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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유적ㆍ유물ㆍ문화재 등

김여물(金汝岉) 장군 묘 및 신도비(神道碑)

by 맥가이버 Macgyver 2021. 1. 24.

김여물(金汝岉) 장군 묘

 

 

김여물(金汝岉) 장군 및 김류 신도비(神道碑)

 

김여물(金汝岉) 장군 묘 및 신도비(神道碑)

 

김여물[1548(명종 3)1592(선조 25)]장군은 안산시 단원구 와동 141번지에 있는 사세충열문의 오른쪽 방에 충신정려문이 모셔져 있다. 와동초등학교 바로 옆이어서 찾아가기가 쉬운편이다. 신도비는 사세충열문이 있는 공원의 왼쪽편에 아들 김류(金瑬)의 신도비와 함께 나란히 서 있고, 묘는 사세충열문 뒤로 5분정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김여물은 원래는 무관출신이 아닌 문관출신이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충신으로, ()는 사수(士秀), ()는 피구자(披裘子), 외암(畏菴),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의 아들이며 영의정(領議政) 김류의 부친이다.

 

1567(선조 즉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선조 10)에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문무를 겸전했으나 성품이 호탕하고 법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높은 벼슬자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충주도사(忠州都事)를 거쳐 담양부사를 지냈고, 1591년에는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그가 무략에 뛰어난 것을 알고 옥에서 풀어 자기 막중(幕中)에 두려고 하였으나,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그의 재능과 용기가 뛰어나고 충의로운 선비임을 알고 자기의 종사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간청하여 신립과 함께 출전했다.

 

신립이 단월역(丹月驛: 현재의 충주 단월역)에 이르러 몇 명의 군졸을 이끌고 왜적의 북상로인 조령(鳥嶺)의 형세를 정찰할 때 상주(尙州)에서 패주해온 순변사 이일(李鎰)을 만나 조령 방어의 어려움을 알고 충주로 나아가 배수의 진을 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것을 반대하고 많은 적을 적은 수의 군사로 물리치는 데는 먼저 조령을 점령하여 지키는 것이 좋고, 그렇지 못하면 평지보다는 높은 언덕을 이용하여 왜적을 역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결국, 충주의 달천(㺚川)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치고 신립을 따라 탄금대(彈琴臺)아래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왜적을 당하지 못하여 강에 투신, 순국하였다.

 

그는 충주싸움의 패배를 예견하고 아들 유에게 삼도(三道)의 근왕병(勤王兵)을 요청했으나 한 사람도 이에 응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이 힘을 다해 싸우나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안타깝다. 남아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본시 바라는 바이지만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또 장한 뜻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갓 재가 되어버리니 하늘을 우러러 한숨만 지을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가족에게는 내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우리 일가는 모두 임금님의 행재(行在)로 가서 돕되 결코 난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광해군초에 충절로써 정려(旌閭)되었으나, 인조반정 뒤에 종래의 포상에 의심스러운 데가 많다고 하여 고쳐진 일이 있으나 1639(인조 17)에 그의 아들 유의 청에 의하여 다시 정표(旌表)되었다.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1788(정조 12)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순조 때에는 신립 등과 함께 임진왜란 때 순의(殉義)한 충주 달천의 옛터에 제사를 지내 충절을 기렸다.

 

김여물의 묘는 호석을 두른 원형의 봉분 앞에 구묘표와 신묘표가 나란히 있고, 상석, 향로석, 동자석 2, 망주석 2, 문인석 2쌍이 있다. 신도비의 규모는 이수 86×38×76cm, 비신 159×73×26cm, 기대석 140×90×70cm이다. 이수(離首)와 비신은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수에는 앞뒷면에 용이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희롱하는 장면을 조각하였는데 역동감이 넘친다. 기대석에는 초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 신도비는 김상헌(金尙憲)이 찬()한 것이다.

김여물 장군 묘와 신도비는 199111월 안산시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글 : 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우리고장 문화유산 이야기 (18)

 

출처 : 안산시 역사와 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