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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보여행 후기☞/☆ 한강&지천따라걷기

[20180311]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 - 1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8.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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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11일(일)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 코스 



당산역→당산중학교→당산/은행나무→당산 부군당→노들길나들목→양화대교→고양이산/선유봉/선유도공원
→선유교→양평1나들목→영등포아리수센터→쥐산 들머리→진주강씨양천공파묘→쥐산/분동산 정상(50.5m)
→양화인공폭포→안양천ㆍ한강합수부 다리→경인양행→염창동둘레길입구→도당산 정상→염창정/이수정터?
→염창나들목→강변골프연습장→염창산 파고라→염창산/증미산/증산(55.7m)→전망데크→가양빗물펌프장
→황금내근린공원→가양아파트교차로→한강전망대 왕복→허준선생동상→광주바위→소요정→허준박물관
→탑산/소요산 정상(32.5m)→공암나루 표석→허가바위(공암바위)→강서 리버사이드파크→궁산둘레길 입구
→양천향교→궁산/관산/진산 정상(75.8m)→관산성황사→소악루→궁산둘레길 입구→가양나들목→마곡철교
→방화대교 남단→개화육갑문→강서둘레길2코스(메타세콰이어숲길)→치현둘레 소공원→치현산 정상(70.5m)
→치현정→개화산 들머리→약사사→우수조망명소→개화산 봉수대→개화산 정상(132m)→개화초교→개화산역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 이야기 


오늘은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를 나선다.


겸재 정선의 양천팔경첩에 나오는 것처럼 기암절벽에 옛 선인들이 정자를 세우고 풍치를 즐겼다는 곳...

그러나 그 당시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진 풍경이지만 한강가에서 사라진 명소와 경관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그 흔적이나마 찾아 감흥을 느끼고자 길을 나선다.


당산역에서부터 출발하여 당산을 시작으로 개화산역까지 한강따라 9개의 산이 있는데...
양천팔경과는 무관하지만 당산을 찾는 이유는 한강가에 그런 산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다.*^&^* 

양화진·행호 일원에는 절경을 자랑하는 여덟 곳의 양천팔경이 있었다.

선유봉·이수정·소요정·공암·소악루·개화사·낙건정·위래정 등이 바로 양천 팔경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의 발길을 묶었다.
특히 선유봉의 소나무 숲이 가장 빼어난 절경으로 꼽혔다고 한다.

양천팔경은 다음과 같다.

악루청풍(岳樓淸風) ; 소악루의 맑은 바람
양강어화(楊江漁火) ; 양화진의 고기잡이 불
목멱조돈(木覓朝暾) ; 목멱산의 해돋이
계양낙조(桂陽落照) ; 계양산의 낙조
행주귀범(杏州歸帆) ; 행주로 돌아드는 고깃배
개화석봉(開花夕烽) ; 개화산의 저녁 봉화
한산모종(寒山暮鐘) ; 겨울 저녁 산사(개화산 약사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이수구면(二水鷗眠) ; 안양천에 졸고 있는 갈매기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 - 1부를 시작하며...



 당산역에서...


 당산중학교 교문에는...


 당산으로...


 당산으로 오르는 데크계단...


당산동(堂山洞)에 대해서 알아보니...


당산동(堂山洞/Dangsan-dong)은 당산 1·2동 2개동의 행정동을 보유한 법정동으로서,

옛날에 이곳에 해당화 나무가 많아 늦은 봄에 많이 피었다하여 당산동이라 하기도 하며,

또 하나는 당산동 110에 우뚝 솟은산이 있어 이를 단산(單山)이라 부르고

이곳에 부군당이 있어 당제(堂祭)를 지냈던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합니다.


당산을 형성한 세군데 옛 자연부락
- 웃당산 : 수령 500여년 은행나무가 있는 당산동110번지 언덕일대
- 원당산 : 당산동4,5,6가 일대로 옛날 당(堂)집이 있는 마을
- 벌당산 : 옛날 벌판이 있던 곳으로 안당산이라고도 하는 마을
- 샛 말 : 당산동과 양평동 사이에 잇는 마을
- 새 말 : 당산1동과 당산2동 사이에 있는 마을로 예전엔 갈대밭이 있었음
- 가락 마을 : 지금의 당산동 104번지에 벽돌공장이 있었던 마을임
- 불탄 자리 : 지금의 당산동1가 256번지 일대 6.25사변때 폭격으로 불탄자리임


출처 : 영등포구청홈페이지



 당산의 당산나무는 수령 530년쯤 된 은행나무



당산의 당산나무는

임금이 쉬어 간 곳을 기념하기 위해 식수한 것으로

이후 동네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왔으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이 일대가 침수되자 동네 사람들이 이 나무 밑으로 피신하여 무사하였다 하여

주변에 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합니다.



