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기행](7) 강화 길상면 선두리
ㆍ사람 냄새가 그리우면 선두리에 오세요
파시(波市 )의 영광과 소란스러움, 번잡함과 풍요로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포구는 그 자체로 질펀한 삶의 풍경이었다.
강화군 길상면 남단 ‘선두리 포구’. 오래 전 배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뱃머리를 돌려야 부두에 배를 댈 수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초지대교를 건너 좌측 해안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갯벌을 달리다 보면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택리(擇里) 마을’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부터 선두리는 시작된다. 마을로 들어서는 야트막한 고개를 넘자마자 또 다시 광활한 갯벌이 펼쳐진다. 갯벌 한복판에 긴 팔을 펼치고 있는 곳이 선두리 선착장이다. ‘선두리 어시장’이란 푯말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오후 2시, 여느 포구와 같이 시끌벅적할 것이란 생각으로 선두리에 들어섰다가 고즈넉한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압도됐다. 이른 새벽 조업을 나갔던 배는 이미 선착장에 묶여 있다. 새벽 4시에 조업을 나갔으니 오전10시쯤부터 서둘러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배들이다. 첫 물에 들어오는 어부들의 습관 때문이다. 그래야 서너 척 들어온 것이 고작이지만.
잡은 물고기를 내려놓은 어부들은 이내 바쁜 손놀림으로 그물을 손질하고 오후2시나 돼야 늦은 점심을 해결한다. 물에 젖은 그물을 바로 손질해야 하는 몸에 밴 습관 때문이지만 어부들은 바다에서 부지런함을 배운다.
예전과 같은 파시는 없으니 그냥 배가 들어오는 대로 잡은 물고기를 부둣가 횟집에 넘기면 어부들의 하루 일과는 끝난다. 첫 물길을 놓쳐 밤새 바다에 떠 있는 배들도 적지 않단다. 오랜만에 잡히는 고기를 그냥 놔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파시의 영광은 옛말… 고즈넉한 풍경
선두리 포구 사람들은 하루 6시간 간격으로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물때에 맞춰 산다. 물때가 하루마다 30분씩 늦어지니 30분씩 천천히 살고 있다. 철저히 바다의 법칙과 섭리에 따라 살고 있는 셈이다.
선두리 어부들은 언제부턴가 어판장에 내다 팔려고 고기를 잡지 않는다. 그만큼 잡히는 양이 줄었기 때문이다. 잡은 고기는 싱싱한 횟감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직접 팔고, 그래도 남으면 이웃 횟집에 넘긴다. 어획량이 예전같지 않아도 화를 내는 법이 없다.
“배 부려 봐야 부자된 놈 없어. 부자 되려고 했으면 벌써 딴 일을 했지” 이제 막 배를 부리고 늦은 점심을 해결한 부광호 선장 이동범씨(64)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이씨는 올해로 40년째 배질을 하고 있으니 선두리포구에서도 이젠 최고참이다. 선두리 부둣가에는 각기 자신들의 배 이름을 딴 횟집이 12채가 있다. 12명의 선장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횟집을 운영하지 않더라도 이씨처럼 선두리 포구에서 터를 잡고 조업하는 배는 모두 40여 척에 달한다.
포구가 있는 선두 5리에 70여채 가구가 있으니 절반에 달하는 집들이 바다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3척이 이씨의 배다. 고기잡는 용도가 각기 다른 1톤짜리와 2.5톤, 6톤짜리 배를 갖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배 이름을 딴 ‘부광호’라는 횟집도 있다.
“부자 되려 했으면 벌써 딴일을 했지”
‘꽤 부자네요’라는 말에 그는 “부자는 무슨 부자여. 그냥 밥술이나 먹고 사는 게지”라며 난데없이 선친의 무용담을 들려줬다. “우리 선친께서는 6·25전쟁 당시 철선을 3척이나 갖고 있었어. 내가 일곱살 땐가 인민군이 마을에 쳐들어와 선친이 철선으로 마을사람들을 전부 장봉도 앞바다까지 실어 날랐지.”
