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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종주 후기☞/♧ 서대문알프스(능선길)

[20140913]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을 다녀오다 - 1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4.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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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13일(토)

맥가이버의 낭만산행 -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를 다녀오다.
 

 

 

맥가이버의 낭만산행 -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 이야기

 

 맥가이버의 낭만산행 -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 코스

 

독립문역→독립문→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진아도서관→우수조망명소→안산 정상(무악東봉수대지)→안천약수터메타세콰이어숲

→홍제천(물레방아)→서대문등기소→서대문 문화체육회관→홍연초교→백련산 들머리 팔각정→백련사→백련산 중계소→백련산 은평정

→매바위→(생태연결다리)→관음사→녹번역→JR아파트→전망데크→장군바위→헬기장→탕춘대성 암문→옥천암(보도각백불)→옥천소공원

→홍지문→탕춘대성(인왕산 성곽길)→기차바위능선→인왕산 초소→인왕산 정상→범바위→선바위(국사당)→마애불→무악공원→독립문

 

  

 

 

오늘은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을 위해 길을 나선다.
 
서대문알프스종주란!
서대문구 지역에 있는 4개의 산(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을 이어가는 산행으로 맥가이버가 임의로 명명한 것임.
혹자가 '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에 북악산을 포함한 5산 산행을 하면서 '서대문알프스종주'라 하는데...
북악산은 행정구역이 종로구이기에 '서대문알프스종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지요.
 
2006년 1월 초에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을 위한 사전답사를 마치고...
2006년 1월 22일 이후 모두 네 번의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을 하면서
백련산과 북한산을 잇기 위한 연결머리를 번번이 달리해보았는데...
지난 8월 30일(토) 도봉산 여성봉ㆍ오봉ㆍ우이암 산행의 들머리인 송추계곡입구로 가기 위해 통일로를 지나면서
 홍제동에서 녹번동으로 넘어가는 산골고개에 생태연결다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산골고개의 생태연결다리를 건너면 백련산에서 북한산으로 이어가기가 훨씬 편하기에 
조만간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을 '한 번 더!' 하기로 맘먹었다.
 
해서 오늘 다섯번째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을 나섰으나...
정작 생태연결다리는 이제 막 기초공사를 마치고 2단계 공사가 진행중인지라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는 상태였다.
 
여섯번째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은 생태연결다리가 완공되면 완공기념산행으로 해야겠다.
 
맥가이버의 낭만산행 -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을 다녀오다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을 다녀오다 - 1부를 시작하며...

 

 

 

09시 02분 - 독립문역 4번 출입구에서...

 

09시 05분 - 독립문

 

 

독립문(獨立門)

 

종 목 : 사적  제32호 
명 칭 : 독립문(獨立門) 
분 류 : 유적건조물 
면적 : 2715.8㎡
지정(등록)일 : 1963년 01월 21일
소 재 지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시 대 : 대한제국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 서대문구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 문화재청 홈에서

 

 

독립문 [獨立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안에 있는 문이다.

원래는 종로구 교북동(橋北洞)에 있던 것을 1979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복원했다.
 
지정번호 : 사적 제32호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시대 : 1896년(건양 1) 
크기 : 현재 면적 2,640㎡ 
종류 : 문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淸)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전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세웠다.

 

창건 당시의 면적 2,800㎡였으며, 총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3,825원이 소요되었다.

완공일은 1897년 11월 20일이다.

현재의 면적은 2,640㎡이다.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徐載弼)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하였다.

공역(工役)은 건축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고 노역(勞役)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다.

공사비는 주로 기부금으로 충당, 1897년에 준공하였다.

 

재료는 주로 화강암을 사용하였는데,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문 앞에는 구(舊)영은문의 주초(柱礎)였던 두 돌기둥이 있다.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 복원하고 예전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에서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영은문[迎恩門]

 

유형 : 유적
시대 : 조선
성격 : 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문.

