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각 마을 주민들의 바램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죽산면 용설리를 싣는다. - 편집자 주 -
용설저수지가 생기면서 바뀐 마을 모양
용설리는 대한제국 시절에 죽산군 남면에 속해 있었다.
법정리로는 용설리이지만 행정리는 설동, 당북, 한실, 거곡의 4개로 이루어져 있다.
『안성군지』(1990)에 의하면 거곡마을은 ‘계곡이 깊고 산이 높아 다른 지역보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진다고’해서 거먹골이라고 부른다고 했고, 설동마을은 ‘용의 혀(舌)처럼 생겼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했다.
한실마을은 ‘자자손손이 평안을 찾는 한가로운 마을’ 혹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동네’라고 불렀으며, 당북마을은 마을이 서당의 뒤쪽에 있었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그런데 거곡마을과 설동마을의 경우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는 달랐다.
거곡마을은 ‘거미실(巨米室-쌀 창고)’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예전에 농사가 잘 되는 풍요로운 마을이었다는 뜻이라고 하며, 설동은 마을에서 계터, 혹은 겨티라고 하는데 느티나무(桂樹)가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자연마을의 경우 더욱 세분할 수 있는데 크게 보아 설동마을과 거곡마을은 모두 양달말과 응달말로 나뉘어져 있고, 한실마을은 용바위와 한실마을로, 당북마을은 안한실과 당듸로 나눌 수 있다.
용설리는 1982년에 축조하기 시작해 1985년에 완공된 ‘용설저수지’로 인해 마을의 일부가 수몰되었고 논밭도 일부 수몰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할 것이다.
현재 용설리는 마을 한가운데 용설저수지가 있고 그 저수지 둘레를 ‘매봉(장원리에서 남산으로 소개한 산인데 용설리에서는 매봉이라고 부른다)’과 바카프미산, 죽림산 등의 산이 둘러싸고 있고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모양새다.
호랑이가 살던 마을
산이 많고 마을이 많은 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 장수바위에서 장수 발자국을 가리키는 정인창씨(1940년생). |
거곡마을은 약 500년전에 인천 이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장군의 발자국이 찍혀있는 바위라고 해서 ‘장수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있다.
실제 가서 본 바위에는 사람의 발자국처럼 바위가 패여 있는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또 거곡마을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2그루가 있었다.
설동마을은 흥해 최씨가 자리를 잡으면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며 느티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을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3그루가 있었는데, 한그루는 실화로 불타 없어지고 2그루는 마을전기 끌어오기 위해 베어서 팔았다고 한다.
한실마을에서는 용바위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실마을에 가뭄이 오면 동네 맏며느리들은 용바위에 모여 보름달이 뜨는 날 소두방(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물싸움을 하면 비가 온다고 믿어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북마을에서는 1,000년은 되었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배나무’를 볼 수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배나무는 가지가 자란 것이라고 하는데, 배맛이 아주 좋다는 이 배나무는 보호가 시급해 보였다.
|
▲ 마을의 오래된 배나무의 굵기를 이야기하는 당북 이호익 이장(1952년생). |
또 마을마다 망월행사와 쥐불놀이 했다는 이야기, 줄다리기, 거북놀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노루잔등에 있는 ‘옻샘’에 쌍가마 타고 와서 물을 가져다 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
▲ 오른쪽부터 옻샘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영해(1946년생), 신원주 이장(1956년생), 한학수씨(1940년생). |
한실마을에도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우물에 보름달이 비칠 때 그 물(달물)을 떠서 떡국을 끓이면 득남한다고 해서 서로 달물을 뜨려고 경쟁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또 ‘차랑이’라고 하는 곳과 ‘산박골’이라고 하는 곳에는 호랑이가 실제 살았고,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호랑이 눈빛이 얼마나 광채가 나는지 마치 보름달빛과 같았다고 한다.
원주민과 이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의좋게 사는 마을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용설리는 용설 저수지가 생기면서 마을의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도 대를 이어 살아오는 토박이 보다는 새로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용설리에서는 4개 마을간에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간에도 원주민이니 새로 들어온 사람이니 하는 구별없이 서로 단결하고 화합하여 잘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이구동성으로 들을 수 있었다.
관련해서 당북마을의 이호익 이장(1952년생)은 맨 처음 마을에 들어온 사람이 모범을 보여서라는 말을 했고 마을의 원주민들도 텃세 부리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마을 4명의 이장들끼리도 단결이 잘되고 화합해서 일을 잘 풀어간다고 했다.
마을사람들이 의기투합해서 추진하는 사업이 ‘용설권역 농촌마을 종합 개발사업’이다.
이 사업은 농촌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도.농간 균형발전을 위해 쾌적하고 활력이 넘치는 살기 좋은 농촌마을을 가꾸기 위한 프로젝트로 2004년부터 농림수산식품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사업인데 마을에서는 이 사업을 위해 2006년도에 ‘마을개발 협의회’를 구성하였고 올해 3월에 이 사업 대상지로 최종 선정된 것이다.
향후 5년간 45억여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이 사업을 위한 마을사람들의 노력과 희망은 마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마을에서는 이 사업을 위해 설문조사 등을 통해 다양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마을소식지’까지 발간하고 있었다.
용설저수지를 비롯한 자연환경을 활용한 사업이나 쌀이나 콩과 같은 친환경 농산물을 이용한 사업, 다용도 문화시설 사업 등을 구상하고 있었다.
