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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사비길] 부소산성~정림사지~능산리고분군~서동공원 등 15.7㎞ 탐방길 조성

by 맥가이버 Macgyver 2014. 7. 27.

 

[부여 사비길]부소산성~정림사지~능산리고분군~서동공원 등 15.7㎞ 탐방길 조성

  • 글·박정원 부장대우 
  • 사진·허재성 기자 
부여 사비길
사적지에서 사적지로 걸으며 1,500년 전 백제의 숨결을 듣다
부소산성~정림사지~능산리고분군~서동공원 등 15.7㎞ 탐방길 조성
 
▲ 부여문화원 김인권 사무국장의 안내로 연꽃이 활짝 핀 궁남지 사잇길을 걷고 있다. 궁남지는 사적 제135호로 백제 무왕의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백제는 크게 3시기로 나뉜다. 첫째 B.C 18년에 한성(지금의 서울)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를 건국하며 융성한 한성백제 시기-. 이 시기는 B.C 18년에서 서기 475년 문주왕까지 500여 년에 이른다. 문주왕은 즉위 첫 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긴다. 바로 이어 웅진백제시대가 열리며, 이 시기는 475년 문주왕에서 538년 성왕까지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성왕 16년(538)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천도하는 사비백제시대가 열린다. 이 시기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나라를 빼앗긴 660년까지 이어진다.


실제로 백제가 500여 년간 한성에 수도를 두었건만 정작 사람들은 백제 하면 부여와 공주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아마 오늘날 공주와 부여에 많은 백제 유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주에는 무령왕릉과 공산성으로 대표되는 유적과 유물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부여에는 부소산성과 낙화암, 정림사지오층석탑, 그리고 능산리고분군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들이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유산을 보여주고 있다.


부여백제시대, 즉 538년에서 660년까지 120여 년간 이어진 사비백제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이 생겼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한, 부여군에서 만든 ‘부여사비길’이다. 부여시내를 한 바퀴 도는 총 연장 15.7㎞쯤 되는 역사유적탐방로다. 걸으면서 백제의 유적을 속속들이 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 1 참나무와 소나무로 우거진 부소산성 위를 걸으면서 부여문화원 김인권 사무국장이 부소산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2 부여문화원 김인권 사무국장이 인도를 내느라 잘라진 부소산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걷고 있다.

부여문화원에 30년간이나 근무하며 부여의 역사를 환히 꿰고 있는 김인권 사무국장의 안내로 1,500여 년 전 백제의 역사를 찾아갔다. 부소산성에서 출발해서 정림사지~부여박물관~금성산~능산리고분~계백장군충혼탑~서동공원(궁남지)~시인 신동엽생가를 거쳐 다시 부소산성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부소산(扶蘇山)은 해발 106m밖에 안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동쪽과 북쪽으로 두 봉우리로 나누어진 부여의 진산이다. 그 산의 정상과 능선을 흙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성이 부소산성으로 사적 제5호로 지정돼 있다. 백제 도성으로 추정되는 부소산성은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전쟁 시에는 최후 방어성으로 이용했던 사비백제시대의 대표적 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식량을 저장하던 군창지(軍倉址), 삼천궁녀가 몸을 던진 낙화암, 고란사와 고란초, 해맞이 명소 영일루(迎日樓), 사자루 등 백제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부소산성숲은 2002년 아름다운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숲’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 숲을 따라 올라갔다. 소나무와 참나무숲 사이로 난 아늑한 길의 연속이다. 남녀노소 누구든지 산책하기 안성맞춤이다. 소나무숲 사이에 고즈넉한 사당이 한 채 나온다. ‘삼충사’라고 한다. 백제 말기 의자왕 때 삼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매년 10월 백제문화제 행사 중 하나로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 부여사비길 개념도

성충은 의자왕 때 최고 관직인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히 당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 장군이 5만 대군을 이끌고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불과 5천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다.


아늑한 길은 1,500여 년을 거슬러 이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에서 패자인 이들이 어떻게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만은 아니기 때문에? 아니면 이들이 패자지만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충신이기 때문에? 하여튼 역사는 많은 화두를 던진다. 그 화두를 던지는 길을 지금 걷고 있다.
이어 참나무가 무성한 숲 사이로 다시 ‘영일루(迎日樓)’라는 누각 한 채가 나온다.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곳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이름도 영일루라고 지었다.


