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구간, 워키힐~아차산~태릉까지…삼국시대 고분·보루, 공원묘지 등 거쳐
2구간, 태릉~불암·수락산~도봉산역… 불암산성 등 유적·사연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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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언제 지금의 행정구역 경계를 갖췄을까? 서울시계를 잇는 경계는 그 길이가 모두 얼마나 될까? 몇 개의 산을 넘을까? 또한 강이나 하천은 얼마나 될까? 그 경계를 따라 어떤 유적이 있으며, 무슨 역사를 말하고 있을까? 1000만 인구가 매일 생활하는 서울이지만 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이에 월간산 취재팀은 거인산악회와 54트레킹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총 138㎞에 달하는 서울시 경계를 10구간으로 나눠 매월 둘째, 넷째 주 화요일에, 즉 한 달에 두 번씩 끊어 종주한 기록을 다섯 달간 연재할 예정이다. 다섯 달 연재하는 동안 구간 소개뿐만 아니라 그 구간에 포함된 서울의 모든 역사도 아울러 소개할 계획이다. 서울의 역사와 함께할 서울시계종주 연재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서울시의 행정구역이 지금 모습을 갖춘 건 불과 30년도 채 안 된다. 조선시대까지는 4대문 안이 서울이었다. 즉 서울 내사산(內四山: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을 따라 축성된 서울 성곽이 서울의 경계였다. 그러던 서울이 해방 전후로 점차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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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북정맥 수락지맥으로 서울과 경기도의 자연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형을 불암산 정상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 도시를 가린 운무는 마치 산을 바다에 우뚝 솟은 섬으로 보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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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구(區)의 개념이 도입된 건 일제 말기인 1943년 3월 19일 공포된 조선총독부의 부령 제163호에 따라 종로, 중, 동대문, 용산, 성동, 영등포, 서대문 등 7개 구로 나뉜 때부터였다. 해방 직전인 1944년 11월에 마포구가 신설돼 8개 구로 해방을 맞았으나 1949년엔 시·도 관할구역의 명칭, 위치, 변경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 숭인면, 은평면 등 45개 리를 서울로 편입시킴과 동시에 성북구를 신설하면서 총 면적 268㎢로 광복 당시의 2배로 커졌다.
1943년 처음 구(區) 개념 도입
1975년엔 강남구를 신설하면서 다시 경계가 대폭 늘어났고, 1995년엔 강북·금천·광진구를 신설하면서 지금의 25개 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 서울의 행정구역과 인구는 총 25개 구, 522개 동, 605㎢에 약 1000만 명이 살고 있다. 해방 당시보다 두 배로 커진 1949년보다 면적만 약 3배 늘어난 규모다. 시청을 중심으로 직경은 약 40㎞ 내외이며, 둘레 길이는 총 138㎞에 달한다.
이 둘레 길이를 10구간으로 나누면 평균 14㎞ 정도 된다. 산과 강을 넘고 도로를 따라 때로는 평지로, 때로는 산길을 따라 간다. 1구간을 마치고 경상도 친구들을 만났다. “서울시계종주를 하고 왔다”고 하니 “서울에 씨게 종주할 산이 어디 있냐”고 대꾸해 한바탕 웃었다. ‘씨게’는 경상도 사투리로 ‘세게’ 혹은 ‘강하게’를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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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이룬 수락산 능선으로 일행이 종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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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계종주는 구간에 따라 ‘씨게’도, 약하게도 걷는다. 1구간은 GPS로 측정한 거리가 18.3㎞에 달했지만 야트막한 산과 평지로 걸어 그렇게 힘들지 않은 코스였다. 하지만 2구간은 15,6㎞로 1구간보다 거리는 짧았지만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불암산, 수락산을 넘어서 도봉산 입구까지 걸어야 했기에 상대적으로 더 지쳤다. 1, 2구간별로 서울시계종주길을 따라가 보자. <원색부록지도 참조>
[1구간] 광나루~아차산~용마산~망우산~구릉산(검암산)~태릉 담터고개 18.3㎞
지하철 광나루역에서 서울시계종주 출발이다. 거인산악회 이구 대장과 54트레킹동회 회원 20여 명이 모였다. 인원을 체크한 뒤 각오를 다지며 일제히 “파이팅”을 외쳤다.
출발지인 광나루는 아차산 남쪽에 있는 나루터로, 한강을 건너 충청·강원·경상도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조선 태종 때 별감을 파견할 정도로 요충지로 발전했다. 지하철 광나루역에서 한강 광나루까지는 복잡한 도로를 몇 개 건너야 하는 관계로 그냥 멀찌감치 보기만 하고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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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무 속으로 솟은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가 저 멀리 보인다. 도시는 운무 속에 완전히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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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커힐을 왼쪽에 두고 구리로 가는 46번 국도 옆 조그만 길로 아차산으로 접근하기 위해 걸었다. 바로 옆으로 차들이 쌩쌩 지나쳤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정확히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찾아가는 길이지만 여러 명이 걷기엔 길이 좁아 다소 위험했다.
모두들 걷는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1954년생으로 구성된 54트레킹동호회 회원들은 대부분 중년의 아주머니들인데도 걷는 품새가 가볍고 빠르다. 그 틈에서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워커힐은 지금은 호텔로 바뀌었지만 한국전쟁 때 국군과 인민군의 격전이 벌어진 아차산 일대에서 전사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서 휴양지를 지은 데서 출발했다. 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기 위한 많은 피란민이 큰 희생을 치렀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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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행이 수락산 하강바위를 넘어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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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구리로 접어들었다. 왼(서)쪽 아차산으로 가는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200m 남짓 갔을까. ‘고구려대장간마을’이라는 커다란 이정표가 나왔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바람의 나라’ ‘자명고’와 영화 ‘쌍화점’ 등을 촬영했던 곳으로, 요즘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철기문화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고구려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대장간’이란 이름을 붙였으며, 옆에 있는 유적전시관엔 고구려 유물이 전시돼 있다. 입장료를 성인 3,000원, 청소년 2,000원씩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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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은 전사한 美 장군 이름 딴 휴양지
잠시 대장간마을로 들어가 취재하는 사이 일행이 전부 사라지고 없다. 아직 녹지 않은 길을 부리나케 뛰어올라갔다. 겨우 뒤꽁무니를 찾았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팀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54트레킹동호회는 백두대간을 두 번씩이나 종주한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 정도 내공인데, 어찌 감히 따라갈 수 있겠나. ‘오늘 고생 좀 하겠다’ 싶었다.
이젠 아차산 올라가는 길이다. 갈림길에 이정표가 있었다. ‘←아차산성·1보루, 큰바위얼굴·전망대→’로 나뉜다. 우린 아차산성 방향이다. 시경계는 위커힐로 올라가야 하나 워커힐 주변은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구리 쪽으로 둘러온 셈이다.
아차산(峨嵯山·286.8m)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이 한강을 앞두고 끝나기 직전에 일으킨 마지막 봉우리다. 이 산줄기는 양주군 광릉의 죽엽산(801m)에서 남하해 천보산, 수락산(水落山·637.7m), 불암산(佛岩山·507m)을 거쳐 그 주맥이 구릉산(검암산)에서 망우리고개를 넘어 망우산, 용마산(龍馬山·348m), 아차산에 이르며 아차산성이 있는 봉우리를 정점으로 한강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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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이 채 녹지 않은 등산로로 일행이 불암산 정상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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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으로 올라서니 아차산성은 문화재보호 및 산불예방으로 입산금지 푯말이 붙어 있고, 살벌한 철조망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뒤쪽으로 한강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이제 한북정맥 수락지맥의 끝지점에서 능선을 타고 간다. 한강이 바라보이는 동쪽은 남양주이고,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자욱하게 낀 서쪽이 서울이다. 이 수락지맥이 경기도와 자연적인 경계를 이룬다.
능선 위로 잘 조성된 등산로엔 평일인데도 등산객들로 북적거렸다.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 광진구를 가리키는 이정표는 180도 양방향으로 서 있다. 길을 따라 가면 된다.
아차산은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
아차산은 높지는 않지만 삼국시대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아차산성과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 사적 제455호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다. 보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이나 흙 등으로 쌓은 축성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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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계종주팀이 안개가 자욱한 제명호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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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길의 전망은 동서남북이 확 트여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남으로는 유려히 흐르는 한강, 북으로는 빌딩 숲속 뒤로 보이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전경이 펼쳐진다.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니 평일에도 등산객이 많이 붐비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차산 명품 소나무 제1호가 그 좋은 전망대 바로 옆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아차산의 바위틈에서 광진구와 한강을 바라보며 오랜 세월 광진구민과 함께한 소나무입니다’라고 이정표에 쓰여 있다. 10m도 못 가서 2호가 모진 세월을 견뎌낸 듯 함께 있다.
용마산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인 헬기장에 도착했다. 왼쪽으로 100여m 가면 용마산 정상이다. 그곳에 신라의 보루 흔적이 남아 있다. 용마산은 서울시 구역이고, 시경계는 망우산 방향이다. 그쪽으로 직진이다.
아차산 전역엔 150여 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확인된 파괴 고분만 해도 70여 기에 이른다. 이곳 용마산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항아리, 석제, 병 등으로 전형적인 신라 토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들이다.
아차산에서 이어지는 능선은 망우산으로 연결된다. 자연히 망우산으로 넘어왔다. 망우산은 서울의 유일한 공동묘지다. 1933년 공동묘지로 지정된 이래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한용운 선생 등이 안장돼 있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의 묘역도 있었으나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했다. 시경계길은 능선 위로 걷지만 공원묘지 순환길을 따라 가면 이들의 묘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망우묘지엔 한용운 선생 등 안장
망우리묘소 입구 주차장에는 13도참의군탑이 세워져 있다. 1907년 일제에 의한 조선군의 강제해산에 저항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했다. 그 해 11월엔 경기도 양주에 13도 의병이 모여 서울 진격작전을 벌였다. 비록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들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3년 건립한 것이다.
길이 이어지듯 시경계도 계속된다. 망우리 고개를 지나 망우산 밑으로 뚫린 중앙선 전철을 발아래 밟고 건넜다. 걷는 사람은 모르지만 지도엔 나타나 있다.
갑자기 급경사가 나왔다. 위에서 보니 경사가 80도 이상은 족히 될 것 같다. 그 아래로 태릉-구리 간 고속화도로가 지나고 있다. 오금이 저려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겼다. 도로 관리하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듯한 거의 수직에 가까운 계단이 눈 아래 세워져 있다. 거기로 내려가야 한다. 양 팔을 뻗어 양쪽을 꽉 잡고 천천히 한 걸음씩 옮겼다. 백 수십 개 되는 계단을 내려오는 데 5분 이상은 걸린 것 같다. 초심자들은 이 길을 찾기 쉽지 않아 보였다. 이 길을 사람들이 어떻게 찾았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내려서니 서울 신내동과 경기도 구리의 경계다. 해치상이 일행을 맞았다. 고속화도로를 건너기 위해 구리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서 횡단도로를 건넜다. 다시 서울 방향으로 내려와 오른쪽 이정표가 있는 망우산 극락사 방향으로 진입했다. 시경계가 계속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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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우산 공원묘지에서 종주팀이 유려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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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간 마지막 산인 구릉산으로 들어섰다. 조선시대 아홉 왕의 능이 동쪽에 있다 하여 동구릉이라 불렸다. 이곳은 원래 검암산이었으나 조선 왕실에서 이름에 ‘칼’을 연상케 하는 ‘검’자가 있어 역대 왕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에 불길하다 하여 이름을 못 쓰게 해서 구릉산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구릉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왕릉터로 주목을 받은 곳이며, 가장 많은 왕이 안장돼 있다. 태조의 건원릉, 5대 문종과 왕비 현덕왕후의 헌릉, 14대 선조와 왕비 자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의 목릉 등 조선 왕조의 17위가 모셔져 있어 사적 제199호로 지정돼 있다. 동구릉은 시경계에서 구리 쪽으로 조금 내려가야 한다. 잠시 들렀다 가려니 준족의 일행을 놓칠까 싶어 멀찌감치 쳐다만 보고 지나쳤다.
구릉을 내려서면서부터는 평지다. 47번 국도를 따라 계속 걷다가 갈매주유소에서 왼쪽으로 꺾어 육군사관학교를 구리 방향으로 우회해서 간다. 이어 경춘선 철로를 건너 삼육대 앞을 지나 태릉 담터사거리까지 가면 1구간 끝이다. 오전 10시5분에 출발해서 오후 4시40분쯤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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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구간] 태릉 담터고개~삼육대 후문~제명호~불암산~수락산~망월정~진달래능선~근린공원(조성 중)~도봉산역 GPS 거리 15.6㎞
담터고개에서 다시 출발이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일기예보엔 오전에 잠시 비가 내리다 오후부터 갠다고 했으나 이날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일기예보가 맞는 날보다 안 맞는 날이 훨씬 많은 것 같다. 그것도 꼭 필요할 때는 항상 틀렸다. 틀렸던 기억만 뚜렷하기 때문일 수 있겠지만.
담터고개는 태릉과 남양주시 별내면과 경계다. 불암산 방향으로 가다가 한사랑한의원을 앞에 두고 논골편의점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동네길로 계속 간다. 삼육대 후문으로 들어가서 제명호수로 찾아가면 제대로 가는 것이다. 길은 아직 녹지 않은 상태라 미끄럽다. 제명호를 앞에 두고 오른쪽으로 가면 불암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나온다. 불암산중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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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우산 공원묘지 능선 위로 종주팀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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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은 화강암의 큰 바위로 된 봉우리가 마치 송낙을 쓴 부처의 형상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졌다. 불암산에 얽힌 전설도 재미있다. 불암산은 원래 금강산에 있었으나 조선왕조가 건국하면서 도읍을 정할 때 한양에 남산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가 한양의 남산이 되겠다고 내려왔으나 벌써 남산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고, 돌아선 채 그 자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암산은 서울을 등지고 있는 형세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세는 수락산과 더불어 조선시대 서울의 북쪽 방어선을 이루며, 서울을 수호하는 기능을 했다. 정상 부분은 온통 바위산을 이루고 있으며, 작지만 웅장한 기품을 자랑한다.