 

내용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1407년(태종 7)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개칭하여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金安老) 등 3정승이 계(啓)하여

모화관 남쪽의 홍살문을 개축하여 청기와를 입히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액자를 걸었다.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칙사가 올 때에는 조(詔)ㆍ칙(勅)과 상사(賞賜)를 가지고 오는데,

영조문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고 영은문(迎恩門)이라 써서 걸도록 하여 이에 따라 이름을 고쳤다.

 

임진ㆍ정유 왜란 후인 1606년(선조39) 영은문을 재건한 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와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는데, 그 액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청일전쟁 후인 1896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쳐 부르고,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독립문을 세웠다.

 

영은문의 기둥을 세웠던 초석은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독립문 바로 앞쪽에 있다.

주초석은 방형의 배흘림 장초석(長礎石)인데 4방의 모를 죽여 8각같이 보이고 위에는 가구구조(架構構造)를 고정시켰던 홈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09시 09분 -

 

09시 10분 - 송재 서재필동상

 

서재필[徐載弼]
독립운동가.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파의 일원으로

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가 되었다.

미국으로 귀화하였으나, 일시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립운동에 여러 방향으로 도움을 주었고, 광복후에는 미군정청고문으로 일하다가 미국에서 영면하였다.   


출생-사망 : 1864.1.7 ~ 1951.1.5
본관 : 대구(大邱)
호 : 송재(松齋)
본명 : 서재필(徐載弼)
별칭 : 영어명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
국적 : 1890년 미국 시민권 획득
활동분야 : 정치(독립운동), 의학
출생지 : 전남 보성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77)

 

본관은 대구(大邱)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영어명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다.

아버지는 서광언(徐光彦)이며, 외가는 성주이씨로 17세기 초 이조참판 이성(李珹)이 보성에 내려와 터를 잡았다.

 

1864년(고종 1) 1월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서 출생했으며 보성은 그의 외갓댁이 있는 곳이었다.

5세 경 본가가 있는 충청남도 논산 은진면(恩津面)에서 성장하다가, 둘째 아들로서 7촌 당숙 서광하(徐光夏)의 집으로 양자 입적되었다.

그러나 서재필의 총명함이 나타나자, 안동김씨 세도가 출신인 양어머니의 주선으로 7세 경에 서울로 올라와

양어머니의 동생인 외숙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성장하며 과거를 준비하였다.

1882년 3월 19세 때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하였고,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명문가에서 성장하여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지도층 자제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였고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8개월간 현대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5월 졸업하였다.

 귀국 뒤 궁궐수비대에 배치되었고 고종을 알현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하였다.

그 결과 설립 승낙을 받았고 조련국(操練局) 사관장에 임명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에 가담하였고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며,

갑신정변 신정부조직에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나

정변의 실패로(3일천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망명객에게 일본이 냉담하게 대하자,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국내에서는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하였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으며, 아들(2세)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었다.

 

처음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 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며 현지에 적응하였다.

그 후 독지가 홀렌백(John Wells Hollenbeck)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고등학교)(Harry Hillman Academy)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1889. 6).

 

다시 워싱턴시(Washington D.C.)로 이주하여 1889년 컬럼비아대학교(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Columbian Medical College)에 입학하여 낮에는 일하고 야간부에 다녔다.

 

가족도 모두 잃고 역적으로 몰려 귀국도 어려워진 상태에서 1890년 6월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893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G.B. Armstrong)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모교에서 강사를 하다가 유색인 차별의 분위기 때문에 사직하고 병원을 개원하였다.

1898년 하반기에는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개혁이 단행되었고 갑신정변 주도자에 대한 역적 누명도 벗겨졌다.

관직에 진출한 박영효(朴泳孝)가 1895년 미국에 들러 권유하여 그해 12월에 귀국하였으며,

이듬해 1월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한 뒤에는 미국 시민으로 행동하며 이름도 미국명인 '필립 제이손'이나 한국명으로 표기한 '피재손'을 사용하였다.

