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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을 아시나요?

by 맥가이버 Macgyver 2009. 8. 27.

 

조선 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은 집권 세력의 거주지였고,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서촌’은 역관 등 조선의 전문직인 ‘중인’들이 모여살던 곳이다.

최근 서울시가 북촌에 이어 서촌 지역 보존과 정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지난달 말 건축가를 선정해 체부동·필운동·누하동·옥인동 일대 11만4천㎡의 세부 도시계획과 통인·창성·효자동 등 38만1천㎡에 대한 한옥 보존 가이드라인을 만들도록 연구를 맡겼다.


이 지역 도시계획 수립을 맡은 권문성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 이충기 서울시립대 건축과 교수, 안우성 온고당 소장이 옥인동·체부동 일대를 두고 서울시에 낸 기본 아이디어는 문화 유적과 한옥, 골목길과 물길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다.


사대문 안의 한옥 1400여채 가운데 300여채가 ‘서촌’에 남아 있는 데다 이 지역 한옥은 북촌과는 다른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들은 밝혔다.


안우성 온고동 소장은 “이 곳엔 중인들이 모여 살아 대체로 북촌보다 한옥 한 채가 차지하는 필지가 작은 편”이라며 “겉보기에는 다른 건축 자재를 덧대 잘 안 보이더라도 한옥의 구조가 남아있는 집들이 많다”고 말했다.


너비 2~3m밖에 안되는 거미줄 같은 골목은 옛 도시 조직의 모세혈관을 드러내고 있다.


안 소장 등은 이 지역을 5층 이하 저층 건물로 짓도록 하고 골목을 남기도록 주차장을 지하에 마련하며, 옥인아파트 쪽에 저류지를 만들어 실개천을 흐르게 하는 구상을 내놓았다. 권 교수는 “주민들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면서 한옥마을의 분위기도 살리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지역은 조선부터 근대까지의 유적을 품고 있는 보물 창고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책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에서 “중인은 의학·천문학·지리학 등을 전공한 전문성 강한 전방위 지식인”이라며 “풍류를 즐기는 시문학 동인 등 문화공동체를 형성해 활약했으며, 바로 그들의 터전이 인왕산 일대”라고 썼다.


옥인동 47번지는 이런 문화공동체 가운데 하나인 ‘송석원 시사’(시 동인) 문인들이 주로 모이던 곳인데 추사 김정희가 쓴 ‘송석원’이란 바위 글씨가 남아있다.

특히 이곳엔 백사 이항복의 글씨가 남아있는 필운대, 세종대왕이 태어난 집터 등 조선 시대 유적뿐 아니라 시인 윤동주의 하숙집, 노천명·이중섭의 집 등 근대 예술가들의 자취도 서려있다.


안 소장은 “역사 유적을 복원하고 이야기를 살리면 북촌보다 문화적 잠재력이 더 큰 곳”이라며 “이런 역사 자산을 살리면 관광 등에서 큰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팀은 이런 기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6개월 동안 세부계획을 만들어 시에 제출할 예정이다. 서울시 정병일 주거정비과장은 “현재 건축가들이 낸 것은 기본 아이디어일 뿐이며, 앞으로 주민들과 협의해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건축설계사무소 광장 제공




"서촌(西村), 골목마다 옛 흔적이 남아 있죠"


김진명 기자 geumbori@chosun.com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건축가 임형남과 함께하는 서촌 '건축투어'


이만큼 뿌리 깊고, 이토록 잊혀진 동네는 흔히 없다.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에서 인왕산 자락 아래 놓인 서촌(西村) 얘기다. 여길 그저 경복궁 서쪽 동네로만 알면 곤란하다. 이곳은 세종대왕이 나고 영조대왕이 자란 땅, 추사 김정희를 낳고 겸재 정선을 품은 고을이다.

역사적인 건물들은 모두 스러지고 일제가 남긴 적산가옥과 콘크리트 건물이 뒤섞인 거리가 됐지만, 아직도 곳곳엔 오래된 일화들이 남아 있다.


이 서촌의 가치를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서울시와 홍선희 건축문화학교 본부장이 '서울 문화의 밤' 행사의 일환으로 공동기획해 29일 진행, 선보이는 '건축투어'다.

건축가와 함께 서울의 '공간'을 재발견하자는 취지로 정동·북촌·홍대앞·대학로에서도 진행되는데, 서촌 투어는 여기 살았던 건축가 임형남씨가 맡았다.

