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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포구기행

[포구기행](1) 강화 동검도 서두물 /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 이승철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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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기행](1) 강화 동검도 서두물

 글 이현준·사진 김순철기자 goodman@kyunghyang.com
ㆍ물 빠진 뻘엔 짠내 묻은 봄내음 ‘스멀 스멀’

인천경향신문은 2009년 4월 27일 오늘 창간호부터 인천 주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포구들을 찾아나선다.
인천이 제물포라는 작은 포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지금도 국내 두번째 항구도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포구는 어쩌면 인천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일부 포구를 제외한 대다수는 은성(殷盛)했던 과거의 영광을 묻어버린 채 흔적만 남아있거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날 바다 건너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최일선에 섰던 포구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천경향의 연재기획물인 <포구기행(浦口紀行)>을 통해 인천 역사의 자양분인 포구의 옛 정취가 다시금 살아나고, 국제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이 곳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가 되새겨지기를 빌어본다. | 편집자주

포구로 가는 길에 맞딱뜨린 아침해는 완연한 봄을 잉태하고 있는 듯 했다.


인천시내를 지나 초지대교를 건넜다. 강화도에 들어선 뒤 왼편으로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동검도로 향했다. 꽃내음 가득한 봄바람이 차창을 넘어 들어왔다. 길따라 줄지어 있는 개나리와 진달래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품안으로 달려든다.봄바람 가운데서 ‘좌(左) 나리 우(右)달래’ 품으니 왕후장상이 따로 없었다. 한 껏 춘기(春氣)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질 무렵 길 옆에 들어선 장어집이 보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내친 김에 식탐(食貪)까지 났다. 봄 기운 가득 머금은 장어 한 토막을 노릿노릿 구워 상추에 가득 싸 한 입 넣었다. 소주 한 잔 곁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소통의 다리, 단절의 다리

하지만 장어집의 상춘객(賞春客)으로만 머물 수는 없는 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10분쯤 차를 달리자 눈 앞에 성큼 동검도가 들어왔다. 자루가 짧은 국자를 눕힌 듯, 작은 종지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새의 동검도는 강화도에서 떨어진 조그만 섬이었으나 지금은 다리가 놓여져 있다. 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날 정도로 작지만 1985년 교량 완공은 동검도 사람들에게 황홀한 사건이었다. 당시 마을에선 큰 잔치도 열렸다고 한다. 동검리 어촌계장 김정훈씨(51)는 “다리가 놓여 마을에 버스도 들어오고 잡은 고기를 바로 바로 육지로 내다 팔 수가 있게 돼 살림살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김씨는 “다리 아래 부분이 아치형이 아닌 매립 형태로 만들어져 다리 양쪽의 바다물이 막히는 바람에 인근 해양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다리 완공엔 불과 1억원이 들었지만 이 다리를 바닷물이 통과하는 아치형으로 만들려면 130억원이라는 공사비가 들어간다고 한다.현재로선 아치형 다리는 불가능하게 됐다. 결국 이 다리는 섬 사람을 육지사람으로 만들어준 소통의 다리임과 동시에 바다를 둘로 갈라 놓은 단절의 다리가 된 셈이다.

다리를 건너 동검도에 들어서자 양 옆으로 길이 나 있다. 왼쪽은 서두물 가는 제방길이고 오른쪽은 큰말 가는 길이다.큰말은 오래전에 형성된 큰 마을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큰말부터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구불구불 언덕길을 넘어 5분 남짓 지나자 바닷가엔 민가 1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예전엔 이 곳에도 포구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물이 들지 않아 포구 흔적만 남아 있었다. 겉 모양만 봐선 어촌인지 농촌인지 구별이 힘들었다.

차를 돌려 동검도 입구로 나와 서두물로 향했다. 서두물 초입은 차 한대가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길가에는 오래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집집마다 담벼락에 어구와 장화들이 눈에 띄었다. 딱 봐도 어촌이다. 이어지는 제방길로 들어서자 한쪽으로 넓게 펼쳐진 갯벌이 눈에 들어왔다. 밀물을 기다리며 갯벌에 앉아 쉬고 있던 어선 몇 척이 가볍게 인사를 한다.

제방길은 언덕없이 S자 모양으로 평탄하게 포장돼 있었고 길 따라 은색 철재 안전판이 이어져 있었다. 안전판은 방문객 경호원인 모양이다. ‘길은 좁지만 안전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길 옆 갯벌 쪽으로는 갈대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연한 노란 빛깔을 띤 갈대들은 마치 방문객을 환영이라도 하는 듯 바람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댔다.

