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울 도보여행 후기☞/☆ 한강&지천따라걷기

[20080907]'구일역에서 안양천/불광천따라 수국사/서오릉까지' 도보여행-1

by 맥가이버 Macgyver 2008. 9. 7.

 

29935

 

  
2008년 9월 07일 일요일
'구일역에서 안양천/불광천따라 수국사/서오릉까지' 도보여행을 다녀오다.
 

구일역에서 출발하여

 

안양천 따라 고척교오금교신정교오목교목동교양평교양화교까지 가서

 

성산대교로 한강을 도강하여평화의 공원과 호수를 거쳐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지나

 

 불광천 따라 역촌역까지서오릉로 따라 수국사까지다시 서오릉로 따라 서오릉까지

 

꿈을 이루려면 첫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꿈을 이루려면 첫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꿈을 이루려면 첫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원하면 전 우주가 그 꿈을 이루도록 돕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첫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그러면 시작되는 것이죠.

 

'파울로 코엘료'의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카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오늘은 황금사원 수국사(守國寺)와 서오릉(西五陵)을 찾아서 가고자 한다. 

그동안 차일피일하며 미루었던 수국사와 서오릉 탐방이

첫발을 내디디지 못하고 혹시나 주저앉을까 염려하여

홀로 공지를 하고
새벽에 집을 나서 05시 30분에 구일역에서 안양천 산책로에 접어들면서
 오늘의 여정이 시작된다.
 
☞ 자세한 이야기는 블로그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수국사(守國寺)는 조선조 제7대 세조대왕 5년(1459년)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극락왕생을 위해 경릉(敬陵) 동쪽에 정인사(正因寺)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그 후 정인사는 연산군 10년(1504년) 화재로 소실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이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광무 4년(1900년) 고종의 내탕금(內帑金)으로 현재의 위치인 갈현동 태화산(太華山) 자락에 다시 짓게 되었다.

 

김수온(金守溫)이 찬한 고양정인사중창기(高陽正因寺重創記)에 의하면 처음 절을 지은 이는 판화엄대선사(判華嚴大禪師)인 설준(雪峻)스님으로 법당등 모든 설계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성종2년(1471년) 덕종의 부인이 되는 인수대비가 “이 절을 처음 지을 때 급히 지어 재목이 좋지 못하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하여 판내시부사 이효지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해 2월에 불사를 착공하여 10월에 낙성하였는데 이듬해 4월 초파일에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푸니 인근의 승려 수만여명이 절하면서 일찍이 없던 일임을 감탄하였다고 한다.

 

새로 중창한 절의 규모는 총 119칸으로 단청이 아름다워 봉선사(奉先寺)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수국사는 덕종, 예종의 원찰로서 오랫동안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왔다. 이는 “성종실록” 22년 10월 27일자 기사에 “호조에 전교하여 정인사에 봉선사의 예에 의하여 쌀 30섬과 면포, 정포 각각 50필을 하사하게 하였다”라는 기록등 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산군 일기” 10년 9월 24일자 기사에는 정인사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니 “능침(陵寢)에 가까운 절이라 하여 즉시 경기감사 안윤덕과 형조참판 박열을 불러 금표로부터 바로 가서 국문하게 하고 놀란 영혼들을 위해 위안제를 지내도록 하라”는 기록도 보인다.

 

수국사는 한 때 잦은 전란으로 퇴락하였으나 광무 1년(1897년) 3월 당시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스님이 진관사에 들러 불공을 올린 일이 계기가 되어 다시 중창불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스님은 진관사 대웅전 구석에 봉안되어있는 아미타좌상앞에 하나의 불기(佛器)도 없는 것이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진관사의 스님이 “그 부처님은 수국사가 풍우(風雨)를 면치못하여 가까운 우리 절에 모신 것이나 차나 향을 공양하지 못했다”고 하자 월초스님은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불상앞에 불공을 드리고 수국사를 중창하겠다고 서약하였다고 한다.