불암·수락산은 6·25 서울 방어선
부슬부슬 내리는 비 사이로 불암산의 호젓한 등산로가 이어졌다. 밑에서 정상을 바라본 바위산의 모습과는 달리 걷는 길은 전형적인 육산이다. ‘맨발길’이란 이정표가 붙은 길도 있다. 그만큼 부드러웠다.
주능선을 따라 계속 앞으로 향했다. 샛길이 나올 땐 항상 이정표가 붙어 있어 길을 잃을 우려도 없다. 등산로 곳곳에 유명인사들의 시(詩)도 간간이 걸려 있다. 자욱한 안개는 노송 사이로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듯하다. 나무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도시는 운무에 가려 전혀 보이질 않았다.
불암산 제2봉 정상 조금 못 미쳐 불암산성이 나왔다. ‘웬 산성이지’ 싶었다. 문화재 지정 예정이라는 이정표가 있다.‘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암산성은 규모는 작지만 삼국시대 석축 산성의 전형적인 축성기법을 보여주는 유적이며, 인근의 수락산보루·봉화산보루·아차산보루군 등과 함께 한강을 중심으로 삼국의 각축 양상과 고대 교통로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쓰여 있다. 일부에서는 산성의 규모가 협소해 산성이라기보다는 ‘보(堡)’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는 의견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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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직에 가까운 계단을 종주팀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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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봉 정상엔 헬기장이 있다. 운동기구도 몇 가지 설치돼 있다. 비는 좀체 그칠 줄을 모르고, 운무는 서울 도심을 완전히 덮고 있다. 운무에 가려 빌딩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마치 바다에 잠긴 도시 같아 보였다. 그 운무의 바다 위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우뚝 솟아 있다. 우뚝 솟은 북한산과 도봉산은 하나의 섬이고, 빙산의 일각이었다. 구름 낀 날의 또 다른 멋진 풍광이다. 정말 진경산수화를 보는 느낌이다. 일행 모두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비와 추위는 잠시 잊은 듯했다. 이런 풍광이 있으리라고 전혀 기대를 못하고 “비가 와서 사진이 제대로 되겠나”라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출발했는데 전혀 의외였다. 그 멋진 풍광을 올라가는 전망대에서 감상하고 디카에 담을 수 있는 데까지 담았다.
‘밥시(밥 먹을 시간)’가 되어갔다. 정상 바로 밑 거북바위 옆에서 점심을 먹고 가자는 의견과 밥 먹으면 힘드니 넘어가서 먹자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의견통일을 보고 같이 갈 줄 알았는데 먹을 사람 먹고, 갈 사람은 가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자율성의 존중인지, 중년의 고집인지.
시계(市界)는 불암산(509,7m) 정상 옆 쥐바위를 지나쳐 가지만 정상 조망에 혹시 뭔가가 있을지 몰라 올라갔다. 정상에 올라가기 직전 꼭 쥐같이 생긴 쥐바위가 등산객들을 반겼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확 트였다. 앞으로 나아갈 시계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락산과 불암산이 가르는 시계가 쭉 펼쳐졌다. 양쪽에 있는 서울과 남양주는 운무에 가렸고, 나아갈 능선만 우뚝하게 솟은 모습, 그 자체가 더없이 장관이었다.
이젠 불암산과 수락산의 경계를 이룬 덕릉고개 방향으로 하산이다. 산 밑으로는 불암산터널이 지나고 있다. 덕릉고개는 노원구의 북동쪽 시계에서 남양주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조선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묘소인 덕릉(德陵)이 고개 동쪽에 자리 잡은 데서 유래했다.
덕릉고개 위로 육교를 놓아 불암산과 수락산을 연결하고 있었다. 육교가 없던 시절엔 횡단보도를 건너는 등 한참을 돌아서 올라갔으나 지금은 편하게 지나쳤다. 불암산과 수락산의 시계종주 코스는 불수사도북(서울 5산) 종주하는 그 길이다.
비 오는 날 운무로 서울 도심 잠겨 장관
이제 수락산이다. 수락산은 내원암 일대 계곡의 병풍 같은 바위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목이 떨어져 나간 모습(首落)’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 사냥꾼 아버지가 호랑이가 물고 간 아들 ‘수락’이를 부르다 바위 아래 떨어져 죽은 뒤, 비 오는 날이면 “수락아, 수락아”하는 소리가 들려 수락산으로 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유적, 경승 못지않게 전해오는 일화도 특히 많은 산이다. 6·25 때는 육군 사관생도들까지 나서 불암산과 함께 서울 사수선으로 격전을 치렀던 산이기도 하다.
수락산 능선 조금 못 미쳐 얼마 전에 탄 듯한 산불의 흔적이 있었다. 다행히 조기진화에 성공한 것 같다. 산림이 심하게 소실되지는 않았다.
물이 많을 것 같은 이름과 달리 수락산은 올라갈수록 웅장한 바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치마바위 삼거리에 이르렀다. 눈이 녹지 않고 얼어 좁은 바위틈새와 바위 옆 등산로로 지나가기엔 위험했다. 날씨도 비가 내리고 추워 손까지 얼어붙었다. 등산로에 로프는 있지만 손을 제대로 펼 수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일행 전부 조심조심 올랐다. 준족의 아주머니들도 이런 길에서는 굉장히 조심스럽다. 엉덩이가 무거워 그런지 로프를 잡아도 오르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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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락산 거북바위를 오른쪽에 두고 일행이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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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길에는 바위들의 연속이다. 하강바위, 바로 그 옆에 남근 비슷하게 생긴 바위, 코끼리 바위, 종바위를 지나 마침내 정상 바로 옆 철모바위에 도착했다. 주말엔 막걸리 파는 비닐 천막집이 있는 곳이다. 잠시 안에 들어가서 비를 피했다. 이정표는 ‘←4.7㎞ 수락산역(수락골), 수락산 정상 0.3㎞→, 수락산역(노원골) 5.2㎞↓’를 가리키고 있다. 정상까지는 불과 300m밖에 안 되지만 시경계가 아니고 의정부라 전부 수락골로 하산했다. 비가 내리니 가기도 그렇고, 또 갔다 하면 따라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정상에 들렀다 가는 걸 포기하고 곧장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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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흔적 매월정 근처에 되살려
과거 기억에 쇠줄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하산한 적이 있었던 길이 이제는 나무계단으로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변신한 등산로로 전혀 힘들지 않게 내려왔다. 길 한쪽 옆으로 독수리바위가 비상할 듯한 자세로 앉아 있다.
수락골에서 길이 이어진 깔딱고개 사거리에 도착했다. 일행은 매월정 방향으로 직진이다. 매월정에는 김시습의 흔적을 곳곳에 되살려 놓았다. 어린 시절 김시습이 살았던 자취를 좇아 그의 업적과 그가 지은 시를 보기 좋게 단장했다. 여유만 있으면 죽 둘러보고 가련만….
2구간 끝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운무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의정부로 가는 3번 국도로 쌩쌩 달리는 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진달래능선으로 한 걸음씩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고 보니 수락산에도 진달래능선이 있었다. 봄에 얼마나 아름다운 군락을 이룰지 궁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도가 나왔다. 제법 큰 길이다. 그런데 시계종주는 임도를 따라 계속 내려가면 낭패다. 왼쪽으로 빠지는 오솔길을 유심히 봐야 한다. 오솔길 들머리에 54트레킹동호회에서 제법 큰 리본을 달아놓았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서면 노원구에서 근린공원을 한창 조성 중이다. 2월 말 현재 거의 완성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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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락산 등산로는 반듯한 흙길에 의외로 호젓한 숲길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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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로 3번 국도를 건너 새로 지은 아파트를 지나 서울 창포원을 거쳐 도봉산역이 2구간 끝이다. 오전 10시20분에 출발해서 오후 5시20분에 도착했다. 1구간보다 거리는 짧았지만 시간은 조금 더 걸렸다.
[서울시계종주 가이드] 지하철·버스로 접근할 수 있게 10개 구간으로 나눠
10개 구간으로 나눈 서울시계종주는 우선 편리하게 접근하기 위해 대중교통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간을 끊었다. 즉 지하철과 버스로 접근 가능하게 했다. 1구간은 지하철 2호선 강변역이나 5호선 광나루역에서 내려 워커힐로 올라가면 된다.
2구간 출발지점인 태릉 담터고개도 7호선 태릉역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버스정류장이다. 거기서 7-3번, 1155번, 1156번 등 담터고개로 가는 버스는 많다. 3구간은 7호선 도봉산역이 바로 출발지점이다.
한 구간거리는 보통 15㎞ 정도 되기 때문에 간단한 도시락과 간식을 갖고 가는 편이 낫다. 등산과 마찬가지로 주로 산을 넘기 때문에 중간에 사 먹을 장소가 없다고 보면 된다.
서울의 경계를 걷기 때문에 둘러볼 구간에 대한 서울의 역사를 대강 훑어보고 가는 것도 지식을 넓히는 한 방법이다. 한국의 역사는 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은 무궁무진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시계종주를 계기로 역사와 산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기회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서울시계종주 동행팀] 거인산악회·54트레킹동호회
한결같은 준족들…이구씨가 총대장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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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인산악회와 54트레킹동호회가 연합한 서울시계종주팀을 이끌고 있는 이구 대장과 김옥희 총무, 유상헌 부대장(오른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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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트레킹동호회는 1954년생들의 모임으로 간혹 남자들이 있긴 하지만 아주머니가 대부분이다. 남자들은 조용한 이들이라 별 농담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한다. 아주머니들도 백두대간을 두 번 종주한 사람들이라 종주 중에는 거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걷는 데 열중할 뿐이다. 간혹 휴식이나 식사 중에도 산과 관련된 얘기만 오갈 뿐 웃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거인산악회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 더 많다. 한 번 종주에 나설 때마다 20명 내외씩 참가해 수적으로는 풍부했으나 분위기는 다소 무미건조했다.
거인산악회의 이구 대장은 이 두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1974년 거인산악회 창립 멤버로 본격적인 활동에 뛰어든 이구 대장은 1976년 창단한 회장의 갑작스런 이민으로 거인산악회 회장을 맡게 됐다. 얼떨결에 맡은 거인산악회 회장과 산행대장 자리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만 34년 장수 회장 겸 산행대장의 관록을 자랑하고 있다.
거인산악회는 전국에 회원이 3000여 명 되지만 매달 한 번 이상 활동하는 회원은 300여 명 정도다. 운영진은 대장 5명, 부대장 10명 등 총 15명이다. 이들이 백두대간 2팀, 정맥 1팀, 명산 1팀, 해외트레킹 1팀 등 5개 팀을 대장 1명과 부대장 2명으로 각각 나눠 맡아 책임지고 있다.
54트레킹동호회는 2008년 순전히 트레킹 목적으로 창립한 모임다. 만든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단체가 백두대간 2회 종주, 백두산·키나발루·일본 아소산과 북알프스·중국 황산 등에 다녀왔다. 1년 내내 산만 다니는 사람들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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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단체가 서울시계종주를 위해 모였다. 총대장은 이구씨, 총무는 김옥희씨, 부대장은 유상헌씨가 각각 맡았다. 54트레킹동호회의 김옥희씨는 ‘준족의 철녀’급에 속한다. 월 2회 산행에 답사·번개산행까지 책임지고 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사뿐사뿐 나는 것 같은 걸음으로 산을 탄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발걸음으로 항상 제일 앞장선다. 한참 가다가 한 번씩 물어본다. “내가 너무 빨리 가냐”고.
같은 모임의 유상헌 부대장은 뉴질랜드로 이민 갔다가 한국에 잠시 둘러보러 왔는데, 등산 다니느라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다. 지금 1년이 넘었다고 한다. 오로지 산만 다니고 있다. 이런 팀들과 서울시계종주를 하고 있다. 거의 가랑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서울은 전체 면적 약 605㎢ 가운데 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60% 이상이다. 인간의 삶과 문화, 역사가 곧 산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지형적 조건이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그린 서울 진경산수화도 산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모습을 조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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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높은 곳에서 서울과 경기도 시계를 볼 수 있는 산성길을 등산객들이 가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서울지역으로 뻗어나온 산줄기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함경도 안변부 철령에서 나온 한 맥이 남쪽으로 500~600리 달리다가 양주에 와서 자잘한 산으로 되었다가, 다시 동쪽으로 비스듬하게 돌아 돌면서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의 만장봉이 되었다. 여기에서 동남방을 향해 가면서 조금 끊어진 듯하다가 다시 우뚝 솟아 삼각산 백운대가 되었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만경대가 되었는데 한 가지는 서남쪽으로 뻗어갔고, 다른 한 가지는 남쪽으로 뻗어 백악산이 되었다. 백악산은 형세가 하늘을 꿰뚫는 목성의 형국으로 궁성의 주산이라고 한다. 동·남·북쪽은 모두 큰 강이 둘렀고, 서쪽으로 바다의 조수와 통한다. 여러 곳 물이 모두 모이는 그 사이에 백악산이 서리어 얽혀서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 일컫는다.’
서울시계종주 3·4구간은 서울의 진산 도봉산(3구간)과 북한산(4구간) 주능선으로 종주하는 코스와 비슷하다. 시계종주 전체 10구간 중에 완전히 산으로 걷는 코스는 3·4구간뿐이다. 서울시계종주의 하이라이트인 것이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거인산악회와 54트레킹 동호회원 10여 명이 구간 종주에 참가했다.
[3구간]
도봉산역~다락능선~포대능선~도봉산 주능선~우이암~우이동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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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출봉·의상봉 등이 펼쳐진 능선을 따라 가는 길이 서울시경계다.
- 2구간에서 헤어졌던 도봉산역 그 자리에서 정확히 오전 10시에 다시 모였다. 이번 참가자는 2구간 때보다 조금 줄었다. 2구간을 원체 세게 한 탓인가.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쉬지도 못하고 불암산과 수락산을 GPS 거리만으로 18.3㎞ 오르락내리락하며 종주했으니 질릴 만도 할 것이다. 그래도 참가한 역전의 등산꾼들은 일제히 도봉산으로 향했다.
