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9산(당산-고양이산-쥐산-도당산-염창산-탑산-궁산-치현산-개화산)따라 역사문화탐방 전반부 답사' 코스
당산역→당산중학교→당산/은행나무→당산 부군당→노들길나들목→양화대교→선유도공원(선유봉/고양이산)
→선유교→양평2나들목→자원순환센터→성산대교남단→영등포아리수센터 후문→쥐산 들머리→진주강씨양천공파묘
→쥐산 정상(50.5m)→양화인공폭포→양화교→나이아가라폭포→염창동둘레길입구→도당산 정상→염창정/이수정터
→염창나들목→염강나들목→염창양수장→염창산산책길→염창산/증미산(55.7m) 전망대→강변골프연습장→염창역
'한강 9산(당산-고양이산-쥐산-도당산-염창산-탑산-궁산-치현산-개화산)따라 역사문화탐방 전반부 답사' 이야기
오늘은 한강가에 있는 산들을 탐방하며
옛 선인들이 정자를 세우고, 배를 타고 풍치를 즐겼다는 '양천팔경'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물론 그 당시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진 풍경이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감흥을 느끼고자 한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양화진에서 행호 일원에는 절경을 자랑하는 여덟 곳이 있는데...
그 여덟 곳을 '양천팔경'이라고 하며...
선유봉·이수정·소요정·공암·소악루·개화사·낙건정·위래정 등이
바로 양천 팔경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의 발길을 잡았다고 한다.
특히 선유봉의 소나무 숲이 가장 빼어난 절경으로 꼽혔다는데...
악루청풍(岳樓淸風) : 소악루의 맑은 바람
양강어화(楊江漁火) : 양화진의 고기잡이 불
목멱조돈(木覓朝暾) : 목멱산의 해돋이
계양낙조(桂陽落照) : 계양산의 낙조
행주귀범(杏州歸帆) : 행주로 돌아드는 고깃배
개화석봉(開花夕烽) : 개화산의 저녁 봉화
한산모종(寒山暮鐘) : 겨울 저녁 산사(개화산 약사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이수구면(二水鷗眠) : 안양천에 졸고 있는 갈매기
당산역에서부터 출발하여 당산을 시작으로 개화산역까지 한강따라 9개의 산이 있는데...
오늘은 전반부 5개의 산을 찾아 연결해 가는 답사이다.
▼ 진주강씨 양천공파 묘에서...
쥐산(분동산:50.5m)
영등포구 양평동 한강변의 표고 50.5m의 쥐산은
양화도 근처에 있는 고양이산(선유봉)과 대칭되는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선유봉의 모습은 고양이가 쥐를 발견하여 발톱을 세우고 있는데 비해서,
쥐산은 먹이를 앞에 놓고 있던 쥐가 금방이라도 도망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해서 붙여졌다.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은 연꽃이 무척 많이 피어있던 연지(蓮池)로서,
고려 때부터 임금이 연꽃을 구경하러 오기도 했으며 외국 사신들이 즐겨찾던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쥐산에서는 분가루 같은 백토(白土)가 있어 바람부는 날이면
근방 일대가 분이 날리는 것처럼 하얗다고 해서 분동산이라고도 하였다.
쥐산은 조선 숙종 때 첨중추부사였던 강효직(姜孝直)에게
사패지로 하사함으로써 진주강씨의 묘역으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웃하고 있는 고양이산 선유봉의 기(氣)에 눌려 32인 외에는 더 이상 모시지 않고 있다는 속설이 전한다.
양화교 앞에는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인공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고 있다.
이 인공폭포 배경인 돌산은 인공 바위산으로
평균 높이가 18m로 높이 12m, 넓이 15m의 주 폭포를 비롯하여 6개의 폭포가 있다.
폭포 주변의 300여평은 녹지대로 조성하여 시민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외국인에게는 서울의 아름다운 첫인상을 갖게 하는 곳이 되었다.