 

광무 4년(1900년) 세자로 있던 순종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다급한 고종은 월초스님에게 세자의 쾌차를 빌도록 명하였다. 이에 스님은 청도 운문사의 사리암에서 백일 나반존자기도를 드렸는데, 기도를 드린지 80여일만에 세자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어디가 아픈가?”하며 금침을 한번 놓는 사이 세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이 월초스님에게 소원을 물으니 스님은 아무 소원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고종은 “허면 스님에게 벼슬과 녹봉을 내리면 어떻냐?”로 물으니 이에 스님은 “출가한 자가 국가의 녹을 받으면 외람된다”고 사양하고 다만 서오릉 옆 수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어진 것이 애석하니 원컨대 근교에다 정사(精舍)를 내리시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다며 수국사의 중창을 소망했다고 한다. 그러자 고종은 “효심과 신심은 본래하나(孝心信心元無二)”라 하고 어명을 내려 수국사를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6.25동란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는데 역대 주지스님들이 계속하여 중창불사를 거듭해오고 있으며, 2005년에 수국사 주지로 부임하였던 토진스님께서 부임당시 있었던 크고 작은 갈등과 종단에서 조차 파악하지 못한 부채 등 난마처럼 얽힌 사찰의 문제를 풀기위해 수국사가 안고 있던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기도와 수행공간으로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시켰으며 2007년 12월 전 조계사 주지셨던 원담스님께서 새로이 부임해서 사찰의 합리적 운영을 통해 수행과 포교 . 교육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질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또한 서울시민과 모든 신도들에게 항상 열려져있는 공간으로 늘 가까이 다가서고 있으며 다양한 법회를 열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전하고있는 서울 서북부지역의 대표적 사찰이다.

 

수국사의 황금보전 법당은 외9포, 내15포, 108평 규모에 청기와로 된 전통목조법당이며 법당 안밖을 기와 이외에는 100% 순금으로 개금불사하여 장엄한 도량이며, 아미타후불탱화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수국사 인근의 진관사, 삼천사, 서오능, 서삼릉, 상암동 소재 2002년 월드컵 주 경기장 등과 연계하여 관광하실 수 있습니다.

수국사 관광을 원하시는 분은 전화(02)356-2001로 연락 주십시요.

관광을 희망하시는 분들께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대중교통

- 시내버스 : 간선버스 702번 또는 광역버스 9701번 이용하여 선정고교 앞 하차 후, 길 건너편에 수국사 안내표지판 따라 온다.
- 752, 751, 7022, 7720, 752, 751, 7022 선진운수 종점에 하차해서 도보로 5분 거리정도 올라오면 수국사 이정표따라 들어오시면 됩니다.

- 지하철 : 6호선 구산역 3번출구 서오릉방향 1km 지점에 위치 (10분정도 소요)

 

 

 

종 목 사적  제198호
명 칭 서오릉(西五陵)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1,829,792㎡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서오릉관리소

 

서오릉은 5개의 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오릉 지역이 무덤지역으로 선택된 이유는 세조 3년(1457)에 세자 장(덕종)이 사망하자, 풍수지리설에 의해 경릉이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서오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무덤인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무덤인 익릉, 21대 영조와 정성왕후의 무덤인 홍릉을 말한다.

 

서오릉은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 왕실의 가족무덤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품격에 따라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왕의 생모·왕세자·빈의 무덤은 ‘원’, 대군·공주 등의 무덤은 ‘묘’로 구분하여 불렀다.

 

서오릉에는 5개의 능 이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으로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무덤 순창원과 숙종의 후궁으로 많은 역사적 일화를 남긴 희빈 장씨의 무덤이 있다.


서오릉(西五陵)은

추존(追尊)된 덕종(德宗)과 동비(同妃) 소혜왕후(昭惠王后)의 경릉(敬陵),

제8대(第8代) 예종(睿宗)과 동계비(同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창릉(昌陵),

제19대 숙종과 동제1계비(同第1繼妃) 인현왕후(仁顯王后), 동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명릉(明陵),

숙종(肅宗)의 원비(元妃)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익릉(翼陵),

제21대(第21代) 영조(英祖)의 원비(元妃) 정성왕후(貞聖王后)의 홍릉(弘陵)의 5릉(陵)이

55만 3천여평의 한 경역내(境域內)에 있으며 동구릉(東九陵) 다음으로 능(陵)이 많이 모여 있다.

