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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주년 기념 특집] 김정호의 생애

by 맥가이버 Macgyver 2011. 11. 20.

[150주년 기념 특집] 김정호의 생애

  • 이상태·국제문화대학원 대학교 석좌교수
오로지 국가를 위해 일로매진한 조선 최고의 위대한 지리학자
김정호 출생지, 백두산답사설, 신분과 사상, 교우 관계
▲ 동여도의 표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김정호가 언제 태어나고, 어디서 살았으며, 언제 죽었는지 등을 정확히 아는 사람도 드물다. 더구나 김정호의 옥사설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제작되었고, 또 <대동지지>가 어떻게 저술되었는지는 더욱 오리무중이다.


<대동여지도>라는 조선 역사상 불멸의 업적을 남긴 김정호에 대한 의문 사항은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이는 그의 빛나는 업적에 비해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정호에 대해서는 추측과 억측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김정호는 <동여도지>를 쓴 후 최성환과 함께 <여도비지>를 편찬하고 이러한 지리지(地理誌)들을 종합해 <대동지지>를 편찬했다. 또 <청구도〉를 여러 차례 제작했으며, <동여도>를 제작해 이 지도를 바탕으로 <대동여지도>를 판각했다.


김정호에 얽힌 수많은 의문을 선학들의 연구를 참고해 김정호의 출생지, 김정호의 생몰 연대, 김정호의 거주지, 김정호의 당호(堂號) 문제, 백두산 등정과 전국 답사의 사실 여부, 김정호의 옥사설, <대동여지도>의 실측 문제, 최한기와의 관계, 김정호의 신분 문제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정호의 출생지 김정호의 출생지가 황해도라는 데 이의를 제기한 연구자는 없다. 황해도 봉산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필자는 황해도의 토산을 김정호의 출생지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김정호가 최초로 쓴 지리지가 <동여도지>인데 이 책의 편자에 ‘월성 김정호 도편(月城 金正浩 圖編)’이라고 썼다가 후에 누군가에 의해서 먹으로 지워졌다. 그러나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동여도지> 제7권만은 편자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른 권수를 유심히 살펴보면 ‘월성 김정호 도편(月城 金正浩 圖編)’이라는 글자를 희미하게나마 읽어 낼 수 있다.


이 월성이란 일반적으로 자기의 본관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김정호는 청도 김씨가 아니라 월성 김씨 곧 경주 김씨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편찬 지리지인  <여도비지>를 살펴보면 이 의문은 풀린다. 이 책은 최성환과 공저로서 편자가 ‘예성 최성환 성옥보 휘집(蘂城 崔瑆煥 星玉甫 彙輯), 오산 김정호 백원보 도편(鰲山 金正浩 伯元甫 圖編)’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로 본다면 김정호는 청도 김씨가 분명하다. 오산(鰲山)은 경상도 청도의 옛 지명이며  오산 김씨는 곧 청도 김씨이다. 그러면 <동여도지>에서는 왜 ‘월성 김정호(月城 金正浩)’라고 했을까? <대동지지> 황해도 토산조를 보면 토산의 옛 명칭이 월성으로 나타난다. 이는 김정호가 황해도 봉산 출신이 아니고 토산 출신임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청구도 표지

김정호의 생몰 연대 김정호의 생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병도는 김정호가 순조·헌종·철종·고종까지 4대에 걸쳐 생존했다고 했다. 매우 타당성이 있는 지적이다. 김정호는 순조 34년(1834)에 <청구도>를 제작했으며, 철종 12년(1861)에는 <대동여지도>를 간행했고, 고종 원년(1864)에는 <대동여지도>를 재간했으며, 고종3년(1866)까지 <대동지지>를 편찬했기 때문에 이러한 단정은 사실에 부합된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김정호의 생몰 연대를 밝히기에 미흡하다.


김양선은 <한국실학발전사>에서 김정호의 생몰 연대를 1804~1866년이라고 정확히 밝혔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 연대의 근거를 전혀 밝히지 않아 아쉬움이 많다.