낙화암은 삼국유사엔 타사암으로 기록
조선시대 창고 터인 군창지를 지나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 시절 3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에 도착했다. 바로 그 아래로 백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망하면서 삼천궁녀가 떨어진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낙화암. 그 아래로 백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에 ‘백제고기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강물에 달하였다. 전하기를 의자왕이 모든 후궁들과 더불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되,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래서 죽은 바위(타사암·墮死岩)라고 세속에 전한다. 이것은 이야기가 잘못 전한 것이다. 다만 궁녀들만 죽은 것이요,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이 당나라 역사에 명문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현 고적조에 ‘(낙화암은) 부여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들이 쏟아져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가서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불렀다 한다’고 적혀 있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 옆 절벽에 송시열이 쓴 ‘낙화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하지만 낙화암 위에서는 볼 수 없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만 1,500여 년 전의 역사를 간직한 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다시 부소산성 입구로 나왔다. 2㎞ 남짓 되는 부소산성 전체를 둘러보는  데만도 2시간 이상 걸린다. 꼼꼼히 살펴보려면 한나절로도 부족할 정도다. 그러나 길은 전체를 다 연결하지는 않고 큰 길 따라 반원을 그리며 원점회귀한다.  

▲ 1 부소산성 바로 옆에 있는 사비백제시대 왕궁으로 추정되는 궁터의 연못과 그 주변의 모습. 2 사적 제301호인 정림사지에 있는 오층석탑.

부소산성 입구엔 부여에서 출토된 국보 3점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모형이 세워져 있다. 국보 9호인 정림사지오층석탑, 국내 최대의 금동제 반가상으로 평가받는 국보 제83호 금동삼산관반가사유상, 국보 제288호인 창왕명석조사리함 등이다.


부소산성에서 정림사지까지는 불과 1㎞ 남짓. 사적 제301호인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왕도를 옮긴 시대(538~660년)의 중심 사찰 터다. 그 사찰 터에 있는 오층석탑은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첫 양식으로, 현존하는 석탑 중 1,500여 년 이상 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바로 그 옆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보물 제108호인 석불좌상이 있다.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정림사지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정림사지에서 국립 부여박물관 조금 못미처 금성산으로 ‘사비길’은 연결된다. 금성산도 해발 121.2m밖에 안 되지만 백제의 삼산(三山) 가운데 하나다. <삼국유사> 남부여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중에는 삼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일산(日山)과 오산(吳山), 부산(浮山)이다. 백제국 전성기에는 이들 삼산 위에 신선이 살며 서로 날아 왕래함이 아침저녁으로 끊임이 없었다.’


백제의 삼산 중의 중앙에 있는 금성산으로 연결
삼산 중에 일산은 부여 시가지의 동편에 있으며, 지금의 금성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산은 현재의 오석산, 부산은 백강 마을 뒷산을 말한다. 이들 삼산은 금성산을 중앙에 놓고 서쪽에 부산과 동쪽에 오산이 3㎞씩의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도성 내의 중심 위치에 일산이 솟아 있고 도성을 둘러막은 나성의 동편 1㎞ 떨어진 곳에 오산이, 서편 1㎞ 떨어진 곳에 부산이 위치해 있다.


▲ 1 부여사비길은 민족시인 신동엽 선생의 생가 터도 지난다. 2 궁남지 바로 옆 논산에서 부여로 들어오는 도로 초입에 ‘백제5천결사대 충혼탑’이 세워져, 부여를 알리고 있다.