 

서오릉(西五陵)에 최초(最初)로 능기(陵基)가 택정(擇定)되어 봉릉(奉陵)된 것은 경릉(敬陵)이다.

 

경릉(敬陵)은 추존왕(追尊王) 덕종(德宗)과 동비(同妃) 한씨(韓氏)의 능(陵)으로서 세조(世祖)의 원자(元子)이며 왕세자(王世子)에 책봉(冊封)된 장(璋) 세조(世祖) 3년(1457년) 9월 춘추(春秋) 20세(歲)로 훙서(薨逝)함에 길지(吉地)로서 고양(高陽) 동(東) 봉현(蜂峴)이 거론(擧論)되고 부왕(父王)인 세조(世祖)가 친행(親幸)하여 능지(陵地)로 택정(擇定)된 것이다.

덕종(德宗)은 세자시(世子時) 훙서(薨逝)하여 의경묘(懿敬墓)로 하였으나 성종(成宗) 7년(1476년) 덕종(德宗)으로 추존(追尊)되고 의경묘(懿敬墓)를 경릉(敬陵)으로 추숭(追崇)하였다.

 

경릉(敬陵) 이후 덕종(德宗)의 弟 예종(睿宗)의 창릉(昌陵)이 설릉(設陵)되고 200여년(餘年) 뒤 숙종(肅宗) 원비(元妃) 김씨(金氏)의 익릉(翼陵)과 숙종(肅宗)과 동제1계비(同第1繼妃) 민씨(閔氏), 제2계비(第2繼妃) 김씨(金氏)의 명릉(明陵)이, 30여년후(餘年後)인 영조(英祖) 33년(1757년)에 영조(英祖) 원비(元妃) 서씨(徐氏)의 홍릉(弘陵)이 마지막으로 설릉(設陵)되고 이후(以後) 서오릉(西五陵)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서오릉(西五陵) 경내(境內)에는 순창원(順昌園)과 수경원(綏慶園) 및 대빈묘(大嬪墓)의 2원(園) 1묘(墓)가 있다.

 

조선조왕실(朝鮮朝王室)의 묘제(墓制)는 왕(王)과 왕비(王妃)는 능(陵)으로, 왕(王)의 생모(生母)인 사친(私親)이나 왕세자(王世子) 및 그 빈(嬪)은 원(園)으로, 대군(大君), 공주(公主), 옹주(翁主), 후궁(後宮)은 묘(墓)로 품격(品格)에 따라 차등(差等), 구분(區分) 호칭(呼稱)하였다.

 

순창원(順昌園)은 명종(明宗)의 제1자(第1子)인 순회세자(順懷世子)나 세자빈(世子嬪) 공회빈(恭懷嬪) 윤씨(尹氏)의 원(園)으로서 세자(世子)는 명종(明宗) 18년(1563년) 13세(歲)의 나이로 요절(夭折)하여 이곳에 장사(葬事)지냈으며 조선왕조(朝鮮王朝) 최초(最初)의 원(園)이다.

 

수경원(綏慶園)은 장조대왕(莊祖大王)의 사친(私親)이며 영조(英祖)의 후궁(後宮)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원(園)이다.

영빈이씨(暎嬪李氏)는 영조(英祖) 40년(1764년) 훙서(薨逝)하여 경기(京畿) 고양(高陽) 연희(延禧) 신촌리(新村里)에 설원(設園)하였으며 한일합병(韓日合倂) 이후(以後)인 1920년대(年代) 당시(當時)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가 수경원(綏慶園) 인근(隣近)에 개교(開校)되어 학교(學校)가 확장(擴張)되면서 학교(學校) 교내지(校內地)의 일부(一部)에 수경원(綏慶園)이 위치(位置)하게 됨에 따라 200여년(餘年)이 지난 1968년 6월에 이곳 서오릉(西五陵) 경내지(境內地)로 천장(遷葬)하였다.