- 서울시 -
▼ 원래의 안양천 하구는 영등포정수장이 있는 저 곳이었는데...
▼ 1925년 을축년 대홍수 후 1929년부터 9년 간에 걸쳐 안양천 하구이체공사를 하여 현재처럼 바뀠다고...
▼ 쥐산 정상의 정자?
▼ 공사 중인 월드컵대교가 보이네...
▼ 안양천 서쪽에 있던 쥐산이 안양천 하구이체공사를 통해 현재는 안양천 동쪽에 위치하게 된 것이라고...
▼ 건설중인 월드컵대교
▼ 쥐산에 이수정 있었다고 주장하는 글에 고개를 끄떡이며...'이수정'이란 이름은 안양천과 한강이 합수되는 지점에 세워진 정자였으니...
이수정 터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는 글이 있다.
지금은 풍광이 많이 변하였지만 쥐산 북쪽 한강변에는 일찍이 이수정(二水亭)이 있었다.
겸재 정선의 이수정 그림은 그가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후 그린 그림으로,
배를 타고 양천에서 양화나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라본 시각으로 그린 장면이다.
각도나 구도로 보아 안양천 하구가 한강으로 흘러들어 만드는 염창탄이 왼쪽 산봉우리들 사이로 이어지고 있고,
높이 솟은 절벽 위로 수림이 우거져 있으며, 그 사이에 누각 형태의 기와집이 반쯤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깍아지른 벼랑이 있고, 나루터에서 오솔길이 나 있는 산 위에 이수정이 보인다.
-서울시-
▼ 쥐산 정상부의 광고탑 뒷면과 통신탑?
▼ 가야 할 '도당산(상산)'을 바라보니...빨간색의 경인양행 우측에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 '상산(도당산)'이다.
▼ '상산(도당산)'과 그 뒤에 보이는 증산(염창산/증미산)은 원래 하나였던 듯...
▼ 월드컵대교 건설 현장사무소
▼ 양화인공폭포에는...
▼ 한강방어 백골부대전적비가...
▼ 양화인공폭포
▼ 오래 전에 찍었던 안내문과 폭포가 가동되었을 때의 모습...
▼ 오늘은 양화교를 건너 길을 잇는다.
▼ 1929년부터 안양천 하구이체공사를 통해 평지가 물길이 되었다고 하네...
▼ 강변무학아파트 104동 옆의로 난 계단을 올라서면...
▼ 경인양행 옆으로 데크계단이 보이고...
▼ 데크계단에는...
▼ 염창동둘레길 안내도가...
▼ 염창동둘레길을 따라...
▼ 동아아파트 202동이 보이는 이곳이 상산(도당산)의 현재 정상인데...
도당산(都堂山)
도당산은 강서구 염창동 한강변,
즉 한강과 안양천 합류지점의 안양천 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에 자리잡은 쥐산과 마주보고 있다.
현재는 강서구 염창동 동아아파트 202동 뒤에 남아있는 조그만 야산으로
아파트를 건설하면서 한강변에 산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도당산은 남북방향 절개지로서 북쪽은 올림픽도로, 남쪽은 아파트단지가 있는데,
정상에는 철조망만 자리잡고 있으며, 정상표시물은 없다.
아래쪽에는 염창정이란 정자와 그옆에 이수정터 표시석, 치성단이 위치하고 있다.
(이수정터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오류인듯...)
▼ 안양천 건너 쥐산(분동산)이 보이고...안양천 수로(하구)가 쥐산 동쪽에 있었을 땐 이곳과 쥐산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 아래로 내려서니...
▼ 염창정이라는 팔각정이 있고...
▼ '이수정터' 표지석이 있는데...이수정이 쥐산에 있었다는 주장과는 배치된다.
▼ 아래 그림과 설명 글을 보면 이곳(도당산)과 증산(염창산)이 원래 하나였고, 이수정은 지금의 염창산에 있었을 것이라 짐작케 하지만...
