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0일(토) '아산 탕정둘레길 1구간ㆍ2구간ㆍ3구간ㆍ4구간 이어 걷기 & 아산 지중해마을 탐방'을 다녀오다.
'아산 탕정둘레길 1구간ㆍ2구간ㆍ3구간ㆍ4구간 이어 걷기 & 아산 지중해마을 탐방' 코스
배방역→구령2리→한내대교→아산지중해마을→탕정면사무소→삼성고 사거리→충남외고→호산(비석산) 정상→덱스솔루션 앞→정좌마을 표지석→명암3리 경로당→약불사→169.5봉(처마바위)→국사봉 정상→명암고개→삼성SDI기숙사→송전탑→작은봉→꾀꼴산성→꾀꼴산 정상→송전탑 쉼터→물한산성(물앙성)→물한산(물앙산) 정상→홍가신묘(홍가신기념관)→홍가신신도비→대동삼거리→이마트24→용두2리→용두1리→탕정우체국→탕정면사무소→지중해마을→한내대교→구령2리→배방역
'아산 탕정둘레길 1구간ㆍ2구간ㆍ3구간ㆍ4구간 이어 걷기 & 아산 지중해마을 탐방' 이야기를 시작하며...
오늘은
아산 탕정둘레길 1구간ㆍ2구간ㆍ3구간ㆍ4구간 이어 걷기 & 아산 지중해마을 탐방을 여정으로 길을 나선다.
일단 배방역에서 아산 탕정둘레길의 시점인 탕정면사무소까지 걷기로 한다.
시점인 탕정면사무소로 가기 전에 지중해마을을 잠시 둘러 보고...
탕정면사무소 옆에 있는 아산 탕정둘레길 코스 안내도 앞에서 시작한다.
1구간 호산(비석산) 코스와 2구간 국사봉 코스는 잘 찾아 걸었는데...
2구간을 잘 마치고 3구간 시점인 삼성SDI기숙사 부근에서 잠시 고민을 한다.
탕정둘레길 시점인 탕정면사무소에서 찍은 탕정둘레길 종합안내도를 보면
16번에서 삼성SDI기숙사 담을 따라 걸어서 17번이 있는 동암리 412-3번지로 가야한다.
그런데 가다보니 주변의 산자락을 깎아내리는 공사를 하는 중이다.
해서 가기 전에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가다가 꾀꼴산 등산로를 만나 작은봉에 오른다.
작은봉(284m)에 오르니 19번이 있다.~
이후는 탕정둘레길 3구간 코스 따라 걸으며 꾀꼴산(성)과 물한산(성)을 거쳐
3구간 날머리에 홍가신묘와 홍가신 신도비도 둘러보고
4구간 도로길을 따라 탕정면사무소로 원점회귀하여
아산 지중해마을을 둘러보고 배방역까지 걸었다.~^^
▼ 꾀꼴산 정상에서...
홍가신 洪可臣
조선시대 한성부우윤,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시대 : 조선
출생 : 1541년(중종 36)
사망 : 1615년(광해군 7)
경력 : 한성부우윤,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관련 사건 : 정여립의 옥사
직업 : 문신, 학자
대표작 : 만전집, 만전당만록
성별 : 남
본관 : 남양(南陽)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아버지는 홍온(洪昷)이며, 어머니는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 1571년(선조 4) 강릉참봉(康陵參奉)이 되었을 때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되고 이어 형조좌랑·지평을 거쳐 1584년 안산군수를 지냈다.
1588년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공이 있어 표창을 받았으나 평소에 정여립(鄭汝立)과 가까이 지낸 이유로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파직 당하였다.
1593년 파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홍주목사로 부임해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해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강화부사·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지내고, 1604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초 장례원정·한성부우윤 겸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1610년 형조판서에 이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아산에서 죽었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주로 사문(師門)의 촉망을 받았으며, 체계있는 학문을 전수받아 문장으로서 조직적인 화실(華實)의 매력을 갖춘 외에 성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문(斯文)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이기(理氣)의 본질을 우주의 본질로서 간파해 기와 이로 보고, 기와 이의 순환 과정에서 만물이 생성하며 음양으로 조화, 분리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동조하였다.
또한 생사분리(生死分離)를 주장하는 노자철학과 인간 생명을 허무적멸(虛無寂滅)로 떨어뜨리는 불교관을 배척하였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봉안되어 있다. 저서로는 『만전집(晚全集)』과 『만전당만록』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壯)이다.
참고문헌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선조실록(宣祖實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가신 묘 [ 洪可臣墓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홍가신의 묘.
개설
홍가신(洪可臣)[1541~1615]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1596년 홍주목사 재임 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해 난을 평정해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학문에도 깊이가 있었으며, 형조판서를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홍가신 묘는 홍가신이 살았던 마을의 선영에 있다.
