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9산(당산-고양이산-쥐산-도당산-염창산-탑산-궁산-치현산-개화산)따라 역사문화탐방 후반부 답사' 코스
개화산역→개화초교→개화산 봉수대→약사사(舊개화사)→치현산 치현정→서남환경공원산책길(메타세콰이어숲길)
→서남물재생센터 정문→마곡 실내배드민턴장→겸재정선미술관 앞→후포경로당→벽산아파트 108동 어린이놀이터
→궁산 정상→성황사→소악루→가양나들목→강서리버사이드파크→허준근린공원→허가바위→탑산 정상→허준박물관
→허준근린공원 광장, 연못, 광주바위, 허준선생동상→한강전망대 왕복→허준선생동상→가양아파트교차로→가양역
'한강 9산(당산-고양이산-쥐산-도당산-염창산-탑산-궁산-치현산-개화산)따라 역사문화탐방 후반부 답사' 이야기
오늘은 한강가에 있는 산들을 탐방하며
옛 선인들이 정자를 세우고, 배를 타고 풍치를 즐겼다는 '양천팔경'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물론 그 당시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진 풍경이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감흥을 느끼고자 한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양화진에서 행호 일원에는 절경을 자랑하는 여덟 곳이 있는데...
그 여덟 곳을 '양천팔경'이라고 하며...
선유봉·이수정·소요정·공암·소악루·개화사·낙건정·위래정 등이
바로 양천 팔경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의 발길을 잡았다고 한다.
특히 선유봉의 소나무 숲이 가장 빼어난 절경으로 꼽혔다는데...
악루청풍(岳樓淸風) : 소악루의 맑은 바람
양강어화(楊江漁火) : 양화진의 고기잡이 불
목멱조돈(木覓朝暾) : 목멱산의 해돋이
계양낙조(桂陽落照) : 계양산의 낙조
행주귀범(杏州歸帆) : 행주로 돌아드는 고깃배
개화석봉(開花夕烽) : 개화산의 저녁 봉화
한산모종(寒山暮鐘) : 겨울 저녁 산사(개화산 약사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이수구면(二水鷗眠) : 안양천에 졸고 있는 갈매기
당산역에서부터 출발하여 당산을 시작으로 개화산역까지 한강따라 9개의 산이 있는데...
지난 2월 18일(일)에 전반부 5개의 산(당산ㆍ고양이산ㆍ쥐산ㆍ도당산ㆍ염창산)을 찾아 가는 답사를 하였고,
오늘은 개화산역에서부터 개화산을 시작으로 치현산과 궁산을 거쳐 탑산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시작한다.
▼ 벽산아파트 108동 어린이놀이터에서...
▼ 잣나무숲길을 올라서며...
▼ 궁산역사문화둘레길 이정목
▼ 궁산공원둘레길 안내표식
▼ 궁산 정상에 올라서니...
▼ 2011년 1월엔 이런 전망대가 있었는데...
▼ 전망대는 없지만 방화대교쪽을 바라보니...
▼ 대덕산(128.4m) 너머로 북한산이 보이네...
▼ 역사유적순례길 안내도
▼ 궁산 정상에는...
▼ 궁산 정상 삼각점
▼ 2011년엔 이런 모습이었는데...
궁산(宮山)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궁산은 표고 75.8m로 조선시대 양천고을의 진산이었다.
한남정맥의 끝자락으로 안산 수리산에서 북행하여 증산(甑山)이 되고,
그 낮은 구릉이 한강으로 끝나면서 작은 봉우리를 이루어 놓고 있다.
따라서 한강을 따라 서쪽의 개화산, 동쪽의 탑산·쥐산·선유봉 등과 더불어
한강의 남안에 솟아 있어 강변의 절경을 이루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대동지지』 등에 이곳을 “성산(城山)에 고성이 있는데,
그 둘레는 726척(약 218m)이고 지금은 성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의 이름은 파산(巴山)·성산·궁산·관산(關山)·진산(鎭山) 등 다양하였다.
