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 코스
당산역→당산중학교→당산/은행나무→당산 부군당→노들길나들목→양화대교→고양이산/선유봉/선유도공원
→선유교→양평1나들목→영등포아리수센터→쥐산 들머리→진주강씨양천공파묘→쥐산/분동산 정상(50.5m)
→양화인공폭포→안양천ㆍ한강합수부 다리→경인양행→염창동둘레길입구→도당산 정상→염창정/이수정터?
→염창나들목→강변골프연습장→염창산 파고라→염창산/증미산/증산(55.7m)→전망데크→가양빗물펌프장
→황금내근린공원→가양아파트교차로→한강전망대 왕복→허준선생동상→광주바위→소요정→허준박물관
→탑산/소요산 정상(32.5m)→공암나루 표석→허가바위(공암바위)→강서 리버사이드파크→궁산둘레길 입구
→양천향교→궁산/관산/진산 정상(75.8m)→관산성황사→소악루→궁산둘레길 입구→가양나들목→마곡철교
→방화대교 남단→개화육갑문→강서둘레길2코스(메타세콰이어숲길)→치현둘레 소공원→치현산 정상(70.5m)
→치현정→개화산 들머리→약사사→우수조망명소→개화산 봉수대→개화산 정상(132m)→개화초교→개화산역
오늘은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를 나선다.
겸재 정선의 양천팔경첩에 나오는 것처럼 기암절벽에 옛 선인들이 정자를 세우고 풍치를 즐겼다는 곳...
그러나 그 당시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진 풍경이지만 한강가에서 사라진 명소와 경관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 흔적이나마 찾아 감흥을 느끼고자 길을 나선다.
악루청풍(岳樓淸風) ; 소악루의 맑은 바람
양강어화(楊江漁火) ; 양화진의 고기잡이 불
목멱조돈(木覓朝暾) ; 목멱산의 해돋이
계양낙조(桂陽落照) ; 계양산의 낙조
행주귀범(杏州歸帆) ; 행주로 돌아드는 고깃배
개화석봉(開花夕烽) ; 개화산의 저녁 봉화
한산모종(寒山暮鐘) ; 겨울 저녁 산사(개화산 약사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이수구면(二水鷗眠) ; 안양천에 졸고 있는 갈매기
☞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 - 2부를 시작하며...
▼ 허가바위(공암바위)에서...
허가바위/공암바위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바위동굴
내용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1호.
굴의 크기는 가로 6m, 세로 2m, 길이 5m이다.
일명 공암바위라고도 불린다.
탑산(塔山)아래 계곡에는 천연적으로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는데,
옛날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한강에서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했던 혈거동굴로서,
학술적가치가 매우 높은데 1991년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면서 육지로 변하였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지만 아래서 보면 수직 절벽의 꽤 높은 바위산으로 보인다.
색깔은 자색을 띤 바위이다.
‘허가바위굴’이라고도 부르며,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곳을 양천허씨의 발상지라고 말한다.
허선문은 고려태조가 견훤을 징벌하러 가면서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도강의 편의와 군량미 제공 등의 공을 세워
‘공암촌주(孔巖村主)’라는 벼슬을 받았는데 그는 나이가 90이 지났는데도 고려태조에 충성을 했으며,
그 자손이 공암허씨로 공암은 양천(陽川)이므로 공암허씨는 양천허씨를 말한다고 『경기읍지』에 기록이 있다.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허가바위와 공암바위가 같은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네요.
공암(孔岩)바위/허가바위
강서구 가양동 산1-2번지에 있는 구멍뚫린 바위로서, 허가바위라고도 한다.
탑산 아래 있는 이 바위는 광주바위와 같은 자색을 띤 자암인데
수십 명이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허가바위굴’이라고도 한다.
이는 양천 허씨의 시조 許宣文이 이곳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있어 이곳을 양천 허씨의 발상지라고 부른다.
허선문은 고려 태조 때 공암촌주가 되었으며 그 자손은 양천 허씨가 되었다.
이 공암 때문에 이곳 지명을 백제와 고구려는 齊次巴衣縣이라 하였고 신라는 공암이라 하였다.
