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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현충원·사육신묘

[20080816]용산 효창공원(孝昌公園)에 다녀오다.

by 맥가이버 Macgyver 2008.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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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6일(토) 용산 효창공원(孝昌公園)에 다녀오다.

 

아주 오래전 '효창운동장'에 들어갔던 적이 있다.

 

오늘은 효창운동장 옆에 있는 김구선생 묘역 등을 둘러보았다.

 

 

효창공원(孝昌公園)

 

종 목 사적  제330호
명 칭 효창공원(孝昌公園)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근대인물/ 광복운동
수량/면적 123,307㎡
지 정 일 1989.06.08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효창동,청파동2가및마포구신공덕동,공덕동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용산구

 

일반설명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 아들인 문효세자·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

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공주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를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지역이 넓고 소나무숲이 울창하며, 무덤 주위로 산책로가 있다.

 

전문설명

 

효창공원(孝昌公園)은 본래 조선조 (朝鮮朝)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장자(長子)로

5세에 작고(作故)한 문효세자(文孝世子)(정조6, 1782. 9 ∼동왕(同王)10, 1786. 5,

동년(同年) 윤(閏) 7월장(月葬) )의 묘소(墓所) 즉 효창원 자리인데

그 후(後)이 경내(境內)에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생모(生母)인 의빈성씨(宜嬪成氏)(정조(正祖)10, 1786. 9월장(月葬))와

순조(純祖)의 후궁(後宮)인 숙의박씨(淑儀朴氏)(철종(哲宗)5, 1854. 7월장(月葬)) 및

숙의박씨의 소생(所生) 영온옹주(永溫翁主)(순조(純祖)29, 1829. 5월장(月葬))를 안장(安葬)한 곳이다.

 

원래 고양군(高陽郡)율목동(栗木洞)이었던 효창원의 경역(境域)은

 지금 효창동과 청파동(靑坡洞)일대에 걸치어 심히 넓고

소나무 밤나무 등 수림(樹林)이 울창(鬱蒼)하여 매우 유수(幽邃)한 곳이었는데,

고종(高宗)31년(갑오(甲午)1984) 청일전쟁(靑日戰爭)발발(勃發)직전(直前)

우리나라에 불법(不法)으로 침공(侵攻)한 일군(日軍)의 주력부대(主力部隊)(대도혼성여단 (大島混成旅團))가

지금 효창운동장(孝昌運動場)남단(南端)의 솔밭에 주둔(駐屯)(야영(野營))함으로부터(5월)

그 좋은 경관(景觀)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어 일제(日帝)가 1924년 6월에 효창원(孝昌園)의 일부(一部)를 떼어서 효창공원을 개발(開發)하고,

패망직전(敗亡直前)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이하(文孝世子以下)의 상기(上記) 묘소(墓所)를

모두 서삼릉(西三稜)(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원당읍(元堂邑) 원당리(元堂里)) 경내로

천장(遷葬)함으로써 효창원은 사실상(事實上)종말(終末)을 고(告)하였다.

 

대망(待望)의 조국광복(祖國光復)과 더불어 환국(還國)한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 김구(金九)선생(先生)은 그 주도하(主導下)에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봉창(李奉昌)(광무(光武)4, 1900∼1932),

윤봉길(尹奉吉)(융희(隆熙)2, 1908∼1932),

백정기(白貞基)(건양(建陽)1, 1896∼1936)의사(義士)의 유해(遺骸)를 고국(古國)땅으로 모시어

1946년 7월 효창공원의 중심지(中心地)(옛 문효세자 묘터)에 국민장(國民葬)으로 안장(安葬)함과 아울러

안중근(安重根)(고종(高宗)16, 1879∼융희(隆熙)4, 1910)의사의 허(虛)(가(假))묘(墓)를 나란히 모셨다.