파산은 삼국시대에 주변의 땅이름이 제차파의(齊次巴衣)로서 이것에 연유된 것이며,
성산이라 함은 성이 있기 때문에 불리워진 이름이고,
진산은 양천고을의 관방설비가 되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관산은 빗장‘관(關)’자를 썼는데,
한강을 지키는 빗장 역할을 했던 산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을 빗장처럼 지킬 수 있는 산이다.
궁산은 양천향교가 있어서 궁(宮)으로 표시했던 것으로 공자를 숭배하는 표시로 불리워졌던 것이다.
현재 표준 명칭도 궁산이다.
궁산이 갖는 역사적 의미로는
임진왜란 때 전라창의사 김천일, 전라소모사 변이중, 강화의병장 우성전 등이
김포·통진·양천·강화·인천 등지의 의병들을 이끌고 이 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한강을 건너 권율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에 참가하여 크게 승리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양천현감들은 매일 저녁 궁산에 올라 강 건너 피어 오르는 봉화를 바라보고 국가의 안위를 살피기도 하였다.
북쪽으로는 인왕산 서쪽 무악봉수를 살피고, 남쪽으로는 부천 장명산 봉화를 감시하였다.
동쪽으로는 목멱산 제5봉수를 살피고, 서쪽으로는 파주 오두산성과 개화산 봉화를 감시할 수 있었다.
궁산에는 춘초정·막여정·악양루·춘산와·제일정·소악루 등 많은 누정이 있었다.
특히 궁산 한강변의 뛰어난 절경은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岳陽樓)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버금간다 하여 이곳에 지어진 악양루라는 정자가 있었다.
영조 때 이유(李楡)가 이곳에 와 악양루 옛터에 소악루를 짓고 명사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
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뒤 매일 이 곳에 올라 소일하면서 한강변의 그림을 그렸다.
그 작품집 『한수주유(漢水舟遊)』야말로 오늘날 한강변의 옛 모습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궁산의 정상에는 6·25전쟁 때 군부대가 주둔하여 진지로 사용되어,
아직도 평평한 꼭대기에는 휴일을 맞이한 인근 주민들이 솔밭 사이에서 소풍을 즐길 수 있다.
그 정상에서 한강변으로 조금 내려가면 난지도와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복원된 소악루가 서 있다.
-서울시-
궁산(宮山)
궁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파산, 성산, 관산, 진산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궁산에는 옛날 백제의 양천고성지가 있고,
조선조 화가인 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재임하면서 그림을 그렸던 소악루가 있으며,
오랜 세월동안 우리 고장의 인물을 배출한 양천항교가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집결장소였으며, 6.25 동란 때에도 국군이 주둔했던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지다.
(궁산은 조선시대 때 우리 고장 행정의 중심지였음)
-강서구-
▼ 관산성황사...궁산은 관산이라고도 하니...
▼ 성황사(成隍祠)의 成은 城의 오기인가?
궁산에 대하여....
궁산은 파산, 성산, 관산, 진산 등 다양한 명칭이 있으며, 옛날 백제의 양천 고성지와
조선시대 화가인 ‘겸재 정선’이 양천 현감으로 재임하며 그림을 그렸던 소악루, 양천 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궁산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집결장소였으며, 한국전쟁 때도 국군이 주둔했던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 전략요충지였다.
그리고 자연생태가 다양한 탐방코스를 걸으며 숲해설가로부터
숲속의 식물, 곤충, 동물 등 생태해설을 들으며 자연놀이도 즐길 수 있는 자연체험교실이
7월부터 12월까지 매월 4째주 토요일 오전10시부터 12시까지 궁산에서 운영되고 있어 지역주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주요식물로는 아까시나무, 리기다소나무, 현사시나무, 잣나무, 때죽나무, 층층나무 등이고,
주요시설은 소악루(小岳褸), 양천고성지, 양천향교, 자연학습탐방로, 사진촬영전망대등이다.
