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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등산사진후기☞/♤ 북한산·도봉산·사패산

[20071104]북한산 단풍유람산행 後 불광천+안양천 도보여행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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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04일(일) 북한산 단풍유람산행 後 불광천+안양천 도보여행을 다녀오다.

 

오늘은 북한산에서 가을 단풍의 끝자락을 잡고. 다음 주에 할 '한강 120km울트라 도보일주'의 사전점검을 위해...

 

여정은 구파발역에서 이말산을 거쳐 삼천사 계곡으로 오르면서 단풍의 끝자락을 보고, 부왕동암문에서 산성계곡으로

내려서면서 남아 있는 단풍을 보는 북한산 단풍유람산행을 하고,

연신내역에서 불광천을 찾아 응암역까지 걸어간 후 불광천으로 내려서서 산책로를 따라 한강합류지점까지 가고,

성산대교를 걸어서 한강을 도강한 후 안양천과 도림천을 따라 신도림역까지 도보여행을 하는 것이다.

 

구파역에서 이말산을 오르면서 단풍의 화려함보다는 낙엽의 푸근함을 느끼면서 편한 걸음을 걷게 되었고...

이말산 끝자락에서 삼천사계곡을 따라오르다가 부왕동암문을 거쳐 북한산성입구로 내려온 북한산 단풍유람산행은

단풍의 끝자락을 잡고자 했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지난 날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다녀온 산행이었고...

 

연신내역에서부터 불광천을 찾아 도로옆 인도를 따라 걸으며 낯선 동네의 신선함?을 느끼면서 지루함을 잊었고,

응암역에서부터 시작되는 불광천 산책로를 따라 한강합류지점으로 내려가면서 '한강 120km 울트라도보일주'의

준비상황 등을 점검하고, 마포농수산물시장에서 저녁식사를 겸해 뒤풀이를 미리 하고, 이어 성산대교를 건너서

안양천과 도림천을 걸어서 신도림역까지 간 후 오늘의 여정을 마쳤다.

 

☞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 블로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 2부(삼천사입구에서 삼천사 거쳐 삼천사폭포까지)를 시작하며...

 

 ▼ 이말산 날머리에서...

 

  ▼ 삼천사를 향해...

 

 

 

 

 ▼ 삼천교를 건너...

 

 

 

 

 

 ▼ 용출봉이 우뚝...

 

 

 ▼ 누리장나무

 

누리장나무

[Clerodendron trichotomum, 개나무, 구릿대나무]

마편초과(馬鞭草科 Verbenaceae)에 속하는 낙엽관목.

 

잎은 마주나며 잎 뒤에 있는 희미한 선점(腺點)들 때문에 고약한 냄새가 난다.

잎자루에는 털이 잔뜩 나 있다.

꽃은 통꽃으로 8~9월에 가지 끝에 취산(聚繖)꽃차례를 이루며 무리지어 피는데,

연한 분홍색의 꽃부리가 5갈래로 갈라졌다.

수술과 암술은 갈라진 꽃부리 밖으로 나와 있다.

열매는 핵과(核果)로 10월에 진한 남빛으로 익고 붉은색으로 변한 꽃받침 위에 달린다.

7월에 어린잎을 따서 나물로 먹는다.

가을에 잔가지와 뿌리를 햇볕에 말린 것을 해주상산(海州常山)이라고 하는데,

한방에서는 기침·감창(疳瘡)을 치료하는 데 쓴다.

추위에 잘 견디며 빨리 자라 정원이나 공원에 흔히 심지만 배기가스에는 약하다.

뿌리가 깊게 내리지 않으나 길게 멀리 뻗는다.

오동잎을 닮은 잎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취오동(臭梧桐)이라고도 부른다.

 

 

 ▼ 삼천사

 

삼천사

 

삼천사는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 대사가 개산(開山)하였다.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승병들의 집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임란 중에 소실 되었으나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마애여래 길상터에 진영 화상이 삼천사라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현재의 주지 평산 성운 화상이 부임하여 경내에 위치한 마애여래입상이 천년 고불(古佛)임을 입증하여 보물로 지정받고 30여 년의 중흥 불사를 통해 대웅보전, 산령각, 천태각, 연수원, 요사채 등의 건물과 세존진신사리탑, 지장보살입상, 종형사리탑, 관음보살상, 5층 석탑, 중창비 등을 조성하여 현재의 문화재 전통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참배객들의 기도도량, 참회도량, 수행도량으로서 확고히 자리하게 되었다.


그 밖에 사찰에서 2km 위쪽에 위치한 옛 삼천사 터에는 대형 석조(石槽)와 동종(銅鐘), 연화대좌(蓮花臺座), 석탑기단석(石塔基壇石),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동종은 보물로 지정받아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5층 석탑

 

5층석탑 

 

삼천사 경내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초입에 위치한 5층 석탑은 무진년 4월, 평산 성운 화상이 미얀마를 성지순례할 때 마하시사사나 사원에서 아판디타 대승정(大僧正)으로부터 전수받은 나한사리를 봉안하였다.


불교에서는 탑이 중요한 신앙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것은 탑 안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다는 점 때문이다. 탑의 발생은 인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는 반구형(半球形)의 분묘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탑은 아쇼카왕 때 세워진 산치의 거대한 불탑을 들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입멸 (入滅)하자 그의 제자들은 유해를 다비(茶毘:火葬)하였다. 이때 인도의 여덟 나라에서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쟁이 일어났다. 그때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을 따라 불타의 사리를 사리를 똑같이 분배하여 각기의 나라에서 탑을 세우고 사리를 보관하였다.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한다.


