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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걷다](46) 연미정·불장돈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12. 14.

[한강을 걷다](46) 연미정·불장돈대  경향신문 2007.06.29 (금) 오후 2:49

-단절 상실감만 강물처럼 넘실거렸다-

해동지도의 강화 북부 지역이다. 오른쪽 맨 뒤에 보이는 산이 개성의 송악산이며 가운데로 흐르는 강이 조강이다.

지도의 왼쪽 위 Y자로 갈라지는 굵은 물줄기가 예성강이며 강화도에 삐죽삐죽 솟아 나온 곳들이 돈대가 위치한 곳들이다. 불장돈대는 왼쪽 끝에서 4번째 가장 높이 솟은 곳이다.

 

늘 새벽에 나섰건만 오늘은 오후 느지막이 나섰다. 강화도는 한 시간이면 다다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려니와 노을이 내리는 바다로 한강이 스러지는 장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 새벽부터 공부방의 창가에 붙어 서성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창으로 한강이 빤히 내려다보이기 때문이었다. 아예 의자를 창가로 옮겨 놓고 그곳에 앉아 지난 1년 동안의 여정을 되짚어 살피다가 강을 건넌 것이다.

김포를 지나 염하(鹽河)에 걸린 강화대교를 건너 연미정(燕尾亭)에 잠시 들렀다. 예전의 초라한 모습은 간 데 없이 너무도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15년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만 하더라도 정자만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 이곳이 돈대(墩臺)였다는 사실은 눈여겨봐야 겨우 찾을 수 있을 만큼 석축의 흔적만이 남아 있지 않았던가. 당시 정자 끝에 서서 유도(留島)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었다. 유도는 염하의 짠물과 조강의 민물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 있으니 한강의 막바지에 있는 섬이기도 하다.

사실 이곳에서부터 조강의 모습은 강과 같이 산과 산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이긴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북쪽의 반도와 남쪽의 섬인 강화도의 해안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니 유도에서부터는 염하로 거슬러 올라오는 짠물과 한강과 임진강으로부터 흘러온 민물이 직접 뒤엉키면서 짠물이 되는 곳이니 바다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북쪽의 육지와 남쪽의 섬들이 마치 골을 이루듯이 펼쳐져 있는 까닭에 아직 강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남쪽의 섬은 강화도를 지나면 교동도, 그리고 볼음도(乶音島)와 말도(唜島)로 이어지며 말도에서 비로소 한강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곳부터는 망망한 바다만 보일 뿐 더 이상 섬이 가로막지 않기 때문이다. 1995년 말도에 다녀 온 적이 있다. 거리상으로 보면 강화도의 외포리에서 얼마 되지 않지만 NLL이라는 북방한계선 때문에 해병 경비정은 무려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빙 돌아서 가야 했다. 섬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바라본 북녘은 연백평야와 염전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뒤로 고개를 돌리면 바다에는 멀리 백령도가 가물거리며 보일 뿐이었다.

연미정에 걸터앉아 건들건들 다가드는 바람과 함께 조강과 염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민통선 안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승천포를 지나쳤다. 1231년 7월7일, 고려 고종이 몽고군을 피해 강화로 천도하면서 강화에 첫발을 디딘 곳이기도 하려니와 여말 선초의 선승인 함허(涵墟) 득통(得通, 1376~1433)이 배를 띄우고 “고운 바람, 넓은 바다, 유유히 흐르는 물 / 서산에 해는 지고 동산에 달 오른다. / 한 조각 거룻배의 그 무한한 뜻이여 / 만 리 흰 구름이 아득한 속에 있다”라고 노래한 곳이기도 하지만 저만치 해가 기울고 있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강을 에워싼 철조망을 곁으로 두고 허겁지겁 달려가 다다른 곳은 불장(佛藏)돈대였다. 강화의 가장 서북쪽 끝은 불장돈대에서 뻔히 보이는 구등(龜登)돈대이지만 구태여 불장돈대로 오른 것은 북녘 땅을 흘러 온 예성강이 바다로 스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성강은 벽란도(碧瀾渡) 앞에서 어느 것이 조강이며 예성강이고 또 바다인지 가늠할 길 없이 뒤엉키고 만다. 오대산의 우통수나 태백 금대산의 검용소라는 작은 샘에서 시작된 미약한 물이 반도를 가로지르며 수백 개의 계곡과 하천을 받아들이며 힘겹게 흘러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강이 예성강이려니 어찌 그 아름다운 어우러짐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돌로 쌓은 문루가 남아 있는 돈대에 오르자 다시 철조망이 눈앞을 가로 막았지만 사실 가로 막힌 것은 시야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러나 강은 이미 그것을 아는지 한 줄기 바람을 보내주었다. 그 바람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기어코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심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줄기 강물과 파수공행(把手共行)하며 한강을 걸어온 그 누군들 이곳에 다다라 더 이상 갈 수 없는 현실과 맞닥뜨리면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감출 수 있으랴. 하지만 바람이 있었다. 천지간의 모든 것 데리고 떠돌아다니는 바람이 나를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그 살가운 바람조차 불지 않아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었더라면 나는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강화도 연미정