한 낮의 갯벌에 물때를 기다리는 어선 몇 척이 한가롭게 햇살을 받고 있다.

갈매기들은 갈대의 춤사위에 추임새라도 넣으려는 듯 그 위를 이리저리 분주히 날아다니며 ‘끼룩 끼룩’ 울어댔다. 갈대는 바람에 따라 흔들렸을 뿐이고, 갈매기는 단지 먹이를 찾은 것 뿐이라는 메마른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춘흥(春興)은 허망하게 끝이 났다.

차 시동을 다시 걸고 제방 길을 따라가자 목적지인 서두물 포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옛 정취가 물씬 풍길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탓일까. 포구에는 널찍한 주차장과 2층 크기의 매점과 식당이 있는 시멘트 건물 한 채만 휑하니 서 있었다. 최근 들어 찾는 이가 별로 없어 평일은 문을 닫고 주말에만 문을 연다고 한다. 주변에는 민가도 보이지 않았다. 포구 앞 갯벌에도 어선 10여 척만이 뻘에 주저앉아 있었다. 포구를 찾았던 방문객들은 멀뚱멀뚱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바람이 귓볼을 때렸다. 퇴락한 듯한 포구의 풍경은 대지에 충만한 봄기운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는 슬슬 돌아갈까 생각하는 사이 어느 듯 한 시간 남짓이 지났을까. 밀물이 되며 바닷물이 슬금슬금 들어왔다. 따스한 햇볕을 머금은 바닷물이 들어오자 뻘에 묻혀 있던 배들도 기지개를 켰다. 선착장까지 밀물이 들어왔다. 어느새 배들은 위풍당당하게 바다 위로 떠올랐다. 그물과 부표 등 온갖 어구를 다 싣고 조업 준비를 마친 듯 당장이라도 바다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군장(軍裝)을 꾸린 채 출정식에 임하고 있는 병사의 모습이었다.

밀물, 뻘에 묻힌 배들의 기지개

이전 밀물 때 이미 바다로 나갔던 어선들은 밤샘 조업을 마치고 포구로 돌아오고 있었다. 만선(滿船)의 기쁨이 전해졌기 때문일까. 포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가 넘쳐났다. 방문객들도 덩달아 신이 난 듯 했다. 우리 일행보다 조금 늦게 포구에 도착한 젊은 연인 한 쌍은 바다를 배경으로 쉬지 않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사람 마음이란 이렇듯 간사하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이처럼 변덕스러우니 말이다. 그러나 포구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듯이 밀물이든 썰물이든 묵묵히 어부와 배의 안식처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어부들 또한 그 포구에서 나고 자라서 죽을 때까지 고기잡으며 성실하게 일만 했을 것이다. 관헌들도 한양으로 가는 관문의 첫 검색대인 이곳에서 자신의 직분을 다했을 것이 틀림없다. 김정훈 어촌계장은 “동검리에서 태어나 평생 고기를 잡고 살아왔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바다와 포구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한양의 해상검문소 ‘동·서검도’

강화에는 삼산면의 서검도(西檢島)와 길상면의 동검도(東檢島)가 있다. 서검도는 예전 중국으로부터 해상으로 교동, 양사, 송해면과 연백군 개풍군 사이 바다를 지나 한강을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배를 검문(檢問)하던 곳이다. 동검도는 일본과 태평양 배들이 강화, 김포 해협을 지나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가는 선박을 조사했다. 동·서검도는 이를테면 한양의 해상검문소였던 셈이다.

첫 포구기행지인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 서두물은 동검리의 형용이 학(鶴)의 머리부분과 흡사한데다 샘물이 좋아 서두정(西頭井) 또는 서두물이라 불리우며 현재 포구가 있는 곳이다. 동검리는 강화도 길상면 남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주민은 약 200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옛부터 처음 이루어진 촌락인 큰말, 그 뒤편 부락인 뒷대와 서두물로 이뤄지며 1985년 12월 10일 육지와 연결됐다.

면적은 1.8㎢, 해안선 길이 6.95㎞, 경지면적 0.34㎢ 로서 쌀, 감자, 고추 등이 재배되며 수역(水域)에서는 주로 숭어, 꽃게, 낙지 등이 잡힌다. 근래는 해태 25㏊, 조개 10㏊, 갯지렁이 10㏊ 등의 양식장이 운영되고 있다. 1947년 6월 25일 동검공립국민학교가 개교돼 1989년 폐교전까지 36회 졸업에 졸업생 521명을 배출했으며 1989년 3월 1일 폐교와 동시에 선택분교로 통합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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