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02일(화)~03일(수) 중랑천 따라 옥수역에서 의정부역까지 밤샘 걷기를 다녀오다.
2006년 10월에 한강 100km울트라 도보일주를 위한 사전 답사와 일주시에 장안교까지만 걸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2007년 한강 100km울트라 도보일주의 사전 몸풀기로 중랑천만 따로 끝까지 완주를 하고자 계획하고...
약 9시간의 여정으로 옥수역에서부터 한강변을 따라 걷다가 중랑천 합수지점에서 중랑천을 따라 올라가고...
이전에 오르고 내리던 장안교를 지나 중랑천의 산책로가 나있는 마지막 구간인 의정부역까지 다녀왔다.
☞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 블로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 중랑천
<역사적 자료>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신북리 북쪽 계곡에서부터 시작되어 남쪽으로 흐르면서 의정부시의 광쟁이 개울과 백석천(白石川)을 합치고 서원천(書院川)을 합한 물줄기는 다시 도봉구에 와서 한내 [漢川]와 당현천(堂峴川)을 이룬 후 바야흐로 상봉동과 면목동에 이른다.
이렇듯 우리에게 익숙한 하천의 지류들을 포함 총 18개의 지류를 갖고 있는 중랑천을 성수동과 금호동의 경계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그 길이가 자그마치 45.3km나 되는 하천으로서 서울의 그 어느 하천보다도 길다.
현재 중랑천(中浪川)이라 부르고 있는 명칭 외에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송계천, 중량포(中梁浦, 中良浦), 충량포(忠良浦)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먼저 송계천(松溪川)이라는 명칭은 냇물 동쪽에 송계원(松溪院)이 있는데서 연유되었음을 왕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종실록의「조선 태종 9년 5월에 태조의 제사를 올리기 위해 건원릉에 나가려 홍인문 밖에 이르렀을 때 앞선 신하가 살피고 돌아와 "송계원 서쪽천의 물이 넘쳐 건널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는 것과,「세종 2년 4월에 상왕(태종)이 철원 등지로 행차하려는 도중 송계원평에서 말을 멈추었다」라는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이로써 송계라는 중랑천의 옛 이름은 그 역사적 유래가 조선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한편 중량천이나 충량포라는 이름들은 하천의 형세가 넓은 물가를 이루고 있는 특성에 따라 붙여진 이름들로 보여진다.
이들 모두는 일정한 표기를 갖고 있진 않으나 왕조실록과 동국여지비고, 대동지지 등의 기록에서 표기만 다를 뿐 음이 비슷한 명칭으로 나타나고 그 위치도 동일한 지점이어서 송계나 속계, 중량포나 충량포는 다같이 중랑천을 일컬었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묘자리를 건원릉이라 칭하고 후손들도 장차 그곳을 장지로 삼으라 일렀다.
이에 5대 문종의 현릉에서 18대 현종의 경릉에 이르기까지 9개의 능을 이룬 게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이 되었다.
이 동구릉을 참배한다는 명분으로 효종은 중랑천 부근의 넓은 모래사장에 자주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것은 병자호란 후 효종이 봉림대군이었을 시절에, 형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8년간이나 볼모로 잡혀 있었던 그 굴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을 세우고 군을 정비하면서 북벌군의 군사훈련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역사적 사연이 서려있는 울분을 풀기위한 곳으로도 이용되었던 중랑천에 얽힌 뒷얘기는 이외 에도 많다.
동구릉이나 사릉, 광릉 등이 있어 역대 왕들의 능행이 잦았는데 이를 위해 특별히 석교를 놓았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시 송계교의 석재를 헐어 사용하는 바람에 고종 이후엔 능행길이 바뀌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강원도 방면으로 나가는데 있어 교통연결에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중랑교는 1934년에 가설된 것이지만 다리가 놓여진 것은 조선 초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러한 중랑천을 둘러싼 풍취가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온다.
여름 밭두둑에 바람 잔잔하니 밀이삭이 널려있고
가을 들판에 비가 흡족하니 벼꽃이 향기롭네.
오늘의 한번 노는 일 농군들도 기뻐하는 것이
시월의 타작마당은 풍년이 틀림없겠네.
夏龍同徵麥穗場(하룡동징맥수장)
秋郊雨足稻花香(추교우족도화향)
一遊正合三豊望(일유정합삼풍망)
準擬豊登十月場(준의풍등십월장)
이는 당시 세종과 상왕이 송계 언덕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중량포에서 점심을 들며 마련한 술자리에서 병조참의 윤회(尹淮)가 지은 것으로 상왕이 흡족케 했다는 7언절구 시이다.
이런 기록이나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중량천(中梁川)의 표기로 보아 옛날 우리 중랑천변은 대단히 넓은 들판으로 한가롭고 풍광 좋은 농경지대였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건원릉에 모신 태조의 능 참배를 위해 태종이 수시로 행차하였는데 후대의 왕들도 자주 능행을 하면서 지금의 월릉교 밑에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송계교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고 이에 따라 자주 보수를 하게 되었다.
송계교를 목교에서 석교로 개축할 때 인근 마을의 장정은 모두 부역으로 동원되었다.
