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 채소 농장·예술 정원·과학관·영화관… 체험하고 쉬어가세요
조선일보 강정미 기자
[아무튼, 주말]
머무는 공간으로 지하철역의 변신
매일 오가는 일상 공간도 일탈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하루 평균 900만명이 이용하는 서울 지하철역들이 그렇다.
거대한 인파가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 세계로 다니지만,
지하철역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공간이 더 이상 아니다.
예술 정원을 만들거나 첨단 기술을 도입한 채소 농장과 과학관, 영화관,
무인(無人) 세탁소가 들어서는 등 이색 지하철역이 점점 늘어난다.
색다른 체험과 휴식, 새로운 기술과 예술을 경험할 수 있다.
365일 채소가 자란다
지하철역에 들어선 실험실 같은 공간.
투명한 유리벽 너머 핑크빛 조명 아래 초록 채소가 자라고 있다.
햇빛도 없고 흙도 없지만 칸칸이 잎을 틔운 채소는 싱그럽다.
7호선 상도역에서 처음 마주한 메트로팜 풍경은 생소하기만 하다.
지하철역을 오가다 발길을 멈추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다.
메트로팜은 지난 9월 상도역 지하 1층에 문을 열었다.
말하자면 지하철역으로 들어온 '스마트팜'이다.
스마트팜은 첨단 정보통신기술(ICT)로 식물이 자라나는 데
필요한 빛과 온도, 습도와 양분 등을 인공적으로 제어한다.
햇빛이나 흙이 없는 지하철역에서도 농약 없이 1년 365일 채소를 재배할 수 있다.
밀폐된 공간이라 미세 먼지 걱정도 없다.
실험실처럼 보이는 유리벽 안은 '수직실내농장(vertical indoor farm)'이다.
바질과 버터헤드레터스, 이자트릭스, 카이피라, 이자벨, 에즈라, 스텔릭스,
파게로 등의 작물을 LED 조명과 수경 재배 방식으로 생산한다.
낯선 이름은 대부분 유럽에서 즐겨 먹는 양상추 계열 채소들이다.
파종 후 수확까지는 38일이 걸린다.
하루 51㎏, 최대 월 1120㎏의 작물이 이 농장에서 생산된다.
컨테이너형 '오토팜'도 눈길을 끈다.
로봇이 파종부터 수확까지 모든 과정을 관리하는 최첨단 미래 농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오토팜의 주종은 로메인과 롤라로사다.
이곳에서 하루 최대 5㎏, 월 최대 110㎏까지 생산한다.
메트로팜에서 수확한 채소는 '팜카페'에서 직접 맛볼 수 있다.
싱싱한 샐러드와 그린주스를 만들어 판매한다.
채소는 포기나 ㎏ 단위로 포장 판매한다.
상도역 ‘메트로팜’에서 수확한 채소로 만든 ‘팜카페’의 로스트비프샐러드와 망고그린주스.
최순애(56)씨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맛을 봤는데 채소가 부드럽고 싱싱해 포기째 구매해 샐러드로 즐긴다"며
"지하철역 안에서 채소가 잘 자라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배 과정을 눈으로 볼 수 있어 안심하고 먹는다"고 했다.
'팜아카데미'에선 스마트팜에 대한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스마트팜에 들어가 채소를 수확하고 샐러드 요리 체험도 할 수 있다.
체험 프로그램은 매주 수~일 하루 5회 진행되며 '네이버 예약'으로 신청하면 된다.
메트로팜은 5호선 답십리역에서도 만날 수 있다.
수직실내농장과 함께 샐러드 자판기가 설치돼 지하철역을 오가며 간편하게 샐러드를 구매할 수 있다.
천왕역(7호선), 을지로3가역(2·3호선), 충정로역(2·5호선)에도 연말까지 메트로팜이 들어선다.
지하철역이 예술 정원으로
이태원과 해방촌, 경리단길의 중심에 있는 6호선 녹사평역은 다른 역과 달리 규모가 크고 구조가 독특하다.
서울시청 이전 계획에 따라 환승역으로 계획된 녹사평역 규모는 지하 1~5층, 6000㎡.
천장 정중앙에는 큰 유리 돔이, 지하 4층엔 자연광이 내리쬐는 깊이 35m의 메인홀이 있다.
긴 에스컬레이터는 역 안을 가로지르며 내려간다.
시청 이전 계획이 무산되면서 녹사평역 공간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이 공간을 채운 건 공공미술이다. '
녹사평역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지난 3월 녹사평역은 '지하예술정원'으로 새롭게 변신했다.
지하철역이 공공미술과 자연의 빛, 식물이 어우러진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기존에 지하 2층에 있던 개찰구를 지하 4층으로 이전해 승강장을 제외한 역사 전체를 누구나 편리하게 즐기도록 만들었다.