위치
홍가신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남양홍씨 문장공파 종중 묘역에 있다. 곡교천 북쪽의 지방도 624호선[이순신대로]의 백암교차로에서 북쪽 마을 길로 접어들어 백암2리 마을회관 등을 지나 2.3㎞ 가면 대동리 마을회관 앞 삼거리에 이르는데, 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용두천 옆길을 따라가다 300m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 100여m를 가면 홍가신기념관이 나온다. 홍가신 기념관에서 오른쪽 뒤에 종중 묘역이 있다. 현충사 뒤가 되며, 음봉면과의 경계가 되는 물한산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자락 남향 사면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홍가신 묘는 선영 상단의 부모 묘 가까이에 있다.
형태
홍가신 묘는 부인 재령이씨(載寧李氏)[1540~1615]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 봉분은 현대에 설치한 호석(護石)으로 둘려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동자석이 설치되어 있다. 동자석은 대리석으로 제작되었으며, 쌍계(雙髻)가 표현된 전형적인 동자석의 모습이다.
봉분 왼쪽으로 신·구(新·舊) 묘표 2기가 건립되어 있다. 구 묘표는 앞면에 ‘숭정대부 영원군 치사 홍공가신지묘. 정경부인재령이씨부좌(崇政大夫寧原君致仕洪公可臣之墓. 貞敬夫人載寧李氏祔左)’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홍가신이 1608년에 직접 지은 자명(自銘)이 새겨져 있다. 홍가신은 선영 아래로 은퇴해 머물면서도 ‘우국망가(憂國忘家)[나라에 대한 걱정에 집안조차 잊고]’, ‘백수단충(白首丹衷)[머리는 희어도 마음은 붉다]’라고 소회를 기록하였다. 이 묘표는 1770년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비석 받침[비좌]과 윗부분이 둥근 원수형(圓首形) 몸돌[비신] 모두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
금관조복(金冠朝服)을 갖춘 문인석은 17세기 중반경의 양식이며, 망주석도 문인석과 제작 시기가 같다. 그러나 문인석은 동자석과 조각 솜씨, 재질 등 큰 차이가 있어 제작 시기와 장인은 다르다고 추정된다.
현황
홍가신 묘는 근래에 묘역을 정비하면서 봉분에 새로 호석을 두르는 등 일부가 원래 모습에서 변형되었다.
의의와 평가
홍가신 묘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조선 후기 사대부 묘의 품격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동자석은 지역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며, 문인석은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 있는 이귀(李貴) 묘 문인석과 양식적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충청남도 지역 문인석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
참고문헌
『만전집(晩全集)』
『문화유적분포지도』-아산시(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2003)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홍가신 신도비 [ 洪可臣神道碑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만전당길120번길 25[대동리 76]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 유적/비
시대 : 조선/조선 후기
개설
홍가신(洪可臣)[1541~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신도비는 2품 이상의 고위 문무 대신의 묘 앞에 세우도록 되어 있는데, 홍가신 신도비는 홍가신의 사후 증직(贈職)으로 묘 앞에 세워졌다.
건립 경위
홍가신 신도비의 비문은 홍가신의 아들 홍절(洪楶)이 조경(趙絅)[1586~1669]에게 부탁하였는데, 조경이 비문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손자 홍우원(洪宇遠)이 다시 청하여 1657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비문 완성 이후 61년 만인 1717년에 홍가신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위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76번지, 홍가신 묘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400m 정도 떨어진 산줄기 끝자락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대동리 황골마을 진입로와 탕정면 용두3리 산골마을 진입로의 갈림길에서 오른쪽 산골마을 북쪽으로 200m 정도 올라간 지점의 길 왼쪽에 보인다.
형태
홍가신 신도비는 비석 받침으로 천연 암반 상단을 다듬어서 비좌(碑座)를 얕게 만들고, 그 위에 비신(碑身)과 지붕돌[蓋石]을 올렸다. 비신은 4면에 모두 글씨를 새겼으며, 비신 상단을 둘러 ‘판서치사증우의정 시문장공 만전홍선생 신도비(判書致仕贈右議政諡文莊公晩全洪先生神道碑)’라는 내용을 전서(篆書)로 새겼다. 지붕돌은 비석의 규모에 비해 낮게 제작되었으며, 위쪽에는 용마루와 추녀마루 등을 조각하고, 아래에는 수평부재를 얕게 새겼다. 홍가신 신도비는 높이 241㎝, 폭 100㎝, 두께 42㎝이다.
금석문
홍가신 신도비의 비문은 ‘판서치사증우의정 시문장공 만전홍선생 신도비(判書致仕贈右議政諡文莊公晩全洪先生神道碑)’이며 조경(趙絅)이 지었다. 비문 글씨는 김세흠(金世欽)이 행서(行書)로 쓰고, 전자(篆字)는 권규(權珪)가 썼다.
의의와 평가
홍가신 신도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공신인 만전당(晩全當) 홍가신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 자료이다. 큰 바위 위에 비석을 세운 점도 특별하다. 홍가신은 홍주목사 재임 중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가족을 홍주성으로 데리고 와서 결전의 의지를 보였고, 고을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난을 평정하게 되었다. 사후에 홍주에서 신격화되어 백월산의 제당에 모셔질 만큼 민심을 얻었던 홍가신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만전집(晩全集)』
『용주유고(龍洲遺稿)』
『문화유적분포지도』-아산시(충청남도·충남발전연구원, 2003)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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