 

이어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殉國)하신

임시정부(臨時政府) 의장(議長) 및 주석(主席) 이동녕(李東寧)(고종 6, 1869∼1940)선생과

국무원비서장(國務院秘書長) 차이석(車利錫)(고종 18, 1881∼1945)선생의 유해(遺骸)와

군무부장(軍務部長)을 역임하고 환국후(還國後) 서거(逝去)하신 조성환(曺成煥)(고종12, 1875∼1945)선생을

공원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1949년 6월에는 임시정부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고종 13, 1876∼1949)선생이

민족통일의 한(恨)을 품고 흉탄(兇彈)에 쓰러지자 국민장(國民葬)으로

공원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일대(一帶)가 선열묘역(先烈墓域)으로 화(化)하였다.

 

그러나 특히 김구선생의 묘소(墓所)가 이곳(서울시내)에 위치하고 있음을,

그간 민족통일의 방책(方策)등에서 이견(異見)을 보이던

이승만영도하(李承晩領導下)의 당시 집권세력(執權勢力)에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었고,

그리하여 선열묘소(先烈墓所)를 교외(郊外)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부단(不斷)하였는데,

그 일단(一端)으로 1959년, 봄부터 제 2회 아세아축구대회유치(蹴球大會誘致)를 구실(口實)로

묘소(墓所)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 개설(開設)을 추진(推進)하였다.

 

이에 독립투사(獨立鬪士) 심산(心山) 김창숙옹(金昌淑翁)등이 중심이 되어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孝昌公園先烈墓所保存會)」가 결성(結成)되고

언론사(言論社)를 비롯한 각계(各界)의 여론(輿論)이 비등(沸騰)하여

묘소이전(墓所移轉)은 보류(保留)되었지만,

효창운동장은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속의 연못 및 섬까지 희생(犧牲)시키고

끝내 1960년에 개설(開設)되었다.

 

이러는 동안 6·25동란(動亂)으로 인(因)한 자연파손(自然破損)도 있고하여 효창공원,

특히 선열묘소(先烈墓所)일대(一帶)의 훼손(毁損)은 극(極)에 달(達)한 형편이었는데,

5·16혁명이후(革命以後) 또다시 선열묘소의 서오릉(西五陵)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신도읍(神道邑) 용두리(龍頭里))부근(附近) 이전(移轉)이 추진(推進)되었으나

역시 유족(遺族)과 사회각층(社會各層)의 반대로 보류(保留)되었다.

 

이같은 경로(經路)를 거쳐 1972년 서울시에서

효창공원 조경사업(造景事業)(묘지진입로 (墓地進入路) 및 석계단설치(石階段設置),

외곽주변정비(外廓周邊整備), 수림조성(樹林造成)등)을 10개년 계획으로 개시(開始)하는 동시에

일반인 (一般人)의 공원출입이 금지(禁止)되었으며(이는 1981년 6월 유료개방(有料開放) 때까지 계속),

1977년 7월에는 건설부(建設部)에서 효창공원으로 고시(告示)하였다.

 

1978년 3월에 이르러 효창공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 (孝昌公園殉國先烈追慕委員會)(발기(發起)

한국전통문화사상연구소장(韓國傳統文化思想硏究所長) 김재홍(金在鴻), 회장 곽상훈(郭尙勳))가 창립되고,

이회 (會)의 주관으로 다음해부터 임시정부수립일(臨時政府樹立日)인 4월 13일을 기(期)해

7위선열합동추모제(7位先烈合同追慕祭)가 매년 거행되게 되었다.

1984년 12월에는 서울시의 협조(協助)로 각 묘소 앞의 묘표석(墓表石)을 신비(新碑)로 개수(改竪)하였다.