도봉산은 등산객들로 평일에도 북적거렸다. 요즘은 정말 ‘등산이 국민 레저활동’임을 실감케 한다. 도봉산역 앞 3번 국도를 지나 즐비한 음식점과 상가 사이가 아닌 시계를 걷기 위해 의정부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금 가다가 공영주차장을 왼쪽으로 끼고 돌았다. 정확한 시계는 조금 더 올라가 하천 쪽이지만 길이 없는 관계로 이곳에서 방향을 틀었다. 차 두 대가 오르내릴 수 있는 제법 넓은 길이다. 큰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다른 길로 빠지기 십상이다. 도봉산 (평화)양봉원 앞에서 오른쪽 좁은 등산로로 접어들어야 한다.
이 길을 제대로 찾으면 이제부터는 ‘알바’할 우려는 없다. 다락능선까지 등산코스는 거의 외길 수준이기 때문이다. 본격 등산로가 시작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시설물인 화생방 방공호가 나왔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 잡초만 무성하다.
여기서 회원들이 일제히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니 날씨가 꽤 풀렸다. 낮 최고 기온이 13도까지 올라간다는 일기예보도 있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은 모처럼 따뜻한 기온에 녹아 질퍽거렸다. 신발과 바짓가랑이에 진흙이 연방 튀었다. 봄이 오기는 오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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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이동에서 3구간 출발 직전 서울시계종주팀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다락능선이 서울과 의정부 경계
다락능선을 향해 올라가는 길에 저 멀리 도봉산 정상 자운봉이 보였다. 그 옆으로 만장봉, 선인봉이 연달아 우뚝 솟은 모습이 위엄을 더했다. 화강암의 희고 큰 바위벽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만장봉이 되었고, 높은 산봉에 붉은빛의 아름다운 구름이 걸리니 자운봉이라 했다고 전한다.
도봉산의 도봉이란 이름은 조선왕조를 여는 길을 닦았으니 도봉이고, 뜻있는 지사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민생을 구제하고자 도(道)를 닦았다고 도봉이라 붙였다고 한다. 실제로 도봉산에 있는 천축사, 회룡사 등 사찰에는 이성계의 왕조 창업과 관련하여 무학대사의 중창 기록이 있다. 경관이 뛰어난 계곡에는 조선 중기 조광조를 모시는 도봉서원이 건립되어 국사를 논하기도 했다. 이 서원은 서울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은 서원이다. 결국 도봉이란 이름은 두 가지 의미를 다 내포하는 셈이다.
첫 삼거리가 나왔다. ‘←0.8㎞ 도봉탐방지원센터, 자운봉 3.2㎞↑’라고 이정표에서 안내하고 있다. 다락능선까지는 약 2㎞ 더 가야 한다.
드디어 지능선에서 다락능선으로 접어드는 길목이다. 바로 앞에 높은 암벽길이 떡 하니 막아섰다. 우회로가 있지만 자신 있는 사람은 암벽으로 올라갔다. 안전한 산행을 위해서 왼쪽으로 우회해서 갔다. 올라가는 길 중간쯤 불과 몇 미터 옆에 은석암이 자리 잡고 있다.
우회로 끝 지점은 다락능선으로 올라서는 길이다. 다락능선이 서울 도봉구와 의정부시 호원동과의 경계다. 다락능선 위 조그만 마당바위에선 사방 조망이 가능하다. 뒤(북)쪽으로는 망월사가 산 중턱에 파묻혀 있고, 앞(서남)쪽으로는 도봉산의 3개 주봉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했다. 성냥갑 같은 서울의 빌딩 모습도 발아래 펼쳐져 있다.
다락능선 끝은 포대능선으로 연결된다. 도봉산역에서 출발한 지 2시간을 훨씬 지나 포대능선 바로 밑 휴식처에 도착했다. 포대능선은 대공포대가 있었던 649봉에서 자운봉과 마주보는 신선대까지를 말한다. 지금은 포대능선 정상에 있는 포대 벙커가 그 자취를 전하고 있다. 도봉산의 포대능선은 한국전쟁 때 수락산과 방어진지를 구축해 남침하는 세력들을 막는 역할을 한 천연 방어선이었다.
포대능선의 Y계곡은 철난간을 잡고 오르내리는 위험한 코스임에도 많은 등산객이 몰려, 일방통행을 실시하고 있다. 이 계곡을 통과하면 곧바로 자운봉과 신선대 사이에 도착한다.
철난간을 잡고 포대능선을 탔다. 몇 번을 탔지만 그래도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 발 딛는 바위틈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러웠다. 있는 힘을 다해 올라섰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어찌할 수 없다. 가장 난코스를 넘어서니 신선대와 만장봉이 마주보고 있다. 이 봉우리들이 우이능선으로 이어지는 도봉주능선과 포대능선을 이어준다.
도봉주능선에서 서울과 경기도의 모습을 보면서 걸었다. 도봉산 주능선은 신선대·자운봉에서 출발해서 종착지인 우이암까지를 말한다. 이 구간의 암릉은 뜀바위, 피바위, 칼바위, 기차바위, 오토바이바위 등이 있다.
신선대에서 출발해서 곧 앞을 가로막는 바로 그 바위가 뜀바위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우회해서 가기 때문에 뜀바위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어 생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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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하루재 고개에서 종주팀이 백운산장을 향해 방향을 가리키며 가고 있다. 2 종주팀이 산성을 따라 시계를 걷고 있다. 3 철제 사다리를 잡고 올라가고 있는 시계종주팀. 4 시계종주팀이 도봉산 전망대에서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망월사와 도봉산 능선을 보고 있다.
도봉주능선은 암릉에 갖가지 바위 널려
뜀바위에서 오봉능선 갈림길까지의 암릉을 칼바위능선이라 부른다. 암릉이 마치 칼처럼 양쪽으로 날카롭게 서 있어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갖가지 이름을 가진 이들 바위를 지나서 우이암에 도착했다. 우이암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원래는 소의 귀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남성의 성기처럼 생겼다는 사람도 있다.
우이암 가는 길에 통천문이란 조그만 바위를 지나게 돼 있다. 지리산과 월출산의 통천문과 조금 비슷하게 생겼다면 전부 통천문이라 부른다. 도봉산 지나온 길에서만 두 번이나 그런 바위가 있었다. 또 웬만한 산에는 전부 통천문이 있다. 통천문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건 아닌지.
이젠 3구간 마지막 능선인 우이암 능선을 타고 우이동까지 가면 끝이다. 우이암 능선은 도봉산과 북한산을 연결하는 가교 능선이다.
우이동에서 도봉산으로 올라오는 등산객은 별로 없다. 북한산으로 접근성이 좋고 길도 좋아 대부분 그쪽으로 간다. 덕분에 우이암능선 등산로는 한적하면서 푹신했다.
우이동으로 내려가기 직전, 바위의 정중앙을 뚫고 올라온 소나무 한 그루가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마치 바위가 소나무를 품고 있는 형상이다. 일행 중 한 명이 신기한 듯 말했다.
“야, 저 소나무 봐라.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지. 나중에 소나무가 이길지 바위가 이길지 모르겠지만 소나무가 이겨 저 바위를 갈라버릴 것 같아.”
“아니야, 아무리 나무라도 저런 상태로는 자라기 힘들거야. 분명 나무가 고사해서 죽을거야.”
의견이 분분했다. 마침내 우이동에 도착했다. 참나무바베큐집이 하산로 바로 옆에 있다. 우이동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니 ‘한정식 백란’이란 거창한 집이 있다. 4구간은 그 집을 거쳐서 북한산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날의 3구간은 일종의 도봉산 종주코스다. 도봉산역에서 다락능선을 거쳐 포대능선~도봉주능선~우이동까지 무척 길 것 같은데, GPS로 측정한 바로는 9.8㎞밖에 안 된다. 알바한 거리나 출발지와 목적지까지의 접근 거리를 포함하면 전부 걸은 거리는 15㎞ 이상이 될 것 같다. 오전 10시에 출발해서 오후 4시30분쯤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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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종주팀이 도봉산 마당바위에서 자운봉과 신선대, 만장봉을 배경으로 환호하고 있다. (우)도봉주능선에서 암릉 위로 걷고 있는 종주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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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구간]
우이동~육모정고개~영봉~하루재~위문~용암봉~문수봉~의상봉~북한산성탐방안내소~지축역 19㎞
4구간은 거리가 다소 길어 출발시각을 1시간 당기기로 했다. 오전 9시 우이동 그린파크 앞에서 일행이 모였다. 3구간 종주 때보다 참가자가 다소 줄어 10명 남짓이었다. 봄이 오니 각종 행사도 많아져 빠졌다고 한다. 날씨가 추워도 봄은 오고, 구간종주는 계속된다. 오전 9시5분쯤 바로 출발이다.
3구간 마지막 구간인 우이동 한정식집으로 들어가다 왼쪽 등산로로 올라갔다. 오크밸리 카페를 거쳐 육모정고개로 갔다. 원래 서울시계는 우이령고개를 넘어 상장능선에서 육모정고개로 이어지지만 자연휴식년제와 통제구역 등으로 우이동으로 우회하는 것이다.
용덕사 방향으로 가다 절을 우측에 두고 왼쪽 등산로로 진입했다. ‘육모정고개 1.1㎞’란 이정표가 나왔다. 등산로는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계곡이라 바람도 없고, 길도 푹신하다.
커다란 입석바위가 나왔다. 가로·세로 7m는 족히 될 것 같다. 바위 앞에 선 사람이 손바닥만 하게 보일 정도다. 이 바위를 아는 산악회는 매년 여기서 시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계곡 등산로는 조금 가팔랐다. 능선으로 오르려니 그럴 것 같았다. 육모정 고갯길에 올랐다. 육모정고개는 사거리지만 북쪽으로 가는 길과 상장능선 가는 길은 통제된 상태다. 고개 오른(북)쪽 능선이 상장능선과 우이령으로 이어진다. 왼쪽으로 완만한 오르막길로 헬기장을 지나 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계속 가면 해발 604m의 영봉이다. 영봉에서는 백운대와 인수봉의 웅장한 모습과 도봉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4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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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대능선 Y계곡의 바위틈엔 아직 눈이 녹지 않고 미끄러운 상태라 종주팀이 힘겹게 오르고 있다.
주요 봉우리와 9개 성문 지나
영봉에서 급경사로 내려서면 하루재에 이른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도선사 주차장으로 하산하고 곧바로 능선으로 올라가면 북한산 인수대피소가 있는 깔딱고개를 지나 백운산장에 이른다. 시각은 11시26분. 출발한 지 2시간30분 가량 지났다. 휴식을 취하고 중식을 해결했다.
백운산장 위로 보이는 북한산 정상 백운대엔 평일에도 많은 사람이 오르내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에 따르면 ‘삼각산은 인수·백운·만경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세 개의 뿔과 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며, (중략)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다는 산이 곧 이 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각산이라고 불리던 산이 조선 후기 북한산성이 축성되고 그 내용을 기록한 <북한지>가 발간됨으로써 북한산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산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출발이다. 위문까지 올랐다가 이제부터 북한산성으로 둘러싸인 북한산의 주요 봉우리를 거쳐 북한산성탐방안내소를 지나야 한다. 갑자기 갈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북한산은 주요 32봉을 포함한 14개의 성문을 가지고 있다. 이 성문은 북한산 중심인 행궁과 중흥사지로 통하는 길목으로 시민들이 찾는 주요 등산로이기도 하다. 북한산은 성곽을 쌓기 전부터 천연의 요새로 기능을 해왔다. 북동쪽 하늘을 가로막고 있는 백운대·인수봉·만경대·노적봉, 그리고 북서쪽의 원효봉·염초봉, 남서쪽의 문수봉·나한봉·증취봉·용출봉·의상봉의 험준한 산 능선이 연결되어 요새를 만들어놓았다. 서울시계는 북서쪽의 봉우리를 빼고는 전부 다 거쳐 지나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북한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토성으로 개루왕 5년(132년)에 축조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축조한 것이다. 고려시대 들어서도 북한산은 중요한 기능을 했다. 11세기 초 거란이 침입해왔을 때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을 북한산 향림사로 옮기고 성을 증축했다. 우왕 13년(1387년)엔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최영 장군에게 노적봉을 중심으로 중흥석성을 수축하도록 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며 산성 축성 논의가 계속되다가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 이르러서야 대대적인 북한산성 축성공사를 벌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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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릉이 펼쳐진 도봉주능선을 가기 위해 나무계단길로 내려가고 있다.
- 그 수많은 역사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산성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걸어야 한다. 역사를 되새기는 건 아무리 해도 좋지만 육체적으로는 녹초가 될 것 같다. 위문부터 산성 출발이 시작됐다. 위문에서 노적봉까지는 거리가 불과 600m 정도밖에 안 되지만 철난간을 잡고 가야 하는 다소 거친 길이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곡식을 수북이 쌓아놓은 노적더미로 의심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봉우리다. 그만큼 우뚝 솟아 있다. 가파른 등산로로 인해 등산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북한산 주능선인 용암문과 대동문 방향으로 진행한다. ‘←0.9㎞ 백운대, 대동문 2.1㎞ ↑’ 이정표가 방향을 안내하고 있다. 북한산대피소를 거쳐 동장대를 지나 대동문에 도착했다. 종주능선은 별로 힘들지 않은 무난한 길이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해 보국문을 지날 즈음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쉬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산성에서 지축역까지 평지 4㎞ 걸어야
‘시경계를 걷는다’는 것은 두 개의 시, 도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의미와 같다. 그것도 가장 높은 지대에서 산성을 따라 걷는 길은 두 개의 하늘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다. 서울의 하늘은 약간 흐리긴 했지만 그나마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돼 있었다. 반면 경기도의 하늘은 눈이 내려 은색의 세계로 변해 있었다. 딱 중간 지점에서 한쪽은 갠 하늘, 다른 쪽은 눈 내리는 하늘, 즉 두 개의 하늘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대성문을 지나니 삼각점이 종로구, 성북구, 고양시의 경계점을 알렸다. 삼각점 위에서 주변을 살펴본 후 대남문으로 향했다. 대남문과 문수봉을 지나 청수동 암문, 부왕동 암문, 용혈봉, 용출봉까지 왔다.
