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경기 도보후기☞/☆ 시흥 늠내길

[20100127]시흥 늠내길 제3코스 옛길을 역방향으로 다녀오다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1. 28.

 

29520

 


 2010년 01월 27일(수) 

시흥 늠내길 제3코스 옛길을 역방향으로 다녀오다.

 

 '시흥 늠내길 제3코스 옛길을 역방향으로 다녀오다' 코스


상대야동 버스정류장→꼬꼬상회→홍두깨칼국수→양평해장국→서울외곽순환도로교각 아래→소래산 남원가든→소래산등산로 입구

→레펠1→레펠2→소래산 마애상→청룡약수터→소암천교→소암천약수터→내원사 갈림길→하중호ㆍ하제명 묘→소산서원→하우명 묘

→계란마을 약수터→팔각정→5거리→소래산등산로 입구(연세농장)→연세장수농장 앞→귀성사격장 앞→소래산등산로 입구(만의골)

→소래산등산 안내도→이동주막→소내골(서울외곽순환도로 소래터널 위)→쉬어가는 숲→배움의 숲→하우고개 구름다리→야생화원

→여우고개 갈림길→오복약수터 갈림길→전망 쉼터→여우고개(생태이동통로)→소래정(와우바위)→한남정맥 갈림길→1번 송전탑

→토끼굴→은혜동산교회→경원포장산업→한빛수도원 앞→잣나무숲→25번 송전탑→전통한옥 추어탕→꼬꼬상회 앞 버스정류장

 

 

 ▲ 시흥 늠내길 3코스 옛길 리플렛 (클릭하면 확대됨) 

 맥가이버의 '시흥 늠내길 제3코스 옛길을 역방향으로 다녀온' 이야기

 

2009년 10월 10일에 개장한 '시흥 늠내길'이란 명칭은

고구려 시대의 지명인 잉벌노(仍伐奴)란 이름의 당시 표현인 '늠내'에서 유래하고,

'늠내'에는 씩씩하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생명도시 시흥의 늠름한 기상과

은근하게 뿜어내는 아름다운 자연의 향내가 묻어나는 도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시흥 늠내길은 '1코스 숲길'과 '2코스 갯골길'에 이어 지난 주 토요일(1월 23일)에 '3코스 옛길'이 개장되었다.
시흥시에서는 이후에도 '낭만적인 바다와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해안길',

'논과 어우러진 수로를 따라 사시사철 색다름을 담아내는 물길',

'저수지와 더불어 드넓게 펼쳐지는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보는 들길' 등

시흥 곳곳의 아름다운 자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코스를 만들어 시민에게 좋은 길을 제공하겠다고 한다.

 

시흥 늠내길 1코스인 '숲길'은 작년 11월 15일(일)에 다녀온 적이 있고,

2코스 갯골길은 완주하지 않았지만 일부구간은 다른 테마로 갯골길이 알려지기 전에 걸었던 적이 있었다.

시흥 늠내길 '1코스 숲길'과 '2코스 갯골길'은 모두 시흥시청에서 출발하여 원점회귀하는 코스이기에

좋은 날에 함께 하는 좋은 님들과 숲길과 갯골길을 이어서 하루에 걸어보고자 한다.

 

오늘은 일단 지난 1월 23일(토)에 개장한 시흥 늠내길의 제3코스인 '옛길'을 걸어보고자 길을 나선다.

그간 소래산을  몇 번 오르내린 적이 있었지만 '소래산 마애상'과 '소산서원'이 있는 곳을 지나가지 못했었는데

마침 시흥 늠내길 3코스 옛길에 그 두 가지가 모두 있다고...

  

☞ '시흥 늠내길 제3코스 옛길'을 역방향으로 다녀오다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시흥 늠내길 제3코스 옛길'을 역방향으로 다녀오다 - 2부를 시작하며...

 


 소암천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 약수터가 소암천약수터...

 

 

 

 

 내원사 갈림길

 

 

 쉼터를 지나...

 

 

 

 

 소래산등산로 안내도에는...

 

 

 

 

 갈림길에서 늠내길 안내 리본이 있는 우측으로...

