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즐거움 20선]<6>해남 가는 길
《“아들과 함께한 도보순례는 세월이 갈수록 값지고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배낭을 짊어지고 아들과 함께 다시 한 번 훌훌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함께 떠나 보면 알게 된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 땅의 아버지와 아들에게 도보순례보다 더 행복한 여행은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땅끝까지 함께 걸은 ‘부자유친’
저자는 초등학교 교사이자 동화작가. 그가 몇 년 전 겨울 아들과 함께 경기 수원에서 전남 해남까지 9일간의 도보여행 길에 올랐다. 이 책은 그 기록이다.
고3을 앞두고 여행을 통해 자신을 다잡고 싶다던 아들이 어느 날 도보순례를 제안해 왔다. 공부에 전념해야 할 아들 녀석이 그런 제안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시 고민한 끝에 아버지는 아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해 12월 31일,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수원에서 부인과 딸의 걱정스러운 배웅을 받으며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평소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이 부자는 9일 동안 서로에게 의지한 채 걷고 또 걸었다.
이들은 길 위에서 만난 역사와 문화, 수많은 사람의 평범하지만 소중한 삶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충남 아산 고향의 형님 집에 들러 옛 추억에 빠져보기도 하고, 수덕사 인근을 지나며 고암 이응로 화백과 수덕여관의 애틋한 사연에 대해 서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존재를 새삼 돌아보게 됐다. 아버지는 여관방에서 아들의 다리에 파스를 붙여주고 마사지를 해주기도 하고 때론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식사 때마다 소주 한잔을 반주로 곁들이기도 했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한없이 넉넉해졌다. 어느 날 어머니의 걱정 전화를 받은 아들이 하는 말. “걱정하지 마. 나는 끝까지 할 수 있으니까.”
이들이 물론 수원에서 해남까지 전 구간을 걷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한 추위가 소한 집에 놀러왔다가 얼어 죽었다고 하는, 그 추운 소한 날. 이들은 전북 군산에서 광주 가는 버스를 탔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우리 남도의 풍경은 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수채화로 머릿속에 남았다. 그리곤 버스에서 내려 다시 걸었다. 시골길 눈발을 헤치고 전남 나주를 들러 영암에 이르고 다시 해남까지.
이렇게 해서 이들이 체득한 것은 역시 걷기의 미학과 느림의 미학에 이르렀다.
저자 아버지의 말이 재미있다. “이따금 생각한다. 아들과 함께한 도보순례가 얼마나 소중한 추억이었던가를. 늙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효도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8일째 되는 날 남도 끝자락 해남에 도착한 아버지와 아들. 해남 출신 시인들의 시도 읊어보고 땅끝마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해남까지 내려온 부인과 딸과의 만남. 그 행복한 만남은 도보여행과 떠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아들은 지금 대학생이다.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코 고는 소리에 잠에서 깼던 기억, 길을 따라 걷다가 급히 화장실을 찾아 헤매던 기억, 물집 생기지 말라고 아버지가 직접 내 양말에 비누를 발라주던 기억, 아버지에게 들은 소중한 이야기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버지와 술 한잔을 나누던 기억…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은 세상을 이해하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라고.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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