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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5]북한산 4대계곡(불광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 탐방산행 - 3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7.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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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7월 15일(토)

'북한산 4대계곡(불광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 탐방산행'을 다녀오다.
 

 


  '북한산 4대계곡(불광사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 탐방산행' 이야기

 

  '북한산 4대계곡(불광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 탐방산행' 코스

 

독바위역→불광사→불광계곡→불광폭포→향림담→잣나무숲→송전탑→덕행봉→전망암봉→향로봉 정상→관모봉

→진관사계곡→전망데크→진관사→진관사일주문→미타교삼천사→삼천사계곡→부왕동암문갈림길→부왕동암문

→부황사지→청하동문→최송설당→북한산성계곡→노적교→중성문→새마을교→무량사→대서문→산성탐방안내소

 

 



 

 

오늘은 '북한산 4대계곡(불광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 탐방산행'을 위해 길을 나선다.
 
장마철 북한산으로의 산행 코스.
어디가 좋을까?
비가 올 수도 있고, 무더울 수도 있고, 날이 쨍쨍하여 불볕일 수도 있고...
 
해서
독바위역에서부터 북한산의 4대계곡(불광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을 찾아 나선다.

예보와 달리 산행 초반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무더웠고,
그래도 계곡 옆으로 갈 때는 계곡물이, 능선으로 오를 때 간간이 불어주는 바람이,
무더위에 지치지 않고 산행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산행 종반부인 부왕동 암문에 다다랐을 때 뿌려주는 소나기는 오히려 열기를 식혀주는 단비였다.
'북한산 4대계곡(불광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 탐방산행'을 다녀오다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북한산 4대계곡(불광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 탐방산행' - 3부를 시작하며...

 

 

삼천사계곡 목교에서...



















































































서경보 [ 徐京保 ]

1914∼1996.

승려· 불교학자. 법호는 일붕(一鵬).

일붕선교종(一鵬禪敎宗)의 종정을 지냈다.

제주도 서귀포 출생.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였다.

 

할아버지의 권유로 16세 때 결혼하였으나 불교 공부에 전념하다가

19세가 되던 해인 1932년 남제주군 산방굴사(山房窟寺) 혜월(慧月) 문하로 출가하였다.

출가 때 받은 법명은 회암(悔巖)이다.

 

약 1년간 제주에서 수행하던 그는 1933년 화엄사의 진응(震應)강백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1935년 진응이 완주 위봉사(威鳳寺) 강원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도 따라갔으며 그 곳에서 사미과·사집과를 수료하였다.

 

이때 위봉사의 주지로 있던 춘담(春潭)은

그를 법제자로 삼았으며 ‘일붕’이라는 법호를 지어 주었다.

재정 형편상 위봉사 강원이 문을 닫게 되자 춘담의 권유로

서울 개운사(開運寺) 박한영(朴漢永) 문하로 들어 왔다.

그로부터 3년 반에 걸쳐 사교과·대교과의 가르침을 받았다.

 

박한영의 천거로 월정사 강원의 강사로 재직하던 그는 1944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당시 월정사에 출강하던 김태흡(金泰洽)의 적극적 권유로 마련된 일이었는데,

이로부터 1946년까지 경도(京都) 임제종 임제전문학교(臨濟專門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귀국 이후 종로구 창신동의 안양암 포교법사로 있으면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1950년 졸업하였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원광대학교·전북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1953년 해인대학(지금의 경남대학교) 교수를 거쳐

1956년부터 1962년까지 동아대학교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였다.

1962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1969년에는 동교 불교대학장에 취임하였다.

 

대학 강단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던 그는 한편으로 활발한 국내외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2년 한국불교청년회 총재로 추대되었고 같은 해 불국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미얀마·독일·스리랑카·영국·미국 등지의 대학에서는 교환교수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1958년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제5차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는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을 마친 이후 1970년과 1980년대에는 해외포교에 전념하였다.

 

입적 이전까지 그가 방문한 국가는 무려 157개국에 달하며,

1969년 미국 템플(Temple)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26개 분야 126개의 국내외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특히 미국 지역에 사찰을 건립하는 등의 활발한 포교활동은

양국 간 문화교류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미국 대통령 레이건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하였다.

 

한때 조계종 원로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1988년 대한불교 일붕선교종을 창종(創宗)하면서 조계종단을 떠났다.

