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9일(수)
종각역 원점회귀하는 보신각터ㆍ청계광장ㆍ광화문광장ㆍ의정부터ㆍ송현광장ㆍ우정총국ㆍ조계사ㆍ보성사터ㆍ종로타워 이어 걷기를 다녀오다
'종각역 원점회귀하는 보신각터ㆍ청계광장ㆍ광화문광장ㆍ의정부터ㆍ송현광장ㆍ우정총국ㆍ조계사ㆍ보성사터ㆍ종로타워 이어 걷기' 코스
종각역 4번 출구→3ㆍ1독립운동기념터 표석→보신각ㆍ보신각터→보신각 앞 지하철 수준점→영풍문고→서린동 유적3호 건물지→모전교→청계천 시점폭포→청계광장→소라탑→일민미술관→세종대로사거리→광화문광장→명량분수/이순장군동상→광장숲→한글분수→문화쉼터→세종대왕동상→사계정원→시간의정원→잔디마당→광화문교차로→의정부터→4월민주혁명 50주년 기념탑→동십자각 지하보도→동십자각→종로문화원→열린송현녹지광장(감성 한 조각 전시장)→안국동사거리→한성도서주식회사터 표석→전의감터 표석→서울 우정총국→도화서터 표석→민영환집터(조계사 경내) 표석→조계사(서울 수송동 백송)→보성사터 표석→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터 표석→목은이색선생영당→옥파 이종일선생 동상→중동학교(현 중동고) 옛터 표석→신흥대학(현 경희대)터 표석→숙명여학교 옛터 표석→보성사터 기념물→용동궁터 표석→수진궁 유적안내→공평도시유적관 앞→종로타워 앞→종각역(종각역 태양의 정원)
오늘은
'종각역 원점회귀하는 보신각터ㆍ청계광장ㆍ광화문광장ㆍ의정부터ㆍ송현광장ㆍ우정총국ㆍ조계사ㆍ보성사터ㆍ종로타워 이어 걷기'를 위해 길을 나선다.
▼ 열린송현녹지광장(감성 한 조각 전시장)에서
우정총국 / 郵征總局
시대 : 근대
성격 : 관청
유형 : 제도
시행일 : 1884년(고종 21) 3월 27일(음력)
폐지일 : 1884년(고종 21) 10월 21일(음력)
분야 : 역사/근대사
요약
조선 말기 우체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내용
1884년(고종 21) 3월 27일에 설치되고, 3월 28일 책임자로 홍영식(洪英植)이 임명되어 법령을 마련하는 등 개국 준비를 하였다.
그 해 10월 1일 처음으로 우체 업무를 시작하였다.
직제는 총판(總辦)·방판(幇辦) 각 1인과 그 아래에 3과 15부를 두었다.
3과는 규획과(規劃課)·발착과·계산과였다.
1884년 5월에 일본인 실무자 2명을 고용하였다.
중앙에 우정총국을 두고 각 지방에 우정분국(실제로 인천에 인천분국을 설치하였다.)과 우정수취소(郵征受取所)·우초매하소(郵鈔賣下所)를 설치하도록 계획되었다.
우정총국 청사는 전동(典洞)에 있었다.
독립기구로 설치되었으며, 다른 관청과의 관계는 알 수 없다.
1884년 12월 8일(음력으로 10월 21일)에 폐지됐는데, 12월 4일(음력으로 10월 17일)에 우정국 개설축하연을 이용해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나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폐지된 이후에도 우체 업무는 계속되어, 실제로 우체 업무가 마감된 것은 음력 11월 20일이었고 인천분국은 음력 12월 1일에야 폐쇄되었다.
의의와 평가
폐지 이후 부활 논의도 있었지만 1893년에 가서야 전우총국(電郵總局)으로 이어졌고, 이후 1894년 공무아문역체국, 1895년 농상공부통신국, 1900년 통신원 등으로 이어졌다.
우정총국은 최초의 근대식 우체기관이라는 점과 갑신정변과의 관련 등이 강조되기 쉽지만 그 한계 또한 적지 않았다.
즉, 우정총국은 국내우체 업무보다 국제우체에 주력한 것 같은데, 국내우체 업무 시작 이전에 이미 외국과의 우체물 교환조약 체결을 추진해, 4월에 일본·홍콩과 약정을 맺었고, 만국우편연합(UPU) 가입도 추진하고 있었다.
1876년 11월 부산에 우편국을 설치한 이래 조선에 독자적인 우편선로를 가지고 있던 일본의 우편조직을 없애려고 했던 점은 인정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계사 / 曹溪寺
건립시기 : 1910년
성격 : 사찰
유형 : 유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분야 : 종교·철학/불교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창건된 사찰.
개설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무원과 종회사무처(宗會事務處)가 본부를 두고 있는 포교전법도량(布敎傳法道場)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의 직할교구 본사이다.