 한강따라 9산 이어걷기 중 첫 번째 당산에서...




 당산동 부군당으로...


 당산동 부군당




당산동 부군당

원래 당은 언덕 바지에 있는 큰 은행나무 2그루가 있는 곳에

2m 높이의 터줏가리를 세우고 그 앞에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원래 부군당은 당산동 1가85번지에 있었는데

도시계획에 의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현 위치로(당산1동 110-71)옮겼다.


대지15평 정도의 땅에 1층을 콘크리트 슬래브로 만들고

그 위에 원래 있던 부군당 건물을 1950년 4월 8일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문 옆에 1974년 4월에 세운 부군당 비가 있는데 부군당이 1450년 4월에 창립된 것으로 적고 있다.


부군당에 모시는 신령은 모두 9분이다
 대동할아버지, 대감님, 장군님, 부군할아버지, 산신님, 칠성님, 삼불제석님, 대신할머니, 각씨님.
치성은 일년에 두 번 하는데  7월 치성에는 간단히 고사 치성으로 하고, 10월 치성에는 굿을 한다.





부군당(府君堂)


부근당(付根堂), 부강당(富降堂)
서울과 경기도지역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당(神堂).


‘부근당’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부군당(附君堂)’·‘부근당(付根堂)’·‘부강당(富降堂)’ 등으로도 표기한다.

『증보문헌비고』에 “본조 풍속에 도하 관부들에는 으레 수호신을 모신 한 작은 숲을 두고

그 사당에 지전(紙錢 : 종이돈)을 걸고 부군이라 일컫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부군’이란 본래 한(漢)나라 태수의 칭호였다고 하나,

부군당이란 옛날 관청 내에 두던 사당의 이름인 듯하다.


현재 부군당이라는 명칭은 다른 데서는 보이지 않고

서울에서 당산동·동빙고동·서빙고동·보광동·수유동·창전동·이태원동 부군당 등 10여건이 조사, 파악되었다.

부군당에 봉안된 부군신은 마을을 보호해 주는 무신적(武臣的) 성격과 함께 풍요신적 요소도 지니고 있다.


무신적 성격은 굿을 할 때 부군신을 놀리는 ‘부군거리’에서

무당이 입는 무복이 장군의 복식인 구군복(具軍服)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부군당신의 생식적 풍요 요소는 부군당에 나무로 깎은 남근(男根)을 벽에 걸었다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기록과

일본인 무라야마(村山智順)의 『조선의 무격(朝鮮の巫覡)』 부록 사진에서 알 수 있다.


부군당의 제의는 봄·가을에 마을에서 공동으로 지내는데

규모가 큰 당에서는 3년마다 한 번씩 대규모의 당굿을 올린다.

서울·경기지역의 대표적인 부군당으로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 1동에 있는 부군당을 꼽을 수 있다.


이 당은 이태원 1,000여 호에서 제의 비용을 모아 3년마다 당굿을 하고 마을회의에서 뽑힌 제관 12명이 당제를 주관한다.

선출된 제관은 당제 15일 전에

대동우물을 퍼내고 왼새끼에 백지술을 끼운 금줄을 쳐서 잡인을 금하고,

새로 괸 우물물을 길어다 ‘조라’를 담가 제를 올린다.


당제는 유교식으로 하며 당굿은 일반 당굿과 달리 부군신을 위한 ‘부군거리’가 추가되며,

끝에 ‘황제풀이’를 하고 나서 ‘뒷전’을 하는 특징이 있다.


참고문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한국(韓國)의 향토신앙(鄕土信仰)』(장주근, 을유문화사, 197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들길나들목으로...


 노들길나들목을 통과하여...


 당산철교


 강변으로 걸어가면서...