출처 : 서울지명사전
▼ 허가바위를 나서서...
▼ 강서리버사이드파크길을 따라...
▼ 궁산과 소악루가 보이네...
▼ 궁산공원둘레길 아치
▼ 먼저 양천향교 방향으로...
▼ 양천향교 홍살문
▼ 양천향교
양천향교지 陽川鄕校址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향교.
시대 : 조선
문화재 지정 ; 서울특별시 시도기념물 제8호
건립시기 ; 1411년(태종 11)
성격 : 교육기관, 향교
유형 : 유적
면적 : 8동(238m²)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향교길 50)
분야 : 교육/교육
내용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
1411년에 창건하여 문묘기능과 함께 유학을 연구·강론하는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오다가
1909년 학제가 개혁됨에 따라 타향교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되고, 문묘기능만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1914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천군(陽川郡)이
김포군(金浦郡)에 합군(合郡)되면서 양천향교가 김포향교에 통합되었다.
그 후 1945년 광복과 함께 김포향교에서 분리·독립되면서 관내 유림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교궁(校宮重修)을 중수하고 비품(備品) 등을 구비하게 되었으며,
이어 1969년에 대성전(大聖殿)과 외삼문(外三門)을 보수(補修)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 1977년부터 1979년까지 3년 동안 향교 복원공사 계획을 수립하고
향교의 재산 처분과 복원사업 승인을 얻어 1980년 11월에 복원공사에 착공,
1981년 8월에 완공을 보았다.
또한 향교 비품도 장만하여 향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향교가 위치한 이곳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 공암(孔岩)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에 수주(樹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1310년에 양천현(陽川縣)으로 고치고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그 후 1895년에 군(郡)이 되었다가 1914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포군에 병합되었고
1963년에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양천향교에서는 대성전에 오성(五聖)과 송조 4현(宋朝四賢),
그리고 우리 나라 십팔현(十八賢)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한다.
참고문헌 : 『양천현읍지(陽川縣邑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선정비/불망비군
▼ 양천향교 외삼문
▼ 좌우 동재와 명륜당
▼ 내삼문 앞에서...
▼ ?
▼ 궁산 정상으로 가면서...
▼ 양천고성지 안내문
양천 고성지 [陽川古城址]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加陽洞) 산8∼4번지 일대 올림픽대로변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터.
지정번호 사적 제372호
지정연도 1992년 3월 10일
소재지 서울 강서구 가양동 산8-4외
시대 삼국시대
크기 석축둘레 762척(약 218m)
면적 2만 9370㎡
분류 산성터
1992년 3월 10일 사적 제372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2만 9370㎡, 석축둘레 762척(약 218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상으로도 그 존재가 확인되며,
성터임을 확인하여 주는 적심석(積心石)과 석재가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한강변의 들판에 우뚝 솟아 서북 대안(對岸)의 행주산성(사적 56) 및 파주 오두산성(烏頭山城:사적 351)과
더불어 삼국시대 이래 한강 하구(河口)를 지키던 요새의 하나로,
옛 관방시설(關防施設) 및 읍치구조(邑治構造)의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조선시대 양천현(陽川縣) 읍치(고을)의 진산(鎭山)인 궁산(宮山:74m) 정상을 중심으로 축성된 퇴뫼식 산성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정상부가 평탄하게 깎여 있는 것을 제외하고 북측 급경사지역을 포함한 전지역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궁산 정상
▼ 2011년 1월엔 이런 전망대가 있었는데...
▼ 고양시 대덕산 너머로 북한산이 보이네...
▼ 궁산 정상 삼각점에서...
▼ 2011년엔 이런 모습이었는데...
궁산(宮山)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궁산은 표고 75.8m로 조선시대 양천고을의 진산이었다.
한남정맥의 끝자락으로 안산 수리산에서 북행하여 증산(甑山)이 되고,
그 낮은 구릉이 한강으로 끝나면서 작은 봉우리를 이루어 놓고 있다.