지하예술정원에선 지하 1층에서 승강장이 있는 지하 5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빛과 숲, 땅을 주제로 한 예술 작품과 지하 정원을 만날 수 있다.
녹사평역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트레이드마크인 깊이 35m의 메인홀 안쪽 벽면에는 메탈 커튼이 설치됐다. '
댄스 오브 라이트'라는 작품으로 천장 유리 돔으로 들어오는 빛을 반사해 시시각각 다른 빛을 담아낸다.
시간이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빛이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마주하는 지하 4층의 넓은 공간은 '숲'을 테마로 한 작품들 차지다.
천장에는 알루미늄 와이어를 뜨개질해 만든 '녹사평 여기'가 설치돼 있어 녹색식물 터널을 지나는 것 같다.
넓은 대합실에는 남산 소나무 길을 재구성한 '숲 갤러리'가 있다.
숲속을 걷듯이 천천히 둘러보거나 잠시 앉았다 가길 추천한다.
지하 정원은 도심에서 만나는 초록빛 쉼터다.
아레카야자, 스킨답서스, 보스턴고사리 등 식물 600여 개가 자연광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지하철역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작품들은 녹사평역 자체를 하나의 미술관이자 작품처럼 느끼게 한다.
미술관을 산책하듯 천천히 지하철역을 둘러보길 권한다.
배우고 체험하며 즐기는 지하철역
지하철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어날 수 있는 재난 상황에 대비해 무료로 안전 교육과 체험이 가능한 곳이 있다.
지난해 서울교통공사가 7호선 반포역에 만든 디지털 시민안전체험·홍보관이다.
안전체험관에선 가상현실(VR) 등의 디지털 콘텐츠를 활용해
실감 나면서도 어렵지 않게 화재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불이 날 경우 필요한 소화기와 화재용 대피마스크 사용법, 심폐소생술과 자동제세동기 사용법도 배울 수 있다.
시뮬레이터를 활용한 전동차 운전 체험은 어린이들에게 인기다.
안전홍보관은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이후 지하철 역사(歷史)와
사고 방지를 위한 시스템 등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체험을 예약하면 홍보관 해설도 함께 들을 수 있다.
90분 소요. 하루 5회 진행하는 체험 프로그램은 서울교통공사 홈페이지에서 예약한다.
안전홍보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안전체험·홍보관은 월요일 휴무.
서울 6호선 상월곡역에는 사이언스 스테이션이 있다.
과학을 주제로 다양한 체험과 강연이 열리는 공간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성인 대상의 과학 강연과 공연이 진행되는 공연장과
바이오·의료 관련 기기를 전시하고 체험할 수 있는 바이오리빙랩 같은 시설이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으로 통하는 지하철역답게
KIST의 역사와 연구 성과가 전시된 호기심존과 과학자와
다양한 행성에 대한 정보를 얻고 체험도 할 수 있는 과학자존도 만날 수 있다.
지하철 승강장에도 과학 상식과 관련된 영상물과 퀴즈를 풀 수 있는 터치스크린이 있다.
사이언스 스테이션에선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 30분 과학 해설사와 함께하는 도슨트 투어를 진행한다.
도슨트 투어와 교육 프로그램 신청은 사이언스 스테이션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무료. 연중무휴,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특별한 영화가 생각날 때
한국 영화를 상징하는 충무로. 그 이름에 걸맞게 3·4호선 환승역 충무로역엔 색다른 공간이 있다.
서울영상위원회가 운영하는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이다.
극장과 아카이브, 갤러리, 편집, 장비 대여 등 재미를 다섯 가지 이상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지하철역 안에 있다 보니 극장은 작다.
총 28석의 소규모 영화관이지만 분위기가 제법 아늑하다.
매주 금요일 독립영화를 상영한다.
상영작은 오!재미동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재미동 이진화 팀장은
"특정 독립영화를 보고 싶어 일부러 찾아오는 분이 많아 빈자리가 별로 없다"며
"동호인들이 극장을 대관하기도 한다"고 했다.
특별히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면 아카이브를 이용하면 된다.
오!재미동 아카이브는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DVD 4650여 편과 책 2600여 권을 보유하고 있다.
DVD룸을 갖춰 영화 감상도 할 수 있다.
책을 한 권 골라 읽으며 쉬어가기에도 좋다.
예술 전시가 계속되는 갤러리도 지하철역을 오가는 사람들에겐 흥미로운 공간이다.
영상이나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장비 대여가 가능하고 편집실도 이용할 수 있다.
일요일·공휴일 휴무,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편의 시설과 덕후를 위한 공간도
색다른 시설도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7
호선 반포역은 지난해 11월 헬스&라이프존을 마련했다.