소악루는 궁산 정상에서 약간 동쪽인 가양동 산6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영조 13년(1737년)에 동복 현감을 지낸 이유가 벼슬을 버리고 악양루 옛터에 소악루를 짓고 시회와 풍류를 즐겼다.
소악루는 중국 동정호의 악양로 경치와 버금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뒤 겸재 정선이 부임하여 5년동안 매일 올라 그림을 그리던 소악루는 중간에 소실되었던 것을
1994. 5월 강서구에서 정선의 업적과 예술혼을 기리는 취지에서 소실된 옛터 바로 위에 새로 지었다
.
양천향교는 궁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양천향교는 기념물제8호로서 서울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이었다.
양천향교는 태종 11년(1411년)에 창건되어 많은 인재를 길러냈으며
현재 건물로는 명륜당, 전사청,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과 부속건물 8동이 있다.
- 서울신문에서 가져옴. -
양천 고성지 [陽川古城址]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加陽洞) 산8∼4번지 일대 올림픽대로변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터.
지정번호 사적 제372호
지정연도 1992년 3월 10일
소재지 서울 강서구 가양동 산8-4외
시대 삼국시대
크기 석축둘레 762척(약 218m)
면적 2만 9370㎡
분류 산성터
1992년 3월 10일 사적 제372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2만 9370㎡, 석축둘레 762척(약 218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상으로도 그 존재가 확인되며,
성터임을 확인하여 주는 적심석(積心石)과 석재가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한강변의 들판에 우뚝 솟아 서북 대안(對岸)의 행주산성(사적 56) 및 파주 오두산성(烏頭山城:사적 351)과
더불어 삼국시대 이래 한강 하구(河口)를 지키던 요새의 하나로,
옛 관방시설(關防施設) 및 읍치구조(邑治構造)의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조선시대 양천현(陽川縣) 읍치(고을)의 진산(鎭山)인 궁산(宮山:74m) 정상을 중심으로 축성된 퇴뫼식 산성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정상부가 평탄하게 깎여 있는 것을 제외하고 북측 급경사지역을 포함한 전지역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소악루
소악루 [小岳樓]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정자.
1737년(영조 13) 동복현감을 지낸 이유(李楡, 1675~1757)가 경관과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자신의 집 부근 옛 악양루 터에 지었다.
‘소악루’란 중국 동정호의 웨양루[岳陽樓] 경치와 버금가는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으로,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 등이 이곳에 찾아와 그림을 그렸다.
당초 가양동 세숫대바위 근처에 세웠던 원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1994년 5월 구청에서 한강변 경관 조성 및 조망을 고려하여 현 위치에 신축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규모로서 화강석 8각 주춧돌에 민흘림 원기둥을 세운 5량집 겹처마 구조이다.
지붕은 단층 팔작지붕이며, 주위에는 조망하기 좋도록 난간을 둘러놓았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소악루를 돌아 보고...
▼ 가양나들목 방향으로 내려서고...
▼ 데크로 조성되었네...
▼ 턱빠진 얼굴바위?
▼ 궁산공원둘레길 아치를 통과하여...
▼ 가양나들목을 지나...
▼ 구암공원(허준근린공원) 방향으로...
▼ '구암공원 1km'라고...
▼ 궁산 소악루를 올려다 보니...
▼ 좌측아래 길은...
▼ 강서리버사이드파크
▼ 이 나무의 땅 위로 드러낸 부분을 뿌리라고 하는가?
▼ 구암나들목을 지나치고...
▼ 광명교회를 지나...
▼ 허준박물관이 보이네...
▼ 허준근린공원(구암공원) 안내도
▼ 소요정
▼ 생명의 나무
▼ 허준박물관 계단길을 따라오르면 탑산으로 갈 수 있을 듯한데...직원외 출입금지라고 철문이 잠겨 있네...
▼ 허가바위를 찾아가며...
▼ 탑산 정상을 올려다보며...
▼ 공암바위/허가바위 입구에서...