용출봉은 몇 년 전 벼락으로 등산객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곳이다. 암벽 위로 오르는 다소 위험한 코스에 안전을 위해 철제 난간을 설치한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벼락이 그 철을 찾아 내려와 때린 것이다. 지금은 사고지점 조금 위에 피뢰침을 설치했다.
용출봉에서 가사동 암문을 거쳐 마지막 봉우리인 의상봉에 다다랐다. 의상봉 정상에서는 북한산성의 전체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북한산의 주요 봉우리와 주요 성문의 위치까지 가늠할 수 있다. 너무 힘들었지만 북한산의 전체 지세를 한결 수월케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의상봉에서 다시 북한산성탐방안내센터로 하산이다. 날씨는 비가 올 듯 말 듯, 눈이 올 듯 말 듯한 상태였다.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코스가 많고 매우 미끄러운 길이다. 겨우 절반쯤 내려가니 포근한 등산로가 이어졌다.
북한산탐방안내센터로 가는 차도와 도보탐방로가 연결되는 지점에 왔다. 하산했지만 4구간 끝은 여기가 아니다. 평지를 걸어서 지하철 지축역까지 무려 4㎞를 더 걸어야 한다.
무릎이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산길을 걷는 것보다 평지 걷는 게 역시 더 힘들다. 오히려 천천히 걸었다. 지축역으로 가는 길은 산성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창릉천을 따라 곧장 가면 된다.
은평뉴타운 건설 중이라 곳곳이 산만하다. 공사 자재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거리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완공된 아파트에 입주민도 별로 없는 듯했다. 저녁이 다 돼 날이 어둑어둑했지만 불이 들어온 집은 몇 집 안 돼 보였다. 이제 바로 저 앞에 지축역이 보이고, 지하철이 지나갔다. 마침내 끝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30분. 오전 9시에 출발했으니 무려 9시간30분을 걸었다. 빨리 밥을 먹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우이동에서 육모정고개~영봉~하루재~위문~용암봉~문수봉~의상봉~북한산성탐방안내소~지축역까지 무려 19㎞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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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우이암 전망대에서 종주팀이 안내판에서 오봉와 자운봉, 신선봉을 확인하고 있다. (우)우이암에서 우이동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난코스를 종주팀이 힘들게 내려가고 있다.
[서울시계종주 3·4구간 가이드]
4구간은 특히 길어 도시락·간식 충분히 챙겨야
서울시계종주는 기본적으로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하다. 1·2구간이 그렇고, 이번 구간도 마찬가지다. 3구간은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에서 모여 출발하니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3구간 끝지점이자 4구간 출발지점인 우이동은 지하철과 버스 환승을 하든지 택시를 타야 한다. 지하철로는 4호선 수유역에서 내려 우이동이나 도선사행 버스를 타면 된다. 지하철 내리는 지점이 버스 승강장과 바로 연결된다. 수유역에서 택시를 타도 5,000원 내외다.
3구간은 도봉산 종주코스로 거리가 10㎞ 정도로 별로 길지 않아 간단한 도시락과 간식을 챙겨 가면 되지만 4구간은 3구간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19㎞기 때문에 도시락과 먹거리를 제대로 챙겨야 한다. 특히 4구간은 평지를 4㎞ 이상 걸어야 하기 때문에 워킹용 신발 밑창을 까는 것도 괜찮다. 여성들은 장거리 도보로 발바닥이 아프면 가끔 생리대를 신발 밑창에 깔기도 한다.
- [서울시계(市界)종주 5·6구간] 겸재 정선·구암 허준 만나고 봉수대와 한강나루터 지나쳐
- 대부분 야트막한 산… 근린공원·고갯길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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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계종주팀이 양천 궁산공원을 내려오며 활짝 웃고 있다. 제일 앞이 총부대장 유상헌씨, 바로 그 뒤가 올해 65세인 전윤정 대장.
- 서울의 동쪽과 북쪽이 북한산·도봉산·수락산·불암산·망우산·아차산 등 산으로 둘러쳐져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면 서쪽과 서북·서남쪽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겸재 정선 기념관, 허준 박물관 등과 야트막한 산에 조성된 근린공원 등이 특징을 이룬다.
야트막한 산은 기본적으로 고개를 갖고 있다. 서울에는 문헌상으로 230개 이상의 많은 고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현재 서울은 택지나 도로 개발로 상당수의 고개가 없어졌으나 아직도 예전 그대로 혹은 흔적이 남은 고개들이 있다.
북악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에 고개가 많다. 삼선교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동소문고개, 서울대 부속병원과 창경궁 정문 북쪽 사이에 있는 박석고개(薄石峴), 동대문경찰서 부근에서 종로5가로 넘어가는 배오개고개(梨峴) 등이다. 인왕산 서사면에서 뻗어 나와 북서쪽 통일로로 통하는 무악재 외에도 풀무재, 미아리고개, 망우리고개, 진고개 등이 있다.
이러한 고개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변모되었지만 무악재, 남태령, 미아리고개, 망우리고개 등 몇몇 큰 고개는 그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고개들은 없어졌지만 그 이름은 지금도 동네 이름으로, 또는 지하철역 이름으로 남아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을 준다.
고개 이름이 동명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인현동(仁峴洞)·송현동(松峴洞)·아현동(阿峴洞)·만리동(萬里洞)·무악동(毋岳洞)·망우동(忘憂洞) 등이다. 지하철역 이름으로는 3호선 무악재역, 4호선 남태령역·당고개역이 있다. 5호선의 애오개역, 6호선의 버티고개역, 7호선의 장승배기역 등도 지명 유래를 전한다.
고개는 기본적으로 도적 떼나 호랑이가 출몰하기 쉬워 길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그래서 고개를 넘을 때 모여서 가거나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넘곤 했다. 따라서 고개 주위에는 주막이 있었다. 길손들은 고개를 무사히 넘게 해 달라는 기원을 담은 서낭당을 만들어 빌었다. 이 서낭당이 나중엔 마을의 안녕과 풍요까지 기원하는 장소로 확대됐다. 지방에 가면 서낭당을 쉽게 볼 수 있으나 서울에서 현재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서낭당은 12곳으로 전한다. 서낭당이고개, 서낭당고개, 사당이고개, 도당재 등으로 그 자취를 알 수 있다.
유난히 야트막한 산이 많은 서울시계종주 제5·6구간을 이번에도 거인산악회·54트레킹동호회 회원들과 같이했다.
[5구간]
지축역~앵봉(서오릉)~벌고개~봉산~수색교~가양대교~구암근린공원(허준박물관)~궁산~겸재 정선기념관~마곡체육공원~방화역 21.9㎞
이번 구간은 강북에서 만나 한강을 건너는 대장정 구간이다. 대장정이라고 하기엔 가소로운 거리지만 한강을 건넌다는, 그것도 북쪽 끝에 가까운 지축역에서 만나 한강을 건넌다고 하기에 굉장히 먼 거리로 느껴졌다. 지축역에서 오전 9시에 일행을 만났다. 모이는 회원들은 구간이 지날 때마다 점점 더 줄었다. 1구간을 시작할 때는 그 추운 날씨에도 30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10명이 채 안 된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다들 60세를 바라보거나 60세를 훌쩍 넘겼는데…. 아마 ‘걷기의 달인’ 경지에 오른 분들 같다.
3호선 지축역을 등지고 남쪽으로 향했다. 한마음미용실의 커다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곳이다. 조금 내려오니 주변은 온통 공사판이다. 이곳도 뉴타운 건립 예정지라 허허벌판에 각종 건축자재들이 쌓여 있다. 그 사이에 있는 시경계 도로를 따라 걸었다. 2차선도 건너고, 4차선 도로도 넘고, 통일로도 지나서 앵산 자락 임도로 접어들었다. 야트막한 앵산이 서울과 경기도 고양의 경계를 이룬다. 앵산 자락 오른쪽(서쪽)으로는 골프장과 서오릉이 있다.
서오릉(西五陵)은 5개의 왕릉으로 구성된 사적 제198호로 지정된 유적지다. 세조 3년(1457) 세자 장(璋:후대에 덕종으로 추대)이 사망 후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곳에 모셔진 것이 시초다.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敬陵),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무덤인 창릉(昌陵),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明陵),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무덤인 익릉(翼陵), 21대 영조 원비 정성왕후의 무덤인 홍릉(弘陵)까지 다섯 왕과 왕후의 능을 모셨다. 경기도 구리에 있는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 왕실의 가족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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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장골산 초입에 있는 좁은 길엔 개나리와 벚꽃, 후박나무 등이 활짝 피어 걸음걸이를 더욱 가볍게 한다.
서오릉은 조선 왕실 가족 무덤
조선시대에는 품격에 따라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왕의 생모·왕세자 빈의 무덤은 ‘원’, 대군·공주 등의 무덤은 ‘묘’로 구분해 불렀다. 서오릉에는 5개의 능 외에도 조선 왕조 최초의 ‘원’으로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무덤인 순창원이 있으며, 숙종의 후궁으로 많은 역사적 일화를 남긴 희빈 장씨의 무덤도 있다.
서오릉 방향으로는 능선에서 철제 펜스로 문화재구역을 보호하고 있다. 앵봉과 응봉(244m)을 거쳐 벌고개로 가는 길이 시경계다. 벌고개엔 서울시와 경기도를 가르는 이정표가 있다.
사실 서오릉 뒷산의 명칭은 조금 애매하다. 잘 닦인 등산로 덕택에 많은 주민이 이용하고 있지만 이 산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 산 전체가 앵봉산”이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응봉과 앵봉의 구분은…”이라며 얼버무렸다. 여하튼 야트막한 봉우리들은 벌고개가 있는 서오릉을 지나 수색까지 계속 되며,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이룬다.
벌고개는 갈현동의 옛 자연부락인 궁말에서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풍수지리상 이 고개는 덕종과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인 경릉의 좌청룡 줄기에 걸쳐 있다. 그런데 지반이 낮고 약해 사람이 지나다니면 더욱 낮아질 염려가 있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만일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큰 벌을 준다고 해서 벌고개(罰峴)라 이름을 붙였다.
응봉에서 내려오면 서오릉로와 접한다. 도로를 건너기 위해서는 서울 방향으로 50m쯤 내려와 횡단보도를 지나 다시 시경계를 찾아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올라가 다다르는 산이 일반 지도에 표시된 봉산이다.
봉산(205m)은 정식명칭이 덕산(德山:일명 거북산)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의 서북쪽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앵봉, 응봉을 거쳐 벌고개에서 끊어진 산은 다시 덕산에서 일어나 갈현동, 구산, 역촌, 신사 등으로 이어져 수색까지 약 7㎞ 연봉으로 이어진다.
덕산은 서울 서북부 주민과 고양 동남쪽 주민들의 휴식처이면서 체력단련장이기도 하다. 능선을 따라 걷다가 쉴 만한 곳에 이르면 정자와 운동기구가 구비돼 있어 많은 주민이 활용하고 있다. 이용 주민은 대부분 서울시민인데 고양시에서 정기적으로 검사하는 약수터도 10곳이 넘는다고 했다. 처음 나온 정자인 ‘봉수정(烽燧亭)’에 앉아 쉬고 있는 등산객들에게 이 산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다.
“전체 산 형세가 거북이 모양을 닮아서 거북이산이라고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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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종주팀이 출발하기 직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아래)꿩고개 길 중 진달래꽃이 만발한 곳을 종주팀이 걷고 있다.
- 허준의 호 따서 구암근린공원 조성
아마 산이라고 하기엔 너무 야트막해서 사람들이 정식명칭을 알려고 하지 않아 그러려니 싶었다. 실제로 이 산 이름을 정확히 아는 주민은 현장에서 만난 4명 중 한 명도 없었다.
이어 덕산 정상(205m)에 도착했다. 정상은 군부대가 철조망을 치고 차지하고 있어 접근이 금지돼 있고, 바로 그 밑에 ‘고은정(高恩亭)’이 등산객을 맞았다. 낮은 산이라 등산로는 외길이다. 간혹 동네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로 두세 갈래 정도 나뉘기는 했다.
마침 사거리가 나왔다. ‘←중산생활체육광장, 산책로↑, 덕산약수터→’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었다. 덕산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했다.
은신정, 수향정을 지나 저 멀리 한강이 보이는 수색까지 나아갔다. 이제부터는 평지로 걷는다. 수많은 차량과 소음을 견뎌야 한다. 울퉁불퉁하지만 그래도 산길이 걷기엔 훨씬 낫다. 최고령인 우리의 전윤정 대장은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전 대장은 올해 65세인데도 등산과 마라톤으로 다져진 체력 덕분인지 50을 갓 넘긴 사람처럼 아직 피부가 탱탱한 편이다. 열심히 운동한 결과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친구들은 모두 꼬부랑 할머니가 다 돼 같이 다닐 사람이 없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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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종주팀이 궁산 우수 조망대에서 한강과 방화대교, 행주대교를 바라보고 있다. 2 종주팀이 소나무숲 사이로 난 등산로를 걷고 있다. 3 종주팀이 모두 모여 정확한 위치와 지명을 지도에서 확인하고 있다. 4 방화대교와 행주대교, 한강을 배경으로 종주팀이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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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교를 넘었다. 다리 아래로는 경의선 철로가 지난다. 철로차량기지도 겸하고 있어 수많은 열차가 정차해 있다. 차량기지 담벼락 너머로 차들이 쌩쌩 달렸다. 왕복 10차선은 될 법하다. 잠시라도 말을 하느라 입을 열면 입 안에 뭔가 씹히는 기분이다. 찜찜하다.
바로 앞에 한강을 두고 동쪽에 난지도 노을공원이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산더미같이 쌓인 쓰레기 더미에서 나오는 악취가 뉴스의 초점이었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공원, 억새가 우거진 연인과 함께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히는 장소가 되었다. 참, 세상은 모를 일이다.