 

 

 

 

 

 

 

 

 

 

 

 

 

 

 

 

 

 

 이 묘가 하제명ㆍ하중호의 묘

 

 

  

  

 

 

 하연 신도비

 

하연河演(1376 ~ 1453)  
  
조선 전기의 문신.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禪) ·교(敎)의 2종(宗)으로 통합하고

사사(寺社) 및 사전(寺田)을 줄일 것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편저로 《경상도지리지》 《진양연고(晉陽聯藁)》 등이 있다.
  

본관 : 진주(晉州)
호 : 경재(敬齋) ·신희옹(新稀翁)
별칭 : 자 연량(淵亮), 시호 문효(文孝)
활동분야 : 정치
주요저서 : 《경상도지리지》 《진양연고(晉陽聯藁)》
 

본관 진주(晉州). 자 연량(淵亮). 호 경재(敬齋) ·신희옹(新稀翁). 시호 문효(文孝).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396년(태조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봉상시녹사(奉常寺錄事)를 거쳐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즉위 후 예조참판을 지내고, 1423년(세종 5)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禪) ·교(敎)의 2종(宗)으로 통합하고

사사(寺社) 및 사전(寺田)을 줄일 것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425년 경상도관찰사, 그 후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31년 대제학을 역임, 1445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70세 때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449년 영의정에 올랐다.
1451년(문종 1)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 합천의 신천서원에 배향되고, 1454년(단종 2)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편저로 《경상도지리지》 《진양연고(晉陽聯藁)》 등이 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에서 -

 

 하연 신도비 전면

 

하연(河演) 신도비(神道碑)

  

 

시흥시 신천동 계란마을 입구에 최근 신설된 하연 신도비(귀부양식,1994년)가 있으며,

이곳에서 소산서원 방향으로 200m 들어가면 하연 묘소로 올라가는 墓道의 우측 10m 정도에 신도비(방부개석,1940년)가 건립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남쪽으로 5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진입하는 길 앞으로 진양 하씨 묘역 관리사무실이 있고 옆으로 사잇길 있다.

 

  신도비의 석재는 옥개 부분과 기단부는 화강암이며, 비신은 오석(烏石)으로 되어 있다.

 

 신도비의 기단부는 높이 50cm, 너비 109cm, 두께 60cm,

비신은 높이 192cm, 너비 60cm, 두께25cm, 옥개석은 높이 65cm,

너비110cm, 두께 60cm로 총 높이 307cm이다.

 

  신도비문은 앞, 뒷면에 새겨져 있는데, 좌의정부좌의정의영남지(左議政府左議政宜寧南智)가 찬(撰)하고

비서원승 김교덕(秘書院丞 金敎悳)이 서병전(書倂篆)을 하여 오석의 비신 전후면에 각자하였다.

 

 비제(碑題)를

대광보국숭록대부행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장사잉령치사경재하문효공신도비명병서

(大匡輔國崇祿大夫行義政府領議政兼領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館觀事 世子師仍令致仕敬齋河文孝公神道碑銘倂序)라 하고

  전액(篆額)을 영의정익문효경재하선생신도비(領議政謚文孝敬齋河先生神道碑)라 올려 비석의 종류가 신도비임을 밝히고 있다.

 

 신도비의 옥개지붕은 방부개석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건립연대는 '선생몰후 488年병辰(1940년)10月 日立'이다.  

하연 신도비를 통해서 18세기부터 크게 유행하던 방부개석 양식이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졋음을 알 수 있다.

 

<하연 신도비문 해석>

 

*이 비문의 해석은 시흥군지편찬위원회에서 1988년 발간한 <시흥시금석문 총람>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하였고,

역사분야 조사단에 의해 일부 수정하였음.

 

  우러러 생각해 보건대 우리 세종대왕께서 정치에 정신을 가다듬고 더욱이 모든 옥사(獄事)에 치중하여

조정 신하 중에 크게 쓸만한 자를 마음속에 골라 두고 반드시 지방장관을 삼아 늘 시험해 보았다.

 

  영남 경상도는 옛 신라의 강토로 동쪽에 바다를 끼고 있다.

바다의 섬이 남으로 일본에 닿고 서북으로는 전라도에 접속되며, 빙돌아 관동 강원도에 이르러 지방이 크다.

한 감사 밑에 명령을 듣는 고을이 대소를 합해 칠십 여 고을이 되어 정치하기 어렵다고 호가 났다.

