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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꽃 이야기 / 이진호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10. 18.


 

 배추꽃 이야기 / 이진호


'아이 심심해가 누가 나하고 얘기해 주는 사람 없을까?'

아욱 밭머리에 홀로 우뚝 피어 있는 배추꽃은 투덜댑니다.

 

하루가 다르게 노란빛을 진하게 피워 올리지만 친구가 없어 배추꽃은 외로웠습니다.

저만치 보리밭을 지나서 라일락꽃을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도 아무말 없이 그냥 달아나 버렸습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향긋한 내음이 배추꽃을 더욱 설레게 하였습니다.

 

'아, 이럴 때 친구가 있었으면……'

배추꽃은 파아란 하늘에 둥실 떠 있는 구름을 쳐다보며 긴 봄날을 심심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설마 오늘은 친구를 만날 수 있겠지!'

맑은 이슬에 얼굴을 씻은 배추꽃은 아침부터 친구를 기다렸습니다.

 

바람은 어제처럼 지나갔지만 배추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가끔가다가 귀여운 병아리들이 쪼르르 달려와서 배춧잎을 콕콕 찍어 보고는 되돌아가곤 하였습니다.

오늘도 한낮이 다 되었는데도 배추꽃을 상대해 주는 친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허탕치고 마는가 보다.'

배추꽃은 맥이 탁 풀렸습니다.

그때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륵 내려앉았습니다.

 

"아이 예뻐라! 어쩜 이리도 고운 빛깔일까!"

노란 빛깔의 배추꽃에 참새는 홀딱 반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넌 빛깔이 그게 뭐니? 우중충한 갈색 빛깔이잖아."

배추꽃은 약간 실망이라도 한 듯 반갑게 반겨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말동무가 없어서 심심해하고 있던 참에 배추꽃은 참새를 만난 것만 해도 퍽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빛깔은 이래도 노래 솜씨 하나는 그만이지."

"뭐, 네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짹짹짹……"

참새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지저귀기 시작했습니다.

 

"에게게, 겨우 그거야? 좀 더 고운 멜로디를 뽑지 못하구."

배추꽃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참새는 배추꽃 위를 포륵포륵 날면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참새의 나는 솜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배추꽃은 방긋방긋 웃어 주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습니다.

다음날도 참새가 찾아와서 배추꽃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노래 솜씨는 없지만 나는 솜씨는 대단한데!"

배추꽃은 참새를 칭찬해 주면서 다정한 친구가 되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참새야, 고맙다. 우리 오래도록 좋은 친구가 되자."

"물론이야, 우리의 우정은 영원할 거야."

배추꽃과 참새는 어찌나 즐겁고 기쁘기만 한지 긴 봄날 하루가 짧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타고 흰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아왔습니다.

 

"어머, 저 비단 같은 두 날개! 어쩜 색깔이 저리도 흴까!"

 

흰나비가 춤추는 모습을 본 배추꽃은 황홀함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놀아 준 참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나비님, 춤을 그만 추고 제 몸에 앉아 보세요."

배추꽃은 흰나비를 반가이 불렀습니다.

 

"안 돼. 흰나비는 안 된단 말이야. 너에게는 내가 있잖아."

참새는 흰나비가 배추꽃에 앉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넌 가만히 있어, 색깔도 형편없는 게 뭐가 그리 잘났다고  참견이야."

배추꽃은 퉁명스럽게 참새를 나무랬습니다.

 

"그게 아니고 흰나비가 네게 해로운 짓을 할 게 뻔하단 말야."

 

"뭐라고? 그럴 리 없어.

저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한 나비님이 어찌 그러겠니?

그건 너의 모함이야.

이제 너하고는 친구가 될 수 없어.

여태 친구가 되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지를 알아."

배추꽃의 마음은 금방 변해 버렸습니다.

 

"배추꽃아, 그러면 못 써. 너와 난 친구잖아. 그리고 우정도 변치 말자고 했잖아."

참새는 타일렀지만 배추꽃은 들은 척도 않고 돌아서 버렸습니다.

 

"나비님, 한 번 더 멋진 춤을 추어 보세요."

배추꽃은 나비의 춤을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나비는 배추꽃 위를 훨훨 날면서 가볍게 춤을 추었습니다.

"야, 난 행복해. 저토록 아름다운 나비님과 친구가 되었으니 말이야."

배추꽃은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서 하루 종일 나비의 날개만 멍하니 바라보면서 지냈습니다.

 

그 후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배추꽃과 나비는 아주 친해져서, 달콤한 이야기로 세월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흰나비의 애벌레가 배춧잎에 다닥다닥 붙어서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많은 애벌레는 망사처럼 뚫어 놓았습니다.

배추꽃은 아픔을 참으며 버티려 했지만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흰나비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애벌레를 데리고 가 주세요!"

 

"뭐라고? 어림없는 소리, 그 동안 내가 춤추며 놀아 준 대가를 지금 받고 있는 것뿐이야."

흰나비는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고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때 배추꽃의 친구였던 참새가 새끼 여러 마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배추꽃아, 너는 왜 이렇게 되었니? 내가 도와 줄 테니 조금만 참아라."

 

참새는 새끼들에게 애벌레를 모두 쪼아 먹으라고 했습니다.

아기 참새들은 열심히 애벌레를 한 마리도 남김없이 쪼아 먹었습니다.

 

"참새야, 미안해. 난 그것도 모르고 흰나비만 좋아했으니. 정말 고맙다."

 

배추꽃은 지난 일을 조용히 반성하면서 참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배춧잎의 새 살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