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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궁궐·왕릉·묘ㆍ원

[20071118]만추산행(헌인릉-인능산-청계산)을 다녀오다 - 2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7.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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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8일(일) 만추산행(헌인릉-인능산-청계산)을 다녀오다.

 

이전에 여러차례 대모산을 오르내리면서 그 자락에 있는 헌릉과 인릉을 지나쳤었는데...

오늘은 만추산행을 계획하고 인릉과 헌릉을 둘러보고, 인능산과 청계산의 연계산행하고자 한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속에 진행된 헌인릉 답사와 인능산/청계산 연계산행은

늘 언제나 그랬듯이 시비 없이 함께 하는 님들과 함께 했기에 좋았다.

 

이번 기회에 왕릉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어 좋았고,

인능산의 인적없는 낙엽길을 걸으면서 가을의 끝자락을 보았고,

또 청계산을 거쳐 과천서울대공원으로의 하산을 하면서 좋은산행을 하게 되었다.

 

☞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 블로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 헌인릉에 대하여

 

 
헌릉(獻陵)은 조선 왕조 제3대 임금인 태종(太宗)과 그 비(妃) 원경(元敬) 왕후 민씨(閔氏, 1365∼1420년)의 능이다.
같은 대모산(大母山) 경내(境內)에 자리한 인릉(仁陵)은 조선 왕조 제23대 임금인 순조(純祖)와 그 비 순원(純元) 왕후(王后) 김씨(金氏, 1789∼1857년)의 능이다. 순조 승하 후 파주 장릉(長陵) 곁에 조성했다가 지금의 헌릉 옆으로 옮겨 천장(遷葬)하였고, 순원 왕후가 돌아가자 함께 합장하였다.
헌릉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을 따라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마련한 동원(同原) 쌍봉릉(雙封陵)의 형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조선 초기 왕릉 중 하나이다.


이와는 달리 인릉은 기본적으로는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합장릉(合葬陵)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혼유석을 1좌만 설치하여 외형상 단릉(單陵)과 같은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조선 후기 왕릉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석물 조각들은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융(隆), 건릉(建陵) 이래의 사실주의적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 두 능을 합쳐 헌인릉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적 제194호이다.

 
헌릉(獻陵)

조선 3대 태종(太宗, 1367~1422)과 원비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 1420) 민씨의 능이다. 헌릉은 동원이봉(同原異封)의 쌍릉으로, 앞쪽에서 보아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태종이 왕권을 잡은 뒤부터 부부간의 불화가 계속되었고, 민씨 형제가 유배, 처형되면서 그 골이 깊어졌다.

세종은 원경왕후 능 옆에 봉분을 따로 만들어 태종을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으로 조성하고 곡장을 둘렀다. 능 앞의 석물들은 망주석만 빼고 모두 한 쌍씩 배치한 것도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헌릉은 난간으로 연결한 쌍릉의 형식이 돋보이는 능이다. 문무인석·석양·석호·석마가 다른 왕릉 석물의 두 배인 각 2쌍씩 설치되어 있다.
헌릉의 참도는 신도와 어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다.
비각에는 신도비만 2기가 있다. 능 조성 때 세운 왼쪽의 신도비가 임진왜란 때 손상되자 숙종 때 오른쪽의 신도비를 새로 세웠다.
 
인릉(仁陵)

조선 23대 순조(純祖, 1790~1834)와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 1857) 김씨의 합장릉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외척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의 문란, 매관매직 성행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사회가 혼란해졌고,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각종 민란이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 탄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순조는 처음에는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인 장릉(長陵) 왼쪽 산줄기에 모셔졌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1856년(철종 7) 헌릉 오른쪽 언덕으로 옮겨졌다. 순원왕후는 1802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익종의 아들인 손자 헌종이 8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였고, 철종 때 다시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7년 승하하여 순조의 능에 합장되었다.

인릉.
봉분에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만 두른 합장릉이지만, 추존왕 문조의 수릉처럼 봉분이 하나이고 혼유석을 1좌만 놓는 등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석물은 조선 후기의 특색을 보인다. 문무인석은 하반신이 길어지고 생기있는 표정과 활기찬 조각기법은 18세기 후반의 사실주의적인 양식이다.

이상은에서 가져옴.

 

 

2007년 11월 18일(일) 만추산행(헌인릉-인능산-청계산)을 다녀오다.

 

 

 

☞ 2부를 시작하며...

 

 ▼ 쉼터4 방향으로...

 

 

 

 ▼ ?

 

 

 

 

 

 

 

 

 ▼ 좀작살나무 열매

 

 

 ▼ 헌릉

 

 

 ▼ 헌릉 전경

 

 

 ▼ 헌릉 상설도

 

 

 ▼ 헌릉의 참도는 신동와 어도의 구분이 없다.

 

 ▼ 정자각과 비각

 

 ▼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이어지고...

  

 ▼ 정자각

 

 ▼ 잡상(삼장법사)

 

 ▼ 준상

 

 

 ▼ 제수진설도

 

  

 

  

 ▼ 신로

 

 ▼ 예감 - 축문을 태우는 곳

 

 ▼ 비각

 

 

 

  

 

 

 

 

 

 

 ▼  

 

 ▼ 

 

 

 

 

 

 

 

 

 

 

 

 

 ▼ 오랑캐꽃이 피었습니다.

  

 ▼ 진달래도 피었습니다.

 

 ▼ 산수유는 익었습니다.

 

 

 

 

 ▼ ?

 

 ▼ 헌인릉을 나서서...

 

 ▼ 헌인릉 주차장을 지나...

 

 ▼ 인릉교를 건너...

 

 

☞ 이것으로 2부를 마치고...

 

 

 

 2007년 11월 18일(일)    

'만추산행(헌인릉-인능산-청계산)'을 다녀오다'

 
-▥☞ 1부(양재역에서 인능까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헌릉에서 인릉교까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헌인가구공단에서 인능산 정상까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4부(인능산 정상에서-원터골입구까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5부(원터골입구에서 청계산 매봉까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6부(청계산 매봉에서 서울대공원역까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