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길 위에서] 강원도 인제 자작나무 숲, 순백 裸身으로 비탈에 서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입력 : 2011.11.17 23:03
나무 중에서 가장 수줍고 귀부인다운 나무
산등성이가 흰 물감으로 그어댄 펜화 같아 자작나무 숲에서 고향 떠올린
시인 백석처럼 사위가 고요한 숲속에서 純白 알몸의 소리없는 합창을 듣는다
늦가을 숲은 황량하다.
잎 다 떨어뜨린 나무들은 우중충한 잿빛이다.
그 휑한 비탈을 정령(精靈)처럼 밝히는 나무가 있다.
가을 다 보내고 이맘때가 돼야 비로소 하얗게 빛나는 나무가 있다.
'나목(裸木)'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나무.
겨울로 갈수록 수피(樹皮)가 하얗다 못해 은빛을 발하는 나무.
누군가 "나무 중에 가장 수줍고 귀부인다운"이라고 노래했던 나무.
추위 속에서 더욱 맑아지는 인고(忍苦)와 침묵의 나무, 자작나무다.
며칠 전
44번 국도에서 양구 가는 46번 국도로 잠깐 벗어나 '수산리' 표지판 보고 한참을 들어가는 막다른 산중(山中)이다.
10월 하순 다녀온 지 보름 만에 다시 이 산골짝에 든 건 순전히 자작나무 숲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북국(北國)에서 온 겨울나무들이 깊어가는 계절과 함께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가는지 보고 싶었다.
높이 800m 되는 매봉의 어깨쯤을 임도(林道)가 꼬불꼬불 휘감고 간다.
그 길 따라 10㎞ 한 바퀴를 천천히 차로 돌았다.
눈 닿는 곳마다 자작나무다.
보름 전 매달고 있던 노랑 잎들이 주변 단풍과 어우러져 알록달록 몸뻬바지 같던 풍경은 그새 무채색이 됐다.
잎을 모두 벗은 자작나무들은 잘 발라낸 생선 뼈처럼 새하얀 줄기를 드러냈다.
산등성이가 온통 흰 물감으로 그어댄 펜화(畵) 같다.
아니 자작나무들은 날카로운 펜 그 자체로 무수히 꽂혀 있다.
자작나무는 한반도에선 개마고원쯤에나 자라는 추운 나라 수종(樹種)이다.
언젠가 백두산 가는 길, 눈밭에서조차 환하게 빛나던 그 숲도 자작나무였다.
북방 사람들은 자작나무로 집을 짓고 불을 땠다.
죽은 이를 자작나무 껍질로 감싸 떠나 보냈다.
자작나무는 겉은 희지만 속은 기름을 잔뜩 머금어 검다.
기름기 때문에 '자작자작' 소리 내며 잘 탄다고 해서 자작나무다.
한자 이름은 '흴 백(白)' 자를 써서 백화(白樺), 백단(白�b)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 '백화').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함경도 함흥에서 교편을 잡았던 스물일곱 살 시인 백석은 그곳 北關 땅 어느 산속 여인숙에 묵었다가 자작나무 숲을 봤다.
그러면서 산 너머 저 먼 고향, 평북 정주를 그렸다.
북구(北歐) 사람들이 외국에서 자작나무를 보면 고향을 생각하듯.
그보다 훨씬 남쪽 땅인 인제 매봉 600ha에
자작나무 90만 그루가 서 있는 건 한 제지회사가 1986년 펄프용으로 심은 덕분이다.
그 엄청난 규모는 임도가 가장 높은 곳을 지나는 길가 자그마한 전망대에 서 보면 안다.
눈앞에 웅대한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다. 쏟
아질 듯 맞은편 산 사면을 가득 메운 하얀 나무들이 한반도 모양을 이루고 있다.
추운 날 알몸으로 선 수산리 자작나무 숲이 처연한 독백이라면,
인제읍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따스한 위안이다.
수산리 숲이 멀리서 경외심으로 바라보는 사진가들의 숲이라면,
원대리 숲은 안에 들어가 거닐며 냄새 맡고 소리 듣고 어루만지는 오감(五感)의 숲이다.
설악산 가는 44번 국도에서 인제 종합장묘센터 쪽으로 벗어나 10㎞쯤 가면 '어서오세요 원대리'라는 표지석을 만난다.
거기서 100m쯤 더 간 오른쪽에 인제 국유림관리소가 만든 '산림 레포츠의 숲'이 있다.
임도를 100m쯤 들어선 갈림길에서 오른쪽 '원정도로'로 길을 잡는다.
비포장 길을 3㎞쯤 올라가 "길을 잘못 들었나" 싶을 즈음 그제야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라고 쓰인 장승이 서 있다.
그 아래 비탈 6㏊에 자작나무 숲이 거짓말처럼 펼쳐진다.
1993년 심은 3만6000그루 국유림이다.
10m도 넘게 키가 훤칠한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 속으로 오솔길이 나 있다.
카펫처럼 푹신하게 깔린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주말인데도 숲은 인적이 드물다. 눈
이 시리도록 하얀 줄기들이 얇은 종잇장처럼 허물을 벗고 있다.
사위가 고요한 정적 속에서 자작나무들의 소리 없는 합창을 듣는다.
그 신령스러운 기운을 한껏 들이마신다.
겨울로 갈수록 숲은 더욱 스산하고 어두워질 것이다.
그 속에 자작나무들만이 순백 알몸으로 서서 새봄 새잎 나올 때까지 잠든 겨울 생명들을 지킬 것이다.
한겨울 자작나무 숲을 보고 싶다.
눈 그친 뒤 시퍼런 하늘을 이고 하얀 눈을 밟으며 자작나무들의 안부를 묻고 싶다.
그 길을 차가 아니라 발로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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