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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4]양주누리길 1코스ㆍ 2코스ㆍ 3코스 이어걷기(교현리마을회관에서 장흥면사무소까지) - 4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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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14일(토)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양주누리길 1코스ㆍ 2코스ㆍ 3코스 이어걷기(교현리마을회관에서 장흥면사무소까지)를 다녀오다.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양주누리길 1코스ㆍ 2코스ㆍ 3코스 이어걷기(교현리마을회관에서 장흥면사무소까지)' 이야기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양주누리길 1코스ㆍ 2코스ㆍ 3코스 이어걷기(교현리마을회관에서 장흥면사무소까지)' 코스

 

교현리마을회관→교현교→올림픽부대앞→송추IC→장포교(1)→장흥작은도서관→광명보육원→도림농원→신흥레져타운 대형주차장/일영교
→일영파워오토캠핑장→징검다리→모자농원→한국보육원→온능교→장포교(2)→일영캠핑장→한씨네→무두리캠핑장→둥지→수회교→초원의집

→우리들자연학교→이곡교→장흥숲길입구→삼상교→싱싱바이클빌리지→일영유원지입구삼거리→정자교→천생연분마을→노고산주말관광농원

→노고산등산로입구/눔바위→징검다리→장자원가든→곡릉교→공릉천 철교→잠수교→남경수목원→한옥촌 신선마을→공릉천 철교→공릉천1교

→굴다리→매남2교→매남3교→매남교→삼하리마을회관→전원일기마을→금바위저수지→월남이상재선생신도비→삼각연못→월남이상재선생묘

→능선 쉼터→안부4거리/추사필적암각문 갈림길→노고산독재동추사필적암각문→가재골 지붕바위→노고산 계곡집→곡릉교 도강→장자원가든

→징검다리→노고산등산로입구/눔바위→천생연분마을회관→임자방→공릉천 자전거도로→삼상교→싱싱바이클빌리지→징검다리→일영수양관

→무명2교→농산물 다목적곳간→한양조씨묘→영도건설→월령교→응달새마을교→석현천15간수문교→오림피아캠프촌→장현교→장흥면사무소

 

 
▲ 위에 있는 '양주누리길 코스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오늘은 양주누리길 1코스ㆍ 2코스ㆍ 3코스 이어걷기(교현리마을회관에서 장흥면사무소까지)를 나선다.
 
지난 해 가을부터 양주시에서 개발한 숲길과 산길을 찾아 걸었던 적이 있는데...
 
며칠 전에는 '양주누리길'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어 숙제도보를 하고자 '양주누리길' 코스를 살펴보니...
 위의 '양주누리길 코스도'에서 보다시피 한 번에 이어걷기를 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해서 '양주누리길을 한 번에 이어걷기'는 교통편 등을 고려하다보니...  
양주누리길 1코스의 종점인 교현리마을회관에서부터 역방향으로 진행하여 공릉천1교까지만 걷게 되고,
(공릉천1교에서 1코스의 시점인 삼하리낚시터까지는 생략하고...2코스 시점이 공릉천1교이기에)
 
양주누리길 2코스는 시점인 '공릉천1교'에서 삼하리마을회관과 금바위저수지를 거쳐 '월남 이상재선생묘'에서 끝나기에...
양주누리길 3코스로 이어걷기를 하기 위해서는 월남이상재선생묘역에서 '노고산독재동추사필적암각문'을 찾아보는 코스를 추가하고...
 
추석필적암각문에서 가재골 계곡을 따라 곡릉교까지 내려선 후 곡릉교에서 삼상교까지는 양주누리길 1코스 구간을 중복 걷기를 하고...
 
양주누리길 3코스 시점인 삼상교 부근의 '싱싱바이클빌리지'에서 석현천을 따라 걸어 3코스 종점인 장흥면사무소에서 여정을 마쳤다.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양주누리길 1코스ㆍ 2코스ㆍ 3코스 이어걷기(교현리마을회관에서 장흥면사무소까지)를 다녀오다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양주누리길 1코스ㆍ 2코스ㆍ 3코스 이어걷기(교현리마을회관에서 장흥면사무소까지) - 4부를 시작하며...

 

 

14시 30분 - 삼하리마을회관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양주누리길 종합안내'와 이정목이 보이네...

 

 

전원일기 마을은 올해 11월 조성 완료될 예정으로

박물관, 테마산책로, 피크닉장, 지역농산물판매장, 전원일기 연기자 조형물 등이 들어서

기존 마을이 신(新)관광지로 변모할 예정이라고...

 

14시 32분 - 양주누리길 종합안내도

 

'양주 누리길 코스 종합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14시 35분 - 저 건물이 혹시...전원일기마을의 지역농산물 판매장, 전원일기 박물관 및 체험관이 들어설 거라고 하는데...

 

 

14시 36분 - 갈림길

 

 

금바위저수지 방향으로...