생활 편의 시설이 입점했는데 그중 하나가 무인 세탁소다.
어반 런드렛은 매장에 설치된 키오스크로 결제하고 세탁물을 보관함에 넣어두면 세탁 후 건조,
포장된 세탁물을 다시 보관함에서 찾아가는 시스템이다.
출퇴근할 때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요금은 기본 1만원(24시간 기준)이고 세탁 요금은 별도다.
오전 5시에서 익일 오전 12시 30분까지.
반포역 헬스&라이프존에는 무인 세탁소 외에도
피트니스 센터와 스터디 카페, 여행사가 운영하는 여행 정보 카페가 있어
편의 시설을 이용하려고 지하철역을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반포역에는 이색적인 공간이 하나 더 있다.
'덕후역 대합실'이다.
철도를 좋아하는 '철덕'이라면 흥미진진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다양한 철도 모형과 철도 관련 기념품, 동호인 수집품이 전시돼 있다.
서울 지하철의 하루를 보여주
는 디오라마(풍경이나 그림을 배경에 두고
축소 모형을 설치해 특정한 장면을 만들거나 배치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디오라마 운행 시간에 맞춰 모형 지하철이 움직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덕후역 대합실은 동호회 모임 장소로 쓰이기도 하지만 열려 있는 공간이다.
덕후가 아니라도 누구든 전시를 보거나 쉬어갈 수 있다.
월요일 휴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대구 진천역은 선사시대 박물관… 서울 안국역은 독립운동 역사관
청동기시대 유물인 ‘붉은간토기’가 대구 진천역 3번 출입구 지붕에 박혀 있다.
실제보다 10배 가까운 크기와 색다른 아이디어로 선사시대 유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달서구청
색다른 테마로 옷을 갈아입은 지하철역도 있다.
대구 1호선 진천역은 '거리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지난 3월 대구 달서구가 진천역과 상화로, 월배로 등에 거
리 박물관을 만들면서 선사시대 유물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만날 수 있게 됐다.
거리 박물관에는 청동기 시대 유물인
붉은간토기와 대롱옥목걸이, 무문토기, 반달돌칼 등을 재현한 대형 전시물을 설치했다.
박물관과 문화재연구원 등 전문 기관의 도움을 받아
유물의 실제 모습을 구현하되 크기를 10배로 키우고 흥미로운 요소를 더했다.
진천역 3번 출입구에 설치된 대형 붉은간토기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지붕에 일부가 박혀 있다.
대롱옥목걸이는 바로 옆 엘리베이터 모서리에 걸어둔 모양새다.
지하철역 내부 벽면에는 유물 발굴 장면을 재현한 평면 그래픽(래핑)을 트릭아트 형식으로 전시했다.
전시를 기획한 '광고 천재' 이제석씨는
"이 지역은 구석기~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선사 유물이 대거 발견된 사상 유례없는 곳으로,
하늘의 축복과 행운임을 알리고자 '로또 맞은 동네'라는 콘셉트로 기획했다"며
"땅속 깊이 잠들어 있는 역사가 땅 위로 나와 이 지역에 역동적인 생명력을 불어넣기를 바란다"고 했다.
진천역 일대는 구석기에서 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다수 출토됐고,
선사유적공원과 선사시대로(路) 등이 조성돼 있다.
거리 박물관과 함께 떠나는 시간 여행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 3호선 안국역은 독립운동 역사와 만나는 정거장으로 변신했다.
안국역은 3·1운동의 중심지이던 북촌과 인사동을 잇는 연결 거점이면서
인근에 여운형, 손병희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집터가 있는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를 표현한 '100년 하늘문'(4번 출입구)을 시작으로 지하 2층에서는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100초 동안 만날 수 있는 '100년 기둥'과 3·1운동과 민족사의 흐름을 구성한 '100년 강물',
헌법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100년 헌법' 등의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승강장이 있는 지하 4층에선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새겨진 '100년 걸상'과
스크린도어에 새겨진 독립운동가의 얼굴과 어록을 볼 수 있다.
부산 2호선 해운대역에선 바닷속 세상을 만난다.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해운대해수욕장으로 통하는
지하철역답게 바다를 모티브로 한 아쿠아 테마 역사다.
지난 8월 씨라이프부산아쿠아리움과 함께 만든 아쿠아 테마 역사는
해운대해수욕장과 연결되는 1·3번 출입구를 중심으로 인어와
바다 생물이 있는 해저 이미지를 래핑하고,
미디어파사드로 역사 벽면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생생하게 구현했다.
실제 촬영한 아쿠아리움 수족관 영상도 볼 수 있어 '지하철역 속 아쿠아리움'에 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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