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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즐거움 20선]<3>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

by 맥가이버 Macgyver 2010. 7. 22.

[걷기의 즐거움 20선]<3>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서명숙 지음/북하우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차량으로 휙휙 스쳐가면서 차창 너머로 본 풍경이, 유명 관광지와 골프장과 박물관 따위가, 제주의 전부가 아님을 알았으면 한다. 올레 길을 직접 걸으면서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보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상처받은 마음을 올레에서 치유하기를, 가파른 속도에서 한순간이라도 벗어나기를, 잠시라도 일 중독자에서 ‘간세다리’(게으름뱅이)가 되어보기를.”》

제주 올레에선 간세다리처럼

만 50세 생일을 한 달 정도 앞둔 2006년 9월. 3년간 벼른 스페인 산티아고 여행을 감행했다. 800km 길을 혼자 걷는 여정이 끝날 무렵이었다. 길에서 만난 영국 여자가 말했다. “우리가 이 길에서 누린 위안과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줘야 한다. 당신 나라로 돌아가 당신의 ‘까미노(길)’를 만들어라.” 벼락을 맞은 듯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고향 제주였다. 어린 시절 그토록 떠나려 발버둥쳤던 그 제주.

기자 출신 저자가 쓴 이 책은 ‘제주 올레’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기록을 담았다. 길이 만들어지는 과정뿐만 아니라 올레를 떠올리게 해준 산티아고 여행기도 수록했다. ‘올레’란 자기 집 마당에서 마을의 거리로 난 진입로를 뜻하는 제주 방언. 이 길은 요즘 ‘한국의 산티아고길’로 불리며 여행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그는 40일간 예비답사를 떠난다. 답사 목표는 ‘산티아고 못지않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만드는 것. 일단 눈에 잘 띄는 이정표 대신 올레 위 돌담 곳곳에 파란색 화살표를 그렸다. 나뭇가지엔 파란색 노란색 리본도 묶었다. 2007년 9월 8일, 그렇게 올레 1코스가 개장했고, 최근 13코스가 문을 열었다. 시흥초등학교부터 저지마을회관까지 제주의 남반구를 잇는 약 246.71km 길이다.

숨은 길을 찾거나 끊어진 길을 잇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고향을 떠난 지 30여 년. 행정력도 자금력도 없이 혼자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뜻밖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쳐 왔다. 해병대 장병들도 난코스에 길을 터주었고 자연봉사자인 ‘올레지기’들은 해안가의 돌멩이를 날라다 끊어진 돌다리를 이었다. 그뿐이랴. 어느새 데면데면해졌던 제주 토박이 남동생까지 누나의 무모한 계획에 동참했다.

책 속에는 길을 만든 과정뿐만 아니라 올레 길에 사는 제주인, 올레를 찾는 ‘올레꾼’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소소한 집안 사정까지 알게 된 해녀들과 함께 “한나절 걸음에 반평생 길을 바꾼” 중산층 주부와 컴퓨터 폐인, 싱글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에게 올레는 단순한 여행코스가 아니었다. 치유이자 재기의 길이었다.

그는 제주의 아름다움도 새삼 깨닫는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던 송악오름부터 세상에서 가장 넓은 비단 폭을 팽팽히 당겨놓은 듯한 비양봉, 여행 작가 김남희 씨의 표현처럼 우주 치맛자락에 폭 감싸인 듯한 산방산까지…. 위압감과 두려움 대신 평화와 위안을 주는 제주는 여러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그는 서문에서 루쉰의 소설 ‘고향’에 적힌 글귀를 인용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올레꾼’이 되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건강한 두 다리로 내디딘 한걸음이 누군가에게 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저자의 말처럼 “왼발과 오른발을 옮기는 단순한 동작에서 엉킨 실타래를 푸는” 짜릿함을. 이 책은 올레 여행을 앞두고 있는 사람을 위한 입문서이자 올레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해주는 고마운 자극제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