따라서 한강을 따라 서쪽의 개화산, 동쪽의 탑산·쥐산·선유봉 등과 더불어
한강의 남안에 솟아 있어 강변의 절경을 이루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대동지지』 등에 이곳을 “성산(城山)에 고성이 있는데,
그 둘레는 726척(약 218m)이고 지금은 성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의 이름은 파산(巴山)·성산·궁산·관산(關山)·진산(鎭山) 등 다양하였다.
파산은 삼국시대에 주변의 땅이름이 제차파의(齊次巴衣)로서 이것에 연유된 것이며,
성산이라 함은 성이 있기 때문에 불리워진 이름이고,
진산은 양천고을의 관방설비가 되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관산은 빗장‘관(關)’자를 썼는데,
한강을 지키는 빗장 역할을 했던 산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을 빗장처럼 지킬 수 있는 산이다.
궁산은 양천향교가 있어서 궁(宮)으로 표시했던 것으로 공자를 숭배하는 표시로 불리워졌던 것이다.
현재 표준 명칭도 궁산이다.
궁산이 갖는 역사적 의미로는
임진왜란 때 전라창의사 김천일, 전라소모사 변이중, 강화의병장 우성전 등이
김포·통진·양천·강화·인천 등지의 의병들을 이끌고 이 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한강을 건너 권율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에 참가하여 크게 승리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양천현감들은 매일 저녁 궁산에 올라 강 건너 피어 오르는 봉화를 바라보고 국가의 안위를 살피기도 하였다.
북쪽으로는 인왕산 서쪽 무악봉수를 살피고, 남쪽으로는 부천 장명산 봉화를 감시하였다.
동쪽으로는 목멱산 제5봉수를 살피고, 서쪽으로는 파주 오두산성과 개화산 봉화를 감시할 수 있었다.
궁산에는 춘초정·막여정·악양루·춘산와·제일정·소악루 등 많은 누정이 있었다.
특히 궁산 한강변의 뛰어난 절경은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岳陽樓)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버금간다 하여 이곳에 지어진 악양루라는 정자가 있었다.
영조 때 이유(李楡)가 이곳에 와 악양루 옛터에 소악루를 짓고 명사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
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뒤 매일 이 곳에 올라 소일하면서 한강변의 그림을 그렸다.
그 작품집 『한수주유(漢水舟遊)』야말로 오늘날 한강변의 옛 모습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궁산의 정상에는 6·25전쟁 때 군부대가 주둔하여 진지로 사용되어,
아직도 평평한 꼭대기에는 휴일을 맞이한 인근 주민들이 솔밭 사이에서 소풍을 즐길 수 있다.
그 정상에서 한강변으로 조금 내려가면 난지도와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복원된 소악루가 서 있다.
-서울시-
▼ 관산(궁산)성황사
▼ 成은 城의 잘못.
궁산(宮山)
궁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파산, 성산, 관산, 진산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궁산에는 옛날 백제의 양천고성지가 있고,
조선조 화가인 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재임하면서 그림을 그렸던 소악루가 있으며,
오랜 세월동안 우리 고장의 인물을 배출한 양천항교가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집결장소였으며, 6.25 동란 때에도 국군이 주둔했던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지다.
(궁산은 조선시대 때 우리 고장 행정의 중심지였음)
-강서구-
▼ 소악루
정선 [소악루], <양천팔경첩> 비단에 엷은 색, 개인소장
[소악루]
현재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소악루는 이유(李楡, 1675-1757)가 1737년 그의 집 뒷 동산에 지은 누정이다.
이는 ‘소악양루’의 준말로서 중국 호남성 악양현 현성의 서문 이름이다.
소악양루는 빼어난 동정호의 절경을 조감할 수 있는 전망대였기 때문에,
이유 역시 집 근처에 악양루 못지않은 누정을 지어 주변 경관을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정선은 팔작지붕의 소악루를 중심으로 연꽃 만발한 연못, 그 가운데 떠있는 섬과 작은 누정, 그리고 배를 탄 풍류객을 포착했다.
소악루 [小岳樓]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정자.
1737년(영조 13) 동복현감을 지낸 이유(李楡, 1675~1757)가 경관과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자신의 집 부근 옛 악양루 터에 지었다.
