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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싶다☞/♤ 포구기행

[포구기행](5) 강화 후포항 /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 이승철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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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기행](5)강화 후포항- 강화 여인의 질긴 생명력을 빼닮았구나

 
‘뻔뻔이’는 인천 강화도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별칭아닌 별칭은 들풀 같은 강화도 아낙들의 억척스러움에서 연유한다.

한국전쟁 이후 참으로 배고팠던 시절, 화문석하면 강화였다. 강화의 여인들은 베와 무명, 비단 등 옷감을 짜는 직조 솜씨 하나 만큼 타고 났다.

구름을 뚫은 햇살이 바다에 꽂힌다. 컬러로 찍었지만 포구는 흑백으로 저장된다.역광의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들이대는 카메라는 작고 초라하다. 석모도를 오가는 연락선 삼보7호나 바다를 건넌 관광버스도 왜소해 보이긴 마찬가지다.


베를 짰으면 팔아야 돈이 되는 일. 그 몫도 강화 아낙들에게 떨어졌다. 강화 남정네들의 피에는 ‘호랑이는 굶어 죽을지언정 풀을 뜯어먹지 않는다’는 도도한 자존심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아픈 역사이었지만 강화는 고려가 몽고에 맞서 항쟁했을 당시 39년 동안 수도였다. 나라와 왕족을 지켜낸 선비의 자손이라는 우월감을 목숨처럼 끌어안고 살았던 이들이 강화 남자들이었다.

들풀같은 아낙들의 억척

이들은 고개를 숙일 일은 헛기침으로 피하곤 했다. 소금장수로 나선 강화 도령이 ‘소금 사세요!’라는 존댓말의 외침이 싫어서 ‘소금 들여 놓으세요’라고 구성진 목소리를 쏟아내는 다른 지역 출신의 소금장수를 졸졸 따라 다니며 ‘나도! 나도!’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강화 여인들은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리는 허기에 찬 자식들을 매몰차게 떠밀어 버린 뒤 옷감을 이고 길을 재촉했다. 서울이며, 김포며, 인천이며 먼 길을 마다않고 사방의 먹고 살 만할 집을 찾아 옷감을 파는 방물장수로 나섰다.

한껏 멋을 부린 할리족들에게도 후포항은 멋진 드라이빙코스다.

 
강화 여인들은 곧잘 너스레를 떨며 물건을 에누리 없이 팔고도 숙식까지 물건을 산 집에서 해결했다. 이왕 먹여주고 재워주기로 했으면 밥 할 때 아궁이에 불도 지피고, 밭 맬 때 풀도 좀 뽑아 주는 시늉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강화 여인들은 꼼짝 않고 죽은 듯 자다가 날이 새면 냉큼 보따리를 챙겨 사라지곤 했다. 타지 사람들은 이를 보고 ‘뻔뻔이’라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강화 아낙네들은 먼 바다를 바라보며 쌀과 고깃덩어리를 들고 올 엄마를 기다리는 굶주린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에미’의 본능이었다.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내리 후포는 강화 여인의 질긴 생명력을 빼닮았다. 삼산면 보문을 잇는 연락선이 뜨는 선수선착장을 끼고 있는 후포는 염하수로 끄트머리에서 웅크리듯 버티고 있다. ‘후포(後浦)’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내리의 ‘큰말’ 뒤편 언저리에 있는 그리 크지 않는 갯마을이다.

“예전에는 ‘노루매기’라고 불렀지.” 누런 벙거지 모자에 청색 장화를 신고 희끗희끗 수염이 덥수룩한 지인석씨(72)는 금세 회상에 잠겼다. 후포에서 6.5t급 어선 ‘선진호’를 부리고 있는 그가 12살 때였다. 1951년 1.4후퇴 때 강화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듯 한 고향 황해도 연백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지 못한 채 가족 일곱 식구와 함께 돛단배를 타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우연치 않게 배가 닿은 곳이 후포였는데, 말도 마. 그때는 사람 살 곳이 영 아니지 싶더라구.” 몸만 빠져나온 탓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지씨 가족은 노루매기 산 중턱에 땅을 파고 움막을 지었다. 이렇듯 후포는 전쟁 통에 이북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하나둘씩 모여 들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피난민촌이었다.

당시 배라고는 조각 배 서너 척이 전부였다. 그는 학교 갈 생각은 아예 접어두고 죽기 살기로 바다에 나가 일했다. 아는 것이라고는 노를 젓고, 그물을 치는 일 뿐이었다.

22일 부터 꽃게·병어축제

“황금바다라,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꼭 들어맞는 말이었어.” 배에 엔진을 단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변변한 그물도 없었던 시절, 바다는 그에게 늘 만선으로 답했다. 꽃게와 밴댕이, 병어, 전어, 새우 등이 후포에 넘쳐났다.