▼ 허가바위 안내문을 보니...
▼ 공암바위로 내려서며...
허가바위/공암바위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바위동굴
내용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1호.
굴의 크기는 가로 6m, 세로 2m, 길이 5m이다.
일명 공암바위라고도 불린다.
탑산(塔山)아래 계곡에는 천연적으로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는데,
옛날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한강에서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했던 혈거동굴로서,
학술적가치가 매우 높은데 1991년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면서 육지로 변하였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지만 아래서 보면 수직 절벽의 꽤 높은 바위산으로 보인다.
색깔은 자색을 띤 바위이다.
‘허가바위굴’이라고도 부르며,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곳을 양천허씨의 발상지라고 말한다.
허선문은 고려태조가 견훤을 징벌하러 가면서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도강의 편의와 군량미 제공 등의 공을 세워
‘공암촌주(孔巖村主)’라는 벼슬을 받았는데 그는 나이가 90이 지났는데도 고려태조에 충성을 했으며,
그 자손이 공암허씨로 공암은 양천(陽川)이므로 공암허씨는 양천허씨를 말한다고 『경기읍지』에 기록이 있다.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암(孔岩)바위/허가바위
강서구 가양동 산1-2번지에 있는 구멍뚫린 바위로서, 허가바위라고도 한다.
탑산 아래 있는 이 바위는 광주바위와 같은 자색을 띤 자암인데
수십 명이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허가바위굴’이라고도 한다.
이는 양천 허씨의 시조 許宣文이 이곳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있어 이곳을 양천 허씨의 발상지라고 부른다.
허선문은 고려 태조 때 공암촌주가 되었으며 그 자손은 양천 허씨가 되었다.
이 공암 때문에 이곳 지명을 백제와 고구려는 齊次巴衣縣이라 하였고 신라는 공암이라 하였다.
출처 : 서울지명사전
▼ 공암바위/허가바위
▼ 공암바위/허가바위 안에서 밖을 보니...
▼ 공암바위/허가바위 내부 모습은...
▼ 탑산 정상을 올려다보니...
▼ 공암나루터(공암진) 표지석
공암진(孔岩津)
공암나루터, 공암도(孔岩渡), 공암진나루, 공총, 공총진, 구멍바위나루
현재의 강서구 개화동 강안에 있던 나루터로서,
강가에 구멍 뚫린 바위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강 하류의 교통 요지로 양화도 관할 아래 있었으며, 진선 5척이 배속되어 있었다.
후에 관선은 폐지되고 사선이 있어 선가를 받고 人馬의 통행을 맡았다.
행주산성 동쪽 덕수천(창릉천)이 한강으로 닿는 북포에 있던 나루가
공암나루와 연결되어 양천,김포와 고양간의 길목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행주산성 서쪽 언덕과 김포 대안에 행주대교가 가설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공암나루는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뱃길로 하류로는 조강진과 닿고
상류로는 양화진과 연결되는 중간참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강 건너편 고양시의 행주나루와 연결되었다.
공암도, 구멍바위나루, 공총, 공암나루, 공암진나루, 공총진이라고도 하였다.
출처 : 서울지명사전
공암나루(공암진)
공암진이란 나루의 이름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둑 밖에 있는 두 개의 쌍둥이 바위에서 기인한다.
그 가운데의 하나가 구멍이 뚫린 구멍바위였던 까닭에 공암진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설화는 다음과 같다.
공암진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둑 밖에 있는 두 개의 쌍둥이 바위에서 기인한 나루의 이름인데
그 가운데의 하나가 구멍이 뚫린 구멍바위였던 까닭에 공암진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본래 이 바위들은 광주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커다란 장마에 휩쓸려 현재의 장소에까지 떠내려 왔다고 한다.
이것을 기화로 광주의 사또는 해마다 양천 사또에게 세 개의 쑥대 빗자루를 세금으로 거두어 갔다.
이 빗자루들은 이 쌍붕이 바위에서 저절로 자라난 쑥대로 만든 것이었다.
