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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걷다](45) 반구정·연화봉·애기봉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12. 14.
[한강을 걷다](45) 반구정·연화봉·애기봉

  경향신문 2007.06.22 (금) 오후 4:53

 

애기봉에서 바라본 조강과 북녘. 강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간다. 왼쪽 긑에 보이는 작은섬이 중립지역의 유도(留島)이며 그 오른쪽 뒤로 보이는 산과 산 사이가 해구이다.

 


강의 흐름을 따르자면 김포로 가야 할 일이지만 나는 다시 한강과 임진강이 뒤엉키는 조강 언저리로 향했다. 임진강을 조금이라도 거슬러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수 허목은 ‘무술주행기’에서 삼기하(三岐河), 곧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곡릉천이 만나는 조강의 풍경을 말하기를 “어부가 배를 타고 강을 가로질러 그물을 펴고, 또 바닷가 아이들이 더벅머리로 발가벗고 배를 타고 그물질을 하며 조수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한다. 바다갈매기 수십 마리가 고기를 잡아 먹으려고 다투어 어지러이 나는데, 사람과 서로 신경쓰지 않는다. 사람은 고기를 보느라고 새를 신경쓰지 않으니, 새도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조강 풍경은 견고한 철조망에 갇혀 박제가 되어 있을 뿐 사람 그림자는 물론 배 한 척을 볼 수가 없다. 간간이 강 위를 날아가는 새들이 유유하고 바람만이 자적할 뿐 조수의 들고남에 따라 강바닥이 드러나고 다시 시커먼 물로 뒤덮이기만을 되풀이하는 강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부터 서해바다까지 이어지는 물길은 육지의 비무장지대와도 같은 중립지역이기 때문이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2㎞씩 도합 4㎞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한 육지와는 달리 남북의 강안을 따라 자연스럽게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이 설정되고 강 가운데가 군사분계선이 된 것이다. 그러니 그 안을 흐르는 조강은 누구도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비무장지대와 같은 중립지역이 되고 만 것이다.

김포반도로 흘러가는 조강을 바라보며 임진강으로 접어들었다. 마침 썰물 때인지 강은 시커먼 바닥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서해바다에서 볼 수 있는 갯등처럼 바닥은 개펄과도 같았고 물이 빠져나가는 곳으로는 갯골이 선명했다. 그러니 어찌 이곳을 두고 강이라고 하겠는가. 강을 걸으며 바다를 보는 격이니 말이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겸하여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상우당(尙友堂) 허종(1434~94)이 이곳을 건너며 “새 그림자는 구름 낀 물가에 잠기고/조수(潮水)소리는 바닷물에 숨는구나./ 멀리서 오는 바람 아지랑이를 때리는데/ 비 개인 날에 황복이 모여드네./ 나그네 길은 산이 연달아 이어지고/ 떠나는 정은 술이 한 단지/ 강 건너 의심스레 바라보는 곳/ 꽃과 버들 두어 집 마을일세”라고 했으니 지금 강 건너에 보이는 저 마을이 그가 노래한 꽃과 버들 아름다운 두어 집 마을일까.

그러나 강 건너의 마을은 갈 수 없는 북한의 마을들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당당하게 강으로 걸어들어가 홀연히 모습을 감춰 세상을 피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무오사화 당시 의주로 유배를 떠나야했던 허암(虛庵) 정희량(1469~?)이다. 의주에서 3년을 지낸 그는 다시 김해(金海)로 양이(量移)되었지만 그 다음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가을에 석방되었다. 그리곤 이곳 조강 언저리인 덕수(德水)에 살면서 늘 “갑자년의 화가 무오년보다 심할 것이니 우리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통탄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어린 종에게 어성초인 필관채(筆管菜)를 캐 저녁 반찬을 준비하라고 해 놓고는 말이다.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이 그를 찾아 나섰지만 물이 빠져 나간 조강의 개펄 위에서 찾은 것이라고는 갓과 신발, 지팡이뿐이었다. 다음날에도 강 속을 잠수하여 그의 시신을 찾았다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로부터 그에 대한 숱한 이야기들이 전해오지만 나는 더 이상 귀기울이지 않는다. 다만 험한 세상을 만나 애를 썼지만 변하지 않는 세상을 버리고 몸까지 그친 청사(淸士)의 존재에서 기억을 멈출 뿐인 것이다. 더구나 그가 홀연히 자취를 감춘 날이 5월5일 단오였다고 하니 오늘이 마침 단옷날이어서 그런가. 강에 드러난 개펄이 더욱 검은 까닭이 말이다.

어느덧 발길은 반구정(伴鷗亭)에 닿아 있었다. 방촌(●村) 황희(1363~1452)가 지어 낙하정(落霞亭)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방촌 선생의 영당(影堂)을 휘돌아 반구정에 오르자 임진강이 손에 잡힐 듯 펼쳐져 있었다. 허목이 쓴 ‘반구정기’에 “임진(臨津)가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강가의 잡초 우거진 벌판에는 모래밭으로 꽉 찼다. 또 9월이 오면 기러기가 찾아든다. 서쪽으로 바다 어귀까지 10리”라고 했으니 반구정은 이름 그대로 갈매기는 물론 강에 날아드는 뭇새들을 벗삼아 말년을 지낸 곳이리라.