마음은 바람에게 맡기고 눈은 강에 어리는 윤슬에게 고정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붉은 빛을 머금은 강물은 다른 곳과는 달리 검은 빛을 띤 때문인지 유난히 반짝이며 빛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물로 뒤덮였던 곳이 모래톱으로 드러났으니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을 테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2시간쯤, 안내를 나온 해병 장교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지난 1년 동안 한강을 속속들이 톺아온 나에게는 그 시간도 모자랐다. 언제나 끝이란 새로운 시작을 수반하는 것이련만 이곳에서는 되돌아 갈 수만 있을 뿐 새로운 곳으로의 시작이 없으니 어쩐 일인가. 더구나 쉽사리 끝이라는 말을 내뱉기에는 너무도 두렵지 않은가.

이렇게 앉아 이곳에서 저 강물처럼 스러져 사라지는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인 범경(泛梗)이라도 되어 물 위를 둥둥 떠다닐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차라리 범경이 되기로 했다. 그리하여 해가 기울수록 붉게 짙어가는 강물과 함께 저 넓은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싶었다. 그렇게 긴 바람을 타고 만 리의 파도를 헤치며 벽란도도 다녀오고 예성강을 거슬러 그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어 보고 싶었다.

다산 정약용이 어느 날 황해남도 백천군 백마산 기슭에 있는 강서사(江西寺)에서 지금 건너다보이는 벽란도까지 배를 타고 온 적이 있다. 그리곤 “바다 위 가랑비에 아름다운 화문 일고 / 저녁 물 날 무렵에 순풍이 불어 왔네. / 부들로 짠 돛을 펴니 깃발이 픽픽 박박 / 청산을 가로질러 쏜살같이 빨리 간다. / 양 언덕에 소 있어도 구별을 못 하겠는데 / 빠졌다 하면 만 길이요 표류했다 하면 만 리라서 / 남쪽 배들 닻 내리고 굽이진 곳 의지하여 / 무릎 안고 고개 떨구며 죽을 듯이 걱정인데 / 활달해도 겁을 먹고 느릿한 자 걱정하니 / 어차피 인생에게 환락이란 없는 법 / 배를 두고 뭍에 오르니 마음이 조금 놓여 / 수양버들 숲 속으로 말을 타고 들어갔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내가 범경이라도 되어 저곳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다산이 느꼈던 두려움조차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뒤엉켜 소용돌이를 치듯이 호된 바람이 불어 제멋대로 처박혔다가 솟구쳐 오르며 마치 정신을 잃을 듯이 질탕한 몸짓으로 어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다. 그렇게 몸부림이라도 치는 듯이 나를 팽개쳤다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강안으로 올라와 쓰러져야지만 이 긴 장정의 막을 내릴 수 있을 것만 같이 여겨졌다.