 

대빈묘(大嬪墓)는 경종대왕(景宗大王)의 사친(私親)이며 숙종(肅宗)의 후궁(後宮)인 대빈장씨(大嬪張氏)의 묘(墓)이다. 희빈장씨(禧嬪張氏)는 숙종(肅宗)의 후궁(後宮)이 되고 왕비(王妃)와 계비(繼妃)의 소생(所生)이 없어 장씨(張氏) 소생(所生) 윤(윤)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된 숙종(肅宗) 14년(1688년) 왕비(王妃)가 되었으나 숙종(肅宗) 20년(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강빈(降嬪)된 후(後) 동(同) 27년(1701년) 무고(誣蠱)의 옥(獄)으로 폐빈(廢嬪), 사사(賜死)되고 경기(京畿) 광주(廣州) 오포(五浦) 문형리(文衡里)에 설묘(設墓)되었으며 경종(景宗) 2년(1722년) 왕산부대빈(王山府大嬪)으로 추존(追尊)되었고 269여년(餘年) 후(後)인 1969년 6월 서오릉(西五陵) 경내(境內)로 천장(遷葬)됨으로써 숙종(肅宗)의 명릉(明陵)과 같은 서오릉(西五陵) 경역내(境域內)에 있게 된 것이다.

 

서오릉(西五陵) 경내(境內)엔 1960년대(年代)에 설치(設置)된 군(軍) 주둔지(駐屯地)가 있다.

상당(相當)한 면적(面積)에 이르는 이 주둔지(駐屯地)는 대북한(對北韓)과의 대치상황(對峙狀況)에서 군사목적상(軍事目的上) 설치(設置)된 것이기는 하나 그 위치(位置)가 서오릉(西五陵) 경내(境內) 능역(陵域)인 만큼 능역(陵域)으로서 보존(保存)되도록 환원(還元)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재실(齋室)은 동구릉(東九陵)의 예(例)와 같이 각(各) 능(陵)마다 있지 아니하고 서오릉(西五陵) 전역(全域) 아우르는 재실(齋室)이 서오릉(西五陵) 정면(正面) 출입로변(出入路邊)에 있다.

 

문화재청 주소

 

 

서오릉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에 있다.

 

서오릉은 풍수적(風水的)인 길지(吉地)에 왕실의 족분(族墳)을 이룬 것인데,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5능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5능 외에 명종(明宗)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이 경내에 있으며, 최근 숙종(肅宗)의 후궁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大嬪墓)도 경내에 옮겨 놓았다.

 

⑴ 경릉 : 세조(世祖)의 세자 장(璋:德宗)과 그 비(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능이다. 능제(陵制)는 좌측이 왕, 우측이 비의 동원이강식(同原異岡式)으로 왕우비좌(王右妃左)의 일반 상례와 반대되고 있다. 이는 왕비가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기에 능제도 왕릉 형식을 갖추었으나, 왕은 당초 세자로 돌아갔으므로 세자묘대로 두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⑵ 창릉 : 덕종의 아우인 예종(睿宗)과 그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의 능이다. 왕릉·왕비릉이 동원이강식을 이루고 있고, 그 석물(石物) 배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전통적인 예에 따르고 있으며, 석물의 양식상 특이한 것이 있다면 고석(鼓石)의 무늬와 석난간 대석주 주두양식(石欄干 大石柱 柱頭樣式)이다.

 

⑶ 익릉 : 숙종왕비(肅宗王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능이다. 능제(陵制)는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면서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좇고 있다. 능표(陵表)는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했고 심익현(沈益顯)이 글씨를 썼다.

 

⑷ 명릉 : 숙종(肅宗)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분(雙墳)으로 조영(造營)되고 인원왕후 능이 우측에 있어 좌측이 숙종의 능과 동원이강의 배치로 된 형식이다. 명릉은 조선의 능제상(陵制上)에 한 시기를 이루었으니 즉 그 제도는 《속오례의 산릉의(續五禮儀山陵儀)》의 골자가 되었고 조선 후기 치장(治葬)의 근간이 된 《상례보편 산릉의(喪禮補編山陵儀)》의 기초를 이루었다.