김정호의 생몰연대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는 대동지지에 있다. <대동지지>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대동지지> 권1 국조기년(國朝紀年) 고종조에 고종의 왕비가 민비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다른 왕들은 세자로 책봉된 뒤 세자빈을 맞아들였다가 부왕이 돌아가시면 함께 즉위하지만 고종은 세자 시절 없이 바로 즉위했기 때문에 세자빈이 없었다. 고종은 즉위하고 철종의 국상을 다 치른 3년 후 고종 3년(1866) 3월에 민비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러한  사실이 <대동지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정호는 고종 3년(1866) 3월 이후까지 생존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친우였던 최한기가 1803년에 태어나서 1877년에 죽었다면 김양선이 지적한 1804년에 태어나서 1866년에 죽었다는 지적은 비교적 타당성이 있다. 김정호의 출생 시기는 현재 밝힐 근거가 없지만 그가 고종 3년(1866)까지 활동했음은 <대동지지>를 통해 분명히 밝혀졌다.


김정호의 거주지 김정호가 황해도에서 언제 서울로 상경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정호는 서울에 상경해 남대문 밖 만리재 부근에 살았다고 한다.


김정호의 거주지에 대해서는 정인보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 그는 김정호와 생전에 면식이 있었던 한세진의 아버지의 증언을 근거로 김정호가 만리재에 살았다고 했다. 그러나 정인보보다 앞서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내용을 보면 조선광문회에서 김정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허가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본다면 김정호는 약현 부근에 살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잘못된 얘기다. 왜냐하면 <수선전도> 등의 도성도를 펼쳐 들고 위치를 확인하면 만리재 너머가 바로 공덕리이기 때문이다. 공덕리는 남대문 밖이지 서대문과는 거리가 멀다. 약현·만리재·공덕리는 서로 지척 거리다. 조선광문회에서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고 한 점으로 보아 이미 상당한 고증이 있었을 것이고 여러 정황에 의해 김정호는 약현 부근에 거주했을 것이다.


▲ 대동여지도의 표지

김정호의 당호 문제 김정호는 고산자라고 스스로 호(號)를 정했다. 호는 대부분 스승이 정해 주거나 친구들이 정해 주는데 김정호는 그에게 호를 지어 줄 스승도 친구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가정 형편이 빈한했고 신분도 미천했다.


그러므로 그가 당호를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동지지>에 그가 인용한 65종의 역사책들은 대부분 최한기나 최성환에게 빌린 것이지, 그가 소장한 역사책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규경도 최한기가 많은 장서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는 책값이 무척 비쌌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좀처럼 책을 소장할 수 없었다.


<지구전후도>에 중간자(重刊者)로 표기된 태연재(泰然齋)는 김정호의 당호가 아니라 최한기의 당호일 것이다. 이규경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을 보면 <지구전후도>를 출판한 사람은 최한기이므로 태연재는 최한기의 당호다. 김정호는 <지구전후도>를 판각해 준 각수(刻手)였지 출판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태연재는 김정호의 당호가 아니라 최한기의 당호다.


김정호의 전국답사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하여 백두산을 일곱 차례나 등정했다는 사실을 믿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과거에는 김정호의 위대성을 드높이기 위해 무비판적으로 이를 수용했다. 오늘날에도 백두산을 혼자 등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또 백두산을 등정했다고 하더라도 지도 제작에는 큰 도움이 못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백두산을 등정했다면 <대동지지>에 수록되어 있는 함경도 무산부 백두산조 기사를 그렇게 소략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두산 7번 등정설은 과장된 듯
김정호보다 앞서 우리나라 지도 발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정상기의 경우를 보더라도, 백리척을 이용해 <동국대지도>와 <팔도분도>라는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지만 그도 전국을 답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집안에서 전해 오는 가장(家藏) 지도와 다른 사람들이 소장한 지도들을 참고해 당시로는 가장 정밀한 <동국대지도>를 만들었다. 그는 <농포문답(農圃問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발자취가 미친 곳은 수백 리에 불과하고, 듣고 본 것도 또한 한 고을 밖을 나가지 못했는데, 무엇으로써 온 나라의 고질적인 폐단을 갖추어 알겠는가? 그러나 가까운 것으로써 미루어 보면, 먼 데 것도 알 수 있다.’