강변북로를 건너 가양대교로 한강을 지났다. 강폭만 1㎞에 달한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 위로 걸은 거리는 총 2㎞ 정도 됐다. 한강에서 부는 바람을 맞고 전경을 구경하며 강 위로 걷는 기분이 새삼스러웠다. 강에는 청둥오리가 무자맥질을 하며 연방 먹이를 찾고 있고, 햇빛에 반사된 강 표면은 여기저기서 반짝거렸다.
다리를 건너니 바로 강변아파트로 연결됐다. 도로 위 이정표는 오른(서)쪽으로 ‘허준박물관 500m’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우회전하지 않고 뒤로 돌아 구암근린공원으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시계는 한강이니 조금 더 가까이 가기로 한 것이다.
‘근데 왜 구암인가?’‘허준박물관은 또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암은 허준의 호이다. 그의 호를 따서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또한 <소설 동의보감>과 TV 드라마 ‘허준’ 등에 경기도 파주와 전남 장성·영광, 경남 산청 등으로 그의 출생지가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경기도 김포군 양천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지금의 강서구 능촌동 능곡마을이다. 그래서 허준박물관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박물관 내부는 그의 일대기와 약탕 체험기, 약초 식별법 등 한의학과 관련한 다양한 시설로 채워져 있다.
허준박물관에서 50m쯤 거리에 공암나루터(孔巖津址)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양천과 행주를 잇던 나루터, 일명 북포(北浦)나루라고 하였다”는 글로 그 옛날 이곳이 나루터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지금 주변은 온통 아파트와 주거단지로 변했다. 나루터의 흔적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주변엔 커다란 바위에 동굴 같은 구멍이 뚫려 있어 공암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짐작케 했다.
영등포공고를 지나 궁산으로 갔다. 궁산은 해발 100m도 안 되는 정말 야트막한 산이지만 조선시대 양천고을의 진산으로 통했다. 한남정맥의 끝자락으로 안산·수리산에서 북행하여 증산(甑山)이 되고, 낮은 구릉이 한강으로 끝나면서 작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한강을 따라 서쪽의 개화산 등과 더불어 한강 남안에 솟아 강변의 절경을 이룬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에 “성산(城山)에 고성이 있는데, 그 둘레는 약 218m이고, 지금은 성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궁산의 이름은 파산(巴山)·성산·궁산·관산(關山)·진산(鎭山) 등 다양했다. 파산은 삼국시대에 주변의 지명인 제차파의(齊次巴衣)여서 연유된 것이며, 성산은 성이 있기 때문에, 진산은 양천고을의 관방설비가 있어 그렇게 불렸다. 관산은 바로 건너에 있는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을 빗장(關)처럼 지킬 수 있는 산이란 의미다. 궁산은 양천향교가 있어서 궁(宮)으로 표시했던 것으로 공자를 숭배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현재 표준 명칭도 궁산이다.
행주산성과 마주보는 궁산, 이름도 다양-
- ▲ 까치울이 있는 능고개로 종주팀이 올라가고 있다.
- 궁산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임진왜란 때 전라창의사 김천일, 전라소모사 변이중, 강화의병장 우성전 등이 김포·통진·양천·강화·인천 등지의 의병들을 이끌고 이 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한강을 건너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대첩에서 크게 승리한 것을 들 수 있다. 양천현감들은 매일 저녁 궁산에 올라 강 건너 피어오르는 봉화를 바라보고 국가의 안위를 살피기도 했다. 사적 제372호로 지정된 양천고성지도 행주산성, 파주의 오두산성 등과 함께 한강어귀를 지키던 중요한 산성이었다고 안내판에 설명하고 있다.
궁산 한강변의 뛰어난 절경은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岳陽樓)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버금간다 하여 이곳에 소악루(小岳樓)라는 정자가 있다. 영조 때 이유(李楡)가 이곳에 와 소악루를 짓고 명사들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 겸재 정선은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뒤 매일 이곳에 올라 소일하면서 한강변의 그림을 그렸다. 그 작품집 <한수주유(漢水舟遊)>는 오늘날 한강변의 옛 모습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다. 겸재 정선의 그림이 안내도와 함께 한강을 바라보는 우수 조망자리에서 탐방객들을 맞고 있다.
궁산 정상은 6·25전쟁 때 군부대 진지가 구축되었다. 인근 주민들이 평평한 꼭대기의 솔밭 사이에서 산책과 경치를 즐기고 있다. 한강의 아름다운 전경과 수많은 다리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펼쳐진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우리의 전 대장이 다시 한 말씀 하신다.
“어휴, 저 다리를 보니 내 다리가 불쌍하다.”
궁산공원을 지나 이젠 5구간 끝인 줄 알았는데 아직 끝이 아니다. 궁산을 내려가 아파트를 지나니 겸재 정선기념관이 나왔다.
겸재 정선은 65세 때인 영조 16년(1740) 양천현감으로 발령받아 부임했다. 정선은 이곳에서 5년간 머물면서 한강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며 종래의 남성적 산악미 위주에 부드럽고 서정적이며 여성적인 표현까지 겸비하게 된다. 그의 진경산수화를 더욱 원숙한 경지로 끌어올린 곳이 바로 양천현인 것이다. 지금은 강서구로 바뀌었지만. 그래서 이곳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
겸재기념관에서 마곡레포츠센터를 지나 강서공고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방화역에 도착했다. 이젠 정말 끝이다.
이날은 오전 9시 지축역에서 만나 방화역까지 꼬박 21.9㎞(GPS 거리)를 걸은 끝에 오후 5시에 도착했다. 정말 다리가 불쌍할 정도로 고생했다. -
- ▲ 수색을 지나 시계를 따라 가양대교를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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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구간]
방화역~개화산~김포공항~오쇠삼거리~강장골산~서서울호수공원~고강보도육교~안산~우렁고개~온수역 22.4㎞
이번 구간은 주로 평지라 만나는 시간을 오전 10시로 조금 느긋하게 잡았다. 오전 10시. 이구 대장이 어김없이 먼저 와 있다. 참여한 거인산악회와 54트레킹동호회원들은 더 줄었다. 총 8명이 단출하게 출발했다.
방화역 2번 출구에서 국립국어연구원 방향으로 곧장 따라 올라갔다. 국어연구원을 오른쪽에 두고 돌아 꿩고개근린공원으로 진입했다. 간단한 체육시설과 휴식을 겸할 수 있는 아담한 공원이다. 공원 입구엔 꿩고개의 유래에 대한 안내판을 붙여 놓았다. 안내판에 의하면 예로부터 꿩이 유난히 많았기에 꿩고개인데 꿩을 의미하는 여러 한자 적(翟), 궉( ), 분(曷鳥), 치(雉) 중 특별히 꿩치자를 쓴 것은 군사적 의미가 있다며 이렇게 전한다.
“꿩고개 앞을 흐르는 한강은 예로부터 물류수송의 운반로이며, 군사적으로 이동·보급로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또한 개화산에서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발견되고, 조선시대까지 봉수가 있었던 곳으로 강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수로를 차단할 수 있는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이에 꿩고개는 개화산의 오른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예로부터 산성방어벽의 끝이었으며, 돌출된 부분을 이를 때나 성곽의 끝, 담장을 이르는 한자 치(雉)는 꿩치(雉)자와 같은 글자를 사용했으므로,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군사적 의미보다 정감 있는 새 이름 꿩에 대한 의미가 더 강해져서 현재 이곳을 꿩고개라 부르고 있다.” - [6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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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허준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 공암나루터를 확인하고 있다. 2 종주팀이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고 있다. 3 양천고성에 있는 정자인 소악루에 올라 한강을 가리키고 있다. 4 양천고성 정상에 있는 성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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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고개에서 개화산으로 연결
이 꿩고개를 한자로 치현산(雉峴山)이라고도 부른다. 많은 주민이 이용하는 듯 산책로는 반들반들했고, 진달래가 활짝 꽃을 피워 봄기운을 만끽하게 했다. 바로 앞에 행주산성이 강 건너 손에 잡힐 듯했고 행주대교와 방화대교가 양쪽으로 있었다.
치현산(꿩고개)은 바로 개화산(128.4m)과 연결됐다. 서울 서쪽의 끝에 있는 개화산은 일명 주룡산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한 도인이 주룡선생(駐龍先生)이라 자칭하며 이 산에 숨어 살면서 도를 닦고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늙어 죽었다. 그가 이곳에 살 때 매년 9월 9일에 동자 두세 명과 더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구구절에 용산에 올라 술을 마시다)’이라 했다 해서 주룡산이라 이름 붙었다고 전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자리에 이상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이 산을 개화산이라 일컫기 시작했다. 지금의 개화사가 주룡선생이 살던 옛 터라고 한다.
<양천읍지>에 개화산의 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동해의 산경은 백두산을 조종으로 하여 태백산에 이르고, 서쪽으로 굽이쳐 속리산이 된 다음, 북행하여 청계산이 된다. 여기서 맥을 나누어 일맥은 북쪽으로 관악산을 이루고, 다시 북쪽으로 떨어져 양화도 선유봉이 되며, 일맥은 서북을 향하여 안산의 수리산, 인천의 소래산으로 이루어져 북행해 와서 본현에 이르러서는 증산(甑山)이 된다. 증산은 산 모습이 예뻐서 군자봉이라고도 하니, 이것이 한 고을의 조봉(祖峰)이 되며, 일맥이 북향하여 주룡산이 된다. 일명 개화산이라고도 하는데, 코끼리 형상으로 사자 형상인 행주산과 더불어 한강 하류의 양쪽 대안에 포진하여 서로를 바라보며 서해안을 통해 들어오는 액운을 막고, 한성에서 흘러나오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이라고 한다.”
겸재 정선은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열수팔경도’의 하나로 ‘개화사’라는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오솔길의 소나무숲과 그 아래 버들숲이 우거져 있고 전답이 있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지금은 개발제한구역과 군사시설이 있어 자연 그대로의 숲이 제법 울창해진 것도 개화산의 자랑이다. 개화산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낸다.
개나리가 만발한 등산로를 지나 개화산 봉수대를 가리키는 비석에 다다랐다. 이곳은 옛 양천 지역의 이름인 파릉(巴陵) 8경의 하나로 ‘개화석봉(開花夕烽)’에 해당한다. 개화산의 저녁 봉화가 평화로운 한강변 경치를 한층 아름답게 꾸몄던 것을 표현했다.
부천과 서울 경계 넘나들어-
- ▲ 개화산 정상 군부대 밑에 있는 개화산 봉수대.
- 행주대교 남쪽 끝자락에 ‘행주나루터’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강변 쪽에 있던 행주나루는 강서구 개화동 갯모랭이마을 앞에 있던 나루터의 이름이다. 행주대교가 놓이기 전에 개화동에서 예전의 고양군 지도읍 해주리로 건너가던 나루터였다. 갯모랭이는 갯가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강 하류는 인천만의 바닷물이 들어와 섞여지므로 소금기가 있어서 강변이지만 갯가라고 했다.”
행주나루터 비석에 새겨진 문구다. 개화동에서 강서농수산도매시장까지 가는 6647번 버스 종점이 지나는 길에 있다.
개화역에 다다랐다. 여기에서 시경계는 논두렁 사이와 김포공항 뒤쪽으로 죽 돌아서 가야 하지만 그 길 자체가 별 의미가 없어 공항 앞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메이필드호텔(맞은편이 강서농산물도매시장이고 농수산물공사 강서지사) 앞을 지나 오쇠삼거리까지 죽 내려갔다. 외발산동에 있는 오쇠삼거리가 부천으로 넘어가는 시경계 지점이다.
외발산동은 발산(鉢山·72.3m)의 서쪽에 있는 동네를 말한다. 발산은 밥주발을 엎어놓은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발산은 파려산 또는 수명산(壽命山)이라고도 한다. 수명산은 화곡동과 발산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수명장수를 비는 산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평지에서 시경계를 찾아가는 길이 더 어렵다. 산길은 능선이 명확히 드러나지만 주거단지나 아파트엔 경계가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먼저 답사한 팀들이 있어 그들을 따라 신월아파트 사이와 뒤로 나와 육교로 도로를 건넜다. 육교 위에서 부천시 경계를 나타내는 이정표가 보였다.
양원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좌측 광영문화관 앞으로 100여m 가다가 엄마분식을 앞두고 다시 우회전으로 돌았다. 서울금융고교 담벼락을 끼고 걷다가 정문을 지나 신원중학교를 통과했다.
지역아동복지센터 앞쪽에서 우회전해서 곧장 올라간다. 시경계를 넘어 부천으로 접어들었다. 고강아파트 단지 사이로 들어가 뒤로 나오는 길이 시경계이지만 뒤쪽은 언덕으로 막혀 있다. 단지 앞으로 가다가 새로나마트에서 좌측으로 돌아 고강아파트 8동과 고강리치빌 1동 사이로 난 계단길로 올라가는 코스로 잠시 부천시로 우회했다.
좁은 길은 만개한 목련과 비슷한 후박나무꽃과 개나리, 벚꽃 등이 가로수처럼 활짝 펼쳐져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했다.
조그만 능선엔 강장골산, 능골산 등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들이 있다. 밀양 변씨 가문에서 세운 비석들이다. 조그만 능선은 서서울호수공원으로 연결됐다. 공원엔 대운동장과 체육시설이 구비돼 있었다.
이어 경인고속도로를 건너는 길과 접속이 됐다. 이른바 고강보도육교다. 육교 아래로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각종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길을 건너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이대목동병원까지 운행하는 6624번 버스 종점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앞에는 높은 기동대 담벼락이다.
평지서 경계 찾기 더 힘들어
넓은 길을 따라 가는 길이 서울 양천과 경기도 부천을 구분하는 도로다. 양쪽으로 빌라 단지가 가득하다. 어떤 빌라는 서울이고, 또 어떤 빌라는 경기도다. 매일, 하루에도 수 차례 경기도와 서울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다.