종로구 통의동~창성동~효자동~궁정동~청운동~신교동~옥인동~필운동을 걸어서 돌아보며 서촌 구석구석 숨은 공간을 일러준다. 최근 임씨와 동행 취재하며 서촌의 '멋'을 미리 훑어봤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순례


"서촌은 풍화된 동네예요." 서촌 입구 격인 경복궁 옆 효자로에서 만났을 때 임씨는 말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평범한 골목마다 남아 있는 옛 흔적에 의미를 두면, 정말 매력 넘치는 곳이죠."


서촌으로의 여행이 시작되는 '통의동 백송' 자리(통의동 35-15)부터 그렇다.

여기엔 원래 수령 600년이 넘는 높이 16m, 둘레 5m가 넘는 백송이 있었다. 일대의 영락을 빠짐없이 지켜봤던 백송은 경복궁 동쪽 재동 백송, 조계사 경내 수송동 백송과 비교해도 모자람 없이 크고 아름다워 1962년 천연기념물 제4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1990년 낙뢰를 맞아 쓰러진 뒤, 지금은 아랫둥치 얼마간과 이후 새로 심은 어린 백송만 남아 있다.


"보이는 건 별로 대단치 않아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려고 하면, 수많은 역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임씨의 말대로 오랜 세월을 거슬러 생각하면 통의동 백송 일대는 의미가 깊다.

바로 영조(1694~1776)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창의궁(彰義宮)터이기 때문이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 증손인 추사 김정희(1786~1856)도 여기서 태어났다고 한다.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 고택에도 백송이 있는데, 추사가 어릴 적 본 백송을 잊지 못해 심었다고 하더군요."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옛 보안여관 (사진 위)효자로 옆 시네마서비스 사옥(사진 아래)./김진명 기자

 

◆현대건축에서 맥락 읽어내기


창의궁터를 지나 효자로를 따라 청와대 앞을 지나는 동안 잠시 과거에서 현대로 시간이동이 필요하다.

대림미술관~시네마서비스~여운헌으로 이어지는 현대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과 현대미술을 주로 전시하는 대림미술관(통의동 35-1)은 1960년대부터 일반 주택으로 쓰였던 건물로, 프랑스 건축가 뱅상 코르뉴(Cornu)가 미술관으로 개조해 2002년 개관했다.

한국 보자기를 본뜬 정면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정원을 둘러싼 베란다가 아름답다.


대림미술관 인근 효자로변에 있는 시네마서비스(통의동 35-23)는 인근에서 여러 해 살았던 건축가 황두진씨 작품이고, 청와대 뒤편 청운동 길가에 콘크리트벽과 담쟁이덩굴을 드러낸 채 서 있는 여운헌(청운동 108-5)은 파주 '헤이리 아트밸리'로 유명한 건축가 우경국씨가 지었다.

나지막한 건물로 길가에 여백을 둔 진화랑(통의동 7-38), 아름드리나무를 살리기 위해 마당을 남긴 옛 헥사콤(통의동 7-29), 청와대 직원들이 이용하는 '보안여관'이었다가 전시공간으로 바뀐 낡은 이층집(통의동 2-1)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영빈 이씨의 신위를 모셨던 선희궁지(사진 위), 청운동 입구에 있는 여운헌(사진 아래)./김진명 기자

 

◆사라지고 잊혀진 것들의 아름다움


여운헌으로 올라갔던 서촌 여행은 청운동주민센터 앞길을 건너 신교동으로 향하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국립서울농학교 교정 안쪽 뒤뜰에 선희궁지(宣禧宮址·신교동 1-1)가 있다. 이곳도 영조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위를 모셨던 사묘(私廟) 선희궁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신위가 청와대 경내에 있는 칠궁(七宮)으로 옮겨가 텅 빈 건물 주변에 꽃만 무성히 피어 있다. "영조가 후궁 출신이라 공식 제사를 받지 못하던 모친 최숙빈을 위해 지은 사당 '육상궁'이 있던 곳에 비슷한 처지인 비빈을 합사한 곳이 칠궁이죠."


청운동에서 신교동 쪽으로 길을 건널 때도 주위를 잘 둘러봐야 한다. 선희궁을 지은 뒤 동편에 놓은 '새다리'(新橋)가 있어 이곳 지명이 신교동이 됐단다.


선희궁지부터는 이미 사라진, 혹은 잊혀진 풍경을 느끼는 길로 들어선다.