김정호가 정밀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두루 답사하고 측량했다는 사실을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 사실에 대해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사료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자.


가) 여지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유재건의 <이향견문록>)


나) 김정호는 어려서부터 지도와 지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오랜 세월 동안 찾고 살펴 여러 도법에 상세히 알아 매번 조용한 시간에 간편한 비람식을 확실히 얻어…… (최한기의 <청구도 제문>)


다)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나 옛날 집에 좀먹다 남은 지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하나의 완벽한 지도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나는 이 작업을 김백원(金百源)에게 위촉하여 완성하였다. (신헌의  <금당초고>에 수록된 「대동방여도」 서문)


가)는 유재건이, 나)는 최한기가, 다)는 신헌이 쓴 기록들이다. 이 세 사람은 김정호와는 같은 시기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김정호가 전국을 두루 답사했다고 지적한 사람은 없다. 세 사람 모두 오로지 기존의 지도들을 두루 모아 좋은 점을 따서 집대성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김정호는 유재건이 지적한 것처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자료를 수집’했거나, 최한기가 말한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자료를 찾고 수집 열람’했으며, 신헌이 말한 대로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거나’, ‘여러 지도들을 상호 비교’해, <청구도>나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심나는 곳은 직접 답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방동인의 지적처럼 단빌은 프랑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지만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호의 옥사설 김정호 옥사설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 옥사설을 강력히 부인한 이병도는 그 근거로 여러 가지를 들었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지리지 어느 것 하나 몰수당하거나 압수당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도 옥사설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추국안> 등을 검토해 보았지만 그러한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판각했기 때문에 옥사당했다는 옥사설이 허위라는 근거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가 만든 지도인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수선전도> 등이 전부 남아 있고, 그가 편찬한 친필본 지리지인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가 하나도 손상당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국가 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동여지도>의 판목을 압수해 소각했다고 했는데 현재에도 <대동여지도> 판목 1매가 숭실대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또 1931년의 경성대 <고도서전관목록>에 의하면 판목 2매가 당시 전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출품을 꺼리는 일본인이 수십 매를 비장하고 있다고 했다. 김양선도 <대동여지도> 판목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최성환 후손들의 증언에도 <대동여지도> 판목들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또 광복과 함께 일제로부터 박물관 소장품을 인계받은 국립중앙박물관 인수목록에 <대동여지도> 판목 1조(組)를 인수받은 기록이 있다. 이 판목은 6·25 때 망실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판목 1조는 1매가 아닌 여러 매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사해 보니 국립박물관 수장고에서 15매의 대동여지도 판목이 발견되었다.(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대동여지도 판목은 양면에 판각했기 때문에 60여 매만 있으면 대동여지도를 판각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유추해 볼 때 <대동여지도> 판목은 압수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유재건이 <이향견문록>에 죄인을 수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유재건은 김정호가 몰(沒)했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김정호가 옥사했다면 물고(物故)당했다고 표기했을 것이다.


넷째, 김정호가 옥사를 치렀다면 김정호와 친하게 지냈던 최한기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성환·신헌 등도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이라도 받았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기록이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들을 근거로 한다면 김정호는 옥사하지 않았으며 그의 옥사설은 일제가 그들의 식민통치를 위해 조작하고 날조한 사실인 것이다.


혹시 그가 옥사했다면 병인사옥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천주당을 처음 지은 것은 약현천주당이다. 왜 이곳에 천주당이 제일 먼저 지어졌을까? 그것은 약현 주변에는 천주교 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약현 주변은 조선시대의 달동네로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김정호와 같이 의식 있는 지식인들은 계급타파를 외치는 천주교에 쉽게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1882년경에는 청파동 지역에 132명, 모화관(독립문 부근) 지역에 187명, 아오개(아현 부근)지역에 380명, 서대문 밖에 79명의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공소와 교우촌에 함께 모여 교리공부를 했다.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의 성인이 서소문 밖 순교 성지에서 순교했으며, 약현성당의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에는 13위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처럼 약현 일대는 천주교와 오랜 연관을 지닌 지역으로 곳곳에 신자마을이 산재했다. 김정호도 8,000명의 천주교 신자가 학살된 병인사옥 때 같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19세기의 수도 한양의 모습