마침내 이것을 귀찮게 여긴 양천사또는 광주 사또에게 따졌다.
“이보시오 광주사또! 이렇게 꼬박꼬박 쑥대 빗자루를 구실로 받아갈 양이면
아예 이 바위들을 당신의 관할 구역으로 도록 가져가시오”
말문을 잃은 광주사또는 다시는 세금을 걷어갈 수 없었고,
그 바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광주바위로 불려지게 되었다.
양천땅에 소재하면서도 ‘광주바위’로 불려온 운명 때문이었을까?
이 바위들은 본래 한강의 흐르는 물살을 몸으로 거스르며 두둥실 떠 있던 바위섬이었는데,
지금은 한강 개발공사의 여파로 둑 너머 물 밖에 나앉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출처 : 서울시편찬위원회
▼ 탑산 정상으로 가는 길...
▼ 탑산 정상으로 가는 계단길...
▼ 탑산 정상에는 육각정이 있네...그 옛날 '소요정'의 자리일까?
▼ 탑산 정상에 오르니...
탑산(塔山)
탑산은 강서구 가양동 궁산 동쪽에 있는 표고 31.5m의 나즈막한 봉우리이다.
탑산은 공암나루터가 있는 산으로 진산(津山)이라고도 하며 산에 오래된 탑이 서 있어서 이름하였다.
그러나 탑은 6·25전쟁 때 무너진 후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일대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탑산 아래 절벽 밑 가양동 산 1-1번지에는 구멍 뚫린 바위가 있어,
이를 흔히 공암바위 또는 허가바위라고 칭해오고 있다.
탑산 아래 있는 이 바위 주변의 경관은 취수장이 세워지고, 올림픽대로가 개통되어 지금은 많이 변하였다.
이 구멍바위 때문에 이곳의 지명을 백제와 고구려는 제차파의현, 신라 경덕왕 때는 공암현이라 하였다.
바위의 한자 표기인 파의(巴衣)로부터 양천의 별호인 파릉(巴陵)이 생기게 되었다.
양천의 진산을 파산이라 한 것도 이때문이다. 제차(齊次)는 갯가라는 뜻이다.
-서울시-
▼ 조금 아래 육각정이 있고...
▼ 허준박물관과 연결되지만 문은 잠겨 있고...
▼ 탑산을 내려서고...
▼ 강서구 안내도를 보니...
▼ 허준박물관
허준박물관 / Heojun Museum / 許浚博物館
조선 중기 의원이자 〈동의보감 東醫寶鑑〉을 지은 구암 허준의 학문적 업적과 박애정신을 기리고
한의학 관련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하기 위해 설립된 공립 박물관.
허준박물관은 1999년 수립된 허준기념관 건립계획에 따라 2000년 부지 매입을 마치고,
2003년 4월부터 약 1년 6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2005년 3월 개관했다.
2005년 5월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했다.
허준박물관의 전시시설은 허준기념실·약초약재실·의약기실·내의원/한의원·체험공간실·약초공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허준기념실은 허준의 일생과 〈동의보감〉을 포함한 한의학의 발달과정을 알아볼 수 있다.
약초약재실에는 〈동의보감〉에 나오는 곡부·과부·채부·초부·목부·쌍화탕·십전대보탕 등의 약초와 약재가 전시되어 있다.
의약기실에는 한국 전통 한의약기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내의원/한의원 코너에는 왕과 왕실 가족을 진료했던 내의원과 일반 백성들이 이용했던 한의원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체험공간에서는 약첩 싸기, 나의 체질 알아보기 등의 체험을 해볼 수 있다.
허준박물관에서는 방학을 이용해 ‘어린이 허준 교실’을 열어 한방과자 만들기, 총명환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허준 건강의학 교실’ 등의 사회교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서울특별시 강서구 허준로 87에 있다.
출처 : 다음백과
▼ 사자의 모습처럼...
▼ 스핑크스모습처럼...