이후 일붕선교종의 종정을 지냈으며,

1992년에는 그가 계속 추진해 오던

세계불교 법왕청 설립 총회가 개최되자 초대 법왕(法王)에 추대되었다.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정회원 16개국 대표가 참가했던 제1차 총회에 이어

1994년 개최된 제2회 대회에서는 부처님 오신날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제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세계 전역을 다니면서 평화를 주창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1955년에는 세계평화교육자협회(IAEWP)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바 있다.

 

입적하기 직전까지도 중국·미국 등지의 포교 활동을 전개했던 그는

서울특별시 신영동 소재 법왕청에서 세속 나이 83세, 법랍 64세로 입적하였다.

 

그는 126개의 박사학위, 1,042권의 저서, 757개의 통일기원비 건립, 50여만 점의 선필(禪筆),

최대 석굴법당 건립 등 5개 분야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하였다.

 

서경보(徐京保)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

민족교육의 선구자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보모


일제시대 전 재산을 털어 김천고보(현 김천중·고교)를 설립하였다.

나이 마흔에 영친왕의 보모가 된 그는 10년간의 보모 생활을 마친 뒤

서울 무교동에 ‘송설당’이라는 큰 집을 짓고 사회사업을 활발하게 벌인 여걸(女傑)이면서

한시와 국문 가사를 담은 ‘송설당집(松雪堂集)’을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최송설당은 홍경래난에 연루되어 유배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英親王)의 보모로 10년 동안의 덕수궁 생활을 마치고 나올 무렵

상당한 재산을 갖게 된 그는 당초 30만원을 웃도는 재산을 해인사에 시주하려고 했지만,

당시 해인사가 친일세력에 장악된 것을 우려한 만해 한용운과 지역 인사들의 설득으로

김천고보 설립으로 방향을 돌렸다.

 

최송설당은 67세이던 1922년 한시 167제(題) 258首와 국문 가사 49편을 수록한 ‘송설당집’을 발간했다.

당대의 대문장가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서문을 쓴 이 문집은 그녀의 학식이 상당한 수준이고

문학적 재능 또한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최송설당 [崔松雪堂]


호 : 송설당(松雪堂)
출생-사망 : 1855(철종 6) ~ 1939
출생지 : 경상북도 금릉
본관 : 화순(和順)
직업 : 문인, 육영사업가
가족 : 아버지 최창환(崔昌煥), 어머니 경주정씨(慶洲鄭氏)

 

1855(철종 6)∼1939. 육영사업가. 본관은 화순(和順).

본명은 미상이며 송설당(松雪堂)은 호이다.

경상북도 김천 출생. 아버지는 창환(昌煥)이며, 어머니는 경주정씨(慶州鄭氏)이다.

 

외가쪽이 홍경래(洪景來)의 난에 연루되어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어려서부터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누명을 벗게 할 것을 맹세하였다.

 

1886년(고종 23) 아버지가 죽고 이어 남편과도 사별하자, 39세 때 불교에 귀의하여 정진하였다.

그뒤 서울에 올라와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 중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으며,

귀비(貴妃)에 봉하여지고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이후부터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금릉학원(金陵學園)에 기부금을 내는 등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30년 2월 25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전국 일간지에

학교설립을 위해 전재산을 희사할 취지를 밝힌 성명서를 발표하고,

1931년 2월 5일 전재산 30만2100만원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松雪學園)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여 오늘날의 김천중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건학이념은 "길이 사학을 경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이다.

 

시문에 능하여 200여수의 한시와 60여수의 국문시가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는 ≪최송설당문집≫ 3권(1922년)이 있다.

 

무덤은 김천중고등학교 뒷산의 송정(松亭) 옆에 있으며,

1935년 11월 30일 교정에 송설당의 동상을 세워 설립자의 뜻을 기리고 있고,

1963년 8월 15일 대통령 문화 포상이 추서되었다.

 

최송설당(1855-1939)

 

참고문헌 : 「松雪五十年史」(김천중고등학교, 1981) ㆍ「松雪六十年史」(김천중고등학교, 198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것으로 '북한산 4대계곡(불광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 탐방산행을 다녀오다'를 마친다.

 

 

 

2017년 07월 15일(토)

'북한산 4대계곡(불광계곡ㆍ진관사계곡ㆍ삼천사계곡ㆍ북한산성계곡) 탐방산행'을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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