‘소악루’란 중국 동정호의 웨양루[岳陽樓] 경치와 버금가는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으로,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 등이 이곳에 찾아와 그림을 그렸다.
당초 가양동 세숫대바위 근처에 세웠던 원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1994년 5월 구청에서 한강변 경관 조성 및 조망을 고려하여 현 위치에 신축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규모로서 화강석 8각 주춧돌에 민흘림 원기둥을 세운 5량집 겹처마 구조이다.
지붕은 단층 팔작지붕이며, 주위에는 조망하기 좋도록 난간을 둘러놓았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안현석봉(鞍峴夕烽), 1740년 비단에 채색한 23.0×29.4㎝ 간송미술관 소장품
<그림에 붙인 이병연의 시>
계절 맛 참으로 좋은 때,
발 걷으니 산 빛이 저물었구나
웃으며 한 점 별같은 불꽃을 보고,
양천 밥 배불리 먹는다.
소악루에서 달맞이 하는 광경을 그린 소악후월에 다음과 같은 이병연의 시가 있다.
파릉(巴陵)에 밝은 달 뜨면
이 난간에 먼저 비친다.
두보(杜甫)의 제구(題句) 없는 것,
끝내 소악루를 위해서겠지.
▼ 턱빠진바위
▼ 궁산공원둘레길 아치로 되돌아 와서...
▼ 가양나들목을 통과하여...
▼ 한강산책길을 따라...
▼ 마곡철교
▼ 방화대교와 덕양산(행주산성이 있는)이 보이네...
▼ 개화나들목(개화육갑문)으로...
▼ 개화육갑문을 통과하여...
▼ 강서둘레길 2코스를 일주하기로...
▼ 메타세콰이어숲길
▼ 강서둘레길 2코스 일주를 마치고...
▼ 치현둘레길소공원에서 치현산으로 오르며...
▼ 치현산 정상에서...
▼ 치현정으로...
▼ 치현정
▼ 방화대교
▼ 덕양산
정선 [귀래정], <양천팔경첩> 비단에 엷은 색, 개인소장
[귀래정] 과 [낙건정]
귀래정과 낙건정은 현재 행주대교가 있는 고양시 덕양구 덕양산 기슭의 누정이다.
귀래정은 김광욱(金光煜, 1580-1656)이, 낙건정은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이 각각 세웠다.
정선은 [귀래정]에서 병풍처럼 드리워진 덕양산과 울창한 송림을 화면 중앙에 과감히 배치했고,
그 아래 누정 주변의 활엽수와 버드나무를 담필, 담묵으로 묘사했다.
반면 [낙건정]은 덕양산 끝자락에 세웠고, 절벽 아래에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의 상류와 하류를 함께 화면에 담았다.
[杏湖觀漁 행호관어 (서울간송미술관 소장)]
행호관어는 ‘행호(杏湖)에서 고기잡는 것을 구경한다'는 뜻.
▼ 꿩고개체력단련장을 지나...
▼ 개화산을 오르며...
▼ 약사사
정선 [개화사], <양천팔경첩> 비단에 엷은 색, 개인소장
[개화사]
개화사는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 해발 126m에 위치한 사찰로서, 현재 약사사로 불린다.
정선은 화면 전체에 개화산의 수려한 봉우리를 중첩했고 산 중턱 구릉에 개화사의 법당과 현존하는 3층 석탑을 그려 넣었다.
<양천팔경첩>의 다른 장면들이 산세를 한쪽에 치우치게 한 후 나머지 공간을 강물로 연출한 것과 차별되는 구성법이다.
▼ 우수조망명소에 들러...
▼ 개화산 봉수대에서...
개화산봉수(開花山烽燧)
개화산봉수는 개화산 북쪽 상봉에 있으며, 속칭 봉화뚝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통신수단으로 설치한 이 봉수는
전라도 순천군 돌산도로부터 충청도·경기도 등의 해로를 거쳐 김포군 냉정산에 다다라,
이 봉수가 서쪽으로 냉정에 연결되고, 동쪽으로 서울 목멱산 제5봉에 전달된다.