빌라 단지 끝에 있는 한신빌라와 한신마트 앞에서 좌회전으로 돌아 길을 따라 100m쯤 가다가 등산로 초입이란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올라간다. 안산체육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체육공원 등산로 이정표를 세운 관할구가 양천구 신월동에서 부천시 오정구로 금방 금방 바뀐다.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이 모두 이용하는 시설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정확한 이름이 궁금했다. 산책객들은 “지양산”이라고 했다. 지도엔 ‘안산’과 ‘지양산’을 혼용했다. 여하튼 등산로를 따라 계속 내려왔다. 많은 주민이 이용하는 듯 길은 외길로 잘 닦여진 상태였다.
온수연립과 우정고개 방향의 이정표를 따라 계속 나아가서 처음으로 조금 헷갈리는 삼거리가 나왔다. ‘← 1㎞ 온수초교, 온수공단 600m ↑’ 이정표에서 온수공단으로 향했다. 콘크리트길로 잠시 이어지더니 이내 다시 능선으로 올랐다. 잠시 이어진 콘크리트길이 작동(鵲洞)고개길이다. 주변엔 까치울이 있고, 까치울초등학교도 있다. 까치가 많아서 유래된 것 같다.
능선을 따라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온수공단으로 계속 가니 한국아파트가 보인다. 다시 평지로 돌아오며 만난 첫 아파트다. 한국아파트 입구에서 왼(동)쪽으로 50m쯤 내려가 손오공문구공장과 강서건설기계 정비공장에서 좌회전한다. 다시 50m쯤 직진하다 삼영기계공업에서 오른쪽으로 돌고, 새마을금고 앞에서 우회전하면 이번 구간의 종착역인 온수역이 나온다.
오전 10시에 방화역에서 만나 하루 종일 걸어 오후 5시쯤 온수역에 도착했다. 무려 22.4㎞를 7시간 걸려 걸었다. 다리에 감사할 뿐이다. -
- ▲ (좌)겸재정선기념관. (우)구암근린공원의 허준 동상.
[서울시계종주 5·6구간 가이드]
양천현감이었던 정선, 양천에서 태어난 허준의 유적 등 둘러볼 곳 많아
이번 구간은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역까지였기 때문에 따로 교통편을 안내할 필요가 없다. 다만 개화역에서 굳이 시경계를 돌지 않고 도심화물터미널로 도로를 따라 내려온 것은 시경계로 도는 길이 다소 위험하기 때문이다. 메이필드호텔 앞 삼거리에서 오쇠삼거리까지 가지 않고 바로 양원초등학교로 가는 길도 있다. 이런 길 정도만 감안하면 종주 길 안내에 다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구간에선 볼거리가 몇 군데 있다. 특히 겸재 정선기념관과 허준박물관, 양천고성 등은 사전 정보를 알고 가면 그만큼 더 잘 볼 수 있다.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겸재 정선기념관은 그의 초기 작품부터 말년까지 다양한 작품이 망라돼 있어 진경산수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상시 큐레이터도 있어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준다. 매주 월요일 휴관. 평일은 오후 6시, 주말은 오후 6시까지 개관한다. 어른 1,000원, 청소년 및 군경 500원.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겸재사생대회도 5월 14일 개최한다. 참가 문의 02-2659-2206.
강서구 가양2동(허준길)에 있는 허준박물관은 출생지부터 가계도까지 허준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준다. <동의보감>뿐만 아니라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벽역신방> 등 다양한 저서도 전시돼 있다. 양천현의 변화상도 한눈에 설명돼 있다. 입장료는 성인 800원, 어린이 500원.
사적 제372호로 지정된 양천고성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산성으로 임진왜란 중 행주대첩에서 승리를 거둘 때 권율 장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데 요긴했던 산성이기도 하다. 양천고성 남쪽에는 서울시 기념물 제8호이자 많은 인재를 양성한 산실 양천향교가 복원돼 있다. 양천고성 정상부에 성황신의 위패와 신물을 모신 성황사 건물 한 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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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계(市界)종주 7·8구간 ] 서울 남서·남동쪽 하천·산 두루 섭렵
- 하천 따라 10여㎞, 산길로 20㎞…발원지 우물·유물 확인하며 걸어
- 서울의 역사는 산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한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삼국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한강 쟁탈전을 벌였으며, 한반도 통일 이후에는 서민 삶의 애환이 서린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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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계종주팀이 연주대가 보이는 서울과 과천의 경계 관악산 주능선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 서울에는 모두 35개의 하천이 있으며, 이 가운데 국가하천은 한강과 안양천·중랑천 등 3개다. 청계천은 지방1급 하천이다. 서울시의 국가하천 가운데 중랑천과 안양천은 모두 한강으로 합류한다. 따라서 이들 하천은 한강의 제1지류이기도 하다.
한강을 기준으로 제1지류는, 즉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은 홍제천·봉원천·중랑천·안양천·반포천·탄천·성내천·고덕천 등 8개다. 제1지류로 흘러 들어가는 제2지류는 불광천·청계천·도봉천·방학천·당현천·우이천·묵동천·면목천·전농천·시흥천·도림천·개화천·사당천·양재천·세곡천 등 15개다. 이어 제2지류로 합류하는 제3지류는 녹번천·정릉천·성북천·가오천·화계천·대동천·봉천천·대방천·오류천·여의천 등 10개며, 제4지류로는 월곡천 1개가 있다.
이들 하천 중에는 이미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곳도 많다. 반포천·사당천·방학천 등은 하천 부지가 복개돼 주차장이나 도로로 이용되고 있어 그 흔적을 찾기조차 힘들다.
하천은 전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북한산·도봉산·남산·관악산·수락산·불암산·청계산 등지에서 발원, 한강으로 흘러들어 서울의 자연조건들을 풍부하게 해주는 역할과 기능들을 수행해왔다. 일부 기능을 상실하고 복개되어 하수구 역할로 전락한 하천도 있으나 환경단체의 ‘하천살리기’ 일환으로 되살아난 안양천·양재천 등은 예전의 건강한 하천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시계 7·8구간은 유난히 많은 하천을 지난다. 7구간은 역곡천부터 시작해서 목감천을 거쳐 안양천에서 끝나고, 8구간은 하천 발원지인 관악산 자락의 호암산으로 바로 들어가서 양재천에서 끝이 난다. 하천과 하천의 발원지인 산을 따라서 서울시 경계를 밟아보았다.
이번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거인산악회와 54트레킹동호회에서 동행했다. 서울시계종주가 등산객들 사이에서 화제로 오르내리자 각종 산악회에서 뒤따라오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있다. 바로 뒤에 쫓아오고 있는 25시산악회 총무가 정확한 코스를 확인하기 위해 7구간에서 합류했고, 8구간에서는 25시산악회원 10여 명이 대거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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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사적 제343호인 ‘한우물’과 주변 산성지. 호암산 한우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곳으로 유명하며, 삼성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 [ 7구간 ]
온수역~역곡천~천황(굴봉)산~천왕역~개웅산~목감천~개명교~개봉1자연방류수문~안양천~금천구청역~석수역 20.7㎞
이번 구간은 하천에서 시작해서 하천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수역에서 오전 9시 어김없이 모였다. 7호선 온수역 2번 출구 바로 앞이다. 성공회대학교와 유한공고 사잇길로 해서 역곡천으로 접어들었다. 이 역곡천이 바로 서울시와 경기도 부천의 경계 지점이다. 역곡천도 제법 크고 길어서 지류에 속할 만도 하지만, 제4지류에도 포함되지 않은 하천이다.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니 조금 흐르다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구릉지 산, 불분명한 이름 많아
서울시계는 이 하천을 따라 계속 나가야 하지만 지겨운 길이라 약 200m쯤 가다 밭이 있는 산자락으로 올랐다. 옛 문헌에는 이 산이 항동과 천왕동의 경계를 이루는 굴봉산, 또는 건지산으로 나오지만 주민들은 천황산의 한 봉우리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굴봉산은 145.6m, 143m, 105m의 세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동 경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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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을 찌르는 창을 세워 놓은 듯한 관악산 정상 연주대의 장엄한 모습. 그 위에 연주암이 있다.
- 산자락 정상에는 행정구역이 ‘부천시 소사구’라고 알리는 삼각점이 있다. 등산로 중간에 쉼터도 있다. 구릉지 능선을 따라 내려서니 허허들판이 나온다. 미나리밭을 지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은 폐철로를 지나쳤다. 마침 지나가는 주민에게 “이 철로는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하루에 한 번 정도 소형 화차(貨車)가 화물을 수송한다”고 대답했다.
매화마을 아파트단지에 들어섰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매화가 환하게 맞았다. 마침 매화가 필 무렵 이 아파트를 지나쳐서 그나마 더 인상에 남았다. 매화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것 같았다. 아파트를 지나자마자 왕복 2차선 도로가 나오면서 양쪽으로 ‘어서오십시오, 부천시입니다’와 ‘여기는 서울 구로구 항동입니다’라는 이정표가 마주 보고 있다. 시계를 제대로 찾고 있었다.
다시 산능선으로 접어들었다. 산불감시초소가 나오면서 부천과 서울과 광명의 세 경계를 알리는 삼각점도 나왔다. 삼각점은 ‘광명’으로 적혀 있다. 실제로 이 봉우리가 해발 152m로 정상이지만 구로구에서는 다음 봉우리를 천황산 정상이라고 표시해 놓았다. 다음 봉우리는 144m밖에 안 됐다. 아마 제일 높은 봉우리는 행정기관이 세 군데나 겹쳐 관리 주체가 애매해서 아무 표시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구로구에서 아예 다음 봉우리를 정상으로 표시하면서 이정표와 전망대를 설치해놓은 듯싶었다. 서울시 지정 조망명소인 전망대에선 여의도와 북한산 인수봉도 희미하게 보였다.
이 산은 등산객들 사이에 천황산·천왕산·굴봉산·건지산 등으로 이름이 다양했다. 어느 명
칭이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1971년 8월 6일 건설부 고시 제465호’엔 “천왕동과 항동에 걸쳐 있는 굴봉산은 오류동 산25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53필지 587,860㎡를 대상으로 도시계획에 의해 도시자연공원인 천왕공원(天旺公園)으로 지정됐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 굴봉산이라 부르는 게 정확하지 싶다.
정상 이정표는 ‘←700m 항동, 천왕역 900m→’라고 가리키고 있다. 천왕역 방면으로 계속 직진이다. 끝 지점은 한창 공사 중이다. 아파트 공사와 터널공사·도로공사를 병행하고 있어 어지러웠다. 길도 없어졌다. 겨우 단지 중앙으로 빠져나와 천왕역을 찾았다.
천왕역 3번 출구 방향으로 나와 다시 산자락으로 올랐다. 굴봉산 동북쪽으로 해발 125m인 개웅산(開雄山)은 그 능선을 따라 오류동과 개봉동의 경계를 이룬다. 개웅마을의 지형이 움푹 들어간 관계로 난리 때마다 총탄이 개웃개웃 피해가서 개웅마을이라고 불렸고, 산 이름도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개웅산 근린공원이 조성돼 등산로도 잘 단장돼 있다.
- 안양천은 시흥 목감동 630고지에서 발원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개웅산과 굴봉산 등으로 둘러싸인 오류골은 현재의 오류동 외에 천왕동·궁동·온수동·항동 일대를 전부 포괄했다. 이곳의 명물은 참외였다고 한다. 오류골 참외는 조선시대 궁중의 진상품으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개웅산 정상은 해발 130m에 불과한 구릉산지다. 정상엔 정자가 있어 주변조망을 가능하게 했다. 목감천이 흐르는 한진아파트 방향이 시계와 일치한다. 그쪽으로 하산이다.
목감천(牧甘川)은 안양천의 제1지류로서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에 위치한 630고지 계곡에서 발원해 안양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상류지역은 경기도 시흥시와 광명시를 경계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울시 경계에 이르러 광명시 철산동과 구로구 구로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안양천과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다.
목감천 발원지 부근에 조선시대 목암사(牧岩寺)라는 사찰이 있었으며, 사찰 경내에 감나무의 개량품종인 단감나무가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을 목암사의 목(牧)자와 감나무의 감(甘)자를 따서 목감리라고 불렀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도 목감천이라고 부른 것으로 전한다.
광명교 아래 목감천으로 접어들었다. 목감천을 따라 무려 3㎞ 가량을 내려갔다. 그러나 이는 곧 다가올 안양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목감천 좌우로 별로 볼 것도 없다. 그냥 흐르는 하천을 보거나 땅을 보며 걸을 뿐이다. 한마디로 무미건조한 길이다.
이어 개명교를 지나고 개봉1자연방류수문을 지나쳐 한강 제1지류인 안양천으로 내려갔
다. 한때 이곳도 난지도와 마찬가지로 오염과 악취로 악명이 높았던 하천인데, 지금은 시민의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자전거도로와 좌우로 야생화·조팝나무·개나리 등을 가로수로 심어 지겹지 않게 조성했다. -
- 안양천은 한강 지류 가운데 중랑천 다음으로 규모가 큰 하천이다.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산 계곡에서 발원한 안양천은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백운산에서 발원한 왕곡천, 수리산에서 발원한 수암천, 삼성산에서 발원한 삼성천 등과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든다.
안양천 유역은 상류로부터 경기도의 의왕·군포·안양·부천·광명시 등 5개 지자체를 거쳐 흘러 내려오며, 서울로 들어서는 금천·관악·동작·영등포·구로·강서·양천 등 7개 구를 지나가는 큰 물줄기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편에는 “대천(大川)이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며, 과천현의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의 철곶포(鐵串浦)로 흘러 들어간다”고 해 큰 하천이란 의미의 대천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과천현편에서는 “현의 남쪽 14리에 인덕원천이 있고, 현의 서쪽 19리에 학고개천(鶴古介川)이 있다”고 하여 안양천의 상류를 ‘인덕원천’, 중류를 ‘학고개천’으로 각기 명칭을 달리했다. <여지도서> 과천현편에서는 “안양천이 현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사근천(沙斤川)과 인덕원천(仁德院川)이 금천에서 합류해 흘러간다”고 기록돼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기탄(岐灘)’으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안양천은 ‘대천’ ‘학고개천’ ‘기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름만큼 긴 안양천을 따라 계속 걸었다. 안양천은 총 길이가 35㎞ 정도로 알려져 있다. 목감천 합류 지점에서 시작해 석수역까지 총 8㎞ 남짓을 하천과 주변을 보며 걸었다. 그날 종주는 그걸로 끝이었다. 거의 하천에서 시작해서 하천으로 끝난 7구간이었다. 하천으로 걸으니 유독 더 길게 느껴져 무지하게 걸은 느낌이었다.
