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with MAMMUT | ②TREKKING월간 아웃도어 문나래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입력 2015.03.13 17:56
영암 사람들에게 기찬묏길은 소중한 선물이다. 서울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이곳까지 찾아온 기자는 그들이 부럽다. 시내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듯 아름다운 길이 우리를 안내한다. 고요하고 한적한 이 산길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하다. 이곳에 늘 적당한 만큼의 사람들이 다녀갔으면 한다. 느림의 아름다움을 아는 이에게, 그것이 간절한 이에게 영암의 기찬묏길을 소개한다.
조용하지만 강하게 흐르고 있는 기(氣)
영암은 고요했다. 식사를 하기 위해 나온 시내에서는 움직이는 자동차를 몇 대 볼 수 없었고 트레킹으로 이미 유명한 기찬묏길에서도 아침 산책을 나온 몇몇 이들만이 이곳이 슬로시티라는 것을 소리 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영암에서는 어디를 가나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월출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산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지만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듯 보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짧은 시간 영암에 머물렀지만 숙소에서 눈부신 아침을 맞이할 때에도, 늦은 밤 차를 타고 이동하거나 고즈넉한 대동제를 차분히 걷는 동안에도 월출산은 요람을 바라보는 엄마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봄이 조금씩 세상에 마음을 열어주는 2월 초, 영암의 기찬묏길을 찾았다. 기찬묏길은 말 그대로 기(氣)가 강하다는 월출산의 기운을 느껴볼 수 있도록 조성된 길을 말한다. 함께한 사진기자가 '마치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고 있을 것만 같아'라고 말한 것처럼 월출산은 웅장한 암봉들 덕분에 무언가 강력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이는 이미지가 다가 아니라 실제로 월출산과 영암은 기가 세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택리지에는 '아침 하늘에 불꽃처럼 기를 내뿜은 기상을 지녔다'고 월출산을 소개하고 있고 도선국사나 왕인박사 등 걸출한 인물들이 이곳의 기를 받고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이렇게 기가 센 월출산의 자락에 둘레길을 조성한 것이 기찬묏길이다. 2005년부터 조성한 이 길은 처음에는 '氣웰빙산책로'라는 이름으로 지어져 왕인박사유적지에서 문산제와 양사제로 가는 길을 이었다. 그러다 둘레길이 인기가 많아지자 계획을 수정해 길이 더욱 길어진 것. 기찬묏길 조성사업은 2년 연속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친환경 생활공간조성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현재 코스는 총 5구간으로 약 40km에 달한다. 1구간은 천황사 주차장~기찬랜드(7.5km)로 영암의 기를 체험하는 구간이다. 2구간은 기찬랜드~월암마을(7.9km)로 월출산 12대 기암, 한옥, 도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체험' 거리, 3구간은 월암마을~학산 용산마을(7.8km)로 왕인 박사와 도선국사의 삶을 찾아볼 수 있는 '역사체험' 거리다. 4구간은 용산마을~학산 학계 마을(8.9km)까지 월출산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생태 체험' 구간, 5구간은 학계마을~미암면 미암리(8.2km)로 삼림욕과 영암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오감 체험'의 거리로 올해까지 영암군은 모든 구간을 개방할 예정이다.
자연과 가까이 있는 영암 사람들
우리는 1,2구간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기찬묏길을 걷기 전에 빼먹을 수 없는 편백나무 숲을 먼저 찾았다. 월출산 동쪽 누릿재에서 사자저수지를 거쳐 천황사 입구로 이어지는 길은 정약용 남도유배길, 삼남길과 구간이 겹친다. 이 부분은 월출산국립공원 구역인데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솟은 편백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이 길이 맞을까?' 편백나무 숲은 사람의 발길이 드물었다. 그 덕에 여기저기 관목이 욕심을 부리고 자라 걷기에 길이 다소 험했다. 호젓하게 자라난 편백나무와 이곳의 무성한 잡초들 사이를 열심히 걷고 있으니 내가 가고 있는 '길'이라는 뚜렷한 대상이 왠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제야 이곳이, 기찬묏길이 그리도 아름답지만 사람이 적은 이유에 대해서 나름대로 결론은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사람이 만든 길이기 이전에 자연이 먼저 내놓은 공간이다. '둘레길'이라는 공간이 오직 사람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자연과 공생하고 그들을 위한 공간을 내어줄, 배려해줄 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영암의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찬묏길의 시작인 1구간은 천황사 주차장에서 시작해 탑동약수터를 지나 기찬랜드로 이어진다. 탑동약수터까지 가는 구간은 자연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구불구불한 숲길이다. 시내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곳에서 자연의 한적함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것이 다른 둘레길과 다르다. 고요한 산길을 편안하게 걸으며 상쾌한 피톤치드를 만끽할 수 있다. 산자락을 가로질러 오르면 시원한 조망도 마주할 수 있다. 탑동약수터를 지나면 돌을 깔아서 포장한 길이 나타난다. 작은 계곡을 지나 흙과 자갈이 깔린 길을 걸으며 다양한 나무들을 만났다.