김정호의 신분과 사상 김정호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전기는 전혀 없다. 따라서 다음에서 제시할 몇 가지 사실을 통해서 그의 신분을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첫째, <이향견문록>에 수록된 인물들의 신분을 통해서 김정호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유재건은 <이향견문록의례(里鄕見聞錄義例)>에서 마을에서 그 아름다운 행적을 기릴 수 있는 사람들 중에 기록이 인멸해 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한탄하여 <이향견문록>을 편찬한다고 했다. 이처럼 이 책은 전기가 전해지지 않는 하층계급 출신으로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모았다. 그러므로 <이향견문록>의 성격상 여기에 수록된 김정호도 하층계급 출신이었던 것이다.


둘째,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문을 통해서도 김정호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다. 서문 중에 신헌은 김정호를 ‘김군백원(金君百源)’이라고 했다. 신헌은 순조 11년(1811)에, 김정호는 순조 3, 4년경에 태어났기 때문에 연령적으로는 김정호가 연상이다. 그런데도 이 글에서는 김정호를 김군(金君)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김정호의 신분은 신헌에 훨씬 못 미쳤던 것이다. 연하자가 연상자에게 김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신헌이 신분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같은 양반 출신이면 김공(金公)이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명을 적지 않고 성과 자(字)만을 적고 있으며, 자(字)도 부정확하게 표기하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김정호는 신헌과는 다른 신분계층으로서 양반은 아니었다.


셋째, 김정호의 족보가 없다는 점이다. 청도 김씨 대동보에 의하면 김정호는 봉산파로 분류되어 있는데 6·25전쟁으로 인해 봉산파가 실계(失系)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6·25전쟁과 관계없이 구보(舊譜)에 등재되어 있어야 하는데 김정호는 구보에도 실려 있지 않다. 이는 김정호가 족보도 갖지 못한 한미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많은 지도를 제작한 점으로 미루어 상당한 지식을 지닌 계층이었던 듯하다. 아마 그는 잔반(殘班) 계층이거나 중인 계층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김정호는 잔반이거나 중인계층 가능성
그럼, 김정호는 어떤 사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김정호는 3대지지를 편찬했지만 자기의 생애나 사상을 나타내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지도유설> 등은 김정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나름대로 인용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동여도지>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자서문(自序文)이 있어 김정호의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대개 여지학에는 지도와 지지가 있는 것은 오래 되었다. 지도는 직방씨가 있고 지지는 한서가 있다.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 역대의 제작(制作)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도적(圖籍)이 없는데 삼국사기나 고려사부터 지지가 실리게 된다. 신라 통합 이전에는 군현이 설치된 경우 이름은 있으나 가리키는 곳이 없으며, 강역의 진퇴도 역시 기록은 있으나 준거할 만한 것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역사가라 하더라도 확실하게 가려 낼 수 없다. 다만 중국이나 우리나라 여러 역사책에 실려 있는 사실을 근거로 혹은 옳다고 하나 잘못됨이 없지 않아 후에 논변자들이 갖다 맞추나 확실히 질정할 수 없다.’


▲ 김정호가 사용한 동여도 지도표

이처럼 <동여도지> 서문은 김정호가 지지나 지도를 제작하면서 <지도유설> 등에서처럼 다른 사람의 견해를 인용한 것과 달리, 지지나 지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한 유일한 사료다. 이 자서문에 나타난 김정호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는 도(圖)와 지(志)를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역사가 있으면 반드시 지리지(地理志)가 있어야만 하고, 그래야만 주현의 설치와 나누어짐 그리고 합쳐짐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지리지가 있으면 반드시 지도가 있어야 높은 산과 큰 바다에 가로막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도 지도의 분율(分率)을 이용해 원근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고, 또 준망(準望)을 통해 피차의 실체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으며, 경위(經緯)와 도리(道里)를 잘 살펴 진상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김정호는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도(圖)와 지(志)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근본이라고 하여 도와 지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젊은 날부터 죽는 그 날까지 지도를 제작하고 지리지를 편찬했던 것이다.


