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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만큼 보이는 제주 동부 여행] 돌담 너머 흐드러진 ‘6월의 수국’ 보러 종달리로 갔다… 걸어도 걸어도 좋았다

by 맥가이버 Macgyver 2021. 6. 20.

[걷는 만큼 보이는 제주 동부 여행] 돌담 너머 흐드러진 ‘6월의 수국’ 보러 종달리로 갔다… 걸어도 걸어도 좋았다

 

6월의 종달리는 마을 전체가 수국으로 물들어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제주에 수국을 보러 갔다. 유월이니까 말이다. 작년 겨울, 제주에 한 달 내려와 있던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제주는 유월에 오셔야 해요. 수국이 피니까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 말은 마음속에 심겨 있다가 어느 순간 발아했다. 유월이 되자 그 말이 떠올랐고, 수국을 보기 위해 제주에 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매화 때문이었다. 작년 겨울, 제주에서 나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한 달 제주에 내려온 것은 좋았는데, 겨울이라는 계절이 문제였다. 또 운치를 원해 제주 농가 주택을 택한 것도 문제였다. 잘 고쳐 놓은 집이었고, 벽난로도 있었고, 장작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벽난로는 번거로웠고, 집은 추웠다. 마음은 움츠러들었고,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건지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매화를 보는 순간 그 억울함이 사라졌다. 이 모든 추위와 바람을 견디고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매화를 보며 겨울의 제주를 용서하게 됐달까.

제주엔 바다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산이 있고, 밭이 있고, 돌담이 있고, 오름이 있고, 도시가 있고, 마을이 있다. 그런데 꽃이 그렇게나 결정적인 줄 몰랐다. 제주의 매화는, 내가 보던 매화와 달랐던 것이다. 현무암으로 된 지반 위에서 내륙과는 다른 스타일로 번성하는 나무와 풀이 더해져 그때의 매화는 강렬하게 남았다. 일월의 동백만큼이나 이월의 매화는 절대적이었고, 이번에 본 유월의 수국도 그랬다. 수국을 보러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보아온 수국과 앞으로 보게 될 수국을 더해도 이번에 본 수국에는 못 미칠 것이다. 유월에 제주에 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201번 버스 타고 가는 동부해안길

제주는 꽤나 넓은 곳이다. 그래서 오래 머무는 게 아니라면 하나의 주제나 권역에 집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동서남북 중 한 곳을 찍어도 좋고, 한라산도 좋고, 해안을 따라 제주 바다를 일주하는 것도 좋겠다. 이번에 나는 수국을 보기로 했으니 수국에 집중하기로 했다. 제주 동쪽에는 ‘종달리’라는 마을이 있고, 이 마을은 수국을 보러 온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 중 하나다. 그래서 숙소를 이쪽으로 잡았고, 종달리에서 가까운 곳들에 다녀오기로 했다.

일단 제주공항에 내려 렌터카로 이동하든 버스를 타든 동쪽으로 가야 한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최단 경로로 가야겠지만, 나는 제주 동쪽의 해안도로를 끼고 천천히 가는 길을 추천한다. 함덕 – 북촌 – 동복 – 김녕 – 월정 – 한동 – 평대 – 세화 – 하도 – 종달 – 성산에 걸쳐 있는 그 길을 나는 좋아한다. 차들도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잠시 바다에 한눈을 팔아도 위험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다면 차를 세우기도 좋다. 그러다 해녀들이 운영하는 시흥해녀의집이나 종달해녀의집 같은 데 들러 조개죽이나 전복물회를 먹어도 좋을 것이다. 자리돔이 제철을 맞았으니 제주의 특산물인 자리물회를 한 그릇 해도 좋다.

숙소를 정하지 않았다면?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조금 더 천천히 가도 된다면, 간선버스인 201번 버스를 타는 것도 좋다. 조천 – 함덕 – 북촌 – 동복 – 김녕 – 월정 – 행원 – 한동 – 평대 – 세화 – 하도 – 종달 – 성산이 노선이다. 어느 정류장에 내려도 밥집이 있고, 서점과 작은 가게와 카페가 있다. 이렇게 길게 제주의 동쪽에 이르는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경로 자체가 제주를 깊게 느끼는 방법 중 하나라 그렇다.