이수정(二水亭)
이수정은 서울 강서구 염창동 도당산(都堂山·지금의 증산) 상봉에 있던 정자다.
‘양천군읍지’에 이런 기록이 있다.
‘염창탄(현 안양천) 서쪽 깎아지른 절벽 위에 효령(孝寧)대군(1396∼1486)의 임정(林亭)이 있었다.
그 후에 한흥군(韓興君) 이덕연(李德演·1555∼1636)과 그 아우인 찬성(贊成·종1품) 이덕형(李德泂·1566∼1645)이
늙어서 정자를 고쳐짓고 이수정(二水亭)이라 했다.’
이덕연 형제가 벼슬에서 물러나 노년을 보내기 위해 이수정을 지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수정은 이덕연이 70대로 접어드는 인조 3년(1625)경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덕연이 스스로 호를 이수옹(二水翁)이라 했던 사실로 짐작이 가능하다.
이들 형제는 인조반정(1623)이 성공하자 벼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해야 했다.
인조반정은 율곡학파인 서인이 주도하고 퇴계학파인 남인이 묵시적으로 동조해 성공시킨 혁명이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광해군 조정에서 벼슬한 소북 계열이었다.
특히 이덕형은 반정 당시 도승지로 광해군의 심복이었다.
당연히 제거 대상이었으나 옛 임금의 목숨을 보전해 줄 것을 요구하는 충성심이 돋보여 반정 주역들이 포섭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이들 형제가 서인 조정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것이다.
이에 이수정을 짓고 언제라도 물러날 준비를 해 두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들 형제는 어떻게 효령대군의 임정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형제의 5대 조모인 비인 현주(庇仁 縣主) 전주 이씨가 효령대군의 정실 외동딸이었다는 사실에서 풀린다.
효령대군이 딸 몫으로 이 임정 일대를 나눠줘 이덕연 형제의 고조부인 우의정 이유청(李惟淸·1459∼1531) 때부터
이 일대가 한산 이씨 소유가 됐던 것이다.
이수정이란 이름은 당나라 최고 시인인
이태백(李太白·701∼762)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서’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세 산은 반쯤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갔고, 두 물은 백로 깃들인 모래벌이 가운데를 갈라놓았다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라는 구절이다.
실제 이수정에 오르면 눈앞에 우뚝 솟은 삼각산(북한산)의 상봉을
흰 구름이 감싸 반쯤은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간 듯 보이고,
난지도 모래펄이 한강물을 두 쪽으로 갈라놓는다.
1891년 편찬된 ‘양천현지’를 보면 이수정은 이미 터만 남아있었다 한다.
그러나 겸재가 ‘이수정’을 그릴 당시인 1742년경에는 그림에서처럼 이수정이 분명히 남아있었다.
이 그림은 양천현아 쪽에서 배를 타고 거슬러 오르며 바라본 시각으로 그려낸 것이다.
도당산 봉우리들이 강가에 급한 경사를 보이며 솟구쳐 있고,
그 봉우리가 상봉에서 서로 만나며 만들어낸 평지에 이수정 건물이 들어서 있다.
강가 모래톱에서 벼랑 위로 까마득하게 뚫려 있는 외줄기 길이 일각(一閣) 대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사 급한 이 오솔길이 이수정을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지금은 이 부근이 모두 아파트 숲으로 뒤덮여 이런 이수정 풍류의 자취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영조 18년(1742)경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의 소장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그런데 이수정 터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는 글도 있다.
지금은 풍광이 많이 변하였지만 쥐산 북쪽 한강변에는 일찍이 이수정(二水亭)이 있었다.
겸재 정선의 이수정 그림은 그가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후 그린 그림으로,
배를 타고 양천에서 양화나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라본 시각으로 그린 장면이다.