조선말기에 봉수제는 폐지되고 그
남은 터도 6·25전쟁으로 미군부대가 주둔하면서 군사시설을 닦느라 흔적마저 없어졌다.
이 곳은 옛 양천지역의 이름인 파릉(巴陵) 8경의 하나로 「개화석봉(開花夕烽)」에 해당하여
개화산의 저녁 봉화가 평화로운 한강변 경치를 한층 아름답게 꾸몄던 것이다.
-서울시-
▼ 개화산 정상부에 '개화산봉수대'라는 표지석이 있네...
개화산(주룡산)
개화산은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 개화동에 위치한 표고 128.4m의 잔구성 구릉산지이다.
『양천읍지』를 보면 개화산의 산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해의 산경은 백두산을 조종(祖宗)으로 하여 태백산에 이르고,
서쪽으로 굽이쳐 속리산이 된 다음, 북행하여 청계산이 된다.
여기서 맥을 나누어 일맥은 북쪽으로 관악산을 이루고, 다시 북쪽으로 떨어져 양화도 선유봉이 되며,
일맥은 서북을 향하여 안산의 수리산·인천의 소래산으로 이루어져 북행해 와서 본현에 이르러서는 증산(甑山)이 된다.
증산은 산 모습이 예뻐서 군자봉이라고도 하니,
이것이 한 고을의 조봉(祖峰)이 되며, 일맥이 북향하여 주룡산(駐龍山)이 된다.
일명 개화산이라고도 하는데, 코끼리 형상으로 사자 형상인 행주산과 더불어
한강 하류의 양쪽 대안에 포진하여 서로를 바라보며 서해안을 통해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한성에서 흘러나오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이라고 한다.
개화산은 일명 ‘주룡산’이라고도 했다.
신라 때 한 도인이 주룡선생(駐龍先生)이라 자칭하며
이 산에 숨어 살면서 도를 닦고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이곳에서 늙어 죽었다.
그가 이 곳에 살 때 매년 9월 9일에는 동자 두 세명과 더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하였으므로 주룡산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자리에는 이상한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이 산을 개화산이라 일컬었다.
지금의 개화사가 주룡선생이 살던 옛 터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곳에 봉수대가 동·서 두 곳에 설치되어 있고,
봉수군과 봉대별장(烽臺別將)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봉수진이 있었던 산이라는 의미로 ‘開火山’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두개의 봉수대 중 동쪽은 방화동의 치현(雉峴)에서, 서쪽은 개화산에서 봉수를 받아 연락하였던 것이다.
개화산봉수는 여수 돌산도에서 시작하여 전라도·충청도 방면의 해로를 통한 봉수로,
회현 동쪽 산마루의 남산 제5봉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치현의 동쪽 봉수대는 현재 통신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봉화를 들었던 곳을 ‘봉화뚝‘이라 한다.
이렇듯 임진왜란·병자호란 전까지는 봉화불을 올렸다 하여 ‘開火山’이라 하였는데,
그후에 ‘開花山’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 본다.
산정에 서면 삼각산과 도봉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조강(祖江)의 광활한 풍광과 바닷물이 들어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낙산·북악·남산을 비롯해서
멀리 관악산과 그 사이를 굽이쳐 오는 한강의 물길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명소 중의 명소이다.
그래서인지 조선후기 화가로 이름 높은 겸재 정선(鄭敾)은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열수팔경도」의 하나로「개화사」라는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오솔길의 소나무숲과 그 아래 버들숲이 우거져 있고 전답이 있는 모습을 그렸다.
지금은 개발제한구역과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어 자연 그대로의 숲이 제법 울창한 것도 개화산의 자랑이다.
그리고 개화산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낸다.
개화산은 1977년 7월 9일 건설부고시 제138호로 개화동 산 17번지 일대 386,500㎡를 미시설 개화근린공원으로,
방화동 산 97-1번지 일대 18만㎡를 미시설 방화제2근린공원인 꿩고개근린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서울시-
▼ 고릴라부부바위
▼ 개화초등학교 부근...
▼ 개화산역에서 여정을 마치고...
☞ 이것으로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