 당산철교 끝자락에 보이는 절두봉(잠두봉)을...


 절두산성지가 있는 잠두봉을 살짝 당기니...


정선 [양화진], <양천팔경첩> 비단에 엷은 색ㅣ개인소장


[양화진] 

잔잔한 물가에 깎아지른 절벽이 우뚝 서 있다.

일엽편주 몇 척이 강변 나루터에 정착해 있고 무심한 강태공만이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웠다.

무엇보다 절벽의 모양새가 특이하다. 마치 물속에서 솟구쳐 나온 용머리 같기도 하고 누에고치와도 닮았다.

현재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용머리, 누에고치를 닮았다 하여 용두봉(龍頭峰),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려온 봉우리.

정선이 그린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의 [양화진(楊花津)]이다.




 선유봉이 있었다는 선유도로 가면서...



 양화대교가 중간에 걸려 있는 선유도는...



정선 [선유봉], <양천팔경첩> 비단에 엷은 색, 개인소장


[선유봉]


신선이 내려와 놀다 간 봉우리라는 의미의 선유봉은 생김새가 고양이와 비슷하다 하여 ‘고양이 산’, ‘괭이 산’으로도 불렸단다.

1962년 양화대교 건설 때 사라졌으며 현재 선유도가 옛 명소를 대신하고 있다.

정선은 우뚝 솟은 선유봉, 주변 인가, 양화나루를 화폭에 담았다.

양화나루에는 오고 가는 배가 대기 중이며, 선유봉 자락에는 웅장한 기와집을 비롯하여 소박한 초가 마을이 표현되었다. 



 양화대교 계단식 엘리베이터



 양화대교를 도강하여...



 선유도공원으로 가면서...


 잠시 철새 구경을 하고...





 선유도공원으로...





고양이산(괭이산/선유봉)


고양이산인 선유봉은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그 절벽의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중국 황하에 있는 저주봉과 같다고 하여 ‘저주봉’이라고도 불리었다.


1930년대에 일제가 대동아전쟁 수행을 위해

김포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도로를 개설하고자 이곳에 채석장을 개설하였다.

그후 제2차대전 후에 미군이 계속하여 비행장 건설과 도로 개설을 위해 본격적으로 석재를 채취하여

현장에서 분쇄하고 도로포장에 사용함으로써 선유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3공화국 시절 이곳에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개설하였는데 선유봉 자리를 중간에 두고 다리를 놓았다.

따라서 지금은 선유수원지가 자리잡고 있어 그 흔적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선유봉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양화도(楊花渡) 나루터를 경유하여

잠두봉(蠶豆峰)을 잇는 한강의 절경으로서 중국 사신들도 그 경치를 사랑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시인·묵객들은 옛날부터 이곳에 많은 누정을 짓고 거처하기도 하였다.

양녕대군은 만년에 이곳에 영복정(榮福亭)을 짓고 한가롭게 지냈다 한다.


- 서울시 -



 선유정









 선유교를 건너며...


 성산대교 너머로 쥐산이 보이네...





 양화1나들목을 통과하여...



 영등포아리수정수장앞 보도육교를 건너...



 앞에 보이는 산이 쥐산...



 쥐산을 오르며...







쥐산(분동산:50.5m)


영등포구 양평동 한강변의 표고 50.5m의 쥐산은

양화도 근처에 있는 고양이산(선유봉)과 대칭되는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선유봉의 모습은 고양이가 쥐를 발견하여 발톱을 세우고 있는데 비해서,

쥐산은 먹이를 앞에 놓고 있던 쥐가 금방이라도 도망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해서 붙여졌다.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은 연꽃이 무척 많이 피어있던 연지(蓮池)로서,

고려 때부터 임금이 연꽃을 구경하러 오기도 했으며 외국 사신들이 즐겨찾던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쥐산에서는 분가루 같은 백토(白土)가 있어 바람부는 날이면

근방 일대가 분이 날리는 것처럼 하얗다고 해서 분동산이라고도 하였다.


쥐산은 조선 숙종 때 첨중추부사였던 강효직(姜孝直)에게

사패지로 하사함으로써 진주강씨의 묘역으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웃하고 있는 고양이산 선유봉의 기(氣)에 눌려 32인 외에는 더 이상 모시지 않고 있다는 속설이 전한다.