신교동·옥인동을 아우르는 '송석원길'의 송석원(松石園)은 조선시대 평민시인 천수경의 집이자 호였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황태자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친가도 옥인동에 남아 있다.


건축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배화여고 건물 뒤편에 살아남은 백사 이항복(1556~1618)의 집터 필운대(弼雲臺·필운동 산1-2). '필운대'라 새겨진 커다란 바위 앞에서 산바람을 쐬며, 건축투어를 마칠 때 임씨는 말했다.


"서촌도 북촌처럼 막 새로운 건물들이 밀려들고 있어요. 지금이 서촌의 본모습을 조금이나마 느낄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겠네요."


 

 

 

경복궁 옆 서촌(西村), 청계천과 물길 잇는다


세종대왕이 태어나고, 정선이 그리고, 이상이 시(詩)를 썼던 마을

"세종 푯돌에 쥐포놓고 팔아서야…" 옥류동천·백운동천 등 물길 복원

한옥마을 만들고 문화마을로 조성

서울 종로구 체부동, 필운동, 누하동, 옥인동 일대 경복궁 서쪽의 '서촌(西村)' 지역이 역사가 숨쉬는 문화촌(文化村)으로 부활한다.


한옥을 개조한 카페와 갤러리들로 명소가 된 북촌(北村)이 조선시대 권세가의 동네였다면, 인왕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서촌은 화원(畵員)·서리·서당 선생 등 중인들의 삶의 흔적이 배어 있는 곳이며, 한국 문화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세종대왕이 태어났고 겸재 정선이 이곳을 '인왕재색도' '청풍계도'에 담았다. 이상, 노천명, 현진건 등 근대 문학을 이끈 작가들도 서촌에서 감수성을 충전했다.


서울시는 면적 58만2161㎡에 이르는 서촌을 '문화를 담는' 방식으로 개발하기 위해 유명 건축가 18명으로 구성된 '서울시 특별경관관리설계자'를 대상으로 지명초청 설계경기를 실시했다. 권문성 성균관대 교수, 이충기 서울시립대 교수, 안우성 온고당 소장 등 3명이 프로젝트 담당 건축가로 선정됐다. 전체사업을 총괄하는 마스터플래너는 신중진 성균관대 교수가 맡았고, 역사 고증을 위해 허경진 연세대 교수, 건축가 김원씨 등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서촌의 역사와 자연, 문화를 살리는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복개로 자취를 감춘 물길을 되살리는 일이다.

겸재의 '청풍계도'에 나오는 옥류동천, 백운동천을 비롯, 사직동천 등 실개천을 되살리고, 이곳에 살던 중인들의 공방(工房)을 재현한다.

이충기 교수는 "옥인시범아파트 부근에서 시작되는 옥류동천(길이 1354m), 청와대 부근에서 시작되는 백운동천(897m), 사직동을 관통하는 사직동천(568m)을 일부 복원하여 이후에 청계천과 연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경복궁, 북촌, 서촌 지역을 연결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고 했다. 서촌 지역에 남아있는 한옥은 630여 채. 건축가들은 이 중 일부를 공방과 게스트하우스, 주민센터로 활용할 계획이다.

김원씨는 "세종대왕 나신 곳을 알리는 푯돌 위에 상인들이 쥐포를 올려놓고 파는 게 서촌의 현실"이라며 "서촌 구석구석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되살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문화마을 서촌을 만드는 데는 주민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최대 숙제로 보인다. 이삼묵 체부동 재개발조합 부위원장은 "1년 전만 해도 고도 제한을 폐지하고 아파트 신축을 허가하겠다고 약속했던 서울시가 말을 바꾸고 있다"며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경복궁 서쪽 동네를 서촌으로 불렀다.

서촌은 인왕산 밑에서 서소문 주변에 이르는 지대였다.

서촌에는 역사자원으로 서궐로 불렸던 경희궁과 칠궁 등의 궁궐과 정도 초에 주례의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조성된 사직단이 있다.

인왕산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어 서봉 또는 서산으로 불리다가 성종 12년(1481년)에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할 즈음 '인왕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인왕산은 높이 338.2m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반이 유난히 노출된 산으로 조선시대 한양의 내사산(內四山)의 우백호에 해당된다.

인왕산 자락의 서촌(西村)은 인왕사라는 절이 있어 인왕동으로 불리던 곳이다.