따가운 햇살에 검게 그을리고 고단한 뱃일에 주름살이 깊게 패인 그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15년 전쯤에는 실장어로 하루에 600만 원을 벌었어. 그땐 땅이 눈에 안 들어 왔지 바다에 나가면 욕심이 없었으니까….” ‘노인과 바다’는 이렇게 40년을 지내왔다. 그러더니 차츰 해수면 상승이니 뭐니 해서 씨가 말랐다. 중국산 장어와 양식장어에 치여 고기를 잡아도 돈이 안 된단다.
오전10시부터 들어온 물이 다시 빠져나가기 시작해 오후2시가 되면 갯벌은 늦게 이불을 벗는다. 이른 아침 이불을 벗어젖힌 요 위에 어린아이들이 뒹굴듯이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따가운 햇살을 받은 갯지렁이며 조개, 게 등이 부끄러운 듯 속살을 드러낸다. 선두리 갯벌은 세계 5대 갯벌이다. 그만큼 보전가치가 높은 생태계의 보고인 것이다.
갯벌은 갯지렁이가 주인이다. 갯지렁이가 없으면 금방 갯벌이 썩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선두리 펄 속엔 유기물질과 플랑크톤이 풍부해 모시조개로 불리는 동죽이 지천에 널려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갯지렁이도 선두리 어가에는 주수입원이었다. 화장품이나 의약품 원료로 일본에 대량 수출됐고, 낚시 미끼로도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근래에는 뜸해졌다.
대신 갯벌은 선두리 아낙이 아닌 아이들로 채워졌다. 생계를 위해 갯지렁이를 잡지 않아도 되니 갯벌을 생태학습장으로 아이들에게 내준 것이다. 요즘에는 10여 년 전부터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펜션 투숙객들도 적지 않다. 낙조 풍광이 좋기로 소문나면서 펜션 투숙객들이 갯벌뿐 아니라 선착장 횟집의 주고객이 돼가고 있다고 한다. 순박하게 살아온 조그만 포구에 큰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부는 잡은 고기를 곧바로 팔 수 있어 좋고 펜션 투숙객은 바로 잡아 올린 싱싱한 회맛을 볼 수 있어 좋다. 8년 전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중화상을 입어 이듬해 귀향한 이지현씨(36)는 “요즘에는 펜션 투숙객과 이따금씩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횟집을 찾는 것이 주수입원”이라고 말했다. 인천에 있을 때는 화상 치료 이후에도 1년 동안 바깥 출입을 못했는데 고향에서는 꺼리낌이 없어 편하다는 그는 고장난 배의 부품을 사러 간다며 트럭을 몰고 읍내로 향했다.
부두에서 수덕호 선장 김현구씨(46)를 만났다. 횟집 수족관에 댈 짠물을 퍼 올리고 있던 그는 전남 무안이 고향이다. 부인의 고향을 따라 선두리에 들어온 지 벌써 27년째란다. 그는 “요즘에는 뱃일을 나가도 공치는 날이 적지 않아. 그래도 못 떠나는 것은 선두리가 이젠 고향이나 진배 없으니 묻고 사는 게지…”라며 겸연쩍게 웃는다.
수많은 생물을 품은 갯벌처럼, 갯벌을 품은 선두리 포구는 이방인이든, 뭍에서 아픔을 안고 돌아온 아들이든, 잠깐 들어온 뭍사람을 아무 차별없이 품는다. 1시간 전 읍내로 나간 이씨가 부두로 돌아왔다. 화상의 상흔이 선명히 남아 있는 손으로 유압기(그물을 걷어 올리는 기계)의 밸브를 갈아 끼고 있던 그에게 “새벽부터 조업을 갔다와 힘들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럼 누가 하겠어요. 밸브만 갈아끼면 좀 쉬어야지요. 내일도 새벽 4시30분에는 바다에 나가야 하는데…”라며 힘껏 밸브를 조였다.