 

세화해변의 바다는 눈이 시리도록 맑다. /제주관광공사

 

이 길로 가다 보면 세화리가 나온다. 세화해수욕장을 목적지로 잡아도 좋고, 날짜가 맞는다면 세화오일장을 구경해도 좋다. 뒤에 0과 5가 오는 날이 세화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다. 제주에 도착했을 때 장에 간다면 블루베리나 애플망고 같은 제주산 과일을 사서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먹으면 좋고, 돌아올 때 들르게 된다면 해산물이나 건어물, 농산물 같은 걸 사기에 좋다.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금방 돌아볼 수 있다.

 

세화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곳곳에서 해안가 마을을 만나게 된다. /제주관광공사

 

그리고 세화는 ‘리(里)’답게 꽤나 규모가 커서 상권이 잘 발달돼 있는 편이다. 주민, 단기 여행객, 한 달 살이를 하러 온 사람, 제주에 왔다가 가게를 차린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식당과 카페의 선택 폭이 넓다. 세화에 처음 갔다가 풀무질 서점을 발견하게 되어서 그 동네를 좋아하게 되었다. 제주에 대한 책이 잘 모여 있고, 오랫동안 공을 들여 큐레이션한 인문 서가가 있는 그 서점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알고 보니 성균관대 앞에서 같은 이름의 서점을 운영하던 사장님이 제주로 내려와 문을 연 서점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서점에 갔을 때 손님들이 많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세화리에 있는 풀무질 책방에는 다양한 인문 서적이 모여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해녀 박물관에는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일했던 과거 해녀들의 삶이 잘 복원돼 있다. /제주관광공사

 

조금 걸으면, 해녀박물관이 있는데 해녀의 삶에 관심이 있다면 들러 봐도 좋을 것이다. 제주 음식에 대한 책을 보다가 제주의 여자들은 요리보다는 먹거리를 구하는 일이 우선이었다는, 그래서 해녀가 그렇게 많을 수밖에 없다는 글을 보고 가서인지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해녀박물관은 제주올레 21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해서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바다를 왼쪽에 끼고 종달리 해변에 이를 수 있다.

제주올레 코스 곳곳에 놓여 있는 표시판.

 

◇밥집 담벼락에도 수국이 피었습니다

이렇게 천천히 걸어도 좋겠지만, 종달리의 수국을 빨리 보고 싶다면 종달리 해안도로 종달리 수국길을 목적지로 삼으면 된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아도 길에 수국이 만발하고, 수국을 포토월 삼아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수국을 보느라 차들이 천천히 움직인다. 한곳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도 좋고, 천천히 움직이는 차들의 속도에 맞춰 수국을 보면서 지나가도 좋다.

 

종달리의 수국길은 해안을 끼고 있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곧 알게 된다. 수국은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동네 밥집의 담벼락에, 소로에, 찻길 옆에 여기저기 수국이 만개해 있어서 궁금해진다. 제주 같은 기후에서 수국이 잘 자라는 건지, 제주의 해풍이 수국의 생장에 도움이 되는 건지 등등 수국의 생태에 대해 궁금해지는 것이다. 종달리는 걷기 좋은 동네다. 길도 넓고, 주민들이 여전히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고, 그 동네의 매력에 빠져 눌러앉은 외지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천천히 걸으며 여기저기 살펴보기 좋다. 동네 여기저기에 서울이라면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로 지정되었을 것 같은 커다랗고 수형도 근사한 나무들이 있어서 놀라게 된다.