"온갖 나무 종류가 다 있네요~."
대나무, 참나무, 소나무, 매화나무 등 기찬묏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나무 이름을 하나씩 입으로 소리 냈다. 계절이 바뀌면 나무는 모습을 바꿔 이 길은 완전히 다른 길이 될 것이다. 풀벌레 소리를 듣고 녹음에 물들기 위해 더위가 짙은 여름, 다시 이곳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차분하고 고즈넉한 겨울의 숲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 쓸쓸한 한적함 속에서 어떤 영암 사람들의, 아니 무수한 세상 사람들의 상념이, 고독이, 깨달음이 지났을지 나는 손을 뻗어 하나하나 만져보고 싶었다.
이 길이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깔끔하게 놓인 나무 데크 덕분이다. 무리하지 않고 편안히 산행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 엿보였다. 길을 걷는 동안 몇몇의 영암 사람들이 모처럼 따사롭게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을 즐기기 위해 산책을 나온 것이 보였다.
매일 아침 이곳에서 눈뜰 수 있다면
기찬랜드 입구에 닿으면 1구간이 끝난다. 그 다음부터는 2구간이다. 기찬랜드 주차장을 가로질러 마을로 향하는 길이다. 도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대동제를 가로지르는 구간이 나타난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대동제의 장관에 숨이 턱 막혔다. 호수 둑방에 설치한 나무 데크를 따라 천천히 그 위를 걸어보았다.
"오스트리아나 노르웨이에 있는 호수 마을에 온 것 같지?"
대동제와 그 뒤로 월출산의 봉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이국적인 풍광에 함께한 동료는 황홀함을 느끼며 말했다. 호수의 잔잔함이 무너질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사실 속으로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과 골짜기 너머로 보이는 산의 모습을 고요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대동제는 바라보고 있으면 깊은 사색에 빠지기 좋다.
국내에서는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라면 관광객으로 바글바글 거릴 텐데. 여기저기 펜션이 지어지고 리조트가 들어서고 체험장에 온 사람들로 붐빌 텐데. 이곳은 어찌된 일인지 자연 그 자체만 오롯이 남아있다. 진정한 쉼을 바라는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을 보면 미래에서 온 고양이 로봇인 도라에몽이 주머니에서 미래의 온갖 발명품들을 꺼내놓는다. 작품이 현실이 된다면 그 수많은 물건들 중에 내가 가장 탐나는 것은 다름 아닌 '어디로든 문'이다. 문 앞에 서서 자기가 가고자 하는 곳의 장면을 또렷이 떠올리고 문을 열면 바로 그곳이 나타나는 것.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침대 안에서, 그리고 매달 마감이 끝나는 날 사무실 문 앞에서 이 문의 간절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한다. '완전히 세상과 차단된 곳에 있고 싶다.' 이달 마감이 끝난다면 이번엔 사무실 문 앞에서 분명 영암의 대동제를 떠올릴 것 같았다.
대동제를 지나니 어김없이 1구간과 마찬가지로 높지 않으면서 구불구불한 산길이 이어졌다. 이 길은 계속해서 이어져 월암마을까지 닿는다. 길을 걷는 동안 해가 어느덧 높이 솟았는지 차가운 공기가 가셨다. 두꺼운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선 남은 구간을 걸었다.
대자연을 만끽하고 사색을 즐기기 위해 많은 이들이 외국을 찾는다. 더 넓은 세상, 더 깊은 자연을 보기 위해. 그런데 조금만 돌아보면 한국에도 아름다운 풍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곳을 사랑하는 이 중 한사람으로서 '그곳을 잘 몰랐으면'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듯 조금은 아끼고 싶은 공간이 영암이었다.
영암을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 숙소에서 잠기 어린 눈을 뜨며 침대를 빠져나왔을 때 방 안으로 월출산 너머의 찬란한 햇살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는 순간까지 그 장면을 잊지 못했다. 영암은 왠지 그런 느낌으로 기억 속에 자리 잡을 것 같다. 조용하지만 강한 기(氣)와 그 위에서 여유롭게 살아가는 이곳의 사람들. 아름다움이 남는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더욱 느리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문나래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 moon@outdo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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