양화교 앞에는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인공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고 있다.

이 인공폭포 배경인 돌산은 인공 바위산으로

평균 높이가 18m로 높이 12m, 넓이 15m의 주 폭포를 비롯하여 6개의 폭포가 있다.

폭포 주변의 300여평은 녹지대로 조성하여 시민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외국인에게는 서울의 아름다운 첫인상을 갖게 하는 곳이 되었다.


- 서울시 -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쥐산 정상의 정자?


 공사 중인 월드컵대교



정선 [이수정], <양천팔경첩> 비단에 엷은 색, 개인소장

  

[이수정]


이수정은 강서구 염창동 도당산에 위치한 누정인데,

그 명칭은 중국 당대의 시선 이백(李白, 701-762)의 시에서 유래되었다.

이백은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에서

“삼산은 반쯤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졌고, 이수는 백로주를 끼고 둘로 나뉘었다.”라고 읊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이덕연(李德演, 1555-1636), 이덕형(李德馨, 1561-1613) 형제는

양화진 남쪽 언덕 백로주와 마주 보는 위치에 정자를 지은 후 이수정이라 하였다.

양화진으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둘로 나뉘는 것을 발견하고, 이백의 시가 떠오른 모양이다.

정선은 도당산 숲 속에 위치한 이수정과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 울타리를 정겹게 재현했다.





 양화인공폭포 옆에 있는 '한강방어백골부대전적비'




 양화인공폭포


 오래 전에 찍었던 안내문과 폭포가 가동되었을 때의 모습...


 


 안양천을 따라 한강합수부로 가면서...







 한강합수부 다리를 건너...




 경인양행


 염창산둘레길을 따라...





 이곳이 도당산(상산)의 정상


도당산(都堂山)


도당산은 강서구 염창동 한강변, 

즉 한강과 안양천 합류지점의 안양천 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에 자리잡은 쥐산과 마주보고 있다. 


현재는 강서구 염창동 동아아파트 202동 뒤에 남아있는 조그만 야산으로

아파트를 건설하면서 한강변에 산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도당산은 남북방향 절개지로서 북쪽은 올림픽도로, 남쪽은 아파트단지가 있는데,

정상에는 철조망만 자리잡고 있으며, 정상표시물은 없다. 


아래쪽에는 염창정이란 정자와 그옆에 이수정터 표시석, 치성단이 위치하고 있다.

(이수정터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오류인듯...)



 염창정


 아래 그림과 설명 글을 보면 이곳(도당산)과 증산(염창산)이 원래 하나였고, 이수정은 지금의 염창산에 있었을 것이라 짐작케 하지만...



이수정(二水亭)

이수정은 서울 강서구 염창동 도당산(都堂山·지금의 증산) 상봉에 있던 정자다.


‘양천군읍지’에 이런 기록이 있다.

‘염창탄(현 안양천) 서쪽 깎아지른 절벽 위에 효령(孝寧)대군(1396∼1486)의 임정(林亭)이 있었다.

그 후에 한흥군(韓興君) 이덕연(李德演·1555∼1636)과 그 아우인 찬성(贊成·종1품) 이덕형(李德泂·1566∼1645)이

늙어서 정자를 고쳐짓고 이수정(二水亭)이라 했다.’


이덕연 형제가 벼슬에서 물러나 노년을 보내기 위해 이수정을 지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수정은 이덕연이 70대로 접어드는 인조 3년(1625)경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덕연이 스스로 호를 이수옹(二水翁)이라 했던 사실로 짐작이 가능하다.


이들 형제는 인조반정(1623)이 성공하자 벼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해야 했다.

인조반정은 율곡학파인 서인이 주도하고 퇴계학파인 남인이 묵시적으로 동조해 성공시킨 혁명이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광해군 조정에서 벼슬한 소북 계열이었다.

특히 이덕형은 반정 당시 도승지로 광해군의 심복이었다.

당연히 제거 대상이었으나 옛 임금의 목숨을 보전해 줄 것을 요구하는 충성심이 돋보여 반정 주역들이 포섭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이들 형제가 서인 조정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을 것이다.

이에 이수정을 짓고 언제라도 물러날 준비를 해 두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들 형제는 어떻게 효령대군의 임정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형제의 5대 조모인 비인 현주(庇仁 縣主) 전주 이씨가 효령대군의 정실 외동딸이었다는 사실에서 풀린다.