◇오름 사이에 숨겨진 빈티지 서점들

세화와 종달의 중간 정도에 송당이라는 동네가 있다. 세화와 종달이 바다를 끼고 있다면 송당은 내륙이다. 종달에서 송당으로 오는 길에 좌우로 펼쳐지는 끝없는 초록과 크고 작은 둔덕들,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을 보면 내륙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크고 작은 둔덕 중 많은 것들은 오름이다. 송당은 오름의 동네고, 크지 않은 규모의 송당 시내를 걸어서 둘러보면 재미있는 가게들을 발견한다. 파앤이스트는 빈티지 물건을 파는 가게로, 갈 때마다 주인의 안목이 남다르다고 생각하게 된다. 서실리서점도 느낌이 좋은 곳이다. 서점의 운영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주인은 서점이 언제 여는지도 인스타그램이나 인터넷의 서점 정보에 등록해놓지 않았는데, 여쭤보니 한 시에 열어 여섯 시에 닫는다고 한다.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무. 제주에 대한 책, 환경과 생태에 대한 책, 그리고 주인이 좋아하는 소설가들의 책으로 되어 있는데 오랜 시간 책을 읽어온 사람의 내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송당리의 제주살롱은 1층은 책방으로, 2층은 북스테이 공간으로 쓰인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오 분 정도 걸으면 제주살롱이라는 서점이 나온다. ‘인문서점’을 표방하고 있는 이곳은 신간도 있지만, 주인의 취향으로 고른 인문서들이 있어 둘러보며 놓친 책이 있나 보기 좋다. 주인이 직접 만드는 빵과 쿠키도 수준급이다. 2층은 ‘생각의오름’이라는 북스테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제주를 걸으며 혼자 여행하는, 그리고 책도 좋아하는 여성 여행자들이 주요 고객이라고 한다. 수·목요일 휴무.

 

송당에 위치한 비자림은 비 오는 날 걷기 좋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송당에서 가기 좋은 곳으로 비자림 스누피가든도 있다. 비 오는 날의 비자림이 특히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내가 그 동네에 갈 때마다 비가 오지 않아 아직 못 가고 있다. 망설이다가 스누피가든에 갔다. 나는 스누피가 나오는 만화 ‘피너츠’를 잘 모르고, 그래서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 루시 같은 등장인물의 이름 정도만 아는 데다가, 키덜트 취향도 아니라서 그랬는데···. 감동하고 말았다. 이곳이 품고 있는 이야기와 정교함, 디테일, 그리고 완성도에 말이다. 실내 전시장도 좋았지만 실외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가든’에서 놀랐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데, 어디 하나 허투루 만들지 않았고, 이곳에 심긴 다양함을 넘어선 수종의 나무들을 보면서 다른 계절에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온종일 있는다고 해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 곳이었다. 걸어도 걸어도 좋았다.

 

스누피가든의 실외 전시장 모습. /제주관광공사

 

◇제주를 느낄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 올레

제주를 가장 편하게(그러니까 고민 없이) 걷는 방법은 제주올레를 걷는 것이다. 제주의 바다와 오름과 마을을 지나며 걸을 수 있어 단조롭지 않고, 걷는 이가 꽤나 많아 혼자 걸어도 혼자 걷는 느낌이 아니다.

제주올레를 만든 이들은 친절하게도 스물여섯 코스를 짜놓았다. 나는 ‘오늘은 제주올레 6코스를 걷겠어!’라며 제주올레 코스를 작정하고 걸은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어딘가를 걷다 보면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제주올레라는 표지를 발견하게 된다. 나무에 매달린 빨간 천과 파란 천이 겹쳐진 데를 보면 ‘JEJU OLLE’라고 쓰여 있다.

 

제주올레 21코스를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토끼섬. 6월이면 문주란이 활짝 핀다. /제주관광공사

 

올레꾼들은 올레 걷기를 목표로 제주를 가는 사람들이다. 올레 코스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일어나자마자 걸어 해지기 전까지 걷는다. 제주올레는 총 26코스로, 모두 걸으면 425km라고 하는데, 이 코스를 완주하겠다는 목표로 걷기도 한다. 제주올레 패스포트(여행 증명서)가 있는 사람들도 있다. 코스의 시작과 중간, 종점에서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어주는데, 26코스의 스탬프를 모두 찍으면 완주 증서와 완주 메달을 받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버킷리스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최근엔 100km 이상만 걸어도 완주 증서를 준다는 얘길 들었다.

제주 동부권의 올레는 김녕부터 하도까지 걸쳐 있는 20코스와 하도부터 종달까지 연결되는 21코스, 시흥부터 광치기 해변까지 이어져 있는 1코스다. 이 세 코스를 합하면 44km. 연달아 걸을 수도 있는데 빨리 걸으면 13시간, 천천히 걸으면 15시간이 걸린다. 올레는 제주말로 ‘골목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제주=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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