둘째, 지도와 지리지는 이렇게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군조선 이래 지도가 없고 지리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의 군현 설치와 강역의 변동을 알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단군 이래 고려시대까지의 국도·강역·풍속·관제 및 제국과의 전쟁 상황을 별도로 편찬해 <동여도지>의 첫머리에 둔다고 했다.


셋째, 조선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만들어져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자신이 살던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동국여지승람>이 만들어진 지 30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주현 진보(鎭堡)의 혁치(革置)나 호구·전부(田賦)의 증감 등이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동여도지>를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제가(諸家)의 지도를 고열해 경위선식으로 지도를 작성하고 전해 오는 사서들을 모두 모아 <동국여지승람>의 예에 따라 문목을 더하고 빼서 42문 85편의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42문은 각 주현의 연혁·방면 등을 42개 항목으로 나누어 편찬했음을 말한다.


넷째, 김정호가 도와 지를 제작한 것은 치국경제에 유용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는 <동여도지>에서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사원 등 42개 편목을 상술하거나 표기해 도와 지가 서로 체용(體用)하여 나라의 다스리는 도(道)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소원을 표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평생에 걸쳐서 지리지를 편찬하고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일신상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로매진한 그의 뜨거운 마음씨를 알 수 있다.


다섯째, <동여도지>는 그가 동관 시절부터 뜻을 두고 편찬하기 시작해 철종 2년(1851)에 〈여도비지>로 1차 완성했고 철종 12년(1861)에는 <대동여지도>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었으며 그 후 <대동지지>로 종합했던 것이다.

▲ 대동여지도의 지도표

최한기는 계급·신분 초월 친구로 교류


김정호의 후원자들 최한기는 순조 3년(1803)에 태어나서 고종16년(1877)에 죽었다. 본관은 삭령(朔寧)이고, 자는 지로(芝老)이며, 호는 혜강(惠岡)·패동(浿東)이고, 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태연재(泰然齋) 등의 당호도 있다. 여러 대를 개성에서 살아 온 점으로 미루어 최한기의 출생지도 개성인 것 같다. 최한기는 어려서 매우 총명했다고 하며 어릴 때의 이름은 성득이었다.


최한기의 가문은 고조부 최문징(崔文徵)대에 이르러 가세가 나아졌다. 최문징은 효행과 학행으로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그는 슬하에 2남4녀를 두었는데 장자 최지숭(崔之嵩, 1710~1765)이 최한기의 증조부이고, 그가 무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최한기 가문은 양반의 반열에 속하게 되었다.


혜강 최한기(崔漢綺)는 김정호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으며 평생의 동지였다. 최한기는 양반 출신이고 김정호는 평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계급과 신분을 초월해 친구로서 교류했다. 최한기는 이규경·최성환 등과 알고 지냈는데, 이들을 김정호에게 소개시켜 준 중개인 역할도 한 듯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최한기의 방대한 저서들이 대부분 상실되었기 때문에 최한기가 김정호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기록은 없고 다만 〈추측록(推測錄)> 제6권 지지학(地志學) 항목을 통해 최한기의 지리지와 지도에 대한 견해와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 서문에 의해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뿐이다.