역사적 변천
이 절은 이전의 중동중학교 자리에 있었던 각황사(覺皇寺)를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은 것이다.
1910년 전국 승려들의 의연금으로 창건한 각황사는 원흥사(元興寺)에 있던 조선불교중앙회무소(朝鮮佛敎中央會務所)를 옮겨 왔다.
1915년 초 포교와 교육사업의 일원화를 위해 각황사에 30본산 연합사무소를 설치하였고, 1922년 1월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총무원을 설치했으나, 같은 해 5월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이 설치됨에 따라 각황사 안에는 상반된 두 개의 종무기관이 존립하게 되었다.
1925년 총무원과 교무원은 타협을 보고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어 통일적인 중앙 통할의 종무기구가 세워졌다.
1929년 1월 3일 104명의 승려가 각황사에 모여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를 열어 종헌을 비롯한 교무원 규정·교정회법(敎正會法)·종회법(宗會法) 등을 제정하였다.
1937년 3월 각황사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는 공사를 착공하여 1938년 10월 준공한 뒤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여 절이름을 태고사라고 하였다.
그 뒤 불교계의 중심 사찰로 명맥을 이어 오다가 1955년 불교계의 정화운동이 일단락된 뒤 태고사를 조계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대한불교조계종의 행정 중심 사찰이 되고 있다.
내용
이 절의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덕왕전(德王殿)·불교회관·불교정화기념관 등이 있다.
대웅전은 1910년에 건립된 법당으로, 크기는 조선시대의 왕궁 건축과 비길 만하지만 그 양식은 조잡하여 미술적 가치는 별로 없다.
다만, 문(門)의 조각과 사면조각(四面彫刻)이 특이하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있다.
법당 뒤뜰의 불교회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현대식 콘크리트건물로 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한국청년불교연합회·성자 이차돈선양회·전국신도회·군법사단(軍法師團)·중앙종회사무처(中央宗會事務處)·불교신문사·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등이 있다.
그리고 2층 건물인 불교정화기념관(佛敎淨化記念館)은 1955년의 불교계 정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에 건립한 건물로, 조계사 사무실과 포교원, 승려들의 숙소로 쓰고 있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종각·범종·사리탑비와 7층석탑 1기가 있다.
1층 목조건물이었던 종각은 1973년 8월에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여 2층 6각으로 개축하였다.
사리탑비는 1930년 스리랑카의 달마파라(達摩婆羅)가 부처의 진신사리 1과(顆)를 가져와 승려 대표 김금담(金錦潭)에게 전해준 것을 기록한 비명이고, 7층의 석탑은 달마파라가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또, 경내에는 수령 약 500년으로 추산되는 백송(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과 수령 약 400년의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 조계사 수송동 백송 / 서울 曹溪寺 壽松洞 白松
유형 생물
분야 과학/식물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백송.
내용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알 수 없다.
백송은 소나무과에 딸린 상록교목이며 원산지에서는 높이 25∼30m까지 자란다고 한다.
높이 10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 1.64m이며, 7m 정도 높이에서 7개로 갈라졌으나 조계사 대웅전쪽으로 향한 3가지만 살아남아 있다.
가지의 길이는 7m 정도이며 빈약한 성장상태이다.
조선시대 중국을 내왕하던 사신들이 종자를 가져다가 심었다.
수세(樹勢)가 약화되고 줄기의 상처 부위가 썩어가기 때문에 1979년 외과수술을 실시한 결과 수세는 좋아졌으나 수형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계사대웅전 / 曺溪寺大雄殿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문화재 지정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7호
건립시기 : 일제강점기
성격 : 건축, 불교건물
유형 : 유적
면적 : 앞면 7칸, 옆면 4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수송동)
분야 : 예술·체육/건축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조계사의 중심 불전.
개설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을 펼쳤던 보천교(普天敎)가 전라북도 정읍에 건립한 건물로, 1937년에 탄압을 받아 해산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옮겨 세웠다.
역사적 변천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조선의 모든 사찰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원찰인 박문사(博文寺)에 귀속하고자 하였다.
만공(滿空) 월면(月面, 1871~1946)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등은 이에 저항하며, 조선 불교의 통합을 위해 총본산 건설운동을 추진하였다.
특히 1935년에 열린 전국 31곳의 본사 주지회의에서는 총본산 건설의 원칙으로 ‘순 조선식 법당’을 중심 불전으로 건립하도록 결정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보천교는 민족운동을 펼치면서, 1925년에 본거지인 전라북도 정읍에 십일전(十一殿)을 건립하였다.
이 건물은 전통적인 양식을 갖추면서도 일제의 신사(神社)에 뒤지지 않는 규모였다.
당시 불교계는 십일전을 지금의 조계사인 각황사(覺皇寺)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1937년 3월에 1만2000원으로 건물을 산 다음, 3월 26일∼5월 5일에 해체하면서 4월∼5월 중순에 부재를 옮겼다.