 

 

 

분홍달맞이꽃

 

 

황금달맞이꽃

 

14시 40분 - 갈림길

 

금바위저수지 방향으로...

 

 

 

14시 43분 - 4거리에서 이정목이 없지만 당황하지 않고 금바위저수지를 찾아가는 길이니까 물길을 따라 직진하면 끝!...

 

14시 43분 -

 

 

14시 46분 - 추사필적암각문 갈림길...금바위저수지와 월남이상재선생묘역을 참배하고는 되돌아 내려오려면...다른 코스를 찾아봐야지...

 

 

14시 47분 - 금바위저수지 둑...

 

 

금바위저수지[金바위貯水池]

[정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에 있는 저수지.


[건립 경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동쪽 계곡의 입구를 제방으로 막아 만든 저수지이다.

노고산[496m] 서남쪽 기슭 계곡에서 발원하여 금바위저수지로 유입된 물은 삼하리 일대를 관개한 후 공릉천으로 흘러들어 간다.


[건립 경위]
금바위저수지는 양주 지역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86년에 준공되었다.


[구성]
인가 면적은 21㏊이고 수혜 면적은 14㏊이다. 가뭄 빈도는 5년이다.


[변천]
금바위저수지 축조 전부터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의 취락들은

소하천 연안에 입지해 있었으며 금바위저수지 앞에는 삼하리 중심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수지 축조 후에 취락의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특히 1990년대 이후 크게 신장한 화훼 농원의 농업용수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2006년에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가 삼하리를 관통하면서 마을과 금바위저수지의 경관도 변모하였다.

 

출처 : 향토문화대전

 

 

14시 48분 - 쉼터에서 잠시 휴식하고...

 

 

14시 55분 - 출발...

 

지금은 물이 저 정도...

 

 

14시 57분 -

 

14시 58분 - 월남 이상재선생 신도비

 

월남이상재선생 신도비

 

루드베키아

 

 

 

 

노고산등산로 안내도..추사필적암각문을 찾아가는 길을 연구해 본다.

 

'양주 누리길 코스 종합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15시 00분 - 돌탑 뒤에는...

 

15시 00분 - 노고산등산로가 있고...

 

15시 01분 - 만덕사/금바위굿당

 

15시 03분 - 월남 이상재선생 신도비 좌측 길로...

 

15시 04분 - 저 위에 보이는 것이 월남 이상재선생묘인 듯...

 

누리는 자....부러우면 지는 건데...

 

월남 이상재선생이 최초의 한국인 YMCA 총무를 역임하였기에...YMCA 상징인 심볼(약장)을 상징하는 역삼각형 연못을 조성하였다고...

 

수련꽃

 

연못 우측으로...

 

15시 08분 - 월남 이상재선생 묘

 

이상재[李商在] 
 한말의 정치가·사회운동가.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복역했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을 준비했다.

소년연합척후대 초대 총재, 조선일보사 사장 등을 지냈다. 
 
출생-사망 1850.10.26 ~ 1927.3.29
본관 한산
호 월남
본명 계호
활동분야 사회운동
출생지 충남 서천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본관 한산(韓山). 호 월남(月南). 본명 계호(季皓).

충청남도 서천(舒川)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과 사귀어 l0여 년 간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改革黨)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參贊)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韓圭卨)·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어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

 

초대 이승만대통령이 쓴 월남 이상재선생 묘비명

 

이상재[李商在]

 자 계호(季皓), 호 월남(月南)
출생 - 사망 1850년(철종 1) ~ 1927년
성격 독립운동가, 국가유공자, 사회운동가
출신지 충청남도 서천
본관 한산(韓山 :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저서(작품) 청년이여, 진평화, 독립문건설소
대표관직(경력) 친군영 문안, 주미공사 2등서기관, 의정부참찬, 조선일보사 사장, 신간회 창립회장

 

아버지는 희택(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는 전통교육을 받고, 1864년(고종 1) 강릉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거사가 되었다.

이를 개탄하고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친족 장직(長稙)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조준영(趙濬永)·김옥균(金玉均) 등

10여 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안종수(安宗洙)·고영희(高永喜)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1884년 신관제에 의해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 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부아문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이 해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였다.

때문에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승인(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한편, 1902년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을 때,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초대 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며,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하여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구금·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3년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으며,

1914년에는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YMCA를 망라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출판·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다.

또한,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특히 3·1운동의 무저항·비폭력의 혁명운동정신을 이루어 놓았다.

 

1920년부터는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으로, 1920년 미국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때,

이른바 제2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년에는 신흥우(申興雨)·이대위(李大偉)·김활란(金活蘭)·김필례(金弼禮) 등 YMCA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학문 및 저술활동유저로는 논문집 『청년이여』를 비롯하여

『청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진평화(眞平和)』·『경고동아일보집필지우자(警告東亞日報執筆智愚者)』·

『청년회문답』과 『상정부서(上政府書)』 제1·2, 『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 등 다수가 있다.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어하였다.