최한기는 ‘지리지는 풍토와 생산물 및 고금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지도라는 것은 한 나라의 경계와 크고 작은 면적을 본 따서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도와 지리지는 정치·경제·군사 면에 절대 필요하고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거나 심지어는 서민이 명승지를 단장하고 농사를 짓거나 물산을 교역하여 유무를 상통하는 것도 지도와 지리지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세상의 이른바 경륜과 사업은 토지를 떠나서 손 쓸 곳이 없고 지도와 지리지를 버리고서는 지리를 알 수 없으며 지리지를 읽어 익숙하게 궁구하면 이해의 근원을 증험할 수 있고, 지도를 상고해 지시하면 심신이 멀리서도 밝게 통찰할 수 있으며 일을 착수할 때의 완급이나 때에 맞는 취사도 모두 지도와 지리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각국의 총명하고 뜻있는 사람이 각각 그 나라의 지도와 지리지를 밝히되 허망한 것은 제거하고 실적만을 보존했다가 후일에 종합해 대성하기를 기다리면 어찌 아름다운 혜택을 후대에 베푸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와 같이 지도와 지리지를 중시하는 최한기는 자신이 <지구전요(地球典要)>라는 세계지리서를 편찬했으며 중국 청(淸)나라 장정빙이 제작한 <만국경위지구도>를 김정호의 도움으로 순조 34년(1834)에 판각 출판하기도 했다. 이규경의 기록에 의하면 최한기는 상당한 서적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중국을 통해 수입한 서양서적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한기는 안목과 시야가 상당히 넓었다.


그는 평생 김정호의 후원자였을 것이다. 김정호가 순조 34년(1834)에 끝마친 <청구도>에  그는 기꺼이 서문을 써주었다.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뚜렷한 봉건사회에서 평민 출신인 김정호에게 친우(親友)라는 표현을 쓰면서 서문을 써주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 대동방여전도 표지

최한기는 <청구도 제언(題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여지도를 통하여 초야의 선비들이 습득하여서는 한 지방을 헤아리고 조정의 관리들이 상고하여 사방을 경영하는데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풍토의 다르고 같음이 환하게 눈앞에 드러나게 할 것이니 어찌 단처이 교착하고 산천이 은영하여 황홀하게 잠시 마음을 즐겁게 함을 취하리요. 친우 김정호는 소년시절부터 깊이 지도와 지리지에 뜻을 두고 오랫동안 자료를 찾아서 지도 만드는 모든 방법의 장단점을 자세히 살피며 매양 한가한 때에 연구 토론하여 간편한 비랍식(比覽式)을 구해 얻어 줄을 그어 그렸으나 (중략) 차례로 따라 펴보면 완연한 한 폭의 전도요, 접어서 책을 만들매 문득 팔도의 진짜 모습이니 이는 실로 배수(裵秀)의 6체가 후대에 있어 더욱 분명하고 양천(楊泉)의 십형(十形)이 어찌 전세(前世)에서만 홀로 아름다우랴.’


여기서 최한기는 김정호를 친우라고 불렀으며 김정호가 전국을 두루 섭렵하고 실측에 의하여 청구도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여러 지도를 참고해 간편한 비람식을 찾아내어 배수의 6체에 의해 <청구도>를 그렸음을 밝히고 있다.


최한기는 이규경과도 교류했으며 이규경과 최성환, 이규경과 김정호, 최성환과 김정호 등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했다고 추정된다.


신헌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신헌은 순조10년(1810)에 태어나서 고종21년(1884)에 죽었다. 신헌은 대원군 집정시기에 병조판서와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치가이며 군인이었다. 그는 순조 10년(1810)에 태어났으므로 최한기나 김정호보다는 나이가 적었으나 최성환보다는 2년 먼저 태어났다. 그는 순조 28년(1828) 무과에 급제해 여러 무관직을 역임한 후 헌종 15년(1849)에 금위대장이 되었다. 그 후 철종 8년(1857)에는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그의 문집 『금당초고(琴堂草稿)』 속에 수록된 「대동방여도(大東方輿圖)」 서문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나 고가(古家)에 좀이 먹다 남은 지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하나의 완벽한 지도를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나는 이 작업을 김군(金君) 백원(百源)에게 위촉하여 완성하였다.’


신헌은 무관이기 때문에 정확한 지도 제작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관심과 지도 제작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는 김정호와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에도 규장각에 상당량 남아 있는 비변사의 지도들, 이 지도들은 방안도법에 의한 경위선식 지도로서 당시에는 대단히 정확성을 기한 지도들이다.