선두리교회는 항일운동 불씨 키운 진원지
선두리포구에는 수많은 세월이 겹겹이 쌓인 갯벌 못지않게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적지가 적지 않다. 선두리교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강화군 전체에서 항일운동의 불씨를 키운 진원지다. 이 교회 장로로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희철 선생은 일본관헌에 체포돼 1년의 옥고를 치른 뒤 후유증으로 1942년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선두리교회는 현재 선두중앙교회로 개명됐으나 그가 활동했던 교회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교회 내 10평 남짓한 예배당(산후성전)에는 유 선생이 당시 활동을 같이 했던 교인들과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데 이것이 그에 대한 자료의 전부다. 지난 4월 이 교회에 부임한 이민효 목사(51)는 “현재 오래된 교인들을 상대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며 “자료가 다 갖춰지면 산후성전을 유 선생 자료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선두리교회에서 내려오다 보면 잡초가 무성한 택지돈대(인천유형문화재 제33호)를 만나게 된다.
포구로 들어가는 바로 오른편에 있어 갯벌을 마주 보게 된다.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만들어진 강화도의 53개 돈대 중 하나로 화강암을 정사각형으로 쌓아 축조됐다. 돈대 안에는 4개의 포좌가 설치돼 있다. 돈대를 훼손하면 마을이 재앙을 입는다는 전설이 있어 선두리의 또 다른 마을인 산뒤마을 사람들은 돈대를 마을 수호를 위한 신단처럼 여겨 현재에도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 선두리포구 찾아가는 길=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김포나들목→김포시(48번 국도)→강화대교→강화읍(84번 지방도)→덕포리→선두리 △ 인천시→초지대교→동막해수욕장 방향 15번 지방도로→장흥리→택이마을→선두리. 초지대교에서 선두리까지는 자전거도로도 잘 정비돼 있어 자전거 여행도 추천할 만하다.
<글 박주성·사진 김순철기자 pjs08@kyunghyang.com>
파시(波市 )의 영광과 소란스러움, 번잡함과 풍요로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포구는 그 자체로 질펀한 삶의 풍경이었다.
사람이 그리운가요. 사랑하는 이가 보고 싶은가요. 잊고 살았던 나 자신이 낯설기만 한가요. 그렇다면 포구에 가세요. 얼른 가세요. 선두리포구에 가면 사랑이 영글고 있어요. 사람냄새도 나지요. 꼭꼭 숨어있던 당신이 수줍게 드러나기도 한답니다. 이방인도, 연인도, 당신도 모두 안고도 남을 만큼 포구는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강화군 길상면 남단 ‘선두리 포구’. 오래 전 배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뱃머리를 돌려야 부두에 배를 댈 수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초지대교를 건너 좌측 해안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갯벌을 달리다 보면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택리(擇里) 마을’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부터 선두리는 시작된다. 마을로 들어서는 야트막한 고개를 넘자마자 또 다시 광활한 갯벌이 펼쳐진다. 갯벌 한복판에 긴 팔을 펼치고 있는 곳이 선두리 선착장이다. ‘선두리 어시장’이란 푯말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오후 2시, 여느 포구와 같이 시끌벅적할 것이란 생각으로 선두리에 들어섰다가 고즈넉한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압도됐다. 이른 새벽 조업을 나갔던 배는 이미 선착장에 묶여 있다. 새벽 4시에 조업을 나갔으니 오전10시쯤부터 서둘러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배들이다. 첫 물에 들어오는 어부들의 습관 때문이다. 그래야 서너 척 들어온 것이 고작이지만.
잡은 물고기를 내려놓은 어부들은 이내 바쁜 손놀림으로 그물을 손질하고 오후2시나 돼야 늦은 점심을 해결한다. 물에 젖은 그물을 바로 손질해야 하는 몸에 밴 습관 때문이지만 어부들은 바다에서 부지런함을 배운다.
예전과 같은 파시는 없으니 그냥 배가 들어오는 대로 잡은 물고기를 부둣가 횟집에 넘기면 어부들의 하루 일과는 끝난다. 첫 물길을 놓쳐 밤새 바다에 떠 있는 배들도 적지 않단다. 오랜만에 잡히는 고기를 그냥 놔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파시의 영광은 옛말… 고즈넉한 풍경
선두리 포구 사람들은 하루 6시간 간격으로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물때에 맞춰 산다. 물때가 하루마다 30분씩 늦어지니 30분씩 천천히 살고 있다. 철저히 바다의 법칙과 섭리에 따라 살고 있는 셈이다.
