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25일(금) 전북 남원 광한루원에 다녀오다.
전북 남원 광한루원
종 목 : 명승 제33호
명 칭 : 광한루원(廣寒樓苑)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원
수량 / 면적 69,795㎡
지 정 일 : 2008.01.08
소 재 지 : 전북 남원시 천거동 78번지 등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공유,사유
관 리 자 : 남원시
[일반설명]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칠석날 단 한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돌다리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은하수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방장·영주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영주섬에는 ‘영주각’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구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1794년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이 세워졌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를 건립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전문설명]
광한루원은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광한루와 지상<地上>의 낙원인 삼신산<三神山>이 함께 어울려 있는 아득한 우주관<宇宙觀>을 표현한 한국 제일의 누원<樓苑>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원년<元年>(1419) 황희<黃喜>가 광통루<廣通樓>라는 작은 누<樓>를 지어 산수<山水>를 즐기던 곳이다.
세종 26년(1444)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에 노니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은 달나라 미인 항아<姮娥>가 사는 월궁 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한후 광한루<廣寒樓>라 이름을 고쳤다.
세조<世祖> 7년(1461) 남원부사<南原府使> 장의국<張義國>은 광한루를 중수<重修>하고 요천<蓼川>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7월 7석날 단 한 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烏鵲橋>을 연못 위에 설치하였다.
이 석교는 네 개의 홍예<虹霓>로 구성되었는데, 한국 조원<造苑> 공간 속에 있는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선조<宣祖> 15년(1582)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鄭撤>이 광한루를 크게 고쳐 짓고 연못 속에 신선이 살고 불로초<不老草>가 있다는 봉래<逢萊>섬, 방장<方丈>섬, 영주<瀛洲>섬의 삼신도<三神島>를 만들고, 봉래섬에는 백일홍<百日紅>,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었으며, 영주섬에는 영주각<瀛洲閣>이란 정자를 세웠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군이 남원성을 침공하여 광한루가 불타고 누원이 모두 황폐하였다.
선조 40년(1607)에 작은 누각이 복구되고, 인조<仁祖> 17년(1639)에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현재의 광한루를 복원하였다.
정조<正祖> 18년(1794)에는 영주각이 복원되고, 1964년에 방장섬에 방장정<方丈亭>이 건립되었다.
이 광한루원은 소설 『춘향전<春香傳>』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처소로도 유명하여 1920년대에 경내에 춘향사<春香祠>를 건립하고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畵伯>이 그린 춘향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에는 춘향제가 성대히 열린다.
에서 가져옴.
▼ 남원 광한루원의 담장에는...
▼ 능소화가 담을 넘어...
딴이름 자위, 금등화, 대화능소화, 양반꽃 분 포 전국의 정원 및 화단 꽃 색 주황색과 노랑색의 조화 개화기 7-9월 크 기 길이 10미터의 낙엽성 덩굴 용 도 관상용, 약용 |
상민의 집에 심으면 잡아다가 곤장을 칠 만큼 엄격하게 양반집 정원에만 허용되었기에 양반꽃이라고한다.
그만큼 꽃이나 잎이 품위 있고 우아하다.
다섯 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한 데 붙어 있는 통꽃이므로 질 때도 그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고 활짝 핀 그대로 톡톡 떨어진다.
그 모습이 마치, 죽어도 지조를 굽히지 않던 옛 선비의 기개를 보는 것 같아 퍽이나 대견스럽고 그래서 괜히 옷깃을 여미게 된다.
살아가면서 많은 변화를 겪어야 되고 또 반드시 그래야 할 때도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성정까지 꺾어가며 구차하게 살지 않는 기품, 바로 그런 기품이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꽃이 크고, 가운데 난 줄무늬 때문에 나팔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덩굴 가지에 흡근이 생겨 담쟁이처럼 벽을 타고 오르기도 하므로 관상용으로 정원 담벼락에 가까이 많이 심는다.
위 글은 에게서 가져옴.
절벽 위에 핀 능소화
옛날 옛적에 수호랑이 한 마리와 반인간 반호랑이인 암호랑이가 살았습니다.
암호랑이는 진정한 호랑이가 되는 것을 꿈으로 키우며 지내 왔습니다.