인왕산에서 누상동으로 흘러내리던 물과 인왕산에서 옥인동과 청운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던 물이 지금의 통인동 우리은행 앞 삼거리에서 합류하여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을 지나 황토마루(동아일보사 근처)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서울 도성 안에서 경치가 뛰어난 이곳은 선조 임금의 출생지 도정궁, 서촌의 유명한 활터 등과정(현재의 황학정), 권율과 그의 사위 백사 이항복이 살았던 필운대, 유명한 친일파 윤덕영의 집터, 청음 김상헌, 선원 김상용, 안동김씨 김수항, 여흥민씨 민태호 등 조선시대 세도가들의 집과 별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촌 중에서 청계천 지역은 시정상인이나 중인, 하급군인 등 중하층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인 소위 '여항(閭巷)'이었다.

이곳은 중하층 평민들이 신분제약의 울분을 술과 시로 달래며 옥계시사, 송석원시사, 칠송정시사, 직하사, 비연시사, 서원(일섭언) 시사, 육교시사 등의 모임을 결성하여 조선후기 '여항문학'을 꽃피웠던 곳이다.

인왕산은 조선후기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의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겸재 정선은 평생을 인왕산 자락에서 살면서 많은 인왕산 그림을 남겼다.

그는 1676년에 유란동(현재의 경복고 자리인 청운동 89번지 일대)에서 태어나 1727년에 인왕곡(현재의 옥인동 20번지 일대)로 이사해서 살았다.

그가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1751년),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1755년), 풍계유택(정선의 외할아버지 집), 청풍계도(1730년경, 1739년), 인곡유거(1755년) 등의 그림에서 18세기의 인왕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선(鄭敾)에게 그림을 배웠고 강세황(姜世晃)·김홍도(金弘道)와 교분이 두터웠던 강희언도 늦은 봄 도화동(桃花洞)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고 그린 '인왕산도(仁王山圖)'를 남겼다.

1791년 6월 15일 무더운 여름밤에 당시 여항문학을 주도하던 천수경(千壽慶)의 집인 송석원에 모인 광경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와 단원의 절친한 벗 이인문의 송석원시회도(松石園詩會圖)의 무대도 인왕산 자락이다.


강희언과 김홍도는 서른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절친하게 지냈다.

김홍도가 그린 '단원도(檀園圖)'는 1784년(40세)에 김홍도가 안기 찰방으로 있을 때, 정란이 단원 김홍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1784년 12월 입춘 2일 후에 그린 그림이다.

1781년 4월 1일, 김홍도의 집 '단원(檀園)'에서 정란, 강희언과 조촐한 풍류모임을 가졌을 때를 회상하여 그린 그림으로 김홍도의 화제, 정란의 시, 이인문의 관화기가 들어있다.


인왕산을 노래한 문인들의 작품은 청음 김상헌의 유서산기(遊西山記, 청음집 권 38에 수록), 김동인의 단편소설 광화사(狂畵師), 박완서의 '내가 잃어버린 동산'(한 길 사람 속, 작가정신, 1999), 김광규의 시 '인왕산' 등이 있다.

그리고 인왕산 근처에는 정지용 시인의 옛집(재동), 소설가 이상의 옛집(통인동),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누상동), 소설가 현진건의 옛집(부암동), 소설가 염상섭의 생가(적선동), 송강 정철의 옛집(청운초등학교), 추사 김정희의 생가(통의동), 세종대왕 생가, 사직단, 필운대대, 선희궁터, 우당기념관, 자하문, 환기미술관, 세검정, 홍지문, 석파정, 청송당터, 운강대터, 송석원터, 청풍계, 무계정사, 총침교터, 어의궁터, 육상궁, 창의궁터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서울의 풍수사신 중 현무와 백호에 해당하는 빼어난 산세의 북악산과 인왕산이 있고, 이 두 산 사이에 원래는 청계천 상류를 이루었던 장안의 경승지 백운동천이 있었다.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자하문길)로 쓰이고 있다.

무형의 자원으로는 조선조 당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특유의 서촌문화가 있었다.

이곳은 조선조 후기에는 당시 서인으로 분류되던 율곡학파 사림들과 중인들의 중심 거주지였다.

실학과 함께 실용주의 노선의 근거지였다.

서인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일종의 시단인 ‘백악사단(白岳詞壇)’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역시 서인 계열이었던 겸재 정선과 송강 정철, 추사 김정희의 거처가 이곳에 있어서 실경산수를 비롯한 문화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개화기와 일제 시대로 이어지는 근대 태동기에 이곳은 독립운동과 신문화의 거점이었다.