이 지도들을 김정호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조처해 주고 또 지도 제작을 적극 후원해 준 인물이 바로 신헌이다. 김정호의 지도가 정확성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국가의 기밀지도까지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 글에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김정호가 8도를 두루 섭렵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지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해 대조해 가면서 완벽한 지도인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최성환(崔煥)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최성환의 본관은 충주이고, 자는 성옥(星玉)이며 호는 어시재(於是齋)이다. 그는 순조 13년(1813)에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을 지낸 최광식(崔匡植)과 강릉 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 고종 28년(1891)에 79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고향은 양주였으나 대부분의 생활을 서울에서 보냈으며, 서울 중부  허병문계(지금의 조흥은행 본점 부근)에서 살았다. 이곳은 주지하다시피 중인들이 주로 사는 곳이었고 개화의 선구자였던 유대치 등이 살았던 곳이다. 그가 벼슬을 그만 둔 뒤에는 한동안 고향인 양주로 낙향했으나, 말년에는 현재의 충북 청원군 강내면 다락리로 이주해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다락리에는 그의 무덤이 남아 있으며, 그의 직계후손들이 살고 있다.


최성환의 신분은 중인이다. 그것은 그의 형과 동생을 위시해 가까운 집안에 많은 잡과 급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최성환의 조부인 최윤상의 자손 중에는 잡과급제자가 15명이나 된다. 이러한 중인의 전통은 최성환의 7대조인 최예남대에 확립된 것 같다. 그 후에는 잡과 합격자보다 무과 합격자가 더 많았다. 6대조인 최준걸과 5대조인 최무백이 모두 무과 급제자이다.


최성환은 중인이었고 무관 출신인데 많은 책을 편집 출판했다. 그는 <태상감응편도설(太上感應篇圖說)> 5권과 <각세신편팔감상목(覺世新編八鑑常目)>, <성령집(性靈集)>, <사소절(士小節)>, <효경대의(孝經大義)> 등을 편집 출판했으며, <고문비략(顧問備略)>을 저술했다.


▲ 조선시대 지도에 나타난 한반도의 모습

지도로 천하 형세 살피고 지리지로 제도·문물 헤아려
최성환과 김정호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기록은 별로 없다. 최성환과 김정호의 만남은 최한기가 이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공동으로 편찬한 <여도비지(輿圖備志)>를 통해 살펴볼 때 두 사람은 상당한 교분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도비지>를 살펴보면 편찬자가 ‘예성 최성환 성옥보 휘집(蘂城 崔煥 星玉甫 彙輯), 오산 김정호 백원보 도편(鰲山 金正浩 伯元甫 圖編)’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는 최성환이 충주 최씨이고 김정호가 청도 김씨라고 밝혀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아마도 김정호가 편찬했던 <동여도지>를 근거로 최성환이 편집하고 김정호가 지도를 첨부해서 편찬한 듯하다.


<여도비지>는 20책으로 1책이 1권씩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동여도지>에는 평안도편이 빠져 있는데 비해 <여도비지>에는 모두 갖추어져 있다. <여도비지>의 편찬은 최성환의 물심양면에 걸친 후원이 있었고, 김정호가 <청구도>를 완성한 후 계속 보완해 온 <동여도지>의 보완 부분을 정서(整書)한 지리지일 것이다.


최성환은 김정호와 함께 <여도비지>라는 지리지를 같이 편찬해 출간했다. 책을 많이 편찬하고 출간한 경험이 많은 최성환은 김정호에게 지리지 편찬의 방법과 지도 제작에 많은 조언을 해주고 협력했을 것이다.


김정호는 황해도 토산에서 출생해 1804~1866년까지 활동했으며 그는 당호(堂號)도 갖지 못한 한미한 평민 출신이었지만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편찬하다 죽은 조선 후기의 위대한 지리학자였다. 물론 그는 정확한 지도를 제작했기 때문에 옥사(獄死)하지 않았으며 백두산을 등정했다거나 전국을 실지로 답사해 실제로 측량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최한기·최성환·신헌 등의 후원자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는 여러 지도, 특히 비변사의 지도 등을 충분히 수집하고 면밀히 비교 검토해 우리의 고지도를 집대성한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위대한 지리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