효령대군이 딸 몫으로 이 임정 일대를 나눠줘 이덕연 형제의 고조부인 우의정 이유청(李惟淸·1459∼1531) 때부터

이 일대가 한산 이씨 소유가 됐던 것이다.


이수정이란 이름은 당나라 최고 시인인

이태백(李太白·701∼762)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서’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세 산은 반쯤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갔고, 두 물은 백로 깃들인 모래벌이 가운데를 갈라놓았다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라는 구절이다.


실제 이수정에 오르면 눈앞에 우뚝 솟은 삼각산(북한산)의 상봉을

흰 구름이 감싸 반쯤은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간 듯 보이고,

난지도 모래펄이 한강물을 두 쪽으로 갈라놓는다.


1891년 편찬된 ‘양천현지’를 보면 이수정은 이미 터만 남아있었다 한다.

그러나 겸재가 ‘이수정’을 그릴 당시인 1742년경에는 그림에서처럼 이수정이 분명히 남아있었다.


이 그림은 양천현아 쪽에서 배를 타고 거슬러 오르며 바라본 시각으로 그려낸 것이다.

도당산 봉우리들이 강가에 급한 경사를 보이며 솟구쳐 있고,

그 봉우리가 상봉에서 서로 만나며 만들어낸 평지에 이수정 건물이 들어서 있다.


강가 모래톱에서 벼랑 위로 까마득하게 뚫려 있는 외줄기 길이 일각(一閣) 대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사 급한 이 오솔길이 이수정을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지금은 이 부근이 모두 아파트 숲으로 뒤덮여 이런 이수정 풍류의 자취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영조 18년(1742)경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의 소장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그런데 이수정 터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는 글도 있다.


지금은 풍광이 많이 변하였지만 쥐산 북쪽 한강변에는 일찍이 이수정(二水亭)이 있었다.

겸재 정선의 이수정 그림은 그가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후 그린 그림으로,

배를 타고 양천에서 양화나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라본 시각으로 그린 장면이다.

각도나 구도로 보아 안양천 하구가 한강으로 흘러들어 만드는 염창탄이 왼쪽 산봉우리들 사이로 이어지고 있고,

높이 솟은 절벽 위로 수림이 우거져 있으며, 그 사이에 누각 형태의 기와집이 반쯤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깍아지른 벼랑이 있고, 나루터에서 오솔길이 나 있는 산 위에 이수정이 보인다.


-서울시-



 이곳에 이수정이 있었다는 주장은 안양천 하구의 위치가 바뀐 것을 모르고...



 상산 치성단...이곳을 상산이라고도...




 염창동둘레길을 따라...





 염창나들목을 지나서...


 천지연 화원 옆으로 염창산(증미산)의 들머리가...









 염창산 안내문


 염창산(중산) 정상에서...


증산(拯山/甑山) 염창산/증미산


강서구 염창동 한강변에 위치한 표고 55.7m의 증산은
서쪽의 탑산·궁산과 동쪽의 쥐산과 더불어 한강변의 절경을 이루었다.
증산의 남쪽 기슭 염창동 20번지 일대에는 조선시대 국영의 소금 창고(鹽倉)가 있었다.
염창동 100번지 작은 동산은 도당산(상산)으로 치성단이 있었다.


-서울시-


염창산과 관련된 옛 고전에는 증산으로 표기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산 아래 소금창고 있었던 관계로 오늘날 염창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산에는 귀신바위와 김말손 장군 설화가 전해 온다.


소금배가 다니던 무렵 이곳은 강물의 흐름이 급한데다가 목이 좁아
모래가 자주 메워져 염창탄(鹽倉灘)이라는 여울목이 생겨났다고 한다.

여기에서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세금으로 받은 쌀을 실어오는 배가 침몰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물에 빠진 쌀을 건지게 되므로

이 여울목은 증미탄(拯米灘)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쌀을 건진다는 뜻의 증미(拯米)가 언제부터인지 증미(曾味)로 와전되어

현재의 증미산, 증산(曾山) 등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러나 원래 이름은 "일찍증(曾)이 아니고 건질증(拯)자인 증산(拯山)이다.