 

1988년 12월부터는 그간 사당건립(祠堂建立)등을 꾸준히 청원(請援)한

효창원순국선열추모위원회(孝昌園殉國先烈追慕委員會)의 활동과

이를 적극(積極) 수용(收容)한 국가 최고영도층(最高領導層)의 지원(支援)으로

효창공원정비공사(孝昌公園整備工事)가 정부주도하(政府主導下)에 본격적으로 추진(推進)되어

의열사(義烈祠)(사당(祠堂), 1989년 11월) 및 창열문 (彰烈門)(정문)이 건립되고

묘역확장(墓域擴張)과 정비(整備)가 대충 마무리되게 되었으며

1989년 6월에는 사적(史蹟) 제 330호로 지정되었다.

 

앞으로 1991년 6월 기한으로 묘역원장개수(墓域垣檣改修),

의열광장조성 (義烈廣場造成)(의열사 (義烈祠) 앞 )

기념관건립(白凡先生墓所 남쪽)등을 완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선열묘소 외 공원관리소 , 어린이놀이터, 정구장(庭球場)등 편의시설과

북한반공투쟁사위령탑(北韓反共鬪爭士慰靈塔), 원효대사동상(元曉大師銅像),

대한노인회중앙복지회관(大韓老人會中央福祉會館)등이 자리잡고 있다. 
 

 문화재청 주소

 

백범기념관

 

한말, 안으로는 봉건 말기의 탐학과 외세의 압제가 가중되는 시기에 태어난 백범 선생은 일찍부터 나라 걱정하지 않은 때가 없었고 민족의 장래를 원려(遠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 때문에 반봉건ㆍ반외세 운동에 나서게 되었으니, 이는 부패한 관료들의 가렴주구로부터 의지할데 없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함이요, 외세의 가중되는 시련으로부터 민초들을 보호코자 함이다.

선생은 일찌기 동학에 입문하여 부패한 시국을 광정(匡正)코자 했으나, 팔봉접주의 용맹함도 시운이 따르지 않았다.

 

무도한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선생은 약관의 나이에 국모보수(國母報讐)를 외치며 맨주먹으로 일본군 장교쓰치다(土田讓亮)를 처치,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한국민의 기개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함이다.

인천 감옥에서 재판을 받을 때 선생은 신민된 자 나라 위해 한 몸 던져 국가의 원수를 갚는 것이 마땅하거늘 원수 갚을 노력은 않고 오히려 국모보수에 앞장 선 의인을 재판하려 하니 이 어찌 국록을 먹는 신료배(臣僚輩)들의 소행일까 보냐 하고 당당히 꾸짖었다.

 

선생의 대의로 재판관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고 그 광경을 보던 백성들은 자신들의 포원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무한한 존경을 보냈다.

 

삼남(三南)을 주유함에 아니 반기는 곳이 없었으니 이 때부터 선생의 인품, 전국적인 흠모의 대상이 되었도다.

백범 선생의 위국충절은 젊은 시절 그가 고민했던 사상의 실천을 통해 얻은 결실이었다. 동학, 주자학, 불교를 섭렵하면서 그 때마다 남다른 열성과 지행합일(知行合一)적 행동성을 보였다. 그러나 개화된 열강이 조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그 때, 민지를 깨우치고 실력을 양성하여 부국강병하지 않으면 약육강식·우승열패의 귀결만이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임을 깨닫고 예수교와 손잡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일제의 농간으로 3년여 감옥에서 투쟁한 시간까지 합하여 선생은 삼일운동 직후 조국을 떠나기까지 17년간을, 학교를 세우고 가르치며 농촌에 들어가 산업을 일으키는 일에 몰두하였다.

 

선생의 해외독립운동은 바로 국내의 민지계발, 부국강병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선생의 자주독립사상은, 여러 종교사상을 종합하여 이룩되었고 뜨거운 가슴과 용맹한 실천성을 토대로 성숙되었던 것이니, 선생에게서는 사상과 행동, 신앙과 실천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선생의 생애 찬연히 빛나는 곳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시절이다. 임시정부 봉사 27년동안 선생은 경무국장에서 주석에까지 이르렀으니, 임정의 틀이나 가재집기에 그의 호흡과 손길이 닿지 않음이 없었다.