 

⑸ 홍릉 : 영조 원비(英祖元妃)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의 능이다. 영조는 왕후의 택조(宅兆)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허석(虛石)의 제도를 쓰고 능상석물(陵上石物)은 쌍릉(雙陵)을 예상하여 배치하여 놓고 있다. 현재 홍릉 우측의 공간은 바로 이것으로 영조의 능이 동구릉(東九陵)에 자리잡게 되자 빈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능은 능상설(陵象設)의 제도와 양식은 기본적으로 명릉(明陵)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에 독특한 양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고 난간석주 주두양식(欄干石柱柱頭樣式)이 특이한 것으로 《속오례의(續五禮儀)》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제도가 잘 반영되고 있다.
 

 

비어 있는 홍릉의 옆자리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

 

홍릉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13세에 시집와서 영조가 세제에 책봉되고 왕위에 오르는 모든 순간을 함께 했던 배필이다. 정성왕후의 행장에 영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내 어머니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이 행장에는 영조의 정성왕후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비어 있는 정성왕후의 옆자리

 

현재 서오릉에 위치하고 있는 홍릉은 처음 보는 사람 눈에 마치 덜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홍살문과 정자각, 석물과 난간석으로 둘러싼 봉분까지 나무랄 데 없는 조선 왕릉의 상설을 따르고 있지만, 봉분이 곡담 한쪽으로 쏠려, 오른쪽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영조실록』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가 승하한 해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능의 혈을 결정하면서 조금 왼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그 오른쪽을 비게 하여 정혈(正穴)을 삼도록 하였는데, 임금의 하교를 따른 것이었다.
- 3월 1일 조.
산릉도감에 명하여 홍릉의 오른쪽 비어 있는 곳에 숭릉, 명릉의 예에 의거하여 조각에 ‘십(十)’자 모형을 새겨 정혈에 묻어 표시하게 하였다.
- 5월 13일 조.

함께 묻힐 날을 기약했던 영조

 

이러한 조영을 ‘우허제(右虛制)’라고 한다. 왕비가 먼저 승하하여 능을 조성할 경우, 왕이 훗날 자신도 왕비와 함께 묻히기 위하여 능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는 것을 말한다.

 

영조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조강지처였던 정성왕후의 옆자리에 묻히길 바라면서, 홍릉을 우허제에 의거하여 조영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영조가 승하한 지 이미 2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홍릉의 옆자리는 왜 여전히 비어있을까?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한 1776년의 『정조실록』 3월 22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상소와 하교가 실려 있다.

 

처음 산릉을 홍릉에 정했다가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과 예조의 당상에게 명하여 풍수상의 길지를 살펴보도록 했었다. 이에 이현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릉 위쪽의 비워 놓은 자리는 곧 영조께서 유언하신 곳으로서, 선왕께서 오늘날의 처지를 미리 염려하여 평소에 처리해 놓으신 것인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풍수의 논리는 땅속의 일이라 아득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니, 선왕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중요한 관계가 있는 일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신중하게 살펴서 해야 하는 것이다. 장릉(長陵)의 동구(洞口) 자리도 또한 먼저 정해 놓은 곳이었으니, 유독 선대왕께서 분부를 남겨 놓은 데가 아닐 수 있겠느냐?” 하고, 이현모의 관직을 박탈하도록 명하였다.

 

결국 정조의 하교 이후 영조의 왕릉은 현재의 위치인 동구릉 내 영릉으로 결정되었고, 홍릉의 오른쪽은 영원히 비어 있는 채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 1부를 시작하며...

 

▼ 구일역 앞에서... 

 

▼ 안양천 산책로로 내려서며...

 

▼ 해를 기다리는 꽃

 

▼ 구일역사 아래를 지나...

 

 

 

▼ 동양공업대학과 고척교가...

 

▼ 고척교

 

 

▼ 고척교는 성능개선 공사 中...

  

  

▼ 가로등불빛에 물든 수크령

 

▼ 코스모스길

 

▼ 코스모스는 신이 제일 먼저 창조한 꽃이라네...국화는 제일 나중에 만든 꽃이고...