탑은 탑파(塔婆) ·솔도파(率堵婆)라고도 한다. 솔도파는 산스크리트인 스투파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말이다. 그러나 스투파의 원래의 뜻은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土石)을 쌓아올린, 불신골(佛身骨:眞身舍利)을 봉안하는 묘(墓)'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탑파란 당초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 삼각산 삼천사 일주문

 

 

 

 

 ▼ 대웅보전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전당으로서 '도력(道力)과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 즉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통 건축양식인 맞배지붕으로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내부 중심 수미단(須彌壇)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의 좌우에는 협시불(脇侍佛)로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왼 쪽에, 부처님의 덕(德)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오른쪽에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화는 목각으로 새긴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으며, 십육나한상과 오백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오른쪽에는 중단을 마련하고 우리나라 전통 신을 의미하는 104위의 호법신(護法神)을 모두 묘사한 신중탱화를 모셨으며, 왼쪽 벽에는 지장보살상과 조상영가 영구위패를 봉안하였다.

 

  

 ▼ 대웅보전의 뒷면

 

 

 ▼ 적멸보궁

 

 ▼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보물 제657호)


마애여래입상은 삼천사 경내 대웅전의 위쪽으로 30m 지점 계곡의 병풍바위에 각인되어 있다. 불상의 어깨 좌우에 큰 사각형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애불 앞에 목조가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으며, 전체 높이는 3.02m, 불상 높이는 2.6m에 달한다. 고려시대 불상 중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된다.


얼굴과 윗몸은 돋을 새김을 하였으나 하반신과 광배 그리고 대좌는 볼록한 선새김으로 마치 강한 선묘화(線描畵) 같은 느낌을 준다. 머리광배[頭光]는 겹둥근 무늬로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살짝 뜬 눈은 눈꼬리가 귀 가까이 닿았으며, 두툼한 코와 연속된 양 눈썹 사이에는 작은 백호공(白毫孔)이 뚫려 있다. 신광(身光)은 한 줄로 새겼다. 신체는 비교적 장신이지만 비례가 자연스러우며, 옷차림을 보면 양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의이나 넓게 'U'자 모양으로 트인

가슴에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비스듬히 걸친 내의와 띠대들이 보인다. 법의는 다소 두껍게 나타내어 새로운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수인을 살펴보면 오른손은 내려뜨려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으며, 왼손은 배 앞쪽으로 무엇을 가볍게 받들어 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발 밑의 대좌는 연꽃잎이 위쪽으로 피어난 앙련의 연화좌이며, 꽃잎은 단판 중엽이고, 꽃잎 사이에는 간엽이 표현되어 있다.


조성된 바위 위에는 또 다른 커다란 바위가 얹혀 있어 마치 불상의 보개(寶蓋)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상호가 원만하고 신체도 균형을 이루었으며, 옷자락도 부드럽게 표현되었고, 양각과 음각의 조화를 잘 살린 매우 우수한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 산령각

 

산령각 

 

산령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전통 건축양식인 맞배지붕으로 을해년에 개축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산신과 호랑이를 그린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는데 산신은 산의 영(靈)으로 산을 지키며 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하는 신으로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산의 주인으로서 늘 가람의 뒤쪽에 자리하며 불법을 수호(守護)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좌우에 각각 독성탱화와 칠성탱화를 봉안하고 있는데 다른 사찰과는 달리 나무에 새긴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삼각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런 이유에서 삼천사를 '산신이 보좌를 튼 절'로 부르기도 한다. 영험한 곳으로 소문이 나 많은 기도객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나타나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어느 종교보다도 우리 민족의 감성과 심성을 잘 이해했다. 그래서 산신신앙은 비록 그 자체로 불교와 직접적 연관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불교의 테두리 안에 넣어 한데 어울리는 대승의 정신을 실천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절은 대개 깊은 산속에 있었으므로 우리 민족의 조상신으로 간주되어 온 산신은 불교에 융해되어 자연 스레 불교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와 확실하게 차이나는 우리 불교 만의 특징이다.

 

대개는 산신각이라 했지만, 산령각(山靈閣) · 산왕각(山王閣) · 성산각(星山閣) · 단하각(丹霞閣) 등의 이름도 있었다. 때로는 산신각 외에 삼성각이나 칠성각에도 산신이 봉안되기도 하니, 산신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대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대웅전 같은 금당을 참배한 다음에는 꼭 산신각을 찾는 것도 우리 불교에 녹아든 산신의 위상을 말해준다.

 

 

 ▼ 계곡에는...

 

 

 

 

 

 ▼ 지난 여름의 추억이 있는 삼천사폭포?

 

 ▼ 잠시 휴식하면서...

 

 

 

☞ 여기서 2부를 마치고...

 

 

 2007년 11월 04일(일)    

'북한산 단풍유람산행 後 불광천+안양천 도보여행을 다녀오다'

 
-▥☞ 1부(구파발역-이말산-삼천사입구)☜▥-
 
-▥☞ 2부(삼천사입구-삼천사-삼천사폭포)☜▥-
  
-▥☞ 3부(삼천사폭포-코끼리바위-부왕동암문)☜▥- 
 
-▥☞ 4부(부왕동암문-산성계곡-북한산성입구)☜▥- 
 
-▥☞ 5부(연신내역-불광천-마포농수산물시장)☜▥- 
 
-▥☞ 6부(성산대교-안양천/도림천-신도림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