또한 용설리는 홍신자씨가 펼치는 ‘죽산 국제예술제’와 같은 문화예술 행사와 안성연극협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소극장이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환경과 자원 그리고 마을사람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진행되는 사업이 ‘농촌마을 종합 개발사업’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 했다.
죽산 제일의 부호 양재원의 고향
죽산을 이야기 하면서 양재원씨에 대한 이야기를 빼 놓을 수는 없다.
죽산면 제일의 부호였고, 양재원씨 땅을 밟지 않고는 길을 다닐 수가 없었으며 땅문서만 3짐이나 되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죽산 제일의 부호였다.
|
▲ 양재원의 아들인 양태석씨가 말을 탄 모습, 일제시대로 추정된다. |
죽산에서는 아직도 양재원씨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아들인 ‘양태석’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양재원씨은 본적이 용설리이고, 다행히 용설리를 탐방하면서 양재원씨의 증손, 즉 양태석씨의 손자를 만나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사진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관련된 자료와 증언 등을 종합하면 양재원씨는 일제시대에 죽산에서 방앗간과 양조장을 운영하였으며 슬하에 9남 5녀를 두었다고 한다.
학무위원, 면협의회원 등을 지내기고 했고, 현재 용설리 본적지에는 앵재원씨와 관련해 그 후손이 모아놓은 3개의 비석이 있다.(비석은 모두 5개인데 그 중 하나는 장호원에 있고 다른 하나는 선산에 있다고 했다.)
왼쪽 비석이 기사년(1929년), 가운데가 대정원년(1911년), 오른쪽이 을해년(1935년)에 세워진 것인데 모두 양재원씨의 선행을 기리고자 세워진 것들이다.
그 중 1935년에 세워진 오른쪽 비석은 ‘양공재원자선불망비’인데 이와 관련된 내용이 일제시대 신문기사에도 보인다.
즉 1935년 3월에 정조 100석과 현금 5백원을 희사하여 농촌빈민을 구제하고, 그해에 양재원씨가 환갑을 맞이하여 잔치를 하지 않고 3,000원을 공익사업 등에 기부하는 등 자선사업을 하여 세운 것이다.
이 비는 원래 죽산역전(본지 9월 22일 위치소개, 현재의 관음당)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1929년에 세워진 맨 왼쪽 비석의 경우 당시 양재원씨가 형편이 어려워 세금을 내지 못하던 죽산면의 800호의 세금을 대신 내 준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담은 ‘시혜비’인데 당시 죽산의 호수가 1,200여호였음을 감안하면 죽산면민 2/3의 세금을 양재원씨가 대납한 것이다.
양재원씨의 아들 가운데 2명은 해방정국에서 좌익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겪은 가족의 아픔과 억울함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한편 양재원씨의 비석이 있는 용설리에는 고려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탑이 1기 있다.
이 탑은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죽산리 435번지(현재 용강빌딩)에 있던 것인데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다만 죽산리 435번지가 원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데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할아버지는 3.1운동, 손자는 4.19 참여
일제시대 죽산면장을 지낸 이달승씨와 해방 후 죽산면장을 지낸 이현익씨가 용설리 사람이다.
이달승씨는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면장을 지낸 후 수원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설동마을에서 만난 최의학(1922년생)씨는 죽산초등학교 26회 졸업생으로 미군정기에 죽산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죽산초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했다.
|
▲ 죽산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한 최의학씨(1922년생). |
최의학씨는 죽산장로교회의 원로장로이기도 한데 교직자로서 또 종교인으로서 겪은 다양한 이야기를 했는데 가장 보람있었던 일로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이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 자리를 잡은 일을 이야기했다.
또 당북마을에서는 3.1만세운동당시 만세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룬 이주남(1882~1946)의 손자이면서 마을 노인회장인 이경우(1943년생)씨를 만날 수 있었다.
|
▲ 독립운동가 이주남의 후손인 당북마을 노인회장 이경우씨(1943년생). |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어렵게 살아온 까닭에 사진 한 장 제대로 보관할 수 없었다고 하며, 이주남씨의 경우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했을 때 어찌나 고초가 심했는지 가족들이나 주변사람들은 모두 ‘송장 가져왔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손자인 이경우씨 역시 당시 서울에서 4.19에 참가해 총상을 입었다고 한다.
설동마을의 최형구 이장은 죽산면 이장단 협의회장이기도 한데, 용설리에 있는 시유지에 특수목적고 같은 것을 유치해 마을이 발전했으면 하는 바램을 이야기했다.
용바위가 제 모습을 찾았으면
거곡마을은 인심 좋고 공기 좋은 오지마을이라는 자랑을 했고, 물이 풍부해 농사도 잘 된다고 했다.
설동마을은 사람들이 착하고 협동심이 강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회관을 지을 때도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실마을은 다른 동네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마을이라는 자랑을 했고, 당북마을에서는 안한실마을이 용설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었으며 사람들이 욕심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을사람들의 공통의 바램은 위에서 이야기한 ‘용설권역 농촌마을 종합 개발사업’이 잘돼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 그 사업이 잘되기 위해 개발제한(산림법상 공익지역, 보호림)이 풀렸으면 하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
▲ 용바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실마을 신원주 이장. |
그런데 한실마을에서는 ‘용바위’와 관련된 바램을 들을 수 있었다.
용바위는 용설리라는 지명이 있게 한 용설리의 상징과도 같은 바위인데 지금은 어느 절 표지석의 받침돌로 사용되고 있었다.(사진참고)
언뜻 모양새가 안성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고인돌과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는 ‘용바위’가 제모습을 찾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봉원학 기자 bwh5722@kg21.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