 

 

 

▼ 오금교가 보이고...

 

 

 

 

▼ 환삼덩굴과 엉켜 핀 나팔꽃

 

 

▼ 코스모스와 황화코스모스가 어우러져...

 

 

▼ 코스모스 원산지는 멕시코, 우리나라에는 선교사에 의해 씨앗이 파종되었는데 우리말로는 '살사리꽃'이라네...

 

▼ 벌개미취 군락

 

 

▼ 동쪽하늘이 밝아오네...

 

 

▼ 신정교가 보이고...

 

▼ 우측길은 도림천 산책로

 

▼ 도림천의 최하류에 있는 다리

 

▼ 도림천과 안양천이 만나는 합수점, 다리는 신정교

 

▼ 신정교를 지나니 목동 하이페리온이 우뚝...

 

 

▼ 달맞이꽃

 

 

 

▼ 부용이 다시 피어...

 

 

 

 

▼ 칸나를 보면 중랑천변의 칸나가 생각난다.

 

▼ 현대 하이페리온과 오목교

 

 

▼ 오목교에서...

 

▼ 목동 빙상장과 축구장, 야구장이...

 

▼ 현대 하이페리온 

 

 

▼ 이곳은...

 

 

 

 

 

 

 

▼ 목동교가 보이네...

 

▼ 풀잎에 맺힌 이슬...

 

 

▼ 벌개미취

 

 

▼ 목동교에서...

 

▼ 안양천과 한강은 자전거와 보행자가 우측통행을 하는데, 불광천은 자전거는 우측, 사람은 좌측이란다.

 

▼ 새벽을 달리는 이들...

 

 

▼ 갈대

 

▼ 목동열병합발전소 굴뚝과 양평교

 

▼ 양평교에서...

 

▼ 이전에는 저 계단이 없어서....

 

▼ 멀리 양화교가 보이네...

 

▼ 붉은 유홍초

 

 

 

 

▼ 새로 단장한 양화교

 

 

▼ 양화교 교각아래에서...

 

▼  이 길로 올라...

 

▼ 양화인공폭포가...

 

▼ 여기는...

 

 

 

▼ 양화인공폭포

 

 

 ▼ 성산대교램프로...

 

▼ 저 육교를 지나자마자 성산대교램프가 있다.

 

▼ 철없는 철쭉

 

 

▼ 뭔 공사?

 

 

▼ 이 길로...

 

 

▼ 성산대교램프를 타고...

 

 

▼ 성산대교

 

▼ 올림픽도로는...

 

▼ 한강변 산책로는...

 

▼ 성산대교는...

 

▼ 한강은...

 

▼ 하늘공원과 노을공원

 

 

 

 

 

▼ 성산대교 끝에는 한강공원으로 내려서는 계단이...

 

▼ 성산대교를 돌아보니...

 

▼ 이제 월드컵공원으로...

 

▼ 한강과 만나는 합수점에 있는 홍제천의 최하류 다리...

 

 

 

 

 

▼ 일단 좌측으로 가서...

 

 

▼ 월드컵공원 內 평화의공원에 있는 어린이놀이터

 

 

 

 

 

 

 

 

 

 

 

 

 

 

 

▼ 펌프를 보면 생각나는 말 - '마중물'

 

▼ 상암월드컵경기장

 

▼ 저 건물은...

 

☞ 여기서 1부를 마치고...

 
2008년 8월 31일 일요일
['구일역에서 안양천/불광천따라 수국사/서오릉까지' 도보여행을 다녀오다.]

 

-▥☞ 1부[구일역-안양천-양화교-성산대교-평화의공원-상암월드컵경기장]는 여기를 누르세요.☜▥-

 

-▥☞ 2부[상암월드컵경기장-불광천-응암역-역촌역-수국사-분재연구원-서오릉]는 여기를 누르세요.☜▥-

 

-▥☞ 3부[서오릉(순창원-경릉-대빈묘-홍릉-창릉-익릉-수경원-명릉)-서오릉 정류장]는 여기를 누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