 

1896년 4월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한편 배재학당에서 목요강좌를 진행하여 계몽활동도 병행하였다.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였고(1896. 7), 이를 중심으로 만민공동회도 개최되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정신을 혁파하기 위해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관으로 바꾸고,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이러한 활동에는 서재필은 외국인 신분이었으므로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러시아 일본측의 추방운동 영향으로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1898. 5).

필라델피아에서 인쇄·문구사업(Philip Jaisohn & Company)을 하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isure》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승만·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연합회'를 개최하였고, 한국통신부를 설립하여 Korea Review를 발간하였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명서를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한국통신부 활동을 종료하고 국내 신문 및 잡지에 기고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펜신베이니아 의과대학원에서 의학공부를 1년 더 한 후,

여러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였고, 1936년에는 개인 의원을 개업하였다.

 1942년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여 미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광복을 맞은 후, 1947년 미군정장관 죤 하지(John R. Hodge)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아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1948. 9) 여생을 마쳤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94년 4월 8일 미국에서

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유해와 함께 옮겨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08년 5월 6일 미국 워싱턴시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워싱턴시에서 이날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하였다.

같은 해 7월 8일에는 그가 태어난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서재필기념공원'을 열었다.

 

[출처 : 두산백과]

 

 

09시 11분 - 삼일운동기념탑

 

서대문독립공원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09시 14분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09시 15분 -

 

서울舊서대문형무소[―舊 西大門刑務所]


'서대문형무소'로 통칭되던 근대적 시설을 갖춘 한국 최초의 감옥.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324호
지정일 : 1988년 02월 27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현저동 101) 
시대 : 대한제국
종류/분류 : 감옥
크기 : 부지 198,348㎡, 연건축면적 26,446㎡

 

1988년 2월 27일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부지 19만 8348㎡. 연건축면적 2만 6446㎡.

수감 가능인원 3,200명(1987년 경기 의왕시로 이전 당시).

 

1907년 시텐노가즈마[四天王數馬]의 설계로 착공,

다음 해 문을 연 후 80년 동안 약 35만 명을 수감,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잉태하였다.

 

준공 당시는 감방 480평, 청사 80평의 규모였으나, 1916년 7, 8옥사 및 여사(女舍), 1923년 13옥사와 사형장,

1925년에 중앙사 및 10, 11, 12 옥사, 1934년에 1~6옥사 및 부속 옥사를 증축하여 확장하였다.

 

청사는 전동(典洞)에 있던 흥사단 건물을 이축(移築)한 것으로,

6·25전쟁 휴전 직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관사(官舍)로 사용하였다.

 

건축물은 군집형태로 묶여져 있고,

이 중 붉은 담벽·감시탑·출입문·구치감·감방(남사·여사·외국인사)·사형장·일반사무실(보안과·순화교육대)·

교회당·공장·창고·취사당·식당·세면장(목욕탕 등)·운동장 등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함석이고, 주위 벽은 판자 위에 아연판을 두른 목조이며,

2층 옥사는 감시하기 좋게 T자형 부채꼴로 설계하고,

감방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되어 있으며,

복도 천장을 뚫어 철망 사이로 위층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이 구치소의 뿌리는 구한말의 전옥서(典獄署)로서, 1904년 경무청감옥서(警務廳監獄署)로 바뀌고,

 1908년 현저동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7월 7일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경기 의왕시로 옥사를 이전한 이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

4·19혁명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인·기업인·세도가·군장성·재야인사·운동권 학생 등과

이 밖에 살인·강도 등의 흉악범과 대형 경제사범·간첩·잡범 등 다양한 범법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이곳에는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윤봉길 의사가 복역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강우규 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여러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남아 있다.

 

1988년 서울시는 이곳을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구한말의 독립관을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렀는데, 1995년 '독립공원 사적지 성역화' 계획을 마련,

독립관 복원 공사에 착수한데 이어 구치소의 제9~13옥사·중앙사·나병사·지하옥사 등 8천여 평과

담장 일부·망루 2곳을 원형대로 되살려 1996년 유료공원화하기로 하였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에 있다.