금성산으로 오른다. 가파르지만 이내 정상이다. 삼산의 중앙 금성산은 백제 전역의 각 산성에 송수신을 담당하는 통수대(統帥臺)를 세워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발생했을 때 군사 행동의 지시와 통제 및 총괄적 연락의 시작점이 되거나 종착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 통수대가 눈앞에 있다. 통수대는 말 그대로 장군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사방 조망이 가능하다. 서쪽 부산을 사이에 두고 백마강이 흐른다. 그런데 백마강이 어떤 강인가? 바로 금강이 아닌가. 4대강 중의 하나인 금강은 전북 장수의 신무내산(897m)의 뜬봉샘에서 시작해서 충북·충남을 거쳐 서해로 흐르며 400㎞ 이상 길이를 자랑한다. 이 금강이 지역에 따라 고유의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금산 제원 부근에서는 광석강, 회덕에서는 부강 또는 절강, 공주에서는 금강, 공주에서 부여 지천 입구까지는 창강, 부여에서는 백마강이라 한다.


백마강과 금성산 사이에 부여시내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건물들이 하나같이 낮고 고층 건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김인권 국장은 “부여는 유적지로서 5층 이상 고층 건물 허가가 나지 않은 아마 유일한 지역일 것”이라며 “부여 주민들도 이를 잘 따르고 있다”고 했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숲속 사이로 난 길에서 상큼한 냄새가 난다. 참나무·소나무·아카시나무들이 어우러진 오솔길 같은 등산로다. 금성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산길은 흙길로 잘 정돈돼 있어 걷기에도 편하다. 서쪽 끝지점은 국도로 연결된다.


▲ 능산리고분군 중에 유일하게 벽화가 그려져 있는 능산리 1호 고분. 천장에는 연화문(蓮花文)이, 벽면에는 비운문(飛雲文)이 그려져 있다.

사비길은 횡단보도를 건너 사적 제34호로 지정된 청마산성으로 향한다. 청마산성 끝 지점이 부여백제시대 왕들의 묘가 있는 능산리고분군으로 연결된다. 사비도성의 동쪽에 위치한 청마산성은 백제 왕도의 관문격이며, 백제성으로는 최대급에 속한다. 부여에는 20개의 백제산성이 있으며, 전부 도성의 방어용으로 구축됐다. 청마산성도 그 하나다. 


길을 이제 갓 조성한 듯 여기저기 제초한 흔적들이 눈에 띈다. 아니면 원래 있던 길에 풀들이 너무 웃자라서 잘라냈는지 숲 사이로 풀들이 흩어져 있다. 이정표와 쉼터도 구비돼 있다. 이정표 방향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청마산성 초입에서 능산리고분군까지는 2㎞가 채 안 된다. 청마산성 등산로로 걷는 길이 1.6㎞ 정도밖에 안 된다.


능산리사지에서 국보 유물 두 점 나와
능선 끝자락에서 백제시대 절터인 능산리사지가 명확히 보인다. 사적 제434호로 지정된 유적지다. 백제 위덕왕 13년(567)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능산리사지의 공방지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국보 제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와 절이 창건된 연대를 알 수 있는 국보 제288호인 창왕명사리감이 출토됐다. 창왕명사리감은 성왕의 위업을 기려 만든 것이다. 이는 이 절이 왕실에서 세운 사찰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묘들을 축원하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능산리사지 바로 옆에는 사적 제14호로 지정된 능산리고분군이 있다. ‘백제왕릉원’이라고 불린다. 사비(부여)백제시대를 지낸 왕들의 무덤이다. 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의자왕 등 여섯 왕과 의자왕의 아들 태자 융의 묘까지 모두 7기가 있다. 의자왕과 태자 융은 백제가 멸망하면서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삼국사기>엔 ‘7월에 항복하고 (중국으로) 끌려가 수일 내 죽었으며, 그 시신은 북망산에 묻혔다’고 기록돼 있다.


▲ 1 부여문화원 김인권 사무국장이 능산리고분군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2 백제의 왕도 부여 ‘부소산성’ 이라고 쓰인 비석 뒤로 부소산성이 보인다. 3 2002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숲’으로 선정된 부소산성 숲길을 걷고 있다.

