선을 물위에 띄울 때도, 배위로 올린 고기를 나를 때도 모두 함께 해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물에 걸린 고기는 많지 않았지만 더리미에는 무욕(無慾)과 평온함이 가득했다. 뱃사람들과의 얘기가 길어졌는지 어느덧 해질녘이 돼 있었다. 더리미 선착장에 비친 서해의 낙조(落照)는 곱고 아름다웠다.

더리미를 향해 달렸던 인천시내 길은 회색 시멘 먼지를 날렸지만 더리미 개펄의 회색빛은 생명을 낳는 자연의 힘이 느껴졌다. 이곳 어부들은 마디마디 거친 손으로 매일 개펄에 던져진 닻줄을 잡아당기며 주렁주렁 매달린 생명의 양식들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섬사람들의 기쁨이었던 다리…어민들에겐 오히려 시름만 더해

임진강 아래 가득한 물고기 때는 이제 옛날 이야기가 돼 버렸다. 어부들은 매일 담배를 입에 물고 그물에 오른 쓰레기를 탓한다.

강화도 선원면(仙源面) 신정리 ‘더리미 선착장’. ‘더리미’라는 지명은 ‘작은 마을들이 하나씩 더해지면서 새로운 마을을 이루게 됐다’는 뜻에서 유래된다.

더리미 선착장은 북쪽에 강화읍, 서쪽에 내가면(內可面), 남쪽에 불은면(佛恩面)을 두고 있는 작은 포구다. 동쪽은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김포시 월곶면(月串面)과 마주하고 있다. 염하는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흐르는 강화해협의 모습이 강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살이 급해 사고가 잦았던 이곳에 다리가 생긴 건 40여 년 전 일이다. 다리가 생기기 전 이 곳 사람들은 김포쪽 나루에서 밀물 때를 기다려 나룻배에 몸을 싣고 강화도를 왕래했다.

처음 강화를 이었던 다리는 섬사람들에게 기쁨이었지만 편리성을 위해 줄지어 물 위에 놓인 다리들은 오히려 어부들의 어깨에 시름만 더했다. 강화교(1969년 완공, 길이 694m)에 이어 강화대교(1997년 완공, 길이 780m)가 생길 때만 해도 신정리 더리미는 삼삼오오 관광객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계절별로 맛을 달리한 다양한 잡어들은 미식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지만 신강화대교(2001년 완공, 720m)와 강화초지대교(2002년 완공, 길이 1.2㎞)가 들어서자 염하의 물골이 바뀌기 시작했다. 고기들은 더 이상 어부들의 그물에 오르지 않았고, 이곳을 찾던 사람들은 자연스레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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