- [ 8구간 ]
석수역~호암산~장군봉~삼성산~관악산~연주대~남태령~우면산~양재천~한국트럭터미널 21.2㎞
최근에는 한번 걸었다 하면 20㎞는 예사로 훌쩍 넘긴다.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에 구간을 종주할 때마다 첫인사로“오늘은 몇 킬로미터 정도 예상됩니까?”라고 묻는 게 정례화되다시피 했다. 그만큼 많이 걷는다는 얘기다.
이날은 기존 동행 멤버에 25시산악회 회원까지 합쳐서 종주를 시작할 때의 인원과 비슷한 21명이나 됐다. 출발부터 사람들로 북적북적했고 호암산·삼성산·관악산·우면산 등 4개의 산을 넘는다는 말에 다소 힘이 빠지는 듯했다. 그래도 걷는 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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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우면산 등산로는 잘 닦여 있고, 숲도 우거져 각종 새소리에 딱따구리 나무 쪼는 소리까지 들린다.(우)둑 위로는 야생화와 가로수 등이 아름답게 정돈된 양재천을 서울시계종주팀이 걷고 있다.
- 석수역에서 오전 9시에 모이기로 했으나 많은 인원이 참석한 관계로 출발이 20분쯤 지연됐다. 석수역에서 내려 육교로 바로 1번 국도를 건너 호암산까지는 불과 1㎞ 정도밖에 안 됐다. 호암산 입구엔 등산안내판이 있어 등산로를 상세히 안내하고 있다.
산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제는 신록이 왔구나’를 직감할 수 있었다. 파릇파릇한 나뭇잎들이 등산로를 가득 덮었다. 보기만 해도 상큼한 세상이다.
호암산은 관악산의 끝봉우리에 속하는 산으로 봉우리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虎巖山)이라 불린다. 호암산과 관련된 일화는 조선 건국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복궁 건설 당시 호랑이 모습의 괴물이 궁궐 건설을 방해해 밤에만 나타나 건물을 무너뜨리자 그 남쪽의 산에 있는 호랑이를 제압하고자 시흥에 있던 호암사를 산 위로 옮겨 호압사(虎壓寺)라 고치고, 산 정상에 방화(防火)의 상징인 해치를 세우고 한우물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한우물 주변에 있는 호암산성은 통일신라시대 당군을 축출할 때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됐다고 한다.
마침 ‘뒷모습은 40대, 앞모습은 50대, 마음은 30대’인 65세의 전윤정 대장이 한 말씀 하신다.
“서울시계종주하면서 참 많이 배워요. 서울에 수십 년을 살면서 전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산을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됐고, 산과 관련된 역사도 많이 배웠어요.”
정말 마음이 젊은 분이다. 요즘도 매주 한두 번씩, 한 달에 최소 일고여덟 번씩 산에 간다
고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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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서울시계종주팀이 비를 맞으며 안양천을 걷고 있다. 이날 안양천만 8㎞ 남짓 걸었다. 2.한우물 옆 50m 거리에 있는 석구상. 원래 경복궁의 방화를 목적으로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한우물 발굴 결과 석구지라는 비석이 나와 석구상으로 확인됐다. 3.우면산 등산로에도 호젓한 길이 많다.
- 호암산 ‘한우물’은 국가사적 제343호
호암산 정상 조금 못 미쳐 국가사적 제343호인 ‘한우물 및 주변 산성지’에 도착했다. 등산로 가는 길에 있는 사적지는 뒤늦게 발굴한 ‘제2 한우물과 옛건물터’라고 소개하고 있다.
연못에는 물도 없고 주변에는 성터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약 50m쯤 내려가니 통일신라시대 조성했다고 알려진 한우물 유적지가 나왔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신기한 연못이라고 한다. 이런 연못이 대개 하천이나 강의 발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복개돼 그 흔적을 찾기도 쉽지 않지만 한우물은 삼성천의 발원지다.
한우물 인근에는 돌해치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지리설에 의거해 우물과 함께 방화의 상징인 해치를 세움으로써 경복궁의 화기를 막았다고 한다.
1989년 서울대박물관에서 한우물과 호암산성 유적을 발굴할 때 우물에서 ‘석구지(石狗
池)’라는 새김글이 발견됨으로써 지금까지 해치로 알려졌던 석조물이 ‘돌개’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현재 이정표에도 석구상(石狗像)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장군봉을 지나 장군능선을 따라 국기봉에 다다랐다. 지나가는 등산객은 깃대봉이라고도 했다. “관악산에는 봉우리에 국기가 꽂힌 봉우리만 12개나 된다”고 덧붙였다. 종주를 좋아하는 등산객들은 12개의 깃대봉을 찾아 완주하곤 한다.
국기봉을 지나 콘크리트 도로가 삼성산 정상까지 포장돼 있다. 삼성산 정상은 군부대와 군사시설로 접근금지 상태. 삼성산은 관악산 연주대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능선의 한 봉우리다. 즉 삼성산은 관악산의 한 지능선에 속하는 산이다.
삼성산은 신라의 고승인 원효·의상·윤필 세 대사가 산의 중턱 삼막사 부근에 초막을 짓고 수도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또 고려 말에 지공·나옹·무학 등 세 고승이 이 산에서 수도했다 하여 산 이름이 삼성산이 되었다고 한다. 삼막사는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가 중수해 서산·사명대사 등이 수도한 도량으로 유명하며, 삼막 중에서 일막과 이막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지금 삼막사만 남아 있다.
삼성산 정상 군사시설물에 조금 못 미쳐 왼쪽으로 빠지는 등산로가 관악산 본능선으로 가는 길이다. 이제부터 관악산 능선으로 올라탄 셈이다. 관악산은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솟구쳐올린 산이다.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 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옛 지도에 그냥 ‘관악’으로 많이 나온다. 악(岳) 자체가 산(山)을 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산’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관악산은 옛날부터 개성 송악산(松岳山), 가평 화악산(華岳山), 파주 감악산(紺岳山), 포
천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도 오악(五岳)의 하나였다. 수십 개의 빼어난 봉우리와 바위,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어우러져 철 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했다. 관악산이 바위가 많고 골이 얕아 남성산이고 백호산이라 불리는 반면, 마주보는 청계산은 골이 깊은 여성산으로 청룡산이라 한다.
관악산은 남성산, 청계산은 여성산
관악산은 그 북쪽 기슭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강감찬 장군과 관련한 전설도 많이 지니고 있다. 그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 대신 이 산의 칡을 모두 뿌리째 뽑아 없앴다는 전설도 있고, 작은 체구인 강감찬이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는 곳마다 발자국이 깊게 패었다는 전설도 있다.
관악산은 풍수로 보아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이다. 조선을 개국하고 왕궁터를 정하면서, 관악산을 정면으로 하면 궁성을 위압해 국가가 평안치 못하다는 무학대사와 남쪽에 한강이 있어 무방하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양립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어쨌든 ‘불산’이라는 데는 의견을 같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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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악산기상관측소.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반 관람을 허용한다.
- 그래서 불의 산인 관악산의 불기운을 끊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숭례문 바로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연못뿐 아니라 서울의 모든 성문 현판이 가로인 데 반해 숭례문은 세로로 되어 있다. 이는 이 불의 산에서 옮겨 붙을 서울의 화재를 막기 위해서였다. ‘예(禮)’는 오행의 ‘화(火)’가 되고, 또 오방(五方)으로 보면 ‘남(南)’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숭(崇)’은 불꽃이 타오를 상형문자이기에 ‘숭례(崇禮)’는 세로로 세워야 불이 타오를 수 있고, 또 타오르는 불을 막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관악산 주봉 연주대 직전에 관악산기상관측소가 있다. 매일 오전 11시에서 오후 4시까지 누구나 견학할 수 있다고 한다. 조금 더 가면 연주대 포토존이 나온다. 많은 등산객이 여기에서 연주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바로 앞에 보이는 연주대 암벽은 10여 개의 창을 모아 세워 놓은 듯한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다.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암자가 자라 잡고 있다. 고3 수험생 학부모들이 전국의 기도발 잘 받는 장소 중의 하나로 꼽는다. 학부모들이 수시로 합장하고 기도 올리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전철 사당역 방면으로 시경계를 따라 하산한다. 가는 길에 한반도 모양을 닮은 바위가 눈에 띈다. ‘지도바위’라고 이정표가 설명하고 있다.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관악산에는 남근바위, 독수리바위, 불꽃바위, 거북바위, 관음바위 등 온갖 형태의 바위가 있다. 정말 기암절벽의 화산을 실감케 하는 산이다.
남태령으로 내려섰다. 남태령로엔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왕복 8차선은 될 법하다. 서울 방향으로 조금 올라갔다가 횡단보도로 건너 우면산으로 들어갔다. 우면산 들목 직전에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과 과천시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있고, 바로 옆에 커다란 남태령 비석이 서 있다.
“남태령 옛길은 한양에서 삼남(三南:충청·전라·경상도)으로 통하는 유일한 도보길이었다. 이곳을 지나 수원·안성을 거쳐 남쪽으로 갔으며, 반대로 과천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사당, 동작, 흑석동을 거쳐 노들나루(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이르렀다. 원래 이 고개는 여우고개(狐峴·호현)로 불리었는데,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원으로 행차할 때 이 고개에서 쉬면서 고개 이름을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임금께 속된 이름을 아뢸 수 없어 남태령(남행할 때 첫 번째 나오는 큰 고개)이라 아뢴 이후 남태령이라 부르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남태령 비석에 있는 문구다. 이 비석을 지나 우면산 아늑한 등산로로 걸었다. 깔끔하게 단장한 등산로다.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가끔 눈에 띈다. 산악자전거 타기에도 딱 좋은 길이다.
우면산은 소가 졸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면산 북쪽 기슭에 있는 대성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 한반도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중국의 고승 마라난타가 주석한 터로 알려져 우리나라 불교 전래의 성지로 주목받고 있는 절이다.
서울시경계는 우면산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헬기장에서 오른쪽 양재천 방향으로 빠져 서초구 우면동 식유촌길로 내려온다. 단독주택단지를 지나 양재천으로 내려섰다. 양재천 진입 직전의 비닐하우스촌이 서울시 보금자리주택 건립 예정지라고 한다. 여기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상전벽해로 변화가 예정돼 있는 셈이다.
이젠 이날의 마지막 구간인 양재천으로 접어들었다. 양재천엔 청둥오리와 학이 자맥질을 하며 놀고 있다. ‘언제적 양재천인지’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그만큼 깨끗해진 것이다.
양재천은 관악산에서 발원한 물이 여러 개의 작은 지류와 만나고, 청계산에서 발원한 여의천과 합류해 탄천으로 흘러들어가는 한강의 제2지류다. 즉 한강의 제1지류가 탄천이고, 탄천의 제1지류가 양재천이다.
양재천(良才川)의 이름은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휴식을 취한 후 먼 길을 떠난다 하여 지어진 말죽거리란 지명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원래 양재천에는 용 10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하늘로 승천하다가 그 중 1마리가 임신한 여자를 보고 놀라서 양재천에 떨어져 죽고 나머지 9마리만 하늘로 올라갔다 해서 양재동 옆산이 구룡산이 됐다고 전한다.
양재천을 지나 한국트럭터미널 주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30분이 다 되어서였다. 호암산~삼성산~관악산~우면산을 거쳐 양재천까지 꼬박 9시간 이상을 걸었다. 힘든 종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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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계(市界)종주 9·10구간] 197.3㎞ 종주 마쳐…산·고개·성곽·하천과 문화유적 두루 살펴
- 한성 백제의 혼 서린 ‘위례’
선사 주거유적지 거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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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문명을 시작하면서 성(城)을 쌓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엔 유달리 산성이 많다. 전국적으로 약 1500여 개 된다고 한다. 성은 일종의 요새 성격을 띠고 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였다. 성곽의 범위는 국가권력 크기의 상징이었고, 넓고 길수록 강력한 왕권을 뜻했다.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은 크고 작은 성들이 많다. 주변에 산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아 왔기 때문에 점령국마다 성을 쌓은 결과다. 백제·고구려·신라는 서울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그때마다 방어진지를 구축할 목적으로 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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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대숲이 우거진 한강 광나루 유원지 생태경관보전지역 옆으로 서울시계종주팀이 걷고 있다. 배경에 있는 산이 아차산이고 그 아래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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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과 도성·읍성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유사시를 대비한 방어체제 구축에 있다. 산성은 험준하거나 높은 곳에서 적의 침입을 막을 목적으로 구축한 것이다. 평지성과 산성으로 이루어진 도시 구조는 도성을 보호하거나 왕을 비롯한 지배집단의 피란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원칙은 우리나라 성곽구조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난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이 원칙이 계승됐다.
기원전 서울에 도성을 정한 한성 백제는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리토성을 쌓았고, 방어성곽인 몽촌리토성으로 한성 외곽을 보호했다. 한강변을 따라 축성된 옥수동 토성, 구리시 수석리토성, 삼성동토성, 양천고성, 대모산성, 암사동토성, 하남시 구산토성 등이 풍납리토성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강 유역과 임진강 유역은 삼국이 통일을 위해 서로 각축을 벌였던 전쟁터였다. 서울지역 한강권에는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아차산성, 장한성, 대모산성, 호암산성, 행주산성 등을 축조하고 삼국이 서로 대치했다. 임진강권에는 칠중성, 호로고루성, 대전리산성, 반월산성, 고모리산성, 고성산보루, 은대리성, 당포성, 아미성, 수철성, 오두산성, 계양산성 등이 축조되었다.
