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나무들이 비냄새가 다 가시지 않은 바람에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다.
집 앞에 피어 있는 철쭉꽃들이
하룻밤 봄비에 우수수 꽃을 잃었다.
땅바닥에 하얗게 깔린 꽃잎을 보며 사람 같으면
저 꽃들이 무슨 말을 했을까 그 생각을 한다.
아름다웠던 날은 짧고 꽃 없이 견뎌야 하는 날들은
이제 길게 남았는데 바람에 대한 원망이 많지 않았을까.
아쉬움과 탄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말을 할 줄 안다면 지나온 긴 겨울 동안
가지와 뿌리가 견뎌야 했던 시간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쏟아 놓고 싶었을까.
그러나 잃어버린 것들 때문에 독을 품는 꽃은 없다.
풀리지 않는 미움과 성냄으로
다른 것들을 해칠 계획을 세우는 꽃은 없다.
옆에서 다시 불두화가 연둣빛으로 피어나는 것을
말없이 지켜 볼 뿐이다.
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다시 꽃 피울 준비를 하는 나무들도
쫒기 듯 숨을 헐떡거리며 길을 재촉하지 않는다.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릴 뿐이다.
인고의 결과가 쉬이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
안달을 하는 것은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화려한 날은 짧게 사라지고
다시 빈 몸으로 견뎌야 하는 날이 시작되는 걸
참을 수 없어 하는 건 사람이다.
채워지지 않는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자신을 학대하고 남에게 독을 품는 것도 사람이다.
내 안에도 그런 탐 진 치의 칡넝쿨들이 엉겨
어떤 날은 가슴을 비집고 나오고
어떤 날은 입 안 가득 고여 있는 걸 본다.
내 생각 속을 흐르는 물줄기가
새도 와서 먹을 수 있고
산짐승도 와서 목을 축일 수 있는 시냇물 같지 않고
욕심으로 검게 오염되고 분노의 독한 이물질이 섞여
풀 한 포기도 거기에 뿌리를 적시면
곧 시들어 버릴 것 같은 날도 많다.
나희덕 시인은
내 속에는
반만 피가 도는 목련 한 그루와
잎 끝이 뾰족뾰족한 오엽송
잎을 잔뜩 오그린 모란 두어 그루
꽃을 일찍 피워 버려
이제 하릴없이 무성해진 라일락
이런 여자들 몇이 산다.
고 했는데 나는 내 속에 시들고 지친 나무들만
몇 그루 성글게 서 있는 걸 본다.
한 때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가슴속에 눈부시게 흰 몸으로
곧게곧게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은사시나무 같은 것을 자라게 했었는데
그 나무들을 언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모란이나 작약처럼 귀족적인 자태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낮은 산과 습기 있는 눅눅한 풀밭에서도 잘 자라는
붓꽃처럼 살고 싶었는데 붓꽃도 풀밭도 사라진
황무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꽃을 피우는 일은 잊은 지 오래인 채
매일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 있는 국도 변의 나무처럼
나도 그렇게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내가 짐 질 수 없는 새들을 모두 불러놓고
허리가 잔뜩 휜 채 힘겨워하고 있는
나무처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도 다시 반쯤은 피가 도는
목련 한 그루를 가슴속에 키우고 싶다.
얽히고 설킨 줄기에서 연보랏빛 등꽃이 핀다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만 그걸 기다리기엔
이미 너무 지쳐 있으므로
못생긴 모과나무라도 하나 자란다면 좋겠다.
향기 짙은 라일락이야 바랄 수 없을 테니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제비꽃 같은 것이라도
하나 자라고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