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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남한산성

[20101009]발도행따라 고골사거리-객산-남한산성-남한산성입구역까지-4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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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0월 09일(토)  

발도행따라 '고골사거리-객산-벌봉-남한산성-남한산성입구역까지 걷기'를 다녀오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맥가이버의 발도행따라 '고골사거리-객산-벌봉-남한산성-남한산성입구역까지 걷기' 이야기 

 

 

 발도행따라 '고골사거리-객산-벌봉-남한산성-남한산성입구역까지 걷기' 코스


잠실역 8번 출구→서부농협 정류장→고골사거리→샘재입구사거리→교산교→선법사 입구→교산동청년회관→선법사→객산 들머리

→삼거리→객산(291m)→공동묘지→옛고개길→청주한씨묘→송전탑1(NO.92)→송전탑2→송전탑3→안부사거리→상사창동 갈림길

→동수교 갈림길→법화골 갈림길→가재울 갈림길→벌봉 암문→노적산(한봉) 갈림길→봉암성 암문→동장대 암문→제2군포터→북암문

→북문(전승문)→북장대지→서문(우익문)→병암남성신수비→청량당→수어장대→매바위→무망루→서암문→영춘정→남문(지화문)

→중원약수터→백련사→산성약수→통일기원 돌탑→약사사 입구→심신수련장→남한산성유원지 입구→산성육교→남한산성입구역

      오늘은 '발견이의 도보여행'을 따라 '고골사거리-객산-벌봉-남한산성-남한산성입구역까지 걷기'에 함께 한다.

 
발견이의 도보여행(길을 찾는 사람들)의 카페지기인 발견이님과는 오랜 전에 전화통화를 한 번 했던 적이 있었고,
지난 여름 백우산에 올랐다가 용소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용소계곡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첫만남이었다.
 
좋은 길을 걷는다는 '발도행' 카페공지를 보고 함께 하겠다는 참가글을 달고,
만남장소인 잠실역 8번 출구밖에서 두번 째 만남을 하고...
길동님의 리딩으로 '고골사거리-객산-벌봉-남한산성-남한산성입구역까지 걷기'를 '발도행' 님들과 함께 한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발도행따라 '고골사거리-객산-벌봉-남한산성-남한산성입구역까지 걷기'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발도행따라 '고골사거리-객산-벌봉-남한산성-남한산성입구역까지 걷기' - 4부를 시작하며...

 

▼ 15시 40분 - 북문(전승문) 문루

 

 

 

 

★ 북문(戰勝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戰勝門)이라 칭하였다.

'전승문' 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에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문의 폭은 325cm, 높이는 365cm이다.

 

육축은 특별히 가공하거나 큰 무사석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일반 성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벽의 두께는 두꺼워져 약 710cm에 달한다.

 

홍예 안쪽에는 판문을 설치하였으며 철린을 박아 보강하였다.

여장은 총안이나 타가 없는 평여장을 설치하였고,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별도로 설치하지도 않았다.

 

문루는 단층이고 규모는 정면 4칸 측면2칸이며,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용머리는 치미를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에도 용두를 장식하였다.

 

천장양식은 연등천정이며 기둥 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다.

 

 

  

 

 

 

 

 

 

 

 

 

▼ 15시 55분 - 서문(우익문)

 

★ 서문(右翼門)


남한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쪽사면의 경사가 급해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99)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터를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것인데, 서문은 우측이 되므로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이 문으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하였던 바로 그 문이다.


서문은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개구부는 내외면이 반원형의 홍예식이다.

외면은 높이 210cm이고 폭은 146cm이다.

 

바닥에는 지대석을 깔고 양쪽에 50×40×130cm의 장방형 홍예기석 한 매를 놓고 그

 위에 5 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을 설치하였다.

 

문짝의 크기는 85×210cm이며, 표면에는 20×33cm 크기의 방형 철엽을 4cm 정도 겹치도록 부착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두리는 석재로 위, 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고,

양 측벽에는 장군목을 끼워 빗장을 지를 수 있게 40×20×35cm의 장방형 홈을 파놓았다.