진정한 호랑이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호랑이와 합방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암호랑이는 산골마을 이진사댁에 태어나 연지라는 여자아이로 자라났고
수호랑이는 창주라는 9살 먹은 남자아이로 변신을 해 김서방네 머슴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로를 그리워하며 바라보면서 한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창주라는 머슴이 들어온 후 김서방네 집엔 살림이 일고,
경사가 겹쳐 김서방네 식구들은 창주를 가족같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혼인의 나이에 접어들자
김서방은 창주가 욕심이 나서 창주가 연지아가씨를 사모하는 것을 눈치채고
그를 잡아둘 생각으로 둘의 혼사를 서둘렀습니다.
창주와 연지는 회심의 미소 속에 혼인을 하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합방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창주는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로 방을 엿보지 말기를 신신당부 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오랜 그리움에 오히려 머쓱하여 앉은 창주
부끄러움에 연지의 가녀린 어깨 떨림
운명의 시간은 촛불의 일렁임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주친 눈길, 그들의 그리움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말았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몰래 담을 넘어 들어와 창호지를 뚫어 안을 들여다 본 것입니다.
커다란 수호랑이가 연지아가씨 몸에 엉겨 붙어있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 놀란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합방의 꿈은 깨어지고 결국 수호랑이는 잡혀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날부터 연지 아가씨는 뒷산 절벽 위
창주가 호랑이로 살았던 굴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오르면 창주가 있을 것 같아 그를 만나겠다는 갈망으로
호랑이의 울부짖음을 환청으로 들으면서
무릎이 깨지고 손톱이 빠지고 피가 맺히다 못해 줄줄 흘리면서
오르고 오르다가 끝내 지쳐 다 오르지 못하고 절벽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한이 씨로 맺혀 싹이 트고 덩굴을 뻗더니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능소화를 피웠다고 합니다.
능소화 연가 / 이해인
이렇게
바람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나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도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 이애인 수녀의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 中에서
능소화에 얽힌 슬픈 전설
이 꽃을 ‘구중궁궐의 꽃’이라 칭하는데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옛날 옛날 복숭아 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다.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에 빈의 자리에 앉아
궁궐의 어느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그 이후로 빈의 처소에
한 번도 찾아오지를 않았다.
빈이 여우같은 심성을 가졌더라면
온갖 방법을 다하여 임금을 불러들였건만
아마 그녀는 그렇지 못했나 보다.
빈의 자리에 오른 여인네가 어디 한 둘이었겠는가.
그들의 시샘과 음모로 그녀는 밀리고 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거 하게 된 빈은
그런 음모를 모르는 채 마냥 임금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나 임금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왔는데 돌아가지는 않았는가 싶어
담장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장 너머를 쳐다보며...
안타까운 기다림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이 불행한 여인은
상사병 내지는 영양실조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권세를 누렸던 빈이었다면 초상도 거창했겠지만
잊혀진 구중궁궐의 한 여인은 초상조차도 치르지 않은 채
'담장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라는 유언을
그녀의 시녀들은 그대로 시행했다.
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온갖 새들이 꽃을 찾아 모여드는 때
빈의 처소 담장에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려고 높게,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벌린 꽃이 피었으니
그것이 능소화이다.
덩굴로 크는 아름다운 꽃이랍니다.
아무튼 능소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이 담장을 휘어 감고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데...
그 꽃잎의 모습이 정말 귀를 활짝 열어 놓은 듯하다.
한이 많은 탓일까, 아니면 한 명의 지아비 외에는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꽃의 모습에 반해 꽃을 따 가지고 놀다 꽃의 독소가 눈에 들어가면
실명을 한다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장미는 그 가시가 있어 더욱 아름답듯이
능소화는 독이 있어 더 만지고 싶은 아름다움이 있답니다.
- 좋은 글에서 -
- 능소화 필 때 / 작자 미상 -
그대 향한 사랑 너무도 깊어
한번 잡은 손 놓을 수 없네
그대 향한 사랑 너무도 깊어
한번 잡은 손 놓을 수 없네
가까이 있어도 그리운 사람아
앞마당 능소화 아름답게 필 적에
나 그대 억센 두 팔에 칭칭 감기어
꿈같이 한세상 살고 싶어라
꿈같이 한세상 살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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