 

상훈과 추모사망한 해인 1927년 4월 7일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卞榮魯)가 비문을 지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월남 이상재선생 묘 앞에서 바라본 연못

 

 

15시 16분 - 월남 이상재선생 묘 뒤에서 바라본 연못

 

15시 18분 - 미지의 길로...'월남 이상재선생묘'에서 '독재동추사필적암각문'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15시 19분 - '추사필적암각문'이 있는 곳으로 제대로 갈 수 있을까...

 

등산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고..이정표도 없는 길을 따라...

 

낯선 길을 찾아가며...제대로 가는 것인지...두렵지만 이런 기분이 길을 걷게 만든다.

 

15시 25분 -

 

누군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두렵지만 매혹적이다'라고 하더라.

 

15시 27분 - 어디선가 추사필적암각문으로 가는 입구가 나오지 않을까 하며...

 

작은 돌탑을 지나고...

 

15시 30분 - 누워서 자라는 나무를 지나니...

 

15시 33분 - 능선을 향해 오르는 길 끝에는...

 

15시 35분 - 능선 쉼터에 올라서니...이제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추사필적암각문'이 나올 듯...기대가 된다.

 

15시 44분 - 휴식 후 추사필적암각문을 찾아...

 

기대반 두려움반...

 

15시 48분 -

 

 

15시 55분 - 드디어 찾았다...추사필적암각문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목 발견...

 

15시 55분 - 추사필적암각문까지는 300m

 

 

오솔길을 따라...

 

 

15시 58분 - '독재동' 각자바위를 발견...

 

 

좀더 앞으로...

 

16시 00분 - 노고산 독재동 추사필적암각문에 대한 안내문이...

 

 

노고산 독재동 추사필적암각문
[ 老姑山篤才洞秋史筆蹟岩刻文 ]
 김정희를 비롯한 조선 후기 문인들의 글씨가 새겨진 암각문. 
 
지정종목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경기기념물 제97호
지정일 1987년 02월 12일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 65 
시대 조선
종류/분류 암각문

 

1987년 2월 12일 경기도기념물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비롯한 문인들의 글씨가 새겨진 암각문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위치한다.

북한산 북쪽 자락인 노고산 중턱 곡릉천 계곡의 자연 암반 9곳에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몽재(夢齋)’라는 암각문의 좌측 하단에 추사(秋史)라는 명문이 있어 이것이 김정희의 필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세로 45㎝가 넘는 글씨에서 추사체의 웅건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러나 몽재가 누구의 호인지는 알 수 없고,

그 아래에 새겨진 ‘갑자(甲子)’ ‘경오(庚午)’ ‘무술(戊戌)’ ‘갑인(甲寅)’이라는 간지(干支)도 무슨 의미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곳에 추사의 필적이 어떻게 해서 남겨진 것인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가 1816년(순조 16)과 다음 해에 신라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하려고 북한산에 두 차례 갔을 때 이곳에 들르지 않았나 추측된다.

 

추사의 암각문으로는 이제까지 충남 예산의 조석산에 있는 것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밖에도 주위의 거대한 바위 여기저기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중 ‘미수선생장리지소(眉壽先生杖履之所)’는 허목(許穆)이 1658년(효종 9) 이곳을 다녀가면서 새긴 것으로 보인다.
또 ‘독재동(篤才洞)’ 등의 각자는 허목의 후배 이시선의 필적으로 전한다.

러나 ‘유마폭(流磨瀑)’ ‘충서근(忠恕勤)’ ‘가탁천(可濯泉)’ ‘만의와(萬懿窩)’ 등의 글씨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

 

출처 : 두산백과

이 비스듬하게 기운 바위에 새겨진 여러 글씨들이 보이네...

 

 

 

 

 

 

16시 04분 - 계곡 주변에는 또다른 암각문이 새겨진 바위들이 있다는데 다음에 찾아보도록 하고...

 

16시 04분 - 양주누리길 3코스를 이어가기 위해...산을 넘을까 하다가...

 

16시 06분 - 계곡을 따라 내려서기로...

 

16시 07분 - 가재골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족탕을 할 장소를 찾아서...

 

 

 

 

16시 11분 - 잠시 족탕을 하고...

 

16시 29분 - '가재골 지붕바위'을 지나...

 

16시 30분 - '가재골 지붕바위' 음식점 본채?

 

16시 31분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교각 아래로...

 

16시 31분 - 통과하여...

 

16시 34분 - 도착한 곳은 '노고산 계곡집'

 

16시 35분 - 공릉천 건너편은 '장자원유원지가든'

 

 

16시 38분 - '노고산 계곡집'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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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14일(토)

맥가이버의 낭만산보 - 양주누리길 1코스ㆍ 2코스ㆍ 3코스 이어걷기(교현리마을회관에서 장흥면사무소까지)를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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