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즐거움 20선]<10>삼남대로 답사기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할 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과 함께 그 어떤 ‘떨림’을 느끼게 된다.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타본 적 없는 열차를 처음 탈 때나 고속도로에 자가용을 몰고 처음 진입하는 순간에도 비슷한 ‘떨림’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멀리 천 리를 다니는 ‘대로 걷기’ 첫걸음에는 그 무엇보다 강한, 그리고 여러 감정이 섞인 ‘떨림’이 오간다.”》
일본인이 찾아낸 우리 옛길의 사연
우리 옛길을 답사한 저자는 일본인이다. 지도와 기차를 좋아해 고등학생일 때 일본 전국 철도 약 2만 km를 모두 승차했고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대학원 지리학과에 유학 중일 때엔 한국의 옛길에 심취해 영남대로(서울∼부산), 삼남대로(서울∼제주), 관동대로(서울∼울진 평해)를 모두 걸었다.
스물닷새에 걸친 답사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풀과 시멘트에 가려 사라지고 있는 우리 옛길의 따스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출발은 서울의 숭례문이다. 삼남대로는 영남대로와 마찬가지로 숭례문에서 시작된다. 춘향전에는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옛길의 이름들이 노다지로 실려 있다. 서울 용산구 남영역 근처에는 옛 마을 ‘돌모루’가, 지금의 삼각지 근처에는 ‘밥전거리’(밥을 파는 음식점 거리)가 있었다. 삼각지는 교차로가 세모꼴이어서 일본이 붙인 이름이니 옛 이름인 ‘밥전거리’로 바꾸자는 저자의 제안을 접할 때는 ‘한국인보다 한국의 옛길을 더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저자의 답사여행을 따라가면 전국의 초등학교 터는 옛날 동헌(東軒·지금의 군청 같은 관공서)이었던 곳이 많음을 알게 된다. 경기 과천도 예외는 아니어서 과천초등학교 교정 한구석에는 옛 과천현 동헌 객사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 이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중심부가 지금의 과천초등학교 부근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 마을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저자는 “한국의 도시 개발이 종전의 전통 마을을 남겨 두지 않고 모조리 부수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고 말한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쓴 지리서 ‘대동지지’를 기초로 저자는 옛길을 하나하나 추적한다.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옛 지명은 ‘살아있는 실마리’다.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인근에서 옛 지도상의 궁원(弓院)마을을 찾을 때 주민들이 들려준 ‘화란’이란 옛 명칭은 힌트가 됐다. ‘궁’이 ‘활’이므로 ‘활원’이 ‘화란’으로 변했으리라는 추측은 쉽다. 이몽룡이 서울로 가며 거쳤던 삼남도로의 옛 지명들을 외우며 옛길을 확인해 주던 마을 노인을 만났을 때, 저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서울을 떠나 열하루째에 전라도로 들어선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서는 다른 고을에서 거의 없어진 동헌을 만나고, 옛 주막촌이었던 전남 나주의 망월초 마을에서는 지금까지 ‘살아있는’ 주막에서 막걸리를 걸친다.
답사에 시골 인심의 푸근함이 빠질 수 없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의 ‘자고 가라’는 청을 나그네의 바쁜 사정으로 거절했더니 ‘그러면 고개 너머 배 과수원이 우리 것이니 가다가 마음껏 따 먹고 가라’는 정겨운 말씀이 돌아온다.”
옛길을 찾아 지도와 나침반만을 믿고 산을 오르는 고생도 마다하지 않은 저자는 마침내 ‘땅끝’(토말)에 도착해 그 옛날 제주로 가는 배가 떠났던 이진(梨津)에 선다. 천리 길 여행은 옛 제주읍성의 관덕정(觀德亭)에서 시원한 생맥주 한 잔과 함께 마친다.
저자는 그냥 걷지 않았다. 축적 2만5000분의 1 지도에 자신이 추정한 옛길을 정확히 옮겼다. 출발 때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이룬 셈이다. “한국의 대로들을 더 걸어야지…다 걸어야지…(그래서) 풀에 묻혀진 옛 사람들의 기억을 내 손으로 되살려야지….”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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