부역자 중 중이(仲伊)라는 사람은 눈이 먼데다가 열여섯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였다.
국가의 명이라 부역을 거역할 수도 없는 처지고 양주 관아에서 이미 수차례나 인원 점검을 해왔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그의 딸은 자신이 아버지 대신 부역을 하겠노라며 양주 관아를 찾았으나, 처녀의 몸으로 돌 나르는 일을 할 수 없다하여 관아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중이의 딸은 관아 앞에서 여러 날을 지새우며 아버지 대신 부역시켜 줄 것을 간청하자, 관아로부터 드디어 부역 허가가 떨어졌는데 반드시 남장을 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녀는 관아에서 시키는 대로 남장을 하고 참여했지만 문제는 생리현상이었다.
동료들과 일하다가도 배변시는 앉아서 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배뇨시에는 남자들과 달리 앉아서 해야 하므로 금방 여자임이 탄로 날 지경이었다.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대나무를 잘라서 옷 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한한 수분섭취를 줄여서 배뇨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하였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양주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시킴으로써 중이를 대신 해서 부역하던 그녀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자인 줄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그가 사실은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그녀를 중랑(仲狼)이라고 불렀고, 중랑(中浪)의 어원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유적지>
사실 중량천의 주변 유적과 유물은 너무 많다. 다른 지류들의 유적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왜냐하면 중량천 본류를 끼고 옆의 지천들에 유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녹천마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 녹천(鹿川)마을
조선시대에 이 마을이 홍수로 인해 폐허가 되자 마을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뒷산에서 사슴이 내려와 마을 앞 중랑천에서 목욕을 하고 간 후부터 농사가 잘 되고 마을일도 순조로워졌다.
이때부터 마을 이름을 녹촌(鹿村)으로, 촌주의 별명을 녹촌대감으로 불렀다. 그 뒤 이 마을에는 병조판서였던 세종대왕의 후손인 녹천(鹿川) 이유(李濡:1645~1721)의 별당이 지어졌다. 현재 이 마을 에는 사슴이 목욕을 하고 갔다는 곳은 남아 있지만 그 자리에 노인정이 위치하고 있어 "녹천(鹿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녹천마을은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어 고향의 푸근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밖에도 태릉, 강릉, 삼군부 청헌당, 연령군 신도비, 충숙이공 영정, 충숙이공 신도비, 이명 신도비, 월계동 각심제, 한글고비 등이 있다.
<중랑천의 환경문제>
옛날에도 청계천과 중랑천의 하천오염은 심했던 모양으로 서빙고(西氷庫)에서 하던 채빙(採氷)을 두모포(豆毛浦:현재 玉水洞) 쪽으로 장소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1970년대의 산업화 등으로 인해 중랑천은 시꺼멓게 썩어 들어가고 물고기들이 사라져 하천 오염이 심각하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중랑천을 살리기 위해 분류하수관거공사, 1979년에 중랑천 하수처리장이 건설되었다.
지속적인 무단 방류업체 단속, 시민들의 환경의식 및 정화 활동에 힘입어 중랑천이 조금씩이나마 다시 살아나고 있다. 하류 쪽에서는 낚시하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다.
- 퍼온글
☞ 2부를 시작하며...
▼ 야식을 먹고...
▼ 다시 출발...
▼ 신이문 2 빗물펌프장을 지나...
▼ 중앙선 철교를 지나...
▼ 이화교를 지나고...
▼ 체육공원의 시계는 3시 11분을 가리키고...
▼ 아치에 조명이 들어와 있는 육교를 지나...
▼ 월릉교를 지나...
▼ 한천교를 지나고...
▼ 체육공원에서 몸풀기를 하고...
▼ 녹천교를 지나고...
▼ 창동교를 지나고...
▼ 상계교를 지나고...
▼ 잠시 휴식을 취하고...
▼ 노원교를 지나고...
▼ 외곽순환도로 밑을 지날 즈음에 새벽이 밝아오고...
▼ 수락산이...
▼ 아파트사이로 도봉산이...
▼ 달맞이꽃
▼ 떨어지는 빗방울이 막기 위해 잠시 배낭을 내리고...
▼ 배낭커버를 씌우고...
▼ 회룡천위에 놓인 회룡보도교
▼ 동막교가 보이고...
▼ 동막교를 지나...
▼ 멀리 중랑천 도보의 마지막 구간인 신곡교가 보이고...
▼ 신곡교 아래 주차장에 들어서서...
▼ 오늘 여정의 마지막 다리인 의정부 신곡교...
▼ 계단을 올라서서...
▼ 치안센터 앞을 지나...
▼ 송산교차로에서...
▼ 아침식사하러 가는 교통순경들과 함께...
▼ 아침을 먹고...
▼ 가을의 전설을 위하여!
▼ 의정부역에서 전철을 타고 귀가...
☞ 이것으로 '중랑천 따라 옥수역에서 의정부역까지 밤샘 걷기를 다녀오다' 를 마친다.
'▣서울 도보여행 후기☞ > ☆ 한강&지천따라걷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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