이 증산에 효령대군이 세운 정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이덕연 형제가 그 정자를 고치고 이수정(二水亭)이라 이름하였고,
그 오른쪽에는 김말손 집안의 정자 영벽정이 있었다고 한다.


- 강서구 -


위 글에서 증산이나 도당산에 이수정이 있었다는 주장은 '이수정(二水亭)'에 대한 배신이다.

한강과 안양천 두 물이 만나는 곳에 지어서 '이수정'이라고 했다는...

현재의 안양천이라면 증산이나 도당산에 있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겠지만

그 당시의 안양천(염창탄)은 지금의 쥐산 동쪽으로 흘렀다고 하니...


-맥가이버-





 강변골프연습장은...






 점심식사 후 염창산을 내려서며...









 가양빗물펌프장


 황금내근린공원






 가양아파트교차로





 허준근린공원과 한강을 잇는 전망대육교











 허준근린공원으로 돌아와서...



 의성 허준동상



 광주암(광주바위)으로...


 광주바위(광주암)


광주(廣州)바위


공암진이란 나루의 이름은 두개의 쌍둥이 바위에서 기인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구멍이 뚫린 구멍바위였기에 공암진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들은 광주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해 커다란 장마에 휩쓸려 바위가 지금의 장소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그러자 광주 사또는 이걸 빌미로 바위에서 자라난 쑥대로 만든 빗자루 세 개를 양천 사또에게 세금으로 걷어갔다.


해마다 이 일이 반복되자 양천사또는

"이보시오. 이렇게 꼬박꼬박 받아갈 양이면 아예 다시 가져가시오!"


광주사또는 말문을 잃었고 다시는 세금을 걷어가지 못하게 됐으며

그 바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광주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한강개발사업으로 서울에 있던 광주바위는
물 밖으로 나안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자료출처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원래의 광주바위 모습은 아닌 듯...


광주(廣州)바위
광제바위(廣濟―), 광주암(廣州岩)
 
강서구 가양동 440번지 부근 현재 구암공원 인공호수 내에 있는 바위로서,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던 바위로 홍수가 나자 이곳까지 떠내려 왔다.


비가 개인 뒤 광주 고을에서 없어진 바위를 찾아다니다가 양천의 탑산 끝머리에 와 있는 것을 알자,

광주 관아에서는 바위 대신 조세를 바치라고 하였다.


양천 고을 원님은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여

그 바위에서 생산되는 싸리나무로 해마다 비 세 자루를 만들어 보내 주다가

조용히 생각해 보니 싸리나무 몇 그루 나는 것마저 비를 만들어 바치니 귀찮기도 하고

또 고을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 바위는 소용이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

앞으로는 빗자루도 못바치겠다고 광주관아에 통보하자

광주고을에서는 이 바위를 가져갈 수 없어 양천고을에 빼앗기고 말았다고 한다.


출처 : 서울지명사전



광주(廣州)바위


서울특별시의 강서구 가양2동 공암나루 끝 한강변 탑산(塔山) 바로 옆에 위치한 바위이다.

강물 속에 두 개의 바위가 서 있다.

높이 12m의 그리 높지 않은 바위지만 강서구의 유서 깊은 경승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현재는 올림픽대로가 강물을 가로질러

그 일대의 옛 자취는 많이 변질되었으나 바위 자체는 옛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옛날 서해로부터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들고

이곳 경관에 도취한 뱃사람, 선유객들이 노를 멈추고 도원경에 심취하던 곳이라고 한다.


경치가 수려해 인근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광주바위는 지금 가양동 아파트 단지 안에 위치하며,

광주바위를 중심으로 '구암공원'이 조성되었다.


'넓은 들'이라는 의미의 '광주'에서 이름이 붙여진 '광주바위'는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었던 바위로,

오랜 옛날에 비가 많이 내려 큰 홍수가 나자 광주에서 이곳까지 떠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출처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광주바위 전설

 

전설에 의하면 옛날 경기도 광주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 커다란 바위가 물에 떠내려 왔다고 한다.

비가 그친 후 광주의 명물인 바위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 광주현감은 바위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위가 양천고을까지 떠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광주현감은

바위를 제자리로 옮겨 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다.


