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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보여행 후기☞/☆ 서울곳곳을 찾아서

[20081025]서울도심 속 가을단풍 유람을 다녀오다 - 3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08.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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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서울도심 속 가을단풍 유람을 다녀오다'
 
시청역-서울광장-덕수궁 대한문-덕수궁 돌담길-구세군(중앙회관)-광화문4거리-이순신장군 동상
-기념비전(고종즉위40주년칭경기념비각)-만세문-도로원표-교보빌딩-광화문 열린 시민광장
-동십자각-경복궁 돌담길-경복궁 동문(건춘문)-민속박물관-삼청동 갈림길-춘추관-청와대 앞길
-경복궁 북문(신무문)-효자동 사랑방-청와대 봉황분수대-무궁화 동산-청운실버센터-청운중학교
-최규식경무관 동상-창의문(자하문)-환기미술관-백사실길-석파감길-연세대학교 우남관-하림각
-홍제천 신영교-일붕 서경보 대선사 시비-전망바위-백사실 연못-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
뒷골마을-백사실계곡-백사실 연못-현통사(玄通寺)-신영교-탕춘대터-세검정-홍지문(오간수문)
  
오늘은 서울도심 속 가을단풍을 찾아서 길을 나선다.
서울 도심에서 단풍이 좋은 곳으로 이름난 곳들을 연계하면서 다녀올 곳으로는
 
덕수궁 돌담길과 경복궁 돌담길, 그리고 청와대 앞길을 지나 창의문(자하문)을 통과하여
백사실(백석동천)을 거쳐 현통사와 세검정을 찾아보고
이어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의 잇는 탕춘대성(일명 西城)의 門인 한북문/홍지문을 찾아보고
이후는 그때가서 결정하기로 하고...

 
☞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으로 대신한다.
     
 
☞ '서울도심 속 가을단풍 유람' 3부를 시작하며...
  

▼ 북한산이 보현봉을 중심으로...

 

▼ 가운데 우뚝한 보현봉

 

▼ 보현봉에서 우측 형제봉까지...

 

▼ 보현봉에서 좌측 향로봉까지...

 

▼ 이어져서 좌측 끝에는 족두리봉이...

 

▼ 보현봉과 문수봉, 그리고 좌측 둥근봉우리가 나한봉

 

▼ 비봉과 사모바위

 

▼ 형제봉

 

▼ 탕춘대능선 - 혹자는 '탕춘대성'이 비봉까지 이어졌다 하고, 족두리봉(수리봉)까지 이어졌다 하는데 '향로봉'아래까지만 그 흔적이 남아있다.

 

 

 

▼ 다시 길을 따라...

 

▼ 연리지

 

 

▼ 여기서 우측으로 내려서야 '백사실'이다.

 

 

 

▼ 백사실(白蛇室) 터

 

사적 462호 지정된 백사실터.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한 계곡 옆으로 정자의 초석이 남아있는 얕은 연못과 집터 등이 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조경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곳은

양반들이 더위를 피해 여름을 지내던 별서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백사실은 조선시대 문신 이항복의 호인 백사(白沙)와 발음이 같다 해서

이항복의 별서가 아니었느냐는 설이 있는데 아직 확인되지는 않은 얘기다.

 

별서(別墅)란 들에 한적하게 지은 집으로 농사 짓는 땅이 딸려 있는 게 별장과 다르다.

이곳 별서에 딸려 있던 연못만은 지금도 온전히 남아 있다

 

 

▼ 사랑채의 누각이 있던 곳

 

 

 

▼ 연못 저 편에는...

 

▼ 연못에는 육각정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주춧돌만이 남아 있다.

 

 

▼ 연못으로 내려서는 계단

  

▼ 직경 20m쯤 되는 연못

 

 

 

 

▼ 육모정의 흔적

 

 

 

▼ 이 돌탁자는 애초에 있었나?

 

 

▼ 아름드리 느티나무 뿌리가 커다란 바위를 안고...

 

 

▼ 단풍이 곱게 든 단풍나무가...

 

 

 

 

 

▼ '백석동천' 각자가 잇는 곳으로...

 

 

 

 

 

 

▼ 정면에 보이는 바위에...

 

▼ '백석동천'

 

▼ 백석동천(白石洞天)

 

▼ '동천洞天'이라는 말은 그 풍광이 절경인 곳에 붙이는 말이다.

 

▼ 백석동천 뒤편 바위에...

 

▼ 알 수 없는 글자가...

 

▼ '백석동천' 각자 바위 뒤편으로 가보니...

 

 

 

▼ 산길을 따라 가다가...

 

▼ 燒酒甁塚?

 

 

▼ 부암동 '뒷골마을' - 현재 16가구 정도가 있다고...