이 넉넉함 뒤에는 후포의 지리적 특성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강과 임진강, 여기에다 예성강의 밀물이 바닷물과 섞이는 곳이어서 물고기가 짜지 않고 맛이 좋았다. 노루 모가지처럼 생긴 갯골의 형세는 ‘헤엄을 치던 오리의 발목이 부러졌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거센 물발 탓에 물고기의 운동량이 많아 쫄깃한 육질로 나타났다. 여기에다 족대로 납작 들어 올리는 어법을 사용해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항상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는 신선도를 유지했다.

22일 부터 사흘간 열리는 병어회축제 준비로 포구가 모처럼 활기를 띄고 있다.

 
“후포에서 잡은 생선은 늘 최상급이었지. 지금도 후포에서 잡은 병어는 후한 대접을 받아.” 강화 외포리나 김포 대명리에서 잡은 병어 한 상자(7~8kg)가 14만~15만원한다면 후포의 그것은 1만원을 더 쳐준다. 후포산 생선은 늘 인기였다. 아침에 잡은 생선을 인력거에 싣고 외지로 나가면 해 저물기 전에는 꼭 동이 났다. 이때도 역시 외지 판매는 여인네의 몫이었다. 지씨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넉넉했던 후포 덕에 어선을 9.8t의 동력선으로 바꾸고, 인천시 서구 가정동에는 109㎡짜리 아파트도 샀다. 그때는 남부럽지 않았다.

“후포의 풍성함도 가물가물한 옛 얘기인 듯 싶으이~” 수온이 변했는지 물길이 바뀌었는지 잘 나오던 물고기가 줄었다. 또 법으로 그물 수와 종류를 묶어놓는 바람에 고기잡이가 더 힘들어졌다. IMF 외환위기 무렵 지씨는 갖고 있던 어선과 아파트를 팔았다. 지금은 임대한 선진호를 부리고 있다.

“사람은 죽으라는 법이 없는 게벼. 2년 전부터는 사라졌던 전어와 밴댕이, 병어가 후포를 다시 찾고 있어” 돌아온 물고기들로 후포가 생기를 찾고 있는 것이다.

후포가 생긴 이래 22일부터 24일까지 연예인을 초청해 꽃게· 병어 축제를 연다. 후포를 살리기 위한 내리어촌계(032-937-9045)의 결단이었다. 경매에서도 최고로 치는 후포의 밴댕이와 전어, 병어를 아는 사람이 없기에 홍보에 나섰다. ‘후포밴댕이마을’ 어판장에서 2만원 어치를 시키면 3~4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시중가보다 절반이나 싼 가격으로 병어 등을 판다는 것이다.

후포항의 갈매기들은 유난히 사람을 낯설어 하지 않는다. 찾는 이가 많은 탓이다.

 
생색낼 줄 모르고 묵묵히 일만 하는 후포 사람, 그들의 기질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난 조선 말 최고의 문사(文士) 이건창 선생(1852~1898)의 곧음을 빼닮았다. 간척을 하지 않았을 그 옛날 바닷가에 정갈한 모습으로 자리잡았을 이 선생의 생가 ‘명미당(明美堂)’은 강화도 사람들의 변함없는 자랑거리다. 강화학파 대학자이었던 선생의 저서 <당의통략(黨議通略)>은 학계에서 파당과 친족정치를 초월해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파헤친 명서로 꼽히고 있다.

명미당의 길 건너 내리면 사기리 버스정류장 바로 밑에는 이 선생의 기개를 닮은 천연기념물 79호인 탱자나무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400여 년 전 적병(敵兵)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심은 탱자나무였다. 높이 3m의 가지는 용트림하는 모양새로 흡사 적의 군대에게 불호령을 하는 듯하다.


강화갯벌센터에 가면 저어새 등 물새 장관

가만히 귀를 귀울이면 자연의 소리를 원 없이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다. 강화갯벌센터다 .

후포에서 동막해수욕장 쪽으로 승용차를 타고 5분여 거리에 있는 멀지 않은 곳이다. 참나무 향기가 물씬 나는 오솔길을 따라 4~5분 따라 걷다보면 거대한 저어새의 조형물이 나온다. 갯벌센터(032-937-5057) 입구다.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12세 이하는 800원)의 입장료를 내고 갯벌센터에 들어서는 순간 너른 갯벌이 눈 앞에 가득 찬다. 연안에서 6㎞ 뻗어나간 여차리~동막리~동검리에 이르는 갯벌(90㎢)이다. 저어새와 노랑부리백로 등 천연기념물 12종과 말똥가리 등 보호종 110종 6만여 마리의 물새를 볼 수 있다. 갯벌센터 오가는 장화리 해안도로에서는 낙조가 연출하는 황홀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경향닷컴 홈으로 이동 <글 박정환 ·사진 김순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