 

임시정부가 해외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기둥으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정이 시종일관 그 권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수많은 어려운 고비를 겪었지만 그런 속에서도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은 선생이 그 가운데 좌정해 있었기 때문이다.

 

1932년, 선생은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를 통해 독립운동의 큰 전기를 마련하고 임시정부를 중국과 온 세계가 우러러 보는 당당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임정이 독립운동 노선상의 거듭되는 갈등을 해소하고 광복군을 결성하기까지 조국광복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은 선생이 임정을 이끌었기 때문이니, 우리 헌법이 임정을 계승한다 함은 바로 선생의 위대한 공적 아니고 무엇이랴.

해방 직후 열강이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선생은 분연히 그 반대운동에 나섰다. 선생은 신탁통치반대 민족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 불렀으니 그 비장함은 어찌 이루 형언하랴.

 

일제 치하 그 이념적 치열성을 과시했던 공산주의자들조차 탁치(託治)로 돌아섰던 때에 선생의 자주독립을 향한 반탁운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임에랴. 탁치에 실패한 미국과 소련이 남북에 단독정부를 획책하는 기미를 보이자 거기에 추종하는 국내 세력들이 준동함에, 선생은 이제 자신의 자주독립운동을 조국의 통일독립운동으로 한 단계 높이게 되었다. 이제는 통일을 통한 완전자주독립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남북의 단정을 막기 위해 선생은 오해를 무릅쓰고 남북회담에 임했고, 단정이 민족분단과 대외예속을 심화시킬 것을 훤히 내다보면서 그 참여를 단호히 거부하였던 것이니, 아아 당대에는 그렇게 매도당했던 선생의 예지가 50여년이 지난 지금에사 세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칭송을 받게 되었다.

선생이 비명(非命)에 가심은 분단조국 통일에 제물로서 바쳐지기 위함인 줄 지금에야 깨닫게 된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이 물으신다면 그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대답도 모두 조국의 완전독립이라고 대답하겠다던 백범 선생, 선생은 남북에 분단정권이 들어선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1949년 6월 26일 흉탄에 의해 돌아갔다.

 

암살자의 배후에는 분단 고착화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려는 정권적 차원의 세력이 있었음이 국회진상규명특별위원회에 의해 밝혀졌다. 그것도 선생 가신 지 46주년이 되어서야 겨우 국민의 이름으로 시해(弑害)의 실마리를 풀게 되었으니, 그동안 정처 없이 떠다니는 선생의 고혼(孤魂)을 홀대함이 그 얼마며, 민족의 스승을 멸시함이 얼마나 심했던가.

 

임정을 국가적 정통으로 삼겠다는 나라에서 이같은 무관심은 우리 시대 모두의 부끄러움이다.

선생이 가신지 어언 47년, 때는 바야흐로 선생이 몽매에도 그리던 통일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동안의 경험은 통일 없이는 민족의 완전자주독립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해 주었으니, 그 또한 선생이 오래 전에 깨우쳐주신 바다. 이제 숨겨두었던 선생의 완전자주통일독립 정신을 온 겨레 앞에 선양하고 편만(遍滿)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선생을 숭모하는 정성에서 기념관을 건립하여, 거기에 선생의 고혼이 정처토록 하고, 그동안 이곳저곳으로 유리하던 선생의 유품을 민족의 이름으로 보관해야 한다.

 

기념관은 선생의 탄신 120주년을 맞아 선생을 흠모하는 각계각층의 정성을 모아 건립하게 될 것이니 이름하여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이요, 이 기념관과 함께 백범정신을 이 땅에 세울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은

백범 선생의 유업을 계승하고 추모사업을 봉행하는 한편 완전자주통일독립 정신을 수련하고 실천하는 도장이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통일조국을 실현하고 애국애족정신과 민족정기를 선양하며 다음 세대의 민족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정신적인 모체가 될 것이다.

