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이버의 '가을비 우산속에 소요산 단풍산행(능선일주산행) + 소요산 국화축제' 코스
소요산역→벨기에ㆍ룩셈부르크 참전기념비→산림욕장입구→팔각정→삼거리→헬기장→현위치 매표소위→전망바위→현위치 일주문위→하백운대
→전망바위→중백운대→덕일봉/중백운대 갈림길→선녀탕 갈림길→상백운대→칼바위→새목고개 갈림길→선녀탕입구 갈림길→갈림길3→나한대
→의상대→데크계단→샘터길 갈림길→데크계단→공주봉→전망대→공주봉 8부능선 데크계단→기도터→구절터→자재암갈림길 백팔계단→해탈문
→원효대→자재암(나한전ㆍ청량폭포)→해탈문→백팔계단→속리교→원효폭포→원효굴→자재암 일주문→건강오행로→소요산주차장→소요산역
▼ 15시 36분 - 전망대에서...
▼ 15시 39분 - 공주봉 8부능선을 지나...
▼ 15시 41분 - 데크계단을 내려서며...
▼ 15시 43분 -
▼ 15시 46분 -
▼ 15시 57분 - 기도터를 지나...
▼ 16시 00분 - 구절터를 향해...
▼ 16시 02분 -
▼ 16시 04분 -
▼ 16시 06분 - 구절터에서 잠시 휴식...
▼ 16시 16분 - 자재암을 향해...
▼ 16시 17분 -
▼ 16시 20분 -
▼ 16시 21분 - 자재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백팔계단을 올라서고...
▼ 16시 23분 - 해탈문에서...
▼ 관음봉
▼ 원효대와 관음봉
▼ 16시 25분 - 원효대
▼ 자재암 가는 길로...
▼ 16시 30분 - 자재암 해우소
▼ 16시 31분 - 자재암
자재암 自在庵 영원사(靈源寺)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소요산(逍遙山)에 있는 절.
[개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역사적 변천]
654년(무열왕 1)원효(元曉)가 창건하여 자재암이라고 하였으며,
974년(광종 25)각규(覺圭)가 태상왕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1153년(의종 7)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채만을 복구하여 폐사와 다름없이 명맥만 이어 오다가,
1872년(고종 9)원공(元空)과 제암(濟庵)이 중창하여 영원사(靈源寺)라고 하였다.
그때의 당우로는 영산전(靈山殿)·만월보전(滿月寶殿)·독성각(獨聖閣)·산신각(山神閣)·별원(別院) 등이 있었다고 한다.
1907년 화재로 인하여 만월보전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소실되자
1909년 성파(性坡)와 제암이 절을 중창하고 다시 자재암이라 하였다.
이때에는 전각(殿閣)뿐 아니라 약사여래상과 지장보살상·관음보살상 등의 불상과 함께
이 절의 유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원효·의상(義湘)·윤필(尹弼) 등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봉안하였다.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으나, 1961년진정(眞靜)이 대웅전을, 1968년성각(性覺)이 요사채를,
1977년법조(法照)가 삼성각(三聖閣)을 각각 지어 현재의 당우를 완성하였다.
[내용]
자재암에는 여러 전설적 설화가 전한다.
『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이곳에 요석궁(瑤石宮)의 옛터가 있다고 하였다.
요석궁은 원효가 요석공주(瑤石公主)와 관계를 가졌던 곳이며,
나중에 원효가 이곳에서 설총(薛聰)을 길렀다고 한다.
자재암이라는 사명(寺名)을 갖게 된 것은,
원효가 요석공주와 관계를 가진 뒤 관음보살이 변신한 아리따운 여인의 유혹을 설법을 통해서 물리친 후,
다음날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고 무애자재인(無碍自在人)을 상징하며 자재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절 근처에는 조선태조가 즐겨 찾았던 백운대(白雲臺)와 폐정(廢井)이 있고,
백운대 밑에 있는 폭포는 원효가 노닐던 곳이라고 하여 원효대(元曉臺)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소요사(逍遙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제암과 원공이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우연히 만나서 절을 중창했다는 영험담도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요산 자재암의 유래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원효 대사께서는....
『이토록 깊은 밤, 폭풍우 속에 여자가 찾아올 리가 없지.』
거센 비바람 속에서 얼핏 여자의 음성을 들었던 원효스님은 자신의 공부를 탓하며 다시 마음을 굳게 다졌다.
『아직도 여인에 대한 동경이 나를 유혹하는구나. 이루기 전에는 결코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자세를 고쳐 점차 선정에 든 원효스님은 휘몰아치는 바람과 거센 빗소리를 분명히 듣는가 하면 자신의 존재마저 아득함을 느꼈다.
