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朝鮮朝)의 역대 왕릉(王陵)에 대한 접근은 그 외형적 특징만으로도 당대(當代)의 역사적 사실들을 반증(反證)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상입니다. 조선조의 왕릉(王陵)은 27대 왕(王)과 왕비(王妃) 혹은 계비(繼妃), 그리고 추존(追尊)된 왕들을 포함해 전체 44기의 능(陵)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태조(太祖)의 비(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과 정종(定宗)과 비(妃) 정안왕후(定安王后)를 모신 후릉(厚陵)만 북한 지역[개성시]에 있어 우리가 아직 답사할 수 없는 지역에 있고, 거리상으로는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에 조성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산재(散在)해 있습니다.
특히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 건원릉(태조), 현릉(문종), 목릉(선조), 휘릉(인조 계비), 숭릉(현종), 혜릉(경종 비), 원릉(영조), 수릉(익종-추존), 경릉(헌종))이나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西五陵 : 경릉(덕종-추존), 창릉(예종), 명릉(숙종), 익릉(숙종 비), 홍릉(영조 비)), 서삼릉(西三陵 : 희릉(중종 계비), 효릉(인종), 예릉(철종))은 왕릉군(王陵群)을 이루고 있는 필수 답사(踏査)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 주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분들은 학교 소풍 등으로 한두 번 정도는 발을 옮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관람이나 사진 촬영 정도로는 왕릉의 진면목(眞面目)을 이해하기에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제 다음의 기본적인 왕릉의 모습들을 살펴보시고 우리의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시기 바라겠습니다.
홍살문은 홍문(紅門)이라고도 불리는데, 본래 궁전(宮殿), 관아(官衙), 능(陵), 원(園:세자나 대군, 공주 등의 묘)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신성한 곳을 알리는 문(門)입니다. 한자로는 홍전문(紅箭門)이라 표현하는데, 형태는 30자 이상되는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는 붉은 살을 쭉 박았습니다. 또한 홍살문 오른쪽에는 왕이 제례(祭禮) 시에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가는 배위(拜位)가 있습니다. 능의 정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홍살문을 지나면서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존재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丁字閣)까지 긴 돌길인 참도(參道)가 펼쳐져 있습니다. 참도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왼쪽 부분은 한 단을 높게 만들었고 , 오른쪽 부분은 단을 낮게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신성한 정령(精靈)이 다니는 왼쪽 신로(神路) 부분과 사람이 걸어가는 오른쪽 인로(人路) 부분을 분리해 놓은 것입니다. 삼각형이나 사각형 모양의 얇은 돌[박석(薄石)]을 깔아 반듯하게 조성한 참도는 왕릉의 신성함을 배가(倍加)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왕릉(王陵)의 참도(參道)를 걸을 기회가 있을 때, 이유야 어떻든 오른쪽 인도 쪽으로 걷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왕릉의 예를 다하는 정자각(丁字閣)과 부속 건물(建物) |
정자각(丁字閣)은 왕릉(王陵)이나 원(園)의 앞에 있는 제전(祭展)으로 건물 형태가 '장정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명명된 명칭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데, 제향(祭享)을 하는 곳이기에 제례(制禮) 의식(儀式)에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고 서쪽으로 내려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의례(儀禮)를 따랐습니다. 건물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정면 3칸과 측면 1-2칸 정도이고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 내에는 본래 신좌(神坐)를 두고 오향제(五享祭)나 한식제(寒食祭)를 지내왔습니다. 정자각 동쪽에는 능의 비(碑)를 안치하기 위해 비각(碑閣)을 조성했는데,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이 비각(碑閣)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자각(丁字閣)에서부터 봉분(封墳)까지는 심한 경사(傾斜)의 사초지(莎草地)가 있어 봉분(封墳)까지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quffh 없지만, 능의 비(碑)라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제대로 된 관람일 것입니다. 또한 훼손된 곳이 많지만 비각(碑閣) 아래로 재실(齋室)이나 고방(庫房) 등의 부속 건물을 두고 있습니다.
왕릉(王陵)의 모습은 각각의 능마다 특징적인 면을 지니고 있지만 사초지(莎草地)를 거슬러 올라와 봉분(封墳)이 있는 능원(陵原)의 전형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봉분(封墳) 자체만 조성된 능이 많지만 봉분 밑을 12각의 병풍석(屛風石)으로 둘러 봉분(封墳)을 보호(保護)하는 호석(호석)을 준 경우가 있고, 데체적으로 봉분 주위는 다시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보호하고 있는 능들이 있습니다.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을 두고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한 쌍을 두었으며, 한 단 아래 중앙에는 상징적 등불인 장명등(長明燈)을 두었습니다.
봉분 전체를 둘러 동서북 3면의 담장을 쌓았는데 이를 곡장(曲墻)이라 하고, 봉분의 난간석(欄干石) 바깥쪽에서 곡장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으로 4마리씩의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번갈아 두어 능을 호위(護衛)를 하는 수호신(守護神) 격으로 삼았습니다.{추존(追尊)된 왕릉(王陵)의 경우는 석호, 석양의 수를 반으로 줄여 일반 왕릉과 차이를 둔 경우도 있습니다.} 봉분 앞 장명등(長明燈)의 한 단 아래에는 관(冠)을 쓰고 홀(笏)을 쥐고 있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좌우로 뒤에 각각 석마(石馬)을 대동하고 서있으며, 그 아래 단에는 갑옷에 검을 들고 있는 무인석(武人石)이 역시 각각 석마를 거느리고 세워져 있습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성립 후 조성된 고종[홍릉(洪陵)]과 순종[유릉(裕陵)]의 경우는 황제릉(皇帝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기존의 능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능의 봉분(封墳) 배치에 따른 형식은 5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왕이나 왕비의 봉분을 별도로 조성한 단독(單獨)의 형태인 단릉(單陵)[태조의 건원릉 등] 형식이 있고, 둘째는 한 언덕에 나란하게 왕과 왕비의 봉분을 마련한 쌍릉(雙陵)[정종의 후릉 등] 형식, 셋째는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삼연릉(三連陵)[헌종의 경릉], 넷째는 하나의 정자각(丁字閣) 뒤로 한 언덕의 다른 줄기에 별도의 봉분(封墳)과 상설(常設)을 배치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문종의 현릉 등] 형식, 다섯째는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합장릉(合葬陵)[세종의 영릉 등] 형식이 있습니다. 이 밖에 동원이강릉의 변형(變形)으로 좌우 나란한 언덕이 아닌 남북이나 비스듬하게 배치한 특이한 형식의 능[효종의 영릉 등]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본격적인 왕릉(王陵)의 여행을 출발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우리는 한가지 먼저 확인해 두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흔히들 우리의 문화유산(文化遺産)에 대해 외국과 비교를 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중국(中國)의 왕릉과 단순 비교를 통해 우리 것을 보잘것없고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한다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문화적(文化的)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만년(半萬年)의 역사(歷史)를 간직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민족(民族)입니다. 그 속의 문화(文化)와 전통(傳統)을 우리가 자부하고 가꾸어 보존할 때 진정한 우리의 문화가 세계 속에 뿌리 내릴 수 있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