해방 이후 백범 선생과 임정을 홀대한 결과 국가적 정통성에 큰 훼손을 입었으니, 뿌리 없는 나라와 같이 되었다고 비판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은
헌법에 규정한 임정의 위상을 복원시켜 줄 것이기에 국가적인 정통성을 회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은
당장에는 선생의 통일자주국가 건설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나, 새 세대를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문화국가를 이룩하는 이념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정신적인 지주가 될 것이다. 그것은, 선생이 신생 조국을 두고, 아름다운 나라 · 한없이 높은 문화의 나라를 이룩하고 싶다고 자주 읊조렸던 그 철학이 깃든 곳이 되겠기 때문이다. 선생은 부강한 나라보다는 가장 진보된 문화국가를 원했던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은
선생의 신념처럼, 각 종교와 사상간의 수준 높은 조화를 이루고 다른 민족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한 민족독립의 당당함을 깃들게 하며, 통일이념과 문화이념이 넘치는 곳으로 단장될 것이다. 선생의 서거 50주년이 되는 해, 늦어도 금세기가 가기 전에,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 세대를 두고 백범 선생을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기 전에, 이같은 사상과 이념이 어우러진 <백범 김구 선생 기념관>이 건립되어야 한다.

만천하의 동포 제위는 이 성스러운 기념관 건립에 거룩한 뜻과 귀한 시간과 정성스런 물질로 협력해 주실 것을 앙망하는 바이다.

1996년 7월 1일

 

 
백범기념관(白凡紀念館, kim koo museum & library)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주 · 민주 · 통일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일생을 분투하신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삶과 사상을 널리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00년 6월 26일에 기공하여 2002년 10월 22일 개관하였습니다.

한국 근 · 현대사 전문 역사박물관[문화관광부 제287호 제1종 박물관(전문)]으로 백범기념관은 격동의 한국 근 · 현대사와 함께한 백범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와 한국 근 · 현대사를 이해하고, 분단된 조국의 자주 · 민주 ·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며, 민족의 아름다운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겨레의 문화적 삶의 공간입니다.

전시관에는 한국 근 · 현대사(동학, 의병, 애국계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열투쟁, 한국광복군, 통일운동, 교육운동 등)와 함께한 백범선생의 일대기에 관련한 각종 기록과 자료가 최첨단 전시기법(타블로, 디오라마, 모형, 애니메이션, 매직비젼, 기록영상물 등)을 활용하여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한국 근 · 현대사와 민족운동에 관련한 다양한 자료를 갖춘 전문 자료실이 있습니다.

교육 ·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교육장(70석/50석 규모 각1곳), 대회의실(350석 규모) 그리고 컨벤션홀(320석 규모)이 있어 각종 교육프로그램, 문화행사 등이 진행되고, 일반인과 단체들이 대관하여 각종 교육 · 문화활동에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 묘역, 삼의사 묘역(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안중근 의사 허묘), 임정요인 묘역(이동녕 선생, 차리석 선생, 조성환 선생)이 있는 효창원을 함께 둘러보면 나라를 위하여 애쓰시다가 돌아가신 선열들의 높은 뜻을 느낄 수 있는 현장체험학습장으로 더욱 뜻 깊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3월∼10월 11월∼2월
10:00∼18:00 (입장마감 : 17:00) 10:00∼17:00 (입장마감 : 16:00)
 
정기휴관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 무료
 
소형차 : 300원/10분 (1,800원/1시간)
대형차 : 600원/10분 (3,600원/1시간)
 
전시관람, 체험학습, 교육문화프로그램 관련 사항 자료실 T.02-799-3430~3432
자료, 유물 관련 사항
시설대관 관련 사항 관리부 T.02-799-3400
T.02-799-3423
T.02-799-3424

에서 가져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