대문 안쪽의 천장부는 회반죽으로 마감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표면이 박락되어 전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

 

안쪽의 홍예는 높이 227cm, 폭 210cm이고,

측벽부는 114×103cm 정도의 장대석으로 두 단을 쌓았으며 높이 170cm 이상부터는 전으로 쌓았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문루의 처마는 겹처마를 두르고 누대의 용마루는 치미를 올려 장식하였다.

문루의 천정 양식은 연등 천정에 일부 우물 천정을 병용하였다.

기둥 양식은 주심포에 2출목익공식포를 장식하였다.

 

 

 

 

 

 

 

 

 

 

 

▼ 16시 03분 - 병암

 

▼ 병암(屛岩)

 

병암은 수어장대에서 서문방향으로 약200m 길 우측에 두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이 비문에는 정조3년(1779) '남성신수기비문'이 새겨져 있어 유명하다.
이 바위 우측에 '병암이민하10세기미서'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병암'의 글씨는 이민하가 10세 때에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16시 13분 - 수어장대 입구

 

 

 

 

 

▼ 16시 14분 - 수어장대 안내문

 

 

 

  

▼ 청량당

 

 

 

 

▼ 수어장대

 

★ 수어장대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라 부르던 것을

영조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수어장대의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 3칸, 측면 2칸만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2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 매바위

 

★ 매바위

 

수어장대 앞 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매바위' 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회 장군에게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장대 앞뜰에서 이회 장군은 참수를 당하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은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회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회 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곽 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 수어서대 각자

 

▼ 수어서대(守御西臺)

 

남동쪽 모서리에 있는 매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이다.
사각형으로 제액을 파고, 그 안에 '수어서대'라고 새겨놓았다.

 

원래 수어사는 도성의 수어청에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유사시 에는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에 와서 지휘하였다.

정조 19년(1795)부터는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였다.

 

 

▼ 무망루

  

 

▼ 무망루(無忘樓)

 

성안 서장대(수어장대)의 2층 문루 이름이다.

남한산성의 5개 장대중 2층 문루가 있는 장대는 서장대와 남장대로서,

서장대의 문루는 '무망루' 이고, 남장대의 문루는 '타운루' 이다.


무망루의 2층 누대는 영조 때인 1751년 유수 이기진이 지었고,

현종 때인 1836년 유수 박기수가 중수한 것이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조아려야 했던 삼배구고두의 치욕,

그리고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가 8년 동안이나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와 북벌을 꾀하였으나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임금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께서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무망루의 뜻은 '無忘' 즉 '잊음이 없다', '잊을 수 없다' 는 뜻이다.

 

 

 

 

▼ 이대팔님의 남한산성 스토리텔링

 

▼ 수어장대를 배경으로...

 

 

 

 

 

 

 

▼ 16시 39분 - 이제 남문으로...

 

 

 

 

▼ 16시 41분 - 서암문

 

 

 

 

 

 

 

 

 

 

 

 

 

 

 

 

 

 

 

▼ 16시48분 - 영춘정에서...

 

☞ 여기서 발도행따라 '고골사거리-객산-벌봉-남한산성-남한산성입구역까지 걷기' - 4부를 마치고...

 

 

 

 2010년 10월 09일(토)  

발도행따라 '고골사거리-객산-벌봉-남한산성-남한산성입구역까지 걷기'를 다녀오다.
   

-▥☞ 1부[잠실역→고골사거리→교산교→선법사→삼거리→객산(291m)→공동묘지→옛고개길→송전탑→안부사거리]는 여기를 클릭.☜▥-

 

-▥☞ 2부[안부사거리→상사창동 갈림길→동수교 갈림길→법화골 갈림길→가재울 갈림길→벌봉 암문→봉암성 암문]는 여기를 클릭.☜▥-

 

-▥☞ 3부[봉암성(신성) 암문→동장대 암문(제3암문)→제2군포터→수구(水口)→북암문(제4암문)→북문(전승문)]는 여기를 클릭.☜▥-

 

-▥☞ 4부[북문(전승문)→북장대지→서문(우익문)→병암남성신수비→수어장대→매바위→무망루→서암문→영춘정]는 여기를 클릭.☜▥-

 

-▥☞ 5부[영춘정→남문(지화문)→중원약수터→백련사→산성약수→통일기원탑→심신수련장→남한산성입구역]는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