각도나 구도로 보아 안양천 하구가 한강으로 흘러들어 만드는 염창탄이 왼쪽 산봉우리들 사이로 이어지고 있고,
높이 솟은 절벽 위로 수림이 우거져 있으며, 그 사이에 누각 형태의 기와집이 반쯤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깍아지른 벼랑이 있고, 나루터에서 오솔길이 나 있는 산 위에 이수정이 보인다.
-서울시-
▼ '상산 치성단'이 보이고...
▼ 염창정 앞에는...
▼ 염창동둘레길을 따라...
▼ 염창나들목에서...
▼ 앞 건물로 직진했으나 길이 폐쇄된 듯 해서...
▼ 염창나들목을 이용해...
▼ 염강나들목을 이용해 증산(염창산/증미산)으로 가기로...
▼ ?...그림자놀이를 하고...
▼ 염강나들목에서...
▼ 황금내근린공원은 서울둘레길 코스 중에 있어서 여러 차례 이용했던 적이 있고...
▼ 오늘은 증산을 향해...
▼ 건너편에 염창산(증산/증미산)의 들머리가 보이네...
▼ 염창양수장
▼ 염창산산책길 이정목이...
▼ 염창산산책길 한강변산책로 방향으로...
▼ 철탑이 있는 곳이 염창산(증산/증미산)의 정상인 듯...
증산(拯山/甑山) 염창산/증미산
강서구 염창동 한강변에 위치한 표고 55.7m의 증산은
서쪽의 탑산·궁산과 동쪽의 쥐산과 더불어 한강변의 절경을 이루었다.
증산의 남쪽 기슭 염창동 20번지 일대에는 조선시대 국영의 소금 창고(鹽倉)가 있었다.
염창동 100번지 작은 동산은 도당산(상산)으로 치성단이 있었다.
-서울시-
염창산과 관련된 옛 고전에는 증산으로 표기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산 아래 소금창고 있었던 관계로 오늘날 염창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산에는 귀신바위와 김말손 장군 설화가 전해 온다.
소금배가 다니던 무렵 이곳은 강물의 흐름이 급한데다가 목이 좁아
모래가 자주 메워져 염창탄(鹽倉灘)이라는 여울목이 생겨났다고 한다.
여기에서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세금으로 받은 쌀을 실어오는 배가 침몰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물에 빠진 쌀을 건지게 되므로
이 여울목은 증미탄(拯米灘)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쌀을 건진다는 뜻의 증미(拯米)가 언제부터인지 증미(曾味)로 와전되어
현재의 증미산, 증산(曾山) 등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러나 원래 이름은 "일찍증(曾)이 아니고 건질증(拯)자인 증산(拯山)이다.
이 증산에 효령대군이 세운 정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이덕연 형제가 그 정자를 고치고 이수정(二水亭)이라 이름하였고,
그 오른쪽에는 김말손 집안의 정자 영벽정이 있었다고 한다.
- 강서구 -
위 글에서 증산이나 도당산에 이수정이 있었다는 주장은 '이수정(二水亭)'에 대한 배신이다.
한강과 안양천 두 물이 만나는 곳에 지어서 '이수정'이라고 했다는...
현재의 안양천이라면 증산이나 도당산에 있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겠지만
그 당시의 안양천(염창탄)은 지금의 쥐산 동쪽으로 흘렀다고 하니...
-맥가이버-
▼ 염창산 전망대
▼ 아래는 골프연습장이었는데 지금은 폐업...
▼ 염창산 산책길을 따라...
▼ 날머리인 이곳을 들머리로 삼으려 했었는데...
▼ 이곳에서 '한강9산탐방' 전반부 답사를 마치고...
▼ 04번 마을버스를 타고 염창역으로...
☞ 이것으로 '한강 9산(당산-고양이산-쥐산-도당산-염창산-탑산-궁산-치현산-개화산)따라 역사문화탐방 전반부 답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