 

  을사(1425년)에 대사헌 하공(河公)을 임명하여 부임하자 정치가 현명하고 성적이 좋았다.

판결하는 일이면 다 적당하였는데 하루는 묵은 문서를 열람하다가 크고 작고 간에 의심스러워 밀린 일이 한 상자나 됐다.

조정 관료들 중에 재간이 있어 판결하는데 참견할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의심스런 것을 판결하는 데는 공(公)이 처리하고도 넉넉히 남는 바이라

특히 겸손하여 자신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한 가지 일이라도 혹은 잘못되어 감사의 직책을 옳게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영리치 못한 내가 아쉬운 대로 막하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인사가 끝난 뒤에 알만한 일은 내가 하고 물어야 될 일은 공에게 품신하니 공이 또한 이의하지 않고 판단력이 있다고 칭찬하며,

나이를 가리지 아니하고 사귐을 허여하니 비록 공은 나를 잘못 알았지마는 나는 얻은 것이 컸다.

  그 뒤 수 십 년이 지나 을축(1445년)에 공이 덕망으로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정묘(1447년)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기사(1449년)에 나도 외람되게 의정 당상에 올라가게 되니 공이 나에게 이르기를

<수령관(首領官)인 늙은 감사(監司)가 만일에 미끄러졌으면 말이 못될것이라>하니

이것은 영남 막부에 있으면서 서로 좋게 지내다가 이때에 와 황각(黃閣)에 발길을 나란히 하였다는 것이다. 

공(公)이 나에게 희롱하면서 기쁜 마음을 표시한 것으로 알겠다.

 

  슬픈 일이다.  공(公)이 벌써 돌아가고, 나 또한 바람병으로 말을 잘 못사는데

공(公)의 아들 우명(友明)이 나에게 신도비문(神道碑文) 요청하니 문장은 내가 능하지 못하다.

  대개 글이라 하여도 그 말을 다 하기는 어렵고, 말을 한다 해도 그 뜻을 다 할 수 없는데 더구나 문장도 능하지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나로서 병이 발작할 때면 하던 말도 혹은 잊어버리니 어찌 공(公)의 묘지를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공에게 알음을 받아 공의 덕업을 사모하고 공의 훈계곌 지켜서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

한두 가지 잊지 않은 일이 있기에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여 쓰기로 한다.

 

  삼가 살펴보면, 공의 휘는 연(演)이요,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이며 진주(晉州) 사람이다. 

원대 조상으로 복사공(僕射公)이 있으나 휘가 전해 오지 않았고, 보첩 세계에 휘 진(珍)이 있으니 벼슬이 사직(司直)이다. 

그 뒤 대대로 벼슬을 하였고, 휘 즙(楫)에 이르러 진천(晉川) 부원군(府院君)을 봉하고 시호는 원정공(元正公)이며,

원정공이 휘 윤원(允源)을 낳았으니 진산부원군을 봉하고 호는 고헌(苦軒)이다.

고헌공은 휘 자종(自宗)을 낳아서 청풍군수(淸風郡守)로 좌의정에 증직하였고

호는 목옹(木翁)이며 홍무구년(洪武九年) 병진(고료우왕2년,1376년)에 공(公)을 진주(晉州) 이구산( 丘山) 밑에서 낳았다. 

자라서 정포은(鄭圃隱) 선생에게 수학하여 약관(弱冠) 시절에 벌써 사람들의 명망을 받았다.

병자년(1376년)에 생원진사(生員進士)과에 다 합격하고, 또 병과(丙科) 문과(文科)에 제사등(第四等)으로 급제하여

청환(淸宦)을 차례로 지내 한림(翰林)으로 부터 대각(坮閣)에 들어갔다.

 

 태종대왕 정유(1417년)에 홀로 바른 말을 올려 법을 밝혔다고 표창하여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승급시켰고,

세종대왕이 선위를 받자 지신사(知申事)에 승진 하였다.

  조심하고 공경으로써 두 임금에게 융숭한 대우를 받고 쓰이게 되었다. 

춘방(春坊)에 문학, 예부(禮部)에 참판 판서, 사헌부(司憲府)에 대사헌,

예문관(禮文館)에 제학 대제학 정부(政府)에 참찬, 좌찬성은 다 일대의 좋은 벼슬이다.

