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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일제가 깎은 채석장 상흔 아래 민주주의·도시재생 꽃피었다 <10> 동대문 ~ 창신·숭인동 일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6. 12. 21.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일제가 깎은 채석장 상흔 아래 민주주의·도시재생 꽃피었다 

<10> 동대문 ~ 창신·숭인동 일대



 

서울미래유산은 정치역사, 산업노동, 시민생활, 도시관리, 문화예술 등 5개 분과로 나뉜다.

시민생활분과 세부선정기준에 따르면 사업자등록증상 개업 연도가 1970년 이전인 소매업종 중 최초 또는 대표성이 있는 것, 가업전승, 장소의 연속성 유지, 독특한 이야깃거리, 변경된 적 없는 상호 등 시민들이 공유할 가치를 한 가지 이상 갖고 있어야 한다.

집합주택일 경우엔 지어진 지 최소한 40년 이상 되면서 최초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거나 독특한 주거 특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특화거리는 형성된 지 30년 이상 경과한 곳 중 독특한 지역 경관과 생활사적 가치가 있으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다.

서울시는 미래유산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서울신문·문화지평과 공동으로 매주 토요일 진행하고 있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신청을 할 수 있다. 

▲ 1910년대 일제가 조선총독부,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등을 짓기 위해 창신동 돌산의 돌을 채취하던 채석장이 지금은 절개지로 남아 있다. 절개지 앞 흉물처럼 남은 건축물에는 쇠침이 박혀 절개지에 고정돼 있다.



서울미래유산 답사팀은 지난달 24일 서울의 대표적인 도시재생 공간인 창신동과 숭인동 답사를 나갔다.
해설은 이 지역 전문가인 박광규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맡았다.
동대문 성 밖 성저십리의 대표적 공간인 창신·숭인 지역은 조선시대는 물론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시장이 즐비하고,
전태일 열사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잉태한 곳이다.
이 지역에는 특히 창신동 봉제마을, 한울삶, 동신교회, 동대문신발종합상가, 풍년철물, 동대문 아파트 등 서울미래유산이 풍성하다.
답사 코스 인접한 데에는 신평화시장, 청평화시장, 제일평화시장, 광희시장, 에리어식스(여성의류도소매시장) 등 시장 미래유산이 운집해 있다. 



‘왕십리 똥파리’ 궤도전차 시발점 
동대문관광호텔 앞 표지석으로 남아 

동대문역 6·7번 출구로 나오면 흥인지문 앞 너른 광장이 나온다.
청명한 가을볕을 등에 지고 여러 답사팀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곳은 한양도성 낙산구간을 답사하려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다.
이날도 서울미래유산 답사팀을 포함해 4개 팀 정도가 흥인지문을 시작점으로 잡았다.
과거에도 이곳은 ‘시작점’이었다.
기동차라고도 불렀던 궤도전차 시발점으로, 현재는 동대문 관광호텔이 자리하고 있다.
이 호텔에는 궤도전차를 운영하던 경성궤도회사가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궤도전차는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뚝섬과 광나루까지 교외 나들이를 나가는 승객과
사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채소 등 물자를 실어 날랐다.
인근 왕십리는 조선시대부터 사대문 밖에서 재배한 채소가 모이는 물류센터 역할을 맡았다.

박 해설사는 “‘왕십리 똥파리’란 말은 궤도전차가 부설된 뒤 왕십리를 통과해 뚝도 채소재배지까지 오가는데
파리가 전차에 새까맣게 들러붙어 나온 데서 유래한 것”이라며
“채소 거름으로 쓸 인분을 실어 나르다 보니 생긴 에피소드”라고 말했다.
사실 인분저장소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었는데 각종 산물이 모이는 곳이라는 이유로 애꿎은 왕십리가 오명을 뒤집어쓴 셈이다. 

박 해설사는 답사단을 창신동 문구골목으로 이끌었다. 우리나라에서 문구와 완구를 가장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곳이다.
매년 어린이날 무렵에는 이 골목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도 제법 늘었다.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메이드 인 차이나’ 문구를 뒤적거리고 있다.
1980년대 해외여행 자유화 초기 외국에서 큰돈 주고 ‘미제’ 옷을 사오니 ‘메이드 인 코리아’였다는
오래지 않은 우리네 현실과도 오버랩되는 풍경이었다. 

▲ 청계천 7가 사거리 창신1동 주민센터 옆에 있는 풍년철물점. 1969년 현재 자리에서 문을 연 뒤 창업자 조세환씨에서 아들 규영씨로 가업이 승계되면서 여전히 영업 중인 서울미래유산이다.



▲ 아파트 한가운데 공간을 비워둔 중정(中庭) 구조를 가진, 서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동대문 아파트 내부 전경. 분양 초기 연예인들이 많이 입주해 ‘연예인 아파트’로도 불렸다.



‘미래유산’ 동신교회·풍년철물 아늑 
서울 두 번째 오래된 동대문아파트 위용 

골목 몇 개를 돌아가니 웅장한 화강암 외벽을 가진 동신교회가 나온다.
1956년 본전을 지은 이후 수차례 증축을 거친 고딕 건축양식을 가진 건축물이다.
1950년대 지은 석조교회 건축물 중에선 완성도가 뛰어난 이유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동대문 신발종합상가는 A동부터 D동까지 있지만 가장 나중에 지어진 D동을 제외하고 A·B·C동까지만 서울미래유산이다.
1970년에 개장한 전국 최대 규모 신발도매시장으로서의 보존 필요성을 인정받았다.
신발상가 C동을 지나면 수족관 상가, 관상조 등 애완동물을 파는 상가가 나와서 볼거리가 풍성하다.