구한말 때 대상지에서 조금 떨어진 성밖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조성하였다.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대한매일신보 사옥 터와 해방 후 민족주의 계열의 활동 거점이었던 경교장이 대상지 내에 있다.

그리고 근대 음조선 후기 안동(장동) 김씨들의 60여년의 외척세도정치가 진행되게 됨에 따라 그들의 본거지인 오늘날 인왕산 동쪽기슭 청운동 일대가 모든 정치ㆍ사회세력의 중심지가 된다.

따라서 이곳 세도지역을 웃대라 하기에 이르렀고, 그 외 지역은 상대적으로 아랫대가 되었던 것이다.

웃대는 한성 전체로 봐서는 서촌에 해당된다.

서출동류하는 청계천 발원지 근처의 맑은 물줄기와 화강암의 풍광이 빼어난 주거지를 바탕으로 그 위세를 떨쳤던 것이다.


서인(庶人)·중인(中人) 출신의 위항인(委巷人)들이 모여 살던 서울 서촌(西村:지금의 인왕산 밑 옥인동 일대). 그 소나무 숲 사이로 계류가 흐르는 곳에 천수경(千壽慶)이 정원(亭園)을 짓고 살면서 김정희(金正喜)가 쓴 송석원(松石園)이라는 편액(扁額)을 걸고 불우한 시인들과 어울려 시와 술로 소요자적하였다.

당시 이곳에 출입하던 시인들을 송석원시사 시인이라 일컬었으며, 후일에 흥선대원군도 여기에 나와 큰 뜻을 길렀다 한다.


서울에는 북촌 말고도 '서촌'이라는 지역이 조선시대 때 존재했다.

그 서촌이 그동안 역사문화적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 채 오랜 세월 서울의 개발 열기 가운데 시민에게 다가설 수 없었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은 전망이어서 반갑기 그지없다.


서촌이라 함은, 현재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지역으로써 체부동, 필운동, 누하동, 옥인동 일대로 조선시대 역관 등 조선의 전문직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말한다. 이른바 집권세력이 거주하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지역이 북촌인데 반해 서촌은 조선시대 전문가 집단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의학, 역학, 천문학, 지리학 등 전문직 종사자 중인들이 모여 살던 집단 거주지가 서촌인 것이다.

또한 이곳은 풍류를 즐기던 문학인들이 문학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던 곳이 서촌으로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알려진 바위글씨(송석원이라는)가 남아있고 백사 이항복의 글씨가 남아있는 필운대와 세종대왕이 태어난 집터 등 조선 시대 유적뿐 아니라 시인 윤동주의 하숙집, 노천명·이중섭의 집 등 근대 예술가들의 자취도 서려있는 등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역사 문화의 자취가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지역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2008년 12월 건축가를 선정해 서촌 일대 11만 4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지역의 세부 도시계획과 통인동, 창성동, 효자동 38만 1천 평방미터에 대한 한옥 보존 가이드라인을 만들도록 연구 용역을 맡긴 것으로 드러났다. 북촌에 이어 서촌 지역 보존과 정비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현재 서울 4대문 안에 남아 있는 한옥 1,400여채 가운데 300여채가 서촌에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촌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성, 즉 조선 중인들 거주지가 북촌에 비해 한옥 한채의 규모가 작고 골목길이 협소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거미줄 같은 조선의 옛 도시 모세혈관을 보여주고 있어 이를 살려내면서도 실개천이 흐르는 정비작업이 함께 이루어지면 그런대로 도시문화의 역사성이 한층 뛰어날 것으로 기대 하고 있다.


앞으로 6개월간 연구 용역이 마쳐지면 현재 주민들과 협의를 거쳐 주거지역 정비와 역사 문화 보존이라는 본래의 전통지역 도시개발이라는 청사진이 구체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시의 삶과 멋, 역사와 현대적 발전의 조화가 자리하는 세계도시 서울의 숨결이 '서촌'에서 발원될 것으로 보여진다.

충분한 협의, 고증과 설득을 통해 펼쳐지는 서울의 문화행정이 되기를 기대한다.


서촌, 골목골목 ‘근대’가 조용히 숨어있었네

이상-이중섭-이상범 가옥 등 문인-화가들의 숨결 생생 북촌 못지않은 답사지로 부상 물길-한옥촌 복원 논의 활발


《“서촌(西村)의 재발견!”