 지방관으로는 군수가 두 번, 감사가 네 번인데 영남인즉 사무가 번잡한 곳이므로 명찰한 관계로 감사를 시킨 것이요, 

관서(關西)인즉 국경의 중요한 지대이므로 의뢰하기 위하여 도진무(都鎭撫)를 주어 삼도(三道)를 겸해 영솔하여

국내를 편하게 하고 외적을 막는데 문무(文武)겸재를 등용하는 것이니, 이것이 그 이력(履歷)중에 큰 일이다. 

중가네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중국에 가서 금(金), 은(銀)으로 조공(朝貢) 바치는 겻을 면해주기를 청하고,

그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대사헌(大司憲)으로써 구담(瞿담)이 임금과 부모를 배반하였으니

절에 시주하는 법을 혁파하여 백성에게 후하게 하기를 청하여 임금의 허락을 얻었다.

 천안(天安)에 귀양을 간 일은 말한 자의 잘못이요 공의 과실이 아니지만은 공은 자신의 과실인양 하고 아무런 기미의 빛도 없었다. 

임금께서 그 충성과 신의를 알고 일년이 못되어 불러 왔으며, 귀양살이로 있을 때도 넉넉하게 보살펴 주셨으니 특별한 은혜이다.

  공(公)이 어렸을 적부터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한번도 실수가 없었고,

장성한 뒤에 조정에 벼슬하여 경재상(卿宰相)이 되었지만은 조석으로 효성을 다하여 조그마한 일도 자식, 조카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구경당(具慶堂)을 지어 부모를 모시고 명절이나 생일에는 형제가 차례로 헌수(獻壽)하니 사대부가 부러워하여 시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기었다. 

  상주 (喪主)가 되어서 백발에 상옷을 입고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며

상이 끝나나 구경당(具慶堂) 이름을 고치어 부모를 길이 생각하는 뜻으로 영모당(永慕堂)이라 하고

장구(杖구)와 도서(圖書)를 부모가 계실 때와 꼭 같이 해 두었다.

  자제(子第)들이 영모당(永慕堂)에 띠로 덮은 것을 기와로 갈자고 청함을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기를

"선인이 거처하시던 집이라 고칠 수도 없으며 또 자손들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하신 덕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경오(1450년)에 문종대왕(文宗大王)이 즉위하자 대자암(大滋庵)을 중수하려 할 때 공(公)이 불가(不可)하다고 고집하니

공이(公) 사부(篩傅)로 있을 적부터 문종께서 공(公)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 일을 중지하였다. 

  조금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하여 노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여 신미(1451년)에 비로소 치사(致仕)함을 허락하였다.

 

  금상(今上) 원년 계유(단종 원년, 1453년) 팔월 십오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여

그해 시월에 인천(仁天) 소래산(蘇來山) 자좌(子坐)에 장사지내고 유언으로 불사(佛事)를 하지 않았다.

 

  태상사(太常寺)에서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인자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하여" 문효공(文孝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리고

사부(師傅)였던 옛 은의로써 명하여 문종(文宗)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아!  장하다!  공(公)이 늙고 덕있는 국가 원로(元老)로써 어진 임금을 만나 묘당 정략을 경륜(經綸)하고

시대에 적당한 일을 논주(論奏)한 것은 국사(國史)에 기재하고 여론이 칭송하니 덧붙여 말할 것이 아니다. 

다만 한스러운 일은 미천한 나로서 나라 은혜를 입어 지중한 고탁(顧託) 받고서도 백 분의 일도 다하지 못하였다.

  공과 같은 이가 있으면 반드시 퇴폐한 풍속을 진정하여 국가를 태산 반석 같이 편케 할 것이고,

이와 같이 졸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의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이 일세에 뛰어나 지은 것은 반드시 자필(自筆)로 쓰니

한 조각 편지를 얻은 자는 소중히 하기를 아름되는 구슬같이 하였다. 

  지난 병인(1446년)에 내가 소헌성후(昭憲聖后)의 수능관(守陵官)이 되었는데 공이 욕되게 시(時)를 지어주니

그 때 제공(諸公)들이 화답(和答)하여 축(軸)이 이뤄졌다. 