1,000여 년의 세월을 타국에 묻혀 쓸쓸히 보내다 1995년 부여에서 백제 의자왕 묘 찾기사업을 벌여 중국 하남성 낙양시에서 태자 융의 묘를 찾았으나 의자왕의 묘는 끝내 찾지 못하고,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흙만 담아와 태자 융과 함께 나란히 묘를 조성했다. 의자왕의 묘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능산리고분군을 나와 이젠 백마강으로 흘러가는 왕포천 둑방길을 따라 걷는다. 하천이나 둑방이나 풀들로 무성하다. 그 둑방길만 3㎞ 가까이 된다. 주변 논들은 한창 무르익은 벼들로 녹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둑방길 끝날 즈음에 ‘백제5천결사대 충혼탑’이 나온다. 논산으로 가는 4번도로와 접속되는 길이다. 계백장군과 관련된 기록은 없는 곳이지만 부여를 나타내기 위해 계백장군과 군사들의 모습을 조각으로 새겨 탑으로 만들었다.


바로 그 옆에는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과 관련된 궁남지가 있다. 궁남지는 백제 궁성의 별궁에 딸린 연못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속에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궁남지(宮南池)를 말한다. 사적 제135호다.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인 서동과 관련된 전설이 많아 ‘서동공원’으로 불린다.


백제시대의 인공 연못으로 밝혀지기 전에는 일명 ‘마래방죽’이라고 불리며 자연 연못으로 인식되어 왔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 터가 남아 있다. 별궁 주변에는 백제시대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과 주춧돌이 산재해 있다.


현재 궁남지 안에는 1971년에 조성된 포룡정이 있고, 목조다리가 만들어져 있다. 연못 주변에는 버드나무 수십 그루가 심어져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으로서 삼국시대의 정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 정원을 조성한 백제의 노자공은 일본에 건너가 아스카시대 정원 조경기술을 전해 주었다고 해서 일본 정원의 효시가 되었다고도 한다. 궁남지 주변에는 10여 년 전부터 전국 최대 규모인 12만 평의 연꽃단지를 조성, 매년 7월 말 연꽃축제를 열며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연꽃 사이로 난 길만 돌아도 2㎞는 족히 된다. 대개 8월 초순에 연꽃이 만개한다.

 

▲ 4 부여시내는 대부분 사적지로 지정돼 있어, 5층 이상의 고층건물을 지을 수 없다. 그래서 도시 자체가 아담하게 보인다.

궁남지를 지나 다소 무미건조한 시내길로 약 2㎞ 걸으면 부소산성으로 원점회귀한다. 중간쯤에 부여가 낳은 대표적인 민족시인인 신동엽 선생의 생가를 지난다. 그 옆엔 신동엽문학관을 올 연말 완공할 예정이다. 부인 임병선 여사가 모든 자료를 기증했다고 한다.


길을 뚜벅뚜벅 걸으며 잠시 1,500여 년 전 백제시대로 돌아가 본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백제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면서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고 불과 60여년 만에 또 사비로 수도를 옮긴 백제-. 잦은 천도로 집권세력의 기반이 매우 약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사비백제시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국력이 매우 강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의외로 쉽게 멸망하고 만다. 왜 그랬을까?


‘부여사비길’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구할 수 없을지 몰라도 찬란한 문화유적은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길이 전부 사적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부소산성이 사적 5호, 정림사지가 사적 301호, 능산리사지가 사적 434호, 능산리고분군이 사적 14호, 청마산성이 사적 34호, 궁남지가 사적 135호 등 유적지 일색인 길이다. 부여의 옛 이름 사비(泗), 즉 지명에서 보여주듯 물과 강이 풍부한 그 땅에서 백제의 역사를 한번 떠올려보라.


익산에도 백제의 왕궁이 있었나?
흔히 백제 700여 년의 역사는 한성→웅진→사비시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익산에서도 왕궁의 유적이 발견돼, 익산에서는 백제의 역사가 한성→웅진→사비→익산→사비시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익산에서 발견된 왕궁리 유적은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조사와 1989년부터 현재까지 계속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 건립된 왕궁유적과 후대의 사찰 유적이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복합유적으로 확인됐다고 익산시에서는 주장한다. 실제로 왕궁리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백제 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궁의 정확한 위치와 왕궁의 규모, 왕궁의 조성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부여에서는 아직 정확한 왕궁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림짐작으로 부소산성 근처 등 몇 군데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사적 제408호인 왕궁리유적 입구 안내판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검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중략) 발굴 조사 결과 백제 무왕(재위기간 600~641년) 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은 규모가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이다. (중략)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 석탑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왕궁리 유적에는 마한의 기준 도읍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는데, 최근의 연구로 백제 궁성의 구조와 기능 등 역사 속 비밀이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다.’


