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즐거움 20선]<2>영남대로-부산에서 서울까지 옛길을…
◇영남대로-부산에서 서울까지 옛길을 걷다/신정일 지음/휴머니스트
《영남대로를 열나흘에 걸쳐 걸으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법구경’의 한 구절처럼 “그들 모두가 나의 스승”이었다. 숱한 길목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길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땅의 숨은 이야기와 세상살이의 팍팍함이나 기쁜 일들을 들려줬고, 우리 역시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동래산성∼숭례문 14일간의 답사
저자는 걷기에 중독된 사람이다. 금강 섬진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을 따라 걸었고 400개가 넘는 산을 오르내린 저자는 2004년 가을 14일에 걸쳐 영남대로를 걸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과거 보러 다니던 길이자,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걸었던 길이다.
10월 1일, 저자는 부산의 동래산성에서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송상현 부사의 기개를 생각하며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양산으로 이어지는 옛길이 골프장 건설로 사라졌다는 현실에 곧바로 부닥쳤다. 저자는 생각한다. ‘우리 땅, 우리 길을 걷고 싶어도, 걸어야 할 그 길이 없으니 어떡한다?’
낙동강변의 철길을 따라 걷다 보니 경남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근처 강가에 있는 널따란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일명 ‘자살바위’다. 바위 아래 물이 깊어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끝이 닿지 않는다고 했던 곳. 한 맺힌 아낙네들이 이 바위에서 뛰어내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원동면 원리의 작은 가게에서 빵과 음료수를 사려 하자 주인아주머니가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아침을 먹었는지 묻더니 시래깃국에 밥을 말아준다. 저자는 “우리는 작고 하찮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 목말라하고 작은 사랑에 감동하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에선 납닥바우가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 때 영남대로를 오가던 길손이 쉬어갔던 곳으로 60명이 눕거나 앉아 쉴 수 있을 정도로 평평하고 큰 바위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선 불경소리에 이끌렸다. 봉화산 석주사다. 저자는 “낯선 길을 걷다가 절을 만나면 꼭 고향집에 온 것처럼 가슴부터 설렌다”고 말한다. 절 안쪽을 보니 두 스님이 놋그릇을 닦고 있다.
경북 칠곡에서 구미로 가는 길에는 ‘서울나들’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 인동에서 칠곡으로 가는 큰 길목에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낙동나루에 도착한 저자는 한숨을 내쉰다. 강변이 매운탕이나 불고기를 파는 ‘가든 천국’으로 바뀐 현실 때문이다.
시골 인심은 어딜 가도 비슷하다. 경북 상주시 사벌면 목가리 원터에서 서낭댕이고개로 접어들자 할머니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날도 저물었는데, 우리집에서 자고 가.” “아직 더 가야 합니다.” “그러면 저 고개 너머에 있는 배 과수원이 우리 것이니, 마음대로 따먹고 가.”
문경새재를 넘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를 지나 충북 충주시 단월동에 이른 것은 길을 떠난 지 열흘째 되던 날. 저자는 단월역 인근의 주전평이라는 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 한양으로 가던 선비가 갈증을 느껴 이곳에서 일하던 농부에게 물 한 사발을 부탁하자, 농부는 갖고 다니던 막걸리를 한 잔 권했다. 이에 감동한 선비는 들르는 마을마다 이곳의 인심을 자랑했고, 그 때문에 영남대로를 가는 행인들은 모두 주전평을 알게 됐다.
14일 만에 서울의 숭례문에 도착한 저자는 또 다른 출발을 다짐한다. “다시 시작하자. 길은 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길이여, 나를 데려왔고 다시 데려갈 길이여!”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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