양천현감은 거절하지 못하고 바위에서 자라는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어 매년 세자루씩 바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생각이 들어 광주현감에게 바위를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바위를 가져갈 수 없었던 광주현감은 더 이상 세금을 내라는 요구를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본래 순박하고 인정 넘치는 양천 고을 사람들의 착한 심성과 멋진 광주바위의 풍광을 잘 나타내는 전설이다.




 아래 그림은 탑산과 광주암 등을 그린 것인데...지금의 광주바위 모습과는 다르다...광주바위 중간에 구멍이 보이는데...공암?


정선 [소요정], <양천팔경첩> 비단에 엷은 색, 개인소장


[소요정]


소요정은 조선 중기 재상 심정(沈貞, 1471-1531)이 양천현 동북쪽에 있는 공암 서쪽 강 연안에 지은 누정이다.

심정의 손자는 소요정이 한강 이남의 강가 누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승경이라고 자랑했다.

심정은 소요정을 짓고 무척 흡족했던 듯, 문장이 뛰어난 선비들에게 글을 청해 현판으로 걸었다.

이에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반허리진 산들은 술상을 밀치고 있고,

가을 골짜기는 술잔을 물리치고 있네(半山排案俎 秋壑閣樽盂)”라고 써주었더니,

심정은 자신을 놀리는 문장임을 알아채고 현판에서 뽑아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무슨 까닭인지 정선은 [소요정]에 누정을 생략하고 강물에 떠 있는 세 개의 웅장한 바위 덩어리만 그렸다.

정선이 이 장소를 그렸을 당시에는 벌써 소요정이 허물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양펀팔경 중 가장 뛰어난 절경으로 여기 '탑산과 광주바위'의 모습이라는데...아래 사진의 바위가 탑산의 절벽부분이 아닐까?


 대한한의사협회 건물 앞에 보이는 바위 부분이...


 연못에 있는 광주바위와 함께 예전의 모습이 아닌 상당히 변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위 '소요정' 그림과 '공암층탑' 그림을 보면 연못에 있는 광주 바위와 탑산의 절벽부분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데...


 너의 본모습은 어땠는지 궁금하네?


 소요정을 지나...


 생명의나무


 허준박물관 포토존


 허준박물관입구를 지나...


허준박물관 / Heojun Museum / 許浚博物館

조선 중기 의원이자 〈동의보감 東醫寶鑑〉을 지은 구암 허준의 학문적 업적과 박애정신을 기리고

한의학 관련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하기 위해 설립된 공립 박물관.
 

허준박물관은 1999년 수립된 허준기념관 건립계획에 따라 2000년 부지 매입을 마치고,

2003년 4월부터 약 1년 6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2005년 3월 개관했다.

2005년 5월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했다.


허준박물관의 전시시설은 허준기념실·약초약재실·의약기실·내의원/한의원·체험공간실·약초공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허준기념실은 허준의 일생과 〈동의보감〉을 포함한 한의학의 발달과정을 알아볼 수 있다.

약초약재실에는 〈동의보감〉에 나오는 곡부·과부·채부·초부·목부·쌍화탕·십전대보탕 등의 약초와 약재가 전시되어 있다.


의약기실에는 한국 전통 한의약기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내의원/한의원 코너에는 왕과 왕실 가족을 진료했던 내의원과 일반 백성들이 이용했던 한의원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체험공간에서는 약첩 싸기, 나의 체질 알아보기 등의 체험을 해볼 수 있다.

허준박물관에서는 방학을 이용해 ‘어린이 허준 교실’을 열어 한방과자 만들기, 총명환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허준 건강의학 교실’ 등의 사회교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서울특별시 강서구 허준로 87에 있다.


출처 : 다음백과 





 탑산(소요산)을 오르며...



 겸재의 공암층탑 그림을 보면 이곳 소요산(소요정이 있어서)에 탑이 잇었다고...

정선 [공암층탑], <경교명승첩> 비단에 색, 간송미술관


 탑산 정상에서...


탑산(塔山)


탑산은 강서구 가양동 궁산 동쪽에 있는 표고 31.5m의 나즈막한 봉우리이다.

탑산은 공암나루터가 있는 산으로 진산(津山)이라고도 하며 산에 오래된 탑이 서 있어서 이름하였다.