  지금 상자 안에 있어 대대로 전하며 보배로 삼을 것이니 공의 비문(碑文)을 지으려 함에 더욱 감개(感慨)한 바가 크다.

 

  공의 아내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본관이 농서(농西)이고 개성 부윤(府尹) 존성(存性)의 따님이다.

 아들 셋 딸 둘을 낳으셨는데 맏이는 효명(孝明)이요 벼슬이 부정(副正)이며,

둘째는 제명(悌明)이요 벼슬이 좌랑(左郞)이며 막내는 우명(友明)이니 즉 이 비문(碑文)을 청하러 온 사람이다. 

  이도 지극한 효성이 있어 능히 공의 옛 명성을 이어 받았으며 맏딸은 문화(文化)사람 호군(護軍) 유경생(柳京生)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안동(安東)사람 감찰(監察) 김맹렴(金孟廉)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증손자 누구누구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경태 사년 계유(1453년), 좌의정, 의령 남지(南智)지음.  후손 기범(箕範) 삼가씀.

 

 하연 신도비 후면

 

 소산서원이 보이네...

 

 

 진양하씨 문효공파 중앙종친회

 

 소산서원

 

소산서원[蘇山書院]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 문효공(文孝公)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3년)을 향사하는 곳이다.
시흥시 신천동 산12번지, 하연의 묘 옆에 자리잡고 있다.

하연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21살에 벼슬에 올라 이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의 벼슬을 두루 거쳤다.
황희, 허조와 함께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이라 일컬어진다.
 
하연이 세상을 떠나자 1455년(세조 즉위년) 소산재(蘇山齋)라는 재실을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다.
1467년(세조 12)에 하연의 셋째아들 우명(友明)이 이곳에 영당을 세우고 소산재를 다시 지어 봄가을로 향사를 지냈다.
1963년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쇄락한 소산재를 중건하였고, 1995년 중건하면서 소산서원(蘇山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소산서원은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며, 지역의 전통문화 보존과 주민들의 예절교육을 위해 힘쓰고 있다.
진양하씨(晋陽河氏) 문효공파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에서 -

 

 

 

 

 

 소산서원 문이 닫혀...

 

 

 소산서원 앞에는 '가을사랑'이라는 카페가...

 

 가을사랑 카페 지키미

 

 

 

 

 

 

 

 

 하연의 아들 하우명의 묘가 있는 곳...

  

 

 하우명의 묘와 소래산

 

 

 

 

 

 

 

 

 

 계란마을 약수터 가는 길...

 

 계란마을 약수터는 주변에 4개나 있다.

 

 

 

 

 

 

 

 

 

 계란마을 약수터 정자가 보이네...

 

 

 

 이 정자를 일단 '계란정'이라고 하자.

 

 

 

 

 

 

 5거리 갈림길

  

 5거리 갈림길에 선 이정목

 

 연세대 장수농장으로 가는 길

 

 소래산등산로 입구(연세농장)으로 가는 길...

 

 

 

 

 

 

 소래산

 

 

 

 

 

 

 

 소래산

 

 

 

 

 

 

 만의골길이 보이네...

 

 만의골길에 있는 소래산등산로 입구(연세농장)

 

 


☞ 여기서 '시흥 늠내길 제3코스 옛길'을 역방향으로 다녀오다 - 2부를 마치고...

 

 

 2010년 01월 27일(수) 

'시흥 늠내길 제3코스 옛길'을 역방향으로 다녀오다.

 

-▥☞ 1부[상대야동 버스정류장→꼬꼬상회→소래산등산로 입구→소래산 마애상→청룡약수터→소암천교]는 여기를 클릭.☜▥-

 

-▥☞ 2부[소암천교→내원사 갈림길→소산서원→계란마을약수터→5거리→소래산등산로 입구(연세농장)]는 여기를 클릭.☜▥-

  

-▥☞ 3부[연세농장→소래산등산로 입구(만의골)→이동주막→소내골→쉬어가는 숲→하우고개→전망쉼터]는 여기를 클릭.☜▥-

  

-▥☞ 4부[전망쉼터→여우고개→소래정(와우바위)→송전탑→한빛수도원→잣나무숲→전통추어탕→꼬꼬상회]는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