「마음, 마음은 무엇일까?」
원효 스님은 둘이 아닌 분명한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해 무서운 내면의 갈등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지직」하고 등잔불이 기름을 튕기며 탔다.
순간 원효스님은 눈을 번쩍 떴다.
비바람이 토굴 안으로 왈칵 밀려들었다.
밀려오는 폭풍우 소리에 섞여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스님은 귀를 기울였다.
『원효스님, 원효스님, 문 좀 열어주세요.』
스님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망설였다.
여인은 황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스님을 불렀다.
스님은 문을 열었다.
왈칵 비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서 방안의 등잔불이 꺼졌다.
『스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찾아와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를 맞고 서 있는 여인을 보고도 스님은 선뜻 들어오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스님, 하룻밤만 지내고 가게 해주세요 .』
여인의 간곡한 애원에 스님은 문 한쪽으로 비켜섰다. 여인이 토막으로 들어섰다.
『스님, 불 좀 켜 주세요. 너무 컴컴해요.』
스님은 묵묵히 화롯불을 찾아 등잔에 불을 옮겼다.
방안이 밝아지자 비에 젖은 여인의 육체가 눈에 들어왔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스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몸 좀 비벼 주세요.』
여인의 아름다움에 잠시 취해 있던 스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공연히 들여놨나 싶어 후회했다.
떨며 신음하는 여인을 안 보려고 스님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비에 젖어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 내 마음에 색심이 없다면 이 여인이 목석과 다를 바 있으랴.』
스님은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여인을 안아 침상에 눕히고는 언몸을 주물러 녹여주기 시작했다.
풍만한 여체를 대하자 스님은 묘한 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스님은 순간 여인을 침상에서 밀어냈다.
「나의 오랜 수도를 하룻밤 사이에 허물 수야 없지.」
이미 해골 물을 달게 마시고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깨달은 스님은 다시 자기 정리를 시작했다.
「해골은 물그릇으로 알았을 때는 그 물이 맛있더니,
해골을 해골로 볼 때는 그 물이 더럽고 구역질이 나지 않았던가.
일체만물이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였으니 내 어찌 더 이상 속으랴.」
이 여인을 목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여인으로 보면서도
마음속에 색심이 일지 않으면 자신의 공부는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다시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는 여인의 몸을 비비면서 염불을 했다.
여인의 풍만한 육체는 여인의 육체가 아니라 한 생명일 뿐이었다.
스님은 여인의 혈맥을 찾아 한 생명에게 힘을 부어주고 있었다.
남을 돕는 것은 기쁜 일.
더욱이 남과 나를 가리지 않고 자비로써 도울 때
그것은 이미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이 되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구별이 없을 때 사람은 경건해진다.
여인과 자기의 분별을 떠나 한 생명을 위해 움직이는 원효스님은 마치 자기 마음을 찾듯 준엄했다.
여인의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여인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스님 앞에 일어나 앉았다.
여인과 자신의 경계를 느낀 스님은 순간 밖으로 뛰쳐나왔다.
폭풍우가 지난 후의 아침 해는 더욱 찬란하고 장엄했다.
간밤의 폭우로 물이 많아진 옥류폭포의 물기둥이 폭음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스님은 훨훨 옷을 벗고 옥류천 맑은 물에 몸을 담갔다.
뼛속까지 시원한 물속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데 여인이 다가왔다.
『스님, 저도 목욕 좀 해야겠어요.』
여인은 옷을 벗어 던지고는 물속으로 들어와 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아침 햇살을 받은 여인의 몸매는 눈이 부셨다.
스님은 생명체 이상으로 보이는 그 느낌을 자제하고 항거했다.
결국 스님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너는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호호호, 스님도. 어디 제가 스님을 유혹합니까? 스님이 저를 색안으로 보시면서.』
큰 방망이로 얻어맞은 듯 순간 스님의 머리는 무한한 혼돈이 일었다.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이란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 스님의 귓전을 때렸다.
거센 폭포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하여 여인의 음성이 혼돈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후비고 들어올 뿐.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을 거듭거듭 뇌이면서 원효스님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폭포 소리가 들렸고 캄캄했던 눈앞의 사물이 제 빛을 찾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의식되는 눈앞의 경계를 놓치지 않고 원효스님은 갑자기 눈을 떴다.
원효스님은 처음으로 빛을 발견한 듯 모든 것을 명료하게 보았다.
「옳거니, 바로 그거로구나. 모든 것이 그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 그 도리!」
스님은 물을 차고 일어섰다.
그의 발가벗은 몸을 여인 앞에 아랑곳없이 드러내며 유유히 걸어 나왔다.
주변의 산과 물, 여인과 나무 등 일체의 모습이 생동하고 있었다.
여인은 어느새 금빛 찬란한 후광을 띤 보살이 되어 폭포를 거슬러 사라졌다.
