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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등산사진후기☞/♤ 경기도의 기타산

[200900717]명성산(산정호수-자인사-억새꽃정상-등룡ㆍ비선폭포-산정호수)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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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산(923m)

  

  

 

 

2009년 7월 17일(금) 명성산 답사산행코스

산정호수-자인사-억새꽃정상(팔각정)-억새꽃군락지-약수터-이정폭포-등룡폭포-비선폭포-등산로출발지-산정호수

 

▼ 04시 48분 - 산정호수

 

 

▼ 05시 17뷴 - 자인사 입구

 

▼ 05시 18분 - 자인사

 

자인사

 

궁예왕이 서기 901년 송악에 도읍을 정했다가 5년 후(서기905년),

지금의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태봉이라 칭하면서 연호를 수덕만세로 개칭하였다.

 

그후 궁예왕은 그의 휘하 부장이었던 왕건을 시켜, 후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그때 왕건은 산자수명한 이곳에서 산제를 지냈고, 현몽을 받아 승전했다고 전한다.

 

한편 훗날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 밀리고 쫓겨, 지금의 명성산성에 진을 치게 되었을 때

이곳 명성산 자인사 터의 커다란 바위에다 제사상을 차리고 자주 기도를 올리던터라 하여 잿터라고 불렸다.

 

뒷산을 명성산이라고 한 것이나 구만동과 용화동이라는 고을 이름이나

한탄강이라는 강이름이나 모두 이런 맥락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재를 올리고 기원하던 터라하여 잿터요.

궁예왕의 군사나 식솔들의 울음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하여 명성산(울음산)이요, 용화세계라 하여 용화동이며,

하염없이 철원쪽을 바라보면서 눈물흘리며 시름에 잠긴 궁예왕에게 충신들이 "이제 그만 들어가십시오, 그만 하십시오."했다 하여

'그만'이 '구만'으로 불려졌고 궁예왕이 강변에서 한탄했다 하여 '한탄강'인 것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태조에 즉위하자 이곳에 조그만 암자를 세우니, 그의 시호를 따서 절 이름을 신성암이라 정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나 300여년이 지난 후 산불로 소실되자 충열왕 3년에 다시 중건하고 절이름을 왕건의 자호를 따 약천암이라 했다.

 

그 뒤 거란침입과 몽고침략, 6.25동란 등 수많은 전란을 거치는 동안 정확한 문헌과 역사적 기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로지 민가의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와 절터만 남아 있어 안타까운 노릇이다.

 

1964년 5월 허물어진 축대와 옛 법당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주춧돌만 몇 개 나뒹굴고 있는 것을

김해공 스님께서 안타깝게 여겨 이곳을 말끔히 다듬고 석고로 된 18척의 미륵불 입상을 조성하였다.

 

그 후 13평의 조그만 법당을 세우고 자인사라고 이름하였다.

'자'란 미륵의 뜻으로 불가에서 자비를 말하며, 궁예왕이 미륵세계를 구현코자 함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자 함이다.

'인'자는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자라 하여

영계에서나마 궁예왕과 태조 왕건의 맺힌 악연을 풀고 미륵세계를 구현하소서하는 기원의 의미로 붙여진 절 이름이다.

 

1993년 정영도 스님이 국민관광지에 어울리도록 석고 미륵불이 서 계신 곳에 극락보전을 다시 짓고,

1998년에 옛날 법당건물을 그대로 보존시킨 채, 그 자리에 미륵좌불을 새로 조성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미륵불

 

중국 절강성 봉화현에 이름이 계차인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항상 맨발로 걸어 다녔을 뿐 아니라,

눈위를 걸어다녀도 발자국이 전혀 나지 않으며, 아무곳에서나 눕고 자고 하였다.

또 그가 언제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항상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니면서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달라고 하고,

먹을 것은 아무거나 주기만 하면 받아서 그 자루 속에 넣어 두었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에서 구원해 주고 복을 주는 부처님이라 하여, 별호를 구빈복불, 또는 포대보살이라 불렀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길흉화복, 날씨, 천재지변 등을 예언해주었는데, 언제나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916년 3월에 명주현 악림사 동쪽, 눈이 수북히 쌓인 밀반석 위에 단정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이 시신을 거두려고 들어올리자, 눈위에 자국이 전혀 없었으며,

자루속에서는 "미륵진미륵 분신백천억 시시시시인 시인자불식"이라는 게송이 적혀져있었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은 이 포대보살을 미륵불의 화신이라 하여,

그 모습을 집안에 모셔놓고 존경하는 받드는 마음으로 꿇어 앉아 기도하기도 하고,

이 게송을 글로 적어 집에 붙여놓고, 늘 암송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또 어떤 이는 그림으로 그려서 대문 앞에 붙여 놓고,

정초가 되면 입춘대길이나 부적처럼 집안에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 달라는 마음으로 빌었다고 한다.

 

후세에는 그가 살아 생전에 박복한 자에게 복을 주고 실덕한 자에게 덕을 쌓도록 인도하셨다 하여

인덕불 또는 시복불, 포대화상 등 명칭이 수없이 붙여졌으며,

중국에서는 그대로 미래불인 미륵불로 주불이 된 것이다.

 

참배인들의 구빈복불의 서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인사에서는 많은 정성을 들여 간좌곤향의 서사택 삼십이 길택 중

제일 길택인 측면 연연득립, 전면 생기, 뒤측면 천을의 문을 구비하여,

양택 기문팔괘의 신비를 성숙시켜 미륵 부처님을 조성 배치하였다.

 

 

 

 

▼ 약수터 뒤편 등산로입구에서 계속되는 계단길을 따라 오르고...

 

 ▼ 06시 14분 - 책바위 갈림길에 도착 

 

 

▼ 06시 15분 - 테크계단 

 

 

▼ 06시 26분 - 데크계단과 로프길이 지나면...

 

   

▼ 06시 34분 - ?봉

 

 

 

 

▼ 억새군락지

 

 

▼ 팔각정이 보이고...

  

▼ 06시 39분 - 팔각정

 

 

 

 

▼ 명성산을 찾아 억새꽃만 보고 내려가는 이들을 위한 기념사진용 '명성산 표지석'인듯...

 

 

 

 

 

 

 

 

 

 

 

 

▼ 07시 25분 - 암반계곡으로 지난 비로 인해 많은 물이...

 

 

 

▼ 07시 28분 - 이 폭포가 '이정폭포'인가?

  

▼ 07시 31분 - 등룡폭포 상단폭포

 

▼ 07시 33분 - 등룡폭포 전망대

 

▼ 등룡폭포는 이단폭포

 

  

 

 

▼ 07시 52분

 

▼ 07시 53분

 

▼ 08시 00분

 

 

▼ 08시 01분

 

▼ 08시 02분 - 비선폭포 상단

 

 

 

▼ 08시 02분 - 비선폭포

 

 

 

▼ 08시 04분

 

▼ 08시 04분

 

 

▼ 좋은 날에 다시 찾을 것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