가까운 곳에 율곡(栗谷) 이이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이 짓고 증조부인 이숙함(李叔緘)이 화석정(花石亭)이라 이름지은 정자가 임진강가에 우뚝 서 있지만 다시 발길을 조강 언저리로 돌렸다. 그러나 조강에서 강을 건너지는 못한다. 멀리 김포대교까지 거슬러 다시 강안을 따라 김포반도로 내려갔다. 강 건너로 파주출판단지와 심악산이 보이는 전류리 포구에서 자동차를 멈추었다. 군부대의 안내장교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전류리는 한강에서 가장 북단에 위치한 포구이며 군부대의 통제를 받으며 어로활동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초소에서 200m가량을 북쪽으로 올라가면 그곳이 바로 한강의 어로저지선이며 조금만 더 나아가면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조강이기 때문이다.

안내장교와 함께 전류리로부터 김포반도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시암리에 이르는 길을 느릿느릿 달렸다. 그러나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한강이 아니라 철책뿐이었다. 간간이 철책 사이로 강을 볼 수 있었으며 강과 철책 사이는 분단 이후 사람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은 때문인지 무성하여 탐스러운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윽고 오른 곳은 최전방 초소인 연화봉(蓮花峰), 눈앞에는 북녘 땅이 가물거리고 고개만 돌리면 강 건너 오두산과 검단산이 한눈에 들어왔으니 한강과 임진강은 물론 드디어 한줄기 조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나가는 강의 모습 또한 선연했다.

 


'해동지도'의 교하현이다. 왼쪽 굵은 강줄기가 조강이며 오른쪽 맨 아래가 한강,

가운데가 곡릉천 그리고 맨 위가 임진강이다.

 

고려의 문사 이규보가 조강을 건넌 적이 있다. 그가 주위의 탄핵을 받아 지금의 부평인 계양(桂陽)의 도호부부사(都護府副使) 병마금할(兵馬鈐轄)로 좌천되어 떠날 때이다. 그는 1219년 4월 조강을 건너기 앞서 제사를 지내고 그곳까지 따라온 처자와 이별을 고하며 시를 지었다. “아내 떠나고 남편은 머무르니 이 무슨 연유인가/ 너 나를 속박지 않건만 난 죄수 같구나./ 배는 가고 사람은 멀어지니 마음도 따라가고/ 바다는 조수를 보내오니 눈물이 함께 흐르네./ 한 강(一江)만이 막혔건만 물결은 넓고 넓어/ 도리어 천리길인 양 유유도 해라/ 지척의 곡산(鵠山)을 가지 못하니/ 말 위에서 짐짓 졸며 머리 돌리기 겁내네”라고 말이다. 곡산은 개경을 일컫는 것이니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 지금의 개성이었던 것이다.

그는 조강을 건너며 ‘조강부(祖江賦)’를 지었는데 후대에까지 명문장으로 소문난 글이었다. 그가 맞닥뜨린 조강을 건너며 부를 짓기를, “넓고 큰 이 조강 물은 흐린 것이 마치 경수(涇水)와 같아, 칠(漆)처럼 검은 빛이 출렁이므로 겁이 나 내려다보기 어렵구나. 여울이 또 거세고도 빠르게 솟구쳐 흐르니 어찌 구당협(瞿塘峽)에 비할 뿐이랴. 온갖 냇물이 한 곳으로 모여들어 마치 솥에 물이 끓어 솟아오르는 듯하다. 이무기와 악어가 서로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며 또 악독한 용이 숨어서 엿보지 않는 줄 어찌 알겠느냐? 여울로 거슬러 올라가 빨리 건너려고 하니, 배가 가는 듯하다가 그만 제자리에 멈추어 있다. 저녁이 아닌데도 사방이 캄캄하고 바람도 불지 않는데, 거센 물결이 일어나 눈 같은 파도가 쾅쾅 바위에 부딪치는 모양은 마치 진(秦)과 진(晉)이 팽아(彭衙)에서 싸움을 하는 듯하다”고 했으니 조강의 모습은 물론 강물에 비친 자신의 서글픈 심정까지 어우러져 빼어난 표현을 할 수 있었지 싶다.

다시 발길을 돌려 향한 곳은 애기봉(愛妓峰)이었다. 안보관광지로 소문난 곳이지만 내 눈길은 발 아래에 놓인 조강을 따라 흘렀다. 멀리 오두산과 관산포 일대로부터 유도(留島)를 지나 바다로 빠져나가는 조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니 강으로 내려서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나마 달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애기봉 아래 마을은 조강리이다. 10여년 전, 경기도 일대의 마을 조사를 할 때 조강리와 인근 용강리 일대 주민들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만났던 어른들 중 상당수는 북쪽이 고향인 분들이었다. 갖가지의 이별 내력이 듣는 나를 슬프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진 포구들, 조강리에는 조강포가 있었고 용강리에는 용강포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철책 속에 갇혀 버렸다. 옛말에 “통진(通津)은 조강이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조강포를 통해 남북으로 오가던 교역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개개인이 지닌 이별의 내력들이 모두 소중하여 비할 데 없이 가슴아픈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초래한 분단 때문에 국가적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는 현실 또한 안타깝기 짝이 없다. 물길 하나 트인다고 무에 그리 달라지겠냐마는 세상의 모든 일은 길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통하여 번성하고 또 그치게 마련이 아니던가.

강을 따라 걷는 어디서나 그랬듯이 강물은 떠나가고 나는 또 머물지만 유독 이곳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떠나가는 강물에 앞서 읽은 이규보가 노래한 시 한 구절 실려 보내고 돌아설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너 나를 속박지 않건만 난 죄수 같구나.”

〈이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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