서울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에 위치한 서촌이 새로운 문화벨트로 부상하고 있다.

서촌은 경복궁의 서쪽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현재 종로구 옥인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필운동 일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 수년 사이 이곳의 문화예술 공간이 근대문화재로 등록되는 등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 지역 근대문화재에 대한 보수·보존 조치가 이뤄지고 있으며 본격적인 답사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동안 서울의 북촌이나 덕수궁 옆 정동길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서촌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


○ 서촌의 매력


서촌의 가장 큰 매력은 인왕산. 18세기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의 명작 ‘인왕제색도’(국보 216호)에 나오는 그 인왕산이다. 서촌은 어느 곳에서도 인왕산의 웅장한 바위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올 정도로 풍광과 조망이 좋다. 인왕산 아래 옥인아파트에 가면 청계천 발원지도 만날 수 있다.

서촌은 조선시대 중인들이 모여 아회(雅會·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던 모임)를 열었던 곳, 근대기 문인들과 화가들이 예술혼을 불태웠던 곳이다. 따라서 서촌에는 조선시대 이래 예술의 전통과 흔적이 전해오고 있다.


○ 서촌의 근대문화재


통인동에는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1937)의 집터, 누하동에는 한국화가 청전 이상범(1897∼1972)의 가옥과 화실, 누상동에는 서양화가 이중섭(1916∼1956)이 생활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가옥, 옥인동에는 한국화 분야의 원로 박노수 화백(82)의 가옥 등이 남아 있다.

박노수 가옥은 1937년 지은 한옥 양옥의 절충형으로, 건축물 자체로서의 가치도 높다. 벽돌로 지은 1층은 온돌 마루 응접실 등을 두어 프랑스풍으로 꾸몄고 나무로 지은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만들었다. 현재 박 화백이 이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이중섭 가옥의 경우 그곳에 이르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인상적이다. 이상범 가옥은 화실이 잘 남아 있어 그의 예술적 체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서촌에는 근대기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건축물도 적지 않다. 사직단 옆쪽 필운동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보통학교인 매동초등학교(1895년 개교),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도서관인 종로도서관(1920년 개관)이 대표적이다.


필운동의 배화여고 생활관도 빼놓을 수 없는 근대문화재다. 1916년 신축된 이 건물은 원래 선교사들의 숙소였다. 붉은색 2층 벽돌집에 기와지붕을 얹은 모습, 정면 가운데 현관 바로 위에 발코니를 꾸민 모습이 이색적이면서 아름답다.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 숙소 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 서촌에 대한 관심


서촌의 근대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보수 및 활용 움직임도 늘어났다. 서울시는 올해 초부터 이상범 가옥과 화실을 보수하고 있다. 올해 안으로 보수공사를 마무리 짓고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문화유산보존 시민단체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지난달 이상의 가옥터를 매입했다. 오민근 사무국장은 17일 “앞으로 이곳을 이상과 관련된 문화공간으로 꾸며 다양한 전시 및 문화행사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서촌의 근대문화재가 부각되면서 이곳을 찾는 답사객도 늘고 있다. 이달 초엔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사단법인 예올이 ‘서촌지역 답사 프로그램’을 마련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답사 및 주변 환경정리 봉사활동을 벌였다. 그동안 개별적인 답사는 있었지만 단체가 나서서 답사프로그램을 마련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두 단체는 앞으로 매월 한 차례씩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해 북촌이나 정동길과 맞먹는 답사코스로 발전시킬 생각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필운동의 ‘시인의 집’처럼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도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 서촌의 미래를 위하여


서촌의 미래에 대한 학술적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서울대 건축과 박소현 교수와 서울대 대학원 도시설계학과 최샛별 씨가 올봄 공동 발표한 ‘서울 서촌의 문화지구 적용 가능성에 대한 연구’ 논문. 이들은 이 논문을 통해 “서촌에 근대 문화예술거리를 조성하고 필운동 일대의 한옥촌을 보존해 전통과 근대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으로 꾸며야 한다”고 밝혔다. 오 사무국장은 “인왕산 아래 옥인아파트의 재개발을 계기로 청계천 발원지의 물길을 복원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는 근대 문화예술공간과 현대의 생활공간이 잘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최 씨는 “근대기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의 문화적 삶을 향상시키는 쪽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민이 함께할 때 서촌이 진정한 문화벨트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