▼ 허준근린공원 광장
▼ 이곳이 한땐 강이었다는데 지금은 작은 호수가 되어버린 광주바위 주변...
광주(廣州)바위
공암진이란 나루의 이름은 두개의 쌍둥이 바위에서 기인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구멍이 뚫린 구멍바위였기에 공암진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들은 광주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해 커다란 장마에 휩쓸려 바위가 지금의 장소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그러자 광주 사또는 이걸 빌미로 바위에서 자라난 쑥대로 만든 빗자루 세 개를 양천 사또에게 세금으로 걷어갔다.
해마다 이 일이 반복되자 양천사또는
"이보시오. 이렇게 꼬박꼬박 받아갈 양이면 아예 다시 가져가시오!"
광주사또는 말문을 잃었고 다시는 세금을 걷어가지 못하게 됐으며
그 바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광주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한강개발사업으로 서울에 있던 광주바위는
물 밖으로 나안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자료출처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 한강전망대 엘리베이터와 허준선생동상이 보이네...
▼ 허준선생동상을 당겨보니...
▼ 광주바위 앞으로 가면서...
광주(廣州)바위
광제바위(廣濟―), 광주암(廣州岩)
강서구 가양동 440번지 부근 현재 구암공원 인공호수 내에 있는 바위로서,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던 바위로 홍수가 나자 이곳까지 떠내려 왔다.
비가 개인 뒤 광주 고을에서 없어진 바위를 찾아다니다가 양천의 탑산 끝머리에 와 있는 것을 알자,
광주 관아에서는 바위 대신 조세를 바치라고 하였다.
양천 고을 원님은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여
그 바위에서 생산되는 싸리나무로 해마다 비 세 자루를 만들어 보내 주다가
조용히 생각해 보니 싸리나무 몇 그루 나는 것마저 비를 만들어 바치니 귀찮기도 하고
또 고을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 바위는 소용이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
앞으로는 빗자루도 못바치겠다고 광주관아에 통보하자
광주고을에서는 이 바위를 가져갈 수 없어 양천고을에 빼앗기고 말았다고 한다.
출처 : 서울지명사전
▼ 광주바위
광주(廣州)바위
서울특별시의 강서구 가양2동 공암나루 끝 한강변 탑산(塔山) 바로 옆에 위치한 바위이다.
강물 속에 두 개의 바위가 서 있다.
높이 12m의 그리 높지 않은 바위지만 강서구의 유서 깊은 경승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현재는 올림픽대로가 강물을 가로질러
그 일대의 옛 자취는 많이 변질되었으나 바위 자체는 옛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옛날 서해로부터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들고
이곳 경관에 도취한 뱃사람, 선유객들이 노를 멈추고 도원경에 심취하던 곳이라고 한다.
경치가 수려해 인근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광주바위는 지금 가양동 아파트 단지 안에 위치하며,
광주바위를 중심으로 '구암공원'이 조성되었다.
'넓은 들'이라는 의미의 '광주'에서 이름이 붙여진 '광주바위'는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었던 바위로,
오랜 옛날에 비가 많이 내려 큰 홍수가 나자 광주에서 이곳까지 떠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출처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광주바위 전설
전설에 의하면 옛날 경기도 광주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 커다란 바위가 물에 떠내려 왔다고 한다.
비가 그친 후 광주의 명물인 바위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 광주현감은 바위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위가 양천고을까지 떠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광주현감은
바위를 제자리로 옮겨 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다.
양천현감은 거절하지 못하고 바위에서 자라는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어 매년 세자루씩 바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생각이 들어 광주현감에게 바위를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바위를 가져갈 수 없었던 광주현감은 더 이상 세금을 내라는 요구를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본래 순박하고 인정 넘치는 양천 고을 사람들의 착한 심성과 멋진 광주바위의 풍광을 잘 나타내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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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한강 9산(당산-고양이산-쥐산-도당산-염창산-탑산-궁산-치현산-개화산)따라 역사문화탐방 후반부 답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