선두리 어부들은 언제부턴가 어판장에 내다 팔려고 고기를 잡지 않는다. 그만큼 잡히는 양이 줄었기 때문이다. 잡은 고기는 싱싱한 횟감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직접 팔고, 그래도 남으면 이웃 횟집에 넘긴다. 어획량이 예전같지 않아도 화를 내는 법이 없다.
“배 부려 봐야 부자된 놈 없어. 부자 되려고 했으면 벌써 딴 일을 했지” 이제 막 배를 부리고 늦은 점심을 해결한 부광호 선장 이동범씨(64)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이씨는 올해로 40년째 배질을 하고 있으니 선두리포구에서도 이젠 최고참이다. 선두리 부둣가에는 각기 자신들의 배 이름을 딴 횟집이 12채가 있다. 12명의 선장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횟집을 운영하지 않더라도 이씨처럼 선두리 포구에서 터를 잡고 조업하는 배는 모두 40여 척에 달한다.
포구가 있는 선두 5리에 70여채 가구가 있으니 절반에 달하는 집들이 바다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3척이 이씨의 배다. 고기잡는 용도가 각기 다른 1톤짜리와 2.5톤, 6톤짜리 배를 갖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배 이름을 딴 ‘부광호’라는 횟집도 있다.
아버지와 함께 부광호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어부 이지현씨. 삶자체가 드라마다.
“부자 되려 했으면 벌써 딴일을 했지”
‘꽤 부자네요’라는 말에 그는 “부자는 무슨 부자여. 그냥 밥술이나 먹고 사는 게지”라며 난데없이 선친의 무용담을 들려줬다. “우리 선친께서는 6·25전쟁 당시 철선을 3척이나 갖고 있었어. 내가 일곱살 땐가 인민군이 마을에 쳐들어와 선친이 철선으로 마을사람들을 전부 장봉도 앞바다까지 실어 날랐지.”
따가운 햇살에 검게 그을리고 고단한 뱃일에 주름살이 깊게 패인 그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15년 전쯤에는 실장어로 하루에 600만 원을 벌었어. 그땐 땅이 눈에 안 들어 왔지 바다에 나가면 욕심이 없었으니까….” ‘노인과 바다’는 이렇게 40년을 지내왔다. 그러더니 차츰 해수면 상승이니 뭐니 해서 씨가 말랐다. 중국산 장어와 양식장어에 치여 고기를 잡아도 돈이 안 된단다.
오전10시부터 들어온 물이 다시 빠져나가기 시작해 오후2시가 되면 갯벌은 늦게 이불을 벗는다. 이른 아침 이불을 벗어젖힌 요 위에 어린아이들이 뒹굴듯이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따가운 햇살을 받은 갯지렁이며 조개, 게 등이 부끄러운 듯 속살을 드러낸다. 선두리 갯벌은 세계 5대 갯벌이다. 그만큼 보전가치가 높은 생태계의 보고인 것이다.
갯벌은 갯지렁이가 주인이다. 갯지렁이가 없으면 금방 갯벌이 썩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선두리 펄 속엔 유기물질과 플랑크톤이 풍부해 모시조개로 불리는 동죽이 지천에 널려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갯지렁이도 선두리 어가에는 주수입원이었다. 화장품이나 의약품 원료로 일본에 대량 수출됐고, 낚시 미끼로도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근래에는 뜸해졌다.
대신 갯벌은 선두리 아낙이 아닌 아이들로 채워졌다. 생계를 위해 갯지렁이를 잡지 않아도 되니 갯벌을 생태학습장으로 아이들에게 내준 것이다. 요즘에는 10여 년 전부터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펜션 투숙객들도 적지 않다. 낙조 풍광이 좋기로 소문나면서 펜션 투숙객들이 갯벌뿐 아니라 선착장 횟집의 주고객이 돼가고 있다고 한다. 순박하게 살아온 조그만 포구에 큰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부는 잡은 고기를 곧바로 팔 수 있어 좋고 펜션 투숙객은 바로 잡아 올린 싱싱한 회맛을 볼 수 있어 좋다. 8년 전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중화상을 입어 이듬해 귀향한 이지현씨(36)는 “요즘에는 펜션 투숙객과 이따금씩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횟집을 찾는 것이 주수입원”이라고 말했다. 인천에 있을 때는 화상 치료 이후에도 1년 동안 바깥 출입을 못했는데 고향에서는 꺼리낌이 없어 편하다는 그는 고장난 배의 부품을 사러 간다며 트럭을 몰고 읍내로 향했다.