익산에서는 무왕의 어릴 적 자란 곳인 서동생가 터, 즉 마룡지를 찾아 유적지로 등재했다. 뿐만 아니라 무왕릉과 왕비릉으로 추정되는 익산쌍릉을 발견, 무왕 시절 백제의 수도가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익산에서는 이 유적지를 ‘익산무왕길’로 연결시켜 전국의 도보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반면 부여문화원에서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얘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익산에서 주장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기록에서 ‘마룡지는 오금사 남쪽 백여 보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라는 부분은 서동의 어머니가 마룡지 근처에 집을 지었다는 기록이지 서동이 마룡지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이어 “부여는 성왕 16년(538)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위덕왕· 혜왕·법왕·무왕·의자왕 등 6대 123년 동안 국력을 기르고 찬란한 문화예술의 꽃을 피운 곳”이라며 “이 시기의 부여는 일국의 수도로서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요소를 구비한 백제의 심장부였으며, 당시의 성곽을 살펴보더라도 과학적인 축성이면서 왕도 경영에 얼마나 주력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고 덧붙였다.


탐방가이드
유적지 연결하는 부여시티투어 3~11월까지 운행
부여군에서는 ‘1400년 전 백제와의 소통’이란 주제로 백제역사문화를 탐방할 수 있는 부여시티투어 버스를 3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일요일 운행한다. 부소산성 관광주차장에서 매일 오전 10시 출발하며, 부여 주요 유적지를 패키지로 순환하는 2개 코스로 나뉘어 있다. 원하는 이는 오전 9시 40분까지 현장에 도착, 종합관광안내소(문의 041-830-2330)에 등록해야 한다.
토요일 출발하는 제1코스는 부소산성 주차장에서 출발, 부소산성 낙화암을 거쳐 황토돛배를 타고 백마강을 유람한 뒤 점심식사를 한다. 이어 오후엔 정림사지 5층석탑→전통국악공연 관람→ 국립부여박물관을 거쳐 다시 부소산성으로 돌아와 일정을 끝낸다. 일요일 출발하는 제2코스는 오전 일정은 제1코스와 동일하다. 하지만 점심식사 후 정림사지 5층석탑→국립부여박물관→ 백제문화단지를 거친 뒤 부소산성에 돌아오는 것으로 일정이 끝난다.  참여 문의 및 신청은 부여문화관광 홈페이지 (
http://buyeotour.net)나 종합관광안내소(041-830-2330) 또는 부여 문화관광과(041-830-2010)로 하면 된다. 이용료는 어른 5,000원, 청소년 3,000원, 7세 이하는 무료이며, 관광지별 입장료는 별도다.


교통 서울에서 자동차로 경부고속도로로 갈 경우 천안JCT에서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로 갈아 탄 뒤 서공주JCT에서 다시 공주·서천 간 고속도로로 바꾼다. 계속 가다 부여IC로 나오면 된다. 부여IC에서 부소산성 입구까지는 승용차로 10분 남짓 걸린다.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갈 땐 대전·당진 간 고속도로, 공주·서천 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부여IC로 빠져 나와 부소산성으로 가면 된다.
고속버스는 서울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여까지 40분 간격으로 부여까지 운행한다. 소요시간 2시간 10분.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소산성 입구까지는 불과 700m도 채 안 돼, 걸어서 가면 된다. 문의 서울 남부터미널 02-521-8550.


맛집(지역번호 041) 부여의 전통적인 별미는 매운탕과 장어로 알려져 있으나 금강 하구둑 건립 이후 장어나 고기들이 거의 잡히지 않아 사실상 매운탕과 장어는 명맥이 끊어진 상태다. 대신 사적 및 명승 제6호로 지정된 구드래 주변에 많은 음식점들이 있다. 주로 한정식 및 불고기정식(향우정 835-0085)과 돌솥쌈밥(구드래돌쌈밥 836-9259) 등이다.

 

출처 : 월간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