 

[출처 : 두산백과]

 

 

 

 

 

 

 

 

 

 

 

 

 

 

 

 

09시 21분 - 이진아도서관

 

 

09시 25분 - 수방사 담장옆 계단으로 오르는데...

 

참새들이...

 

 

 

09시 28분 - 안산자락길이 보이네...

 

09시 30분 - 늘 이용하던 계단...데크계단으로 바뀌었네...

 

 

09시 32분 -

 

안산자락길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안산 정상 봉수대 방향으로...

 

09시 34분 - 안산자락길과 교차하여...

 

09시 36분 -

 

 

09시 39분 -

 

09시 40분 - 능선으로 올라서니...

 

안산자락길 안내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09시 42분 - 봉수대 방향으로...

 

09시 43분 -

 

 

 

 

09시 47분 -

 

 

 

 

 

우수조망명소 아래에도 데크전망대가...

 

 

09시 52분 - 데크전망대에서...

 

 

 

 

 

 

 

매부리코얼굴바위

 

 

09시 57분 - 매부리코얼굴바위

 

09시 58분 - 매부리코얼굴바위의 뒷모습

 

 

 

 

 

10시 04분 - 무악東봉수대지

 

 

무악東봉수대지/무악산 東봉수대 터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봉수대지. 


지정종목 :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 서울기념물 제13호
지정일 : 1993년 09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 1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봉수대
크기 : 면적 381㎡, 봉화연조대 높이 3.2m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381㎡, 상부 연대(烟臺) 108㎡, 하부 연대 307㎡이고,

봉화연조대의 높이 3.2m로, 자연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봉수대는 높은 산봉우리에 봉화를 올릴 수 있게 설비해 놓은 곳으로,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 위급한 소식을 횃불로 중앙에 전하는 통신시설이었다.

 

전국의 봉수는 경흥·동래·강계·의주·순천의 5개 봉수대를 기점으로 하여

서울 목멱산(남산)의 제1봉에서 제5봉의 봉수대로 집결되었는데,
그 중 2군데가 안산(무악산)의 정상에 있었다.


하나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발 직봉 78, 간봉 22처를 거쳐 안산 동봉수(제3봉수로)에 전해져 남산으로 최종 보고되고,
다른 하나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발 서해안을 따라 직봉 71, 간봉 35처를 거쳐 안산 서봉수(제4봉수로)에 전해져 남산으로 전달되었다.

 

현재의 동봉수대는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남산 중앙 봉수대와 연계하여 제3봉수로의 봉화를 올리기 위해

봉수대가 멸실된 지 100년 만인 1994년 8월 30일 서대문 향토사연구회의 자문을 받아 복원하였다.

 

 西봉수대는 동봉수대로부터 100m 정도 떨어진 지점으로, 현 군부대의 통신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출처 : 두산백과]

 

안산 동봉(무악東봉수대지에서 )바라본 안산 서봉(무악西봉수대지)에는 봉수대를 대신한 철탑이 우뚝...

 

무악동봉수대

 

봉수대 안에서 하늘을 찍었더니...'좌정관천(坐井觀天)'하면 이런 모습이겠지...

 

 

 

 

'舊서대문형무소'를 당겨보니...

 

 

 

 

10시 09분 - 안천약수터 방향으로 내려서며...

 

10시 10분 - 헬기장에서 우측으로...

 

 

10시 14분 - 전망바위에서...

 

 

 

 

 

10시 16분 - 안천약수터

 

 

 

 

 

☞ 여기서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을 다녀오다 - 1부를 마치고...

 

 

 

2014년 09월 13일(토)

맥가이버의 낭만산행 - 서대문알프스종주산행(안산ㆍ백련산ㆍ북한산ㆍ인왕산 연계산행)을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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