부두에서 수덕호 선장 김현구씨(46)를 만났다. 횟집 수족관에 댈 짠물을 퍼 올리고 있던 그는 전남 무안이 고향이다. 부인의 고향을 따라 선두리에 들어온 지 벌써 27년째란다. 그는 “요즘에는 뱃일을 나가도 공치는 날이 적지 않아. 그래도 못 떠나는 것은 선두리가 이젠 고향이나 진배 없으니 묻고 사는 게지…”라며 겸연쩍게 웃는다.
수많은 생물을 품은 갯벌처럼, 갯벌을 품은 선두리 포구는 이방인이든, 뭍에서 아픔을 안고 돌아온 아들이든, 잠깐 들어온 뭍사람을 아무 차별없이 품는다. 1시간 전 읍내로 나간 이씨가 부두로 돌아왔다. 화상의 상흔이 선명히 남아 있는 손으로 유압기(그물을 걷어 올리는 기계)의 밸브를 갈아 끼고 있던 그에게 “새벽부터 조업을 갔다와 힘들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럼 누가 하겠어요. 밸브만 갈아끼면 좀 쉬어야지요. 내일도 새벽 4시30분에는 바다에 나가야 하는데…”라며 힘껏 밸브를 조였다.
1919년 강화도 지역 항일운동의 진원지였던 선두리 교회 옛터. 1956년 산후성전으로 증축된후 지금은 독립운동가 유희철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선두리교회는 항일운동 불씨 키운 진원지
선두리포구에는 수많은 세월이 겹겹이 쌓인 갯벌 못지않게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적지가 적지 않다. 선두리교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강화군 전체에서 항일운동의 불씨를 키운 진원지다. 이 교회 장로로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희철 선생은 일본관헌에 체포돼 1년의 옥고를 치른 뒤 후유증으로 1942년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선두리교회는 현재 선두중앙교회로 개명됐으나 그가 활동했던 교회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교회 내 10평 남짓한 예배당(산후성전)에는 유 선생이 당시 활동을 같이 했던 교인들과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데 이것이 그에 대한 자료의 전부다. 지난 4월 이 교회에 부임한 이민효 목사(51)는 “현재 오래된 교인들을 상대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며 “자료가 다 갖춰지면 산후성전을 유 선생 자료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선두리교회에서 내려오다 보면 잡초가 무성한 택지돈대(인천유형문화재 제33호)를 만나게 된다.
포구로 들어가는 바로 오른편에 있어 갯벌을 마주 보게 된다.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만들어진 강화도의 53개 돈대 중 하나로 화강암을 정사각형으로 쌓아 축조됐다. 돈대 안에는 4개의 포좌가 설치돼 있다. 돈대를 훼손하면 마을이 재앙을 입는다는 전설이 있어 선두리의 또 다른 마을인 산뒤마을 사람들은 돈대를 마을 수호를 위한 신단처럼 여겨 현재에도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택지돈대 너머로 광활한 갯벌이 드러났다. 100여년 전 저기 어디쯤인가로 일본군함이.서양상선이 드나들었다. 돈대를 찾은 어느 가족의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 선두리포구 찾아가는 길=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김포나들목→김포시(48번 국도)→강화대교→강화읍(84번 지방도)→덕포리→선두리 △ 인천시→초지대교→동막해수욕장 방향 15번 지방도로→장흥리→택이마을→선두리. 초지대교에서 선두리까지는 자전거도로도 잘 정비돼 있어 자전거 여행도 추천할 만하다.
<글 박주성·사진 김순철기자 pjs0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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