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탄신일에 북한산 칠대사찰(진관사ㆍ승가사ㆍ문수사ㆍ중흥사ㆍ노적사ㆍ국녕사ㆍ백화사) 순례산행' 코스
구파발역→이말산(진관근린공원)→진관사 입구→진관사 일주문→진관사 탐방→진관사계곡→비봉→승가사 갈림길→승가사 일주문
→승가사 탐방→승가사계곡→구기삼거리→구기계곡→문수사 탐방→대남문→대성암계곡?→보국사지→행궁지→산영루→북한산성계곡
→중흥사 탐방→노적사 탐방→노적교→중성문→시구문→국녕사 탐방→가사당암문→백화사계곡→백화사 탐방→백화사 정류장→연신내역
'석가탄신일에 북한산 칠대사찰(진관사ㆍ승가사ㆍ문수사ㆍ중흥사ㆍ노적사ㆍ국녕사ㆍ백화사) 순례산행'을 위해 길을 나선다.
석가탄신일인 4월초파일에 의미 있는 산행을 하고자 '지리산 칠암자 순례'를 나서려고 했으나
여러 사정상 '북한산 칠대사찰'을 순례하는 산행을 구상하고...
좋은 님들과 함께 구파발역에서 이말산을 넘어서 진관사부터 '북한산 칠대사찰 순례'를 나선다.
올들어 가장 더웠다는 날에 '북한산 칠대사찰 순례'하며, 각 사찰만의 인연을 되뇌여 보기도 하고...
구파발역에서 이말산 들머리를 08시 03분에 들어서서 '북한산 칠대사찰 순례'를 모두 마치고
백화사입구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시각이 17시 44분이다.
약 9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아무도 슬프지 않기"
'부처님 오신 날에 '인연'을 생각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 하나 조차 정확히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진다고 한다.
이처럼 인연은 한 치의 오차도 없어 나타나야 할 가장 정확한 이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부모와의 인연, 부부의 인연, 직장의 인연, 사제의 인연, 친구의 인연 등
지금 내 삶의 환경들은 나에게 주어진 내 인연이다.
그런데 그 인연에 내 잣대를 가지고 온갖 좋고 싫은 분별을 일으킨다.
좋은 인연을 만나면 애착하여 더 잡으려고 애를 쓰고, 싫은 인연을 만나면 애써 버리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런 인연의 흐름이 늘 나의 어리석은 분별로 인해 껄끄러웠다.
'억지로 인연을 만들지 말라. 만날 사람은 다 만나게 된다’
어느 인연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애착이나 집착 없이 받아들이고, 얽매이지 않아야겠다.
▼ 08시 03분 - 구파발역에서...
진관사津寬寺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에 있는 절.
시대 고대/삼국
건립시기 신라 진덕왕 연간
성격 절, 사찰
유형 유적
소재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분야 종교·철학/불교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고려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하여 진관사를 창건하였다.
고려경종이 죽자 젊은 왕비는 왕태후가 되어 파계승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나누다가 사생아를 낳았다.
그 때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이던 왕욱(王郁: 安宗)의 직손이며
법통을 이어받을 대랑원군(大良院君)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왕태후는 대랑원군을 없애고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하여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로 옮기도록 하였다.
신혈사는 진관(津寬)이 혼자서 수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살해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사실을 눈치 챈 진관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열두 살인 대랑원군을 숨겼으므로 왕태후가 보낸 자객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3년 뒤 목종이 죽자 대랑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현종이 되었고,
1011년 진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1090년(선종 7)에 왕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1099년(숙종 4)과 1110년(예종 5)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조선에서는 1397년(태조 6) 태조는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육지와 수중의 고혼과 아귀를 위하여 법식(法食)을 공양하는 수륙재를 지냈다.
이를 본받아 척불왕이던 태종도 1413년(태종 13) 이 절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이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를 열었다.
그 뒤 1463년(세조 9) 화재로 소실된 것을 1470년(성종 1)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1
854년(철종 5)과 1858년에 중수하였다.
1879년(고종 16)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고, 1
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나한전·독성전(獨聖殿)·칠성각·홍제루(弘濟樓)·종각(鐘閣)·일주문·선원(禪院)·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대웅전에 봉안된 본존불은 고려 현종을 구해준 불상이라 전하며,
홍제루의 고색이 깃든 초석이나 축대, 대웅전 후면의 축대나 석불 등은 이 절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법당 앞에는 석탑 대신 석등 2기가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09시 08분 - 진관사 일주문에서...
▼ 10시 46분 - 승가사 일주문에서...
승가사僧伽寺
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에 있는 절.
시대 고대/삼국
건립시기 756년(경덕왕 연간)
성격 절, 사찰
유형 유적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 1
분야 종교·철학/불교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가 창건하여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生佛)로 지칭되었던 승가(僧伽)를 사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라 하였다.
그 뒤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하였고,
1090년(선종 7)에는 구산사(龜山寺)의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중수하였으며,
1099년(숙종 4)에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의천(義天)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불당을 중수하였다.
1422년(세종 4)에 왕이 7종을 통합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할 때는 선종에 속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쳐 고종 때 민비와 엄상궁의 시주를 얻어 일신, 중건하였다.
1941년에 도공(道空)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비구니 도명(道明)이 중창하여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약사전(藥師殿)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그 뒤를 이어 비구니 상륜(相侖)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현재는 산신각(山神閣)·향로각(香爐閣)·동정각(動靜閣)·범종각(梵鐘閣)·대방(大房)·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좁고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알맞게 배열되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창건 이후 여러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하였고,
조선 초기의 고승 함허(涵虛)가 수도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는 성월(城月)이 이절에서 배출되어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의 직책을 맡아
쇠잔하던 불교를 크게 진작하는 등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찰이다.
또한 예로부터 기도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의 유물로는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석조승가대사상이 있으며,
서북방 100m 지점에는 보물 제215호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부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과 약사전에 모신 약사여래의 영험, 그리고 약수의 효험 등은 이 절을 기도처로서 유명하게 만들었다.
절의 뒤편 비봉에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유지비(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여기서 '석가탄신일에 북한산 칠대사찰(진관사ㆍ승가사ㆍ문수사ㆍ중흥사ㆍ노적사ㆍ국녕사ㆍ백화사) 순례산행' - 1부를 마치고...
-▥☞ 2부[승가사 탐방→승가사계곡→구기삼거리→문수사 탐방→대남문→행궁지→산영루→중흥사 탐방→노적사 탐방]는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