원효 스님은 그 곳에 암자를 세웠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뜻대로 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자재암'이라 했다.
지금도 동두천에서 멀지 않은 단풍으로 유명한 소요산 골짜기에는
보살이 목욕했다는 옥류폭포가 있고 그 앞에는 스님들이 자재의 도리를 공부하는 자재암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지명연역고
▼ '자재암의 유래' 안내문
▼ 자재암 대웅전
▼ 나한전과 독성암(옥류봉)
▼ 옥류폭포
▼ 독성암(옥류봉, 원효봉)
▼ 나한
▼ 옥류폭포
▼ 16시 40분 - 자재암을 둘러보고...
▼ 소요산역으로 가면서...
▼ 16시 46분 - 해탈문을 통과하면서...
▼ 해탈종을 울려보고...
▼ 16시 47분 - 백팔계단을 내려서서...
▼ 16시 49분 - 원효폭포와 원효굴 방향으로...
▼ 원효폭포
▼ 원효굴
▼ 16시 54분 - 자재암 일주문을 나서서...
▼ 17시 07분 - 소요산 매표소를 나서서...
▼ 17시 08분 -
▼ 17시 10분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원효대사는 신라의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며 큰 소리로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라고 노래를 불렀다.
아무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태종무열왕은 누가 귀부인을 원효대사와 맺어주면 국가에 큰 일을 할 사람을 낳겠다는 의미라고 간파하였다.
마침 문무왕 의 딸인 요석공주(무열왕의 둘째 누이)가
백제와의 싸움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후라 원효대사를 그녀와 맺어줄 것을 결심하고 그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요석공주 또한 이미 원효대사의 명성을 들어왔던 터라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원효대사가 경주에 있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난다는 것을 미리 조사한 궁리들이
이 사실을 요석공주에게 알리자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궁내로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졸들은 문천교 밑에 숨어 있다가 원효대사가 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길을 막은후 요석궁 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원효대사가 껄껄 웃으며 못 가겠다고 하자
나졸 중의 대표 한 사람 이 자신과 무술을 겨루어 대사가 지면 요석궁으로 가고 반대로 이기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 말에 대사는 족히 승낙을 하고 무술을 겨루었는데 출가하기 전 낭도로서 무예가 특출했던 원효대사와 나졸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요석궁으로 꼭 모시고 오라는 지엄한 명을 받은 나졸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원효대사에게 달려 들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졸들이 덤비는대로 원효대사 는 가볍게 들어 문천교 밑으로 떨어뜨리니
다리 밑에는 허위적거리는 나졸들이 점점 늘게 되었다.
마지막 나졸 한 명과 함께 원효대사가 문천교 밑으로 일부러 빠지니
나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모르고 자연스럽게 요석궁으로 모시고 갈 수 있었다.
젖은 옷을 말려드린다는 구실을 삼아 요석궁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이 때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게 된 것이다.
그 후부터 원효대사는 파계하였다고 속복으로 바뀌어 입고 소성거사라고 자칭하면서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보고 도구를 만들어 무애라 이름 짓고,
촌락으로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기 시작하여 후일 삼국통일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
원효대사는 대략 30∼40세 정도 되었을 때 소요산에 머무르며 지금의 원효대에서 공부를 하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요석공주도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에 들어와 조그마한 별궁을 짓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원효대사가 공부하는 원효대를 향하여 삼배를 드렸다고 전 해오고 있으며,
그 때의 별궁터가 지금도 남아 있어 요석궁지라 불리고 있다.
참고문헌 : 양주군지 편집위원회편, 양주군지, 양주군, 1978.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안내문
▼ 요석공원 안내문
▼ 17시 17분 - 이태조행궁지
▼ 17시 17분 - 건강오행로를 따라...
▼ 17시 23분 - 소요산 국화축제 전시장에서...
▼ 17시 30분 - 소요맛거리에서...
▼ 18시 26분 - 소요산역으로 원점회귀하며 소요산 단풍산행과 소요산 국화축제 전시 관람을 위한 여정을 마침.
☞ 이것으로 맥가이버의 '가을비 우산속에 소요산 단풍산행(능선일주산행) + 소요산 국화축제를 다녀오다'를 마친다.
-▥☞ 2부[선녀탕입구 갈림길→갈림길3→나한대→의상대→데크계단→샘터길하산로 갈림길→데크계단→공주봉→전망대]는 여기를 클릭.☜▥-
-▥☞ 3부[전망대→기도터→구절터→백팔계단→해탈문→자재암→속리교→원효폭포→일주문→건강오행로→소요산역]는 여기를 클릭.☜▥-
'▣꿈★의 종주 후기☞ > ♧ 동두천알프스(동두천6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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