공사는 1938년 10월 중순 경에 마무리되었고, 25일에 낙성봉불식을 열었다.
그 뒤 2004년에 대들보를 교체하고 활주를 제거하는 등 해체 수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내용
이 건물은 당시에 궁궐 목수로 불렸던 최원식(崔元植)이 도목수를 맡아 건립하였다.
앞면 7칸, 옆면 4칸의 1층 건물로, 팔작지붕을 올렸다.
공포는 내7출목, 외5출목으로, 기둥의 중간에도 공포를 배치한 다포식 구조이다.
건물 안에는 앞뒤로 1줄씩 고주(高柱)를 세웠으며, 7개의 도리로 지붕을 지지하게 하였다.
상량문은 권상로(權相老, 1887~1965)가 지었으며, 낙성에 맞추어 도갑사에서 옮겨온 조계사 목불좌상(曺溪寺 木佛坐像,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26호)을 봉안하였다.
이 불상은 일섭(日燮, 1900~1975)이 제작한 것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함께 지녔다.
하지만 건물의 규모에 비해 불상의 크기가 작아, 최근에 목조삼세불좌상을 봉안하고서, 그 오른쪽에따로 불단을 설치하여 모시고 있다.
특징
이 건물은 조계사로 옮겨 지으면서 큰 변화를 주지는 않았지만, 기둥 아래에 높은 주춧돌을 세우고 4곳의 추녀 밑에 활주를 받치는 등 일부를 보강하였다.
높은 주춧돌을 놓은 것은 전통 건축 수법이지만, 일제강점기에 건물을 해체 수리할 때 기둥 밑둥이 썩는 것을 방지하려고 자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건물은 한국 불교의 상징인 조계사의 중심 불전으로, 1920년대에 건립된 1층 불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알려져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성사터 / 普成社 터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보성사는 1910년 말 창신사와 보성학원 소속 보성사 인쇄소를 합병하여 만든 천도교 계통의 인쇄소이다.
3.1운동 동시 2만 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보성사 사장이었던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 등과 함께 1919년 2월 27일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자신의 집으로 운반한 뒤, 다음날 전국 각지에 배포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보성사는 30평 2층 기와 벽돌집으로 전동 보성학교 구내에 있었으며, 보성사의 소유주이기도 했던 천도교 교주 의암 손병희의 특명으로 육당 최남선이 초안을 집필하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아 사장 이종일, 공장 감독 김흥규, 총무 장효근이 1919년 2월 27일 밤에 3만 5천 매를 인쇄하였다.
일본 측의 형사에게 발각되는 위기도 있었으나 족보책이라고 위장하여 위기를 넘겼다.
3월 1일에는 윤익선과 이종린, 이종일, 김홍규 등이 지하신문인 조선 독립신문 1만 부를 계속 발행하였다.
일경은 보성사를 즉각 폐쇄하였으며, 1919년 6월 28일 밤에는 불을 질러 태워버린 이후 터만 남아 오늘에 전한다.
보성사는 현 종로구 조계사 경내에 있으며, 기념비와 동상은 조계사 후문 맞은편 근린공원에 있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보성사 / 普成社
시대 : 근대
설립 : 1910년
성격 : 인쇄소
유형 : 단체
설립자 : 천도교
분야 : 역사/근대사
요약
1910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인쇄소.
내용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 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따라 동교(同校)에 속해 있던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이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간부는 손병희(孫秉熙)에게 보성사의 폐쇄를 건의한 적도 있었다.
보성사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1919년 3·1운동 때 발포된 독립선언서의 인쇄였다.
1919년 2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다.
그달 27일 사장 이종일(李鍾一)은 공장감독 김홍규(金弘奎), 총무 장효근(張孝根)과 같이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인쇄를 완료하였다.
총 2만 1000매의 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한 후 이종일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인쇄소의 작업소리를 듣고 형사 신승희(申勝熙)가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에 놀란 이종일이 형사의 옷자락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와 뒤에 손병희로부터 받은 5,000원을 주며 눈감아주기를 간청해서 위기를 넘겼다.
또 10시가 넘어 인쇄 완료된 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교당으로 가는 도중 일본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손수레의 짐은 인쇄된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옮길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무사히 은닉됨으로써 3·1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것으로 '종각역 원점회귀하는 보신각터ㆍ청계광장ㆍ광화문광장ㆍ의정부터ㆍ송현광장ㆍ우정총국ㆍ조계사ㆍ보성사터ㆍ종로타워 이어 걷기' 이야기를 마친다.
'종각역 원점회귀하는 보신각터ㆍ청계광장ㆍ광화문광장ㆍ의정부터ㆍ송현광장ㆍ우정총국ㆍ조계사ㆍ보성사터ㆍ종로타워 이어 걷기를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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