그러나 탑은 6·25전쟁 때 무너진 후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일대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탑산 아래 절벽 밑 가양동 산 1-1번지에는 구멍 뚫린 바위가 있어,

이를 흔히 공암바위 또는 허가바위라고 칭해오고 있다.

탑산 아래 있는 이 바위 주변의 경관은 취수장이 세워지고, 올림픽대로가 개통되어 지금은 많이 변하였다.

이 구멍바위 때문에 이곳의 지명을 백제와 고구려는 제차파의현, 신라 경덕왕 때는 공암현이라 하였다.

바위의 한자 표기인 파의(巴衣)로부터 양천의 별호인 파릉(巴陵)이 생기게 되었다.

양천의 진산을 파산이라 한 것도 이때문이다. 제차(齊次)는 갯가라는 뜻이다.


-서울시-




 공암나루터로 가면서...


공암나루(공암진)

공암진이란 나루의 이름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둑 밖에 있는 두 개의 쌍둥이 바위에서 기인한다.

그 가운데의 하나가 구멍이 뚫린 구멍바위였던 까닭에 공암진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설화는 다음과 같다.


공암진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둑 밖에 있는 두 개의 쌍둥이 바위에서 기인한 나루의 이름인데

그 가운데의 하나가 구멍이 뚫린 구멍바위였던 까닭에 공암진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본래 이 바위들은 광주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커다란 장마에 휩쓸려 현재의 장소에까지 떠내려 왔다고 한다.

 

이것을 기화로 광주의 사또는 해마다 양천 사또에게 세 개의 쑥대 빗자루를 세금으로 거두어 갔다.

이 빗자루들은 이 쌍붕이 바위에서 저절로 자라난 쑥대로 만든 것이었다.

마침내 이것을 귀찮게 여긴 양천사또는 광주 사또에게 따졌다.


“이보시오 광주사또! 이렇게 꼬박꼬박 쑥대 빗자루를 구실로 받아갈 양이면
 아예 이 바위들을 당신의 관할 구역으로 도록 가져가시오”


말문을 잃은 광주사또는 다시는 세금을 걷어갈 수 없었고,

그 바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광주바위로 불려지게 되었다.


양천땅에 소재하면서도 ‘광주바위’로 불려온 운명 때문이었을까?

이 바위들은 본래 한강의 흐르는 물살을 몸으로 거스르며 두둥실 떠 있던 바위섬이었는데,

지금은 한강 개발공사의 여파로 둑 너머 물 밖에 나앉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출처 : 서울시편찬위원회


 공암나루터(공암진) 표석에서...


공암진(孔岩津)
공암나루터, 공암도(孔岩渡), 공암진나루, 공총, 공총진, 구멍바위나루

 

현재의 강서구 개화동 강안에 있던 나루터로서,

강가에 구멍 뚫린 바위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강 하류의 교통 요지로 양화도 관할 아래 있었으며, 진선 5척이 배속되어 있었다.

후에 관선은 폐지되고 사선이 있어 선가를 받고 人馬의 통행을 맡았다.


행주산성 동쪽 덕수천(창릉천)이 한강으로 닿는 북포에 있던 나루가

공암나루와 연결되어 양천,김포와 고양간의 길목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행주산성 서쪽 언덕과 김포 대안에 행주대교가 가설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공암나루는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뱃길로 하류로는 조강진과 닿고

상류로는 양화진과 연결되는 중간참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강 건너편 고양시의 행주나루와 연결되었다.

공암도, 구멍바위나루, 공총, 공암나루, 공암진나루, 공총진이라고도 하였다.


출처 :  서울지명사전


 허가바위(공암바위)를 내려다보며...





 공암바위가 허가바위인지는 논란의 소지가 있네...






☞ 여기서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 - 1부를 마치고...


2018년 03월 11일(일)

'사라진 양천팔경의 절경을 상상하며 당산역에서 개화산역까지 한강 9산 이어걷기'를 다녀오다
 
-▥☞ 1부[당산→선유도공원→쥐산(50.5m)→도당산→염창산(55.7m)→광주바위→탑산(32.5m)→허가바위]는 여기를 클릭.☜▥-
 
-▥☞ 2부[허가바위→양천향교→궁산(75.8m)→소악루→치현산(70.5m)→치현정→약사사→개화산(132m)→개화산역]는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