 

▼ 이전에 여러 님들과 백사실계곡을 따라 몇 차례 오르내렸었는데... 

 

▼ 오늘은 혼자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 얘가 버들치인가?

 

 

 

 

▼ 이 나무가...

 

 

 

 

 

 

 

 

 

▼ 다시 백사실 연못으로 돌아와서...

 

 

▼ 이제 현통사로...

 

▼ 떨어지는 빗방울에 놀라? 물고기들이 바삐...

 

 

▼ 저기가...

 

▼ 현통사

 

 

 

▼ 암반 위에 스크래치

 

 

▼ 삼각산 현통사

 

▼ 바위벽에 '일붕애국시'가...

 

 

 

▼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듯...

 

 

 

 

 

 

▼ 비를 피해 든 까치 한 마리가...

 

▼ 현통사 정문에서 바라보니...

 

▼ 비는 계속 내리고...

 

▼ 이제 비를 맞으며 가야하니 카메라는 잠시 접고...해서 이후 사진이 부족하다.

 

▼ 세검정으로 가는 길에 이 주변에 '탕춘대 한지마을'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탕춘대 한지마을

 

[탕춘대 한지마을은 국가에서 필요한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에서

종이를 만드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 지역은 북한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시냇물이 있고, 평평한 돌이 많을 뿐 아니라,

인근 산에 한지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가 풍부하여 종이를 제조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조지서는 창의문 밖 장의사동(壯義寺洞, 현재의 세검정 근처)에 있었는 바,

이 지역이 북한산에서 흘러오는 맑은 시냇물이 있고 반석(盤石)이 많아서

종이를 제조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삼각산․인왕산 등의 인근 산에는 많은 닥나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종 15년(1415) 국영 제지공장이며 종이제조 사무담당 기구이기도 한 조지서(造紙署)가 설치되어

제지 기술과 합리적 생산관리에 관한 일이 맡겨지고

지질(紙質)의 개량과 생산원가의 절하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조지서에서는 표․전․자문지를 제조하였으며,

또한 고정지(藁精紙)․유엽지(柳葉紙)․유목지(柳木紙)․의이지(薏苡紙)․마골지(麻骨紙)․순왜지(純倭紙) 등도

제작하였는데, 모두 매우 정교하였으며 인쇄한 서적도 또한 좋았다고 한다.

 

조지서가 있었던 세검정 계곡 좌우에는 천혜의 자연적인 조건과

서울에 인접하고 있는 지리적인 여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민간의 지장(紙匠)들이 모여들어

한지를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한지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에 지장 수백호가 모여 살았다고 하는데,

1961년까지도 40~50호의 지장의 후예들이 초도지(初塗紙) 등의 한지를

옛날 그대로의 방법으로 뜨고 있었다고 한다.

 

- 퍼온글 -

 

▼ 탕춘대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

 

▼ 세검정

 

 

 

 

▼ 세검정 차일암

 

 

 

 

 

 

 

▼ 상명대 입구에 선 저 조형물은...

 

 

 

▼ 홍지문 가는 길...

 

▼ 홍지문

 

홍지문 및 탕춘대성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 (종로구) 
명    칭 : 홍지문및탕춘대성(弘智門및蕩春大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76.06.23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홍지동 산4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종로구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문화진흥과 02-731-1170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ꡐ弘智門(홍지문)ꡑ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墻)이 있고, 문루는 우진각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수문(五間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다섯칸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되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홍제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수리봉(향로봉의 오류인 듯)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약 2.8km의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현종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그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 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 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축성역, 축성방법, 축성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을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하였다.

 

- 퍼온 글 -

 

 

 

 

▼ 홍지문과 이어진 오간수문

 

▼ 오간수문 끝에는 탕춘대성곽 이어지고...

 

 

▼ 홍지문 밖으로 나와서...

 

▼ 홍지문 안팎으로 종로구 부암동(홍지동)과 서대문구 홍은동으로 갈라지네...

 

▼ 홍지문을 밖에서 보니...

  

 

▼ 오간수문 홍예 위쪽에는...

 

▼ 서수(瑞獸)를 새겨서...

 

▼ 홍지문 바닥에는...

 

☞ 이것으로 '서울도심 속 단풍유람을 다녀오다'를 마친다.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서울도심 속 가을단풍 유람을 다녀오다]

 

-▥☞ 1부(서울광장-덕수궁 돌담길-경복궁 돌담길-청와대 앞길-효자동사랑방)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2부(효자동사랑방-창의문-환기미술관-우남관-하림각-신영교-전망바위)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3부(전망바위-백사실-백석동천-신영교-세검정-홍지문/오간수문)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