길다랗게 형성된 신발도매상가와 수족관 상가를 거쳐 동대문 아파트로 가다 보면 사거리 길 건너에 풍년철물점이 보인다.
1969년 지금의 위치에 조세환씨가 문을 연 철물점이다.
1998년 조씨의 아들인 규영씨가 가업을 승계해 운영하고 있다.
가게를 지키고 있던 규영씨는 “주변 사람이 신청해줘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지만, 미래유산 현판은 달지 않았다”고 말했다. 

풍년철물점 건너 창신동 방향으로 가다 보면 동대문 아파트를 만날 수 있다.
1965년 완공된 7층짜리 건물로 중정(中庭)이라고 부르는 중앙 공간을 가지고 있다.
박 해설사는 “서울시 현존 아파트 중 충정 아파트에 이어 지은 지 두 번째로 오래된 아파트”라며
“초기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아 ‘연예인 아파트’로도 불렸다”고 설명했다.

동대문 아파트 인근에는 천재 화가 박수근 화백의 집터가 있다.
지금은 빗물 배관에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란 아홉 글자로 흔적이 남아 있다.
길 건너 천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살던 집터까지 따지면 이 지역은 예술 거장들의 흔적이 짙은 곳이다.
백남준 집터는 서울시 마중물 사업의 일환으로 다음달 중순 백남준 기념관과 주민 사랑방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창신동 봉제골목에 접어들면 전태일기념관이 골목 깊숙이 들어서 있다.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며 평화시장에서 자기 몸을 불살랐다.
그가 사른 불씨 하나가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의 강력한 동력이 됐고,
길게는 대통령 직선제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토대가 됐다. 

▲ 전태일기념관 인근에 있는 한울삶. 이곳은 민주화 투쟁에서 희생된 이들의 가족들이 만든 전국민족민주운동유가족협의회(민가협) 회원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생활공동체로 서울미래유산이다.



전태일기념관 등 민주화 상징 곳곳 
봉제
공장 900여곳 밀집…‘명소’로 부상 

전태일기념관 옆에는 여전히 이름도 없는 좁고 침침한 봉제공장에서 미싱이 돌아가고 있었다.
기념관 지척에는 민주화 투쟁에서 희생된 이들의 가족들이 만든
‘전국민족민주운동유가족협의회’(민가협) 회원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한울삶’이 자리하고 있다. 한
울삶을 가기 위해 골목을 들어서자 발밑에 시대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다.
1970년대는 ‘유신독재 짙은 어둠 속 희망을 일군 선구자들’, 1980년대는 ‘5공 독재에 맞선 민중들의 6월 항쟁,
그 앞자리의 열사들’, 1990년대는 ‘민주, 인권, 통일을 향한 더딘 전진, 그러나…’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울삶은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유가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징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창신동 봉제골목도 지역 전체가 서울미래유산이다.
지금도 900여개의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다.
동대문 의류제조업의 배후 클러스터로 자연형성된 곳이다.
일대가 가파르고 좁은 골목이라 무거운 원단을 나르기 위해 오토바이가 주요 운송수단으로 이용된다.
박 해설사는
“창신동은 비탈길에다가 원단이 무겁기 때문에 오르막길에서 멈추면 오토바이가 뒤로 자빠질 수 있다”며
“멀리서 엔진 소리가 나면 재빨리 길을 피해 줘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서울시는 봉제산업의 역사를 남기기 위해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봉제박물관을 짓는다.
현재 부지를 확정하고 내년 9월 개관할 예정이다.
봉제박물관이 들어서면 자연스레 지금의 봉제거리가 확대 조성돼 지역 명소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역시 서울시 마중물 사업의 일환이다.

이날 부인과 함께 답사에 참여한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의 김근성 대표는
“혼자서는 이런 답사가 쉽지 않은데 같이 다니면서 설명도 들으니 많은 공부가 된다”며
“우리 단체에서도 비슷한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10회차 ‘도시재생 공간 창신·숭인’ 집합지인 동대문 앞에서 출발 전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답사단. 이날 동대문 광장에는 한양도성 답사팀을 비롯해 다른 답사 단체들도 모이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이 드러났다.



지역주민 주도 도시재생 사업 활기 
지역 문화해설사 양성 등 활동 두각 

창신동에는 1910년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채석장 흔적이 여러 곳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경성역(현 서울역) 등을 지으려고 돌을 캐낸 뒤 방치한 민족적 상흔이다.
폐허처럼 남은 깎아지른 채석장 꼭대기에도 삶의 터전이 있다.
동쪽인 숭인동 지역에도 창신동보다 ‘생채기’가 큰 절개지 두 곳이 있다.
이런 상처를 안고 창신·숭인동은 도시재생이란 시험대 위에 서 있다.
답사 말미에 참여자 한 분이 “도시재생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박 해설사는 “주민이 주도하고 주민이 원하는 형태의 재생사업”이라며
“관은 예산 지원에 집중하는 게 올바른 도시 재생의 형태”라고 말했다. 

창신·숭인 지역은 서울도시재생사업 1호 지역이다.
도시 재생의 시금석과 같은 곳이다.
그동안 지역주민 사이에, 민관 사이에 갈등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다소 잠잠해지면서 주민들이 주도해 지역 문화해설사를 양성하는 등 활동이 도드라지고 있다.
남매를 데리고 답사에 나온 사진작가 박초월씨는
“이 지역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잉태한 자궁 같은 곳”이라며
“민주적 절차와 합의에 기반 한 도시재생 사업으로 성숙한 민주주의를 꽃 피우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