강을 함께 걸어 온 사람들아, 골똘히 되돌아보라. 강이란 과거의 기억 속에 잠재하는 샘에서 시작되어 항상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드는가 하면 종래에는 바다와 같은 미래를 펼쳐 놓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강의 끝은 비록 폭포가 되어 곤두박질치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나 무한대로 열려져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강은 어떤가. 과거로부터 현실에 이르기까지만 충실할 뿐 철조망에 가로막힌 미래는 준비는 되어있으되 펼쳐지지 못했으며 단절에 이어지는 상실감만이 강물처럼 넘실거릴 뿐이다.

철조망이란 것이 물리적인 제재를 상징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심리적인 단절일 것이다. 비록 뾰족하긴 하지만 그 가녀린 쇠로 만든 몇 가닥 철조망이 어찌 나의 분방한 마음마저 붙들어 맬 것인가. 길지 않은 세월이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들 중 하나는 단절을 넘어서는 것은 물리적인 요소의 철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철조망보다도 날카로우며 시멘트보다도 견고한 서로 마음을 해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너에 앞서 나의 마음부터 말이다.

오늘은 붉게 물들어가던 저녁놀조차 검은 구름에 갇히고 말았다. 떠나가는 강물에게 그나마 찬란하게 빛나는 저녁놀이라도 벗으로 보내려 했건만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언젠가는 범경이 아니라 철조망이 제거된 이곳에서 비록 일엽편주일지라도 배를 띄워 북녘은 물론 거침없이 서해를 헤치고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오늘 미처 가 닿지 못한 우리들이 당대에 이루어야 하는 미래이리라.

-강화 월곶진 오른족에 연미정… 민통선 안에 있으나 출입가능-

연미정은 인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강화도 월곶진(月串鎭) 오른쪽에 있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고종이 강화로 천도한 후 1244년에 시랑(侍郞)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 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여름 공부인 하과(夏課)를 시켜 55명을 가려 뽑았다고 한다. 또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부장(副將)인 유해(劉海)와 1627년 강화조약을 맺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에 앞서 언평(彦平) 황형(1459∼1520)의 집이 연미정 근처에 있었다. 그는 집 근처에 소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 후 임진년(선조 25년, 1592)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강도(江都)에 들어와서 지키면서 선박·영책(營柵)·방패·기계 등을 만들 때에 모두 황형이 심은 소나무를 사용했다. 이때에 쓰고 남은 것은 정유년(선조 30년, 1597)에 양경리(楊經理)가 왕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가려 할 때 관부(官府)에서 베어다가 행궁의 치비(峙備)와 건물과 성책(城柵)을 만들었다.

강화도는 섬의 외곽이 5군데의 진(鎭)과 7군데의 보(堡), 그리고 54군데의 돈대(墩臺)로 싸여 있다. 섬의 외곽 해안선을 따라 돌출된 곳에는 어김없이 위에서 말한 세 가지의 방어시설 중 하나가 만들어져 있고 그 규모에 따라 가장 작은 것이 돈대, 다음이 보, 그리고 가장 큰 규모가 진이다. 널리 알려진 진으로는 초지진, 보로는 광성보, 돈대로는 갑곶돈대, 분오리돈대와 같은 것들이 있다.

예성강은 서강(西江)이라고도 불렀으며 벽란도와 예성항은 고려와 송나라의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무역뿐 아니라 중국을 통한 문물의 통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벽란도를 떠난 배가 조강을 거슬러 경강을 지나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 앞에까지 가는 데 4일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또한 조선 후기의 문사인 이덕무에 따르면 “벽란진은 나라 안에서 아주 험한 곳이다. 북쪽 전탄(錢灘)에서 나와 남으로 바다에 들어가는데, 물길이 넓고 굽이진 데다 개펄은 잘 빠지고 악석(惡石)이 톱날 같아 돌다리를 거쳐야 배를 탈 수 있는 곳”이었다고 전한다.

연미정은 민통선 안에 있지만 관광객은 초소에서 신고만 하면 들어갈 수 있다. 강화대교를 건너 48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군청과 경찰서 언저리에서 우회전하여 농로를 따라 줄곧 들어가면 민통선 초소와 만나며 바로 앞에 연미정이 있다.

〈이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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