고려시대엔 성곽의 흔적을 찾기 쉽지 않지만 고려 말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 피란지로 삼각산에 중흥산성을 쌓고,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겨오기도 했다. 물론 왕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40여 년간 기거한 강화도에는 고려의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엔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서울성곽이 축조되어 왕도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갖췄다.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이 잇달아 축조되면서 한강 너머 남한산성과 함께 피란처를 다원화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산성들은 외침이 있을 때 일부 이용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행주산성과 양천고성, 호암산성 등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비롯하여 한양 탈환의 주요 기지로 활용됐다.
서울시계종주 9·10구간은 한성 백제의 흔적이 서린 위례성과 남한산성을 스쳐 지나가게 된다. 그리고 유서 깊으며 시계종주를 처음 시작했던 아차산을 마주 보며 걸어간다. 서울시계종주 10구간을 통해 총체적인 서울의 연혁과 역사, 서울에 있는 강과 산, 하천에 대해 나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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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송과 각종 야생화가 어울린 범바위산 마지막 자락에서 아름다운 야생화 모습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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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구간 ]
트럭터미널~옥녀봉~494.8봉~옛골~세정이마을~인릉산~범바위산~세곡사거리~복정역~장지역 18.7㎞
이번 구간은 지하철역에서 내려 트럭터미널 앞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양재역에서 오전 10시에 모인 회원들은 버스를 타기 위해 이리저리 이동했다. 이구 대장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왔다갔다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다른 회원이 “산에서는 방향을 잘 인도하더니, 평지에서는 길을 잘 모르구먼, 역시 산 전문가야”라고 농담을 했다. 한바탕 웃으며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서 내렸다.
트럭터미널 버스정류장에서 밤나무골 등산로 입구까지는 약 200m 거리다. 트럭터미널 주변은 공사를 하느라 산만했다. 겨우 길을 찾아 서울시계인 청계산 밤나무골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엔 ‘청계산등산로 안내’라는 이정표가 길을 가리키고 있다.
청계산은 서울과 성남, 과천, 의왕을 가르는 경계다. 1899년에 간행된 <과천읍지> 산천조에 따르면‘청계산은 군 동남으로 8리에 있는데, 일명 청룡산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 푸른 용이 산허리를 뚫고 나와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했다고 해서 청룡산이라는 것이다.
또한 풍수에서는 관악산을 바위가 많고 거칠어 남성의 산이며 백호의 산이라 부르는 반면, 마주 보는 청계산은 골이 깊어 여성의 산이며 좌청룡에 해당한다 해서 청룡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청계산 유래의 또 다른 설은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청계(淸溪)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러한 내를 지닌 산이라 해서 청계산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몇 가지 유래가 다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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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산은 계곡물이 맑아 이름 붙었다는 설도
청계산의 주봉은 망경대다. 이는 고려가 망한 뒤 조선 개국공신인 조준의 아우 조윤이 청계산 정상에 올라 송도를 바라보며 세월의 허망을 달랬다고 해서 망경대로 붙여진 것으로 전한다. <과천읍지>는 ‘망경대는 또한 주위의 삼라만상 경치를 다 볼 수 있다고 해서 만경대라고도 한다’라고 적고 있다.
청계산 기슭의 토양은 사질토양으로 밤나무가 잘 자란다. 과천의 옛 이름이 율목현(栗木縣)인데, 이는 밤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시계인 청계산 들머리도 밤나무골이다. 한때 밤나무가 많아서 그런지 지금도 언뜻언뜻 눈에 띈다. 밤나무뿐만 아니라 초목과 관목, 교목 등 모든 나무가 우거져 어느 산보다 훌륭한 숲을 보여준다. 이제 나무들은 신록을 넘어 녹음으로 넘어가는 단계다. 등산길 따라 보이는 나무들은 푸름이 넘친다.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 모두 푸르게 만든다.
푸른 등산로는 계속된다. 조금 가파르면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등산객들이 올라가기 수월케 했다. 우거진 숲은 새를 부른다. 숲을 찾은 새들은 아름다운 노래로 보답한다. 자연의 순환이치이고, 공생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나무들이 다양한 높이, 다양한 모습으로 자라듯이 새소리도 각양각색이다.
여기저기서 검은등뻐꾸기가 운다. 4음절의 검은등뻐꾸기 울음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 달리 들린다. 시인 박남준씨를 예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는 검은등뻐꾸기 우는 소리가 왜 그리도 처량하게 들리는지 마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어~흐흐흐~”라며 가엾게 여기는 것 같더라고 했다. 갑자기 자기 인생이 서럽게 느껴져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다고 한다. ‘내 삶이 얼마나 비참했으면 저 새까지 나를 비웃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나중에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어 여기저기 강연 가서 “그 새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고 청중에게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홀·딱·벗·고~, 홀·딱·벗·고~”로 들리더라고 했다. 가깝게 지내는 스님에게 다시 물었다. 그 스님은 “빡·빡·깎·고~, 빡·빡·깎·고~”로 들리더라는 거였다.
어느 소리가 맞는지 아무도 모르고 정답은 없다. 전문가들은 “미·레·레·도~, 미·레·레·도~”로 들린다고 한다. 조그만 새소리가 시사하는 바가 많지만 지금 현재 본인이 처한 상황이 어떻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들린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 같다. 여름날 우거진 숲 속의 시원한 그늘에 있으면 이 새의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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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서울시계종주팀 중 한 명이 천마산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마주 보는 산이 남한산성 자락인 금암산. 2.외곽순환도로 방음벽 옆에 조성한 은행나무와 소나무 사이로 종주팀이 걸어가고 있다. 방음을 위해 심은 나무들이 오히려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3. 종주팀이 나무들이 우거진 청계산 옛골로 내려오고 있다. 4.강동구에서 조성한 강동그린웨이는 서울시에서 가장 걷기 좋은 구로 선정될 만큼 잘 단장된 길이다. 강동그린웨이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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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산은 순조의 능인 인릉의 조산
해발 375m 옥녀봉에 도착했다. ‘봉우리가 예쁜 여성처럼 보여 옥녀봉이라 붙였다’고 한다. 예쁜지 어쩐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다시 일행을 찾아 나섰다. 옥녀봉은 잘 모르겠지만 ‘등산로는 참 예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유달리 여성들이 많았다. 물론 주말에 서울에서 가장 많은 여성이 찾는 산이 청계산이라고 익히 들었지만 지금 보니 평일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주능선 따라 일송정쉼터, 떡갈나무 군락지, 참나리 군락지 등을 거쳐 매봉 조금 못미처 헬기장에 도착했다. 벤치도 마련돼 있어 잠시 휴식이다. 동행하는 54년생 아주머니들을 힐끗 쳐다봤다. ‘참 대단하신 분들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매주 한 번 이상씩 등산하는 사람들이다. 서울시계종주만 하더라도 한 달에 두 번씩, 한 번 걸을 때마다 20㎞ 내외를 거뜬히 걷는다. 물론 그중에 올해 65세인 전윤정 대장은 그보다 훨씬 더 한 분이지만.
서울시계는 헬기장에서 정상 가는 방향인 매봉으로 가지 않고, 왼쪽 옛골 방향으로 돌렸다. 내려가는 등산로도 우거진 숲 속이기는 마찬가지다. 청계산이 높지는 않지만 여성의 산이라는 기록대로 깊은 계곡과 숲이 있고, 곳곳에 물이 넘친다. 여성의 산은 대개 육산이면서 물을 오래 머금어, 사람들이 필요할 때 조금씩 내놓는 특징을 지닌다. 청계산이 그런 산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옛골 입구로 내려왔다. 주변은 온통 밭들이다. 감자와 콩 등을 재배하고 있다. 길가엔 하얀 아카시아꽃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그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상쾌한 냄새다.
바로 앞엔 경부고속도로가 지난다. 그 밑 지하보도를 건너 새정이마을로 들어간다. 마을 입구엔 커다란 비석이 방문객을 반긴다. 새정이마을을 가로질러 인릉산 자락으로 진입한다.
인릉산이 서초구 내곡동과 성남시의 경계를 이룬다. <대동여지도>에 인릉산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천림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인릉산은 산 북쪽에 위치한 순조의 능인 인릉의 조산(朝山)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이 원래의 산 이름을 바꾼 격이다.
인릉산으로 접어들자 성남시계 이정표가 자주 보인다. 성남시 이름으로 돼 있다. 성남시계가 바로 서울시계와 똑같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가면 된다. 산 밑으로 내곡터널이 뚫려 있다. 지금 터널 위로 가고 있는 것이다. 성남시계는 이정표가 일정거리마다 안내하고 있어 현재 위치를 정확하게 가리킨다.
신구대학 식물원도 시계종주길에 있다. 그 식물원 뒷길 등산로로 올라간다. 식물원은 철망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철망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다시 등산로를 따라간다.
이번엔 조금 딱딱한 철조망이 나온다. 아까는 식물원이었지만 지금은 군부대다. 철조망의 차이는 식물원과 군부대의 차이다. 그 철조망 중간의 열린 문을 통과해 인릉산 정상으로 향했다. 조그만 헬기장이 나오는 동시에 확 트인 정상에 도착했다. 모두 휴식이다. 정상은 확 트였지만 주변엔 나무들이 우거져 시내는 조망할 수 없었다.
약 600m 남짓 더 가면 전망대가 있다. 거기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봤다. 저 멀리 북한산 인수봉과 중간쯤엔 여의도 쌍둥이 빌딩, 가까이는 내곡IC까지 한눈에 조망됐다.
세곡동 방향으로 하산길은 붓꽃, 찔레꽃, 애기똥풀꽃 등 각종 야생화와 수백 년은 족히 된 듯한 노송들이 길을 수놓았다. 노송은 금빛을 띤 금강송으로, 우람하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듯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길이다. 너무 아름다운 장면을 그냥 놓칠 수 없다.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새 일행을 찾을 수 없다. 잠시 한눈만 팔면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사람들이다. 부랴부랴 뒤쫓았다. 겨우 꽁무니를 따라잡아 같이 갔다.
주택가로 내려와 23번 국도로 나왔다. ‘안녕히 가십시오, 경기도 성남시’ ‘어서 오십시오, 서울시 강남구’ 이정표가 마주 보고 있다. 세곡천을 가로지르는 세곡교 서울 방향으로 해치상이 서울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
세곡동사거리에서 성남송파IC 방향으로 곧장 걸어가서 복정역까지 걸었다. 이번 구간 종점이다. 모처럼 20㎞ 이내로 걸었지만 그래도 오전 10시에 출발해서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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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구간 ]
복정역~장지천~장지근린공원~천마산~새우고개~일자산~명일근린공원~샘터근린공원~고덕산(매봉)~암사선사주거지~광진교~광나루 29.5㎞
오전 9시30분 복정역에 모였다. 서울시계종주 마지막 구간은 지난번 9구간을 조금 줄여서 마치는 바람에 약 30㎞ 가까이 된다고 했다. 가야 할 거리에 중압감을 느꼈는지 모두 줄행랑치듯 갔다. 복정역 1번 출구로 나와 장지천으로 걸어 올라갔다. 장지천 주변은 온갖 야생화가 만발했다. 걷기 편하도록 타탄트랙도 깔아놓았다. 야생화 즐길 정신도 없다. 오로지 걷기에 일념이다.
이번 구간은 야트막한 산에 조성한 근린공원과 주택가, 들판을 가로질러 선사주거지를 거쳐 한강을 지난다. 특히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산성을 남북으로 멀찌감치 쳐다보고, 또한 선사시대 주거지를 스쳐 지나가는 의미 있는 구간이다.
장지천이 끝날 즈음 대단위 아파트 단지 뒤편에 조성된 장지근린공원으로 들어간다. 운동시설과 휴식처를 갖춘 아담한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정원엔 들국화 같은 야생화와 양귀비꽃이 만발해 있다. 꽃들이 울긋불긋 서로 자랑하는 듯하다.
공원을 지나자마자 서울외곽순환도로 바로 옆길로 합류한다. 도로는 방음벽으로 둘러쳐져 있지만 워낙 달리는 차들이 많아 소리는 그대로 들린다. 소음 때문인지 방음벽 안으로는 은행나무와 소나무를 3중으로 심어 놓아 가로수 사이로 두 개의 길이 나 있다. 이 길도 제법 운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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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동그린웨이 못미처 누에머리공원 끝 지점엔 시민들을 위해 분수대를 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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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은 임경업 장군 전설 지녀
서울시계는 외곽순환도로 반대편으로 가야 하지만 군부대 통제구역으로 통행이 쉽지 않아 외곽순환도로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 반대편 지역은 위례 신도시 조성예정지이기도 하다.
위례성은 한성 백제 초기의 도읍지인 곳이다. 백제의 건국은 기원전이므로 20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지닌 성이다. 서울 수돗물의 이름인 ‘아리수’도 위례와 관련 있다.
위례 명칭 유래에 대한 3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한강을 뜻하는 ‘아리수(阿利水)’·욱리하의 아리·욱리에서 어휘변화를 일으켜 위례가 됐으며, 모두 크다는 뜻이다.
둘째로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는 어라하(於羅瑕)의 어라가 위례의 기원이고, 곧 왕성이라는 뜻이다. 셋째는 ‘우리’, 즉 울타리에서 기원했는데, 그 뜻은 성곽·성책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 위례는 한강과 성곽, 왕 등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외곽순환도로 따라가는 길을 벗어나 거여동사거리에서 거여동 방향 오른쪽으로 틀었다. 여기서 남한산성 등산로 입구인 만남의 장소까지 줄곧 가면 된다. 서울시계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 중간에 국방과학연구소 서울 제2 기술연구본부로 우회했다가 나오는 길도 있다.
만남의 장소는 등산객, 일반인 구분없이 북적거린다. 서울시계는 남한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고 왼쪽 신명실업고교 방향, 즉 천마산으로 가는 길이다. 빌라 등 주택가를 지나 은빛 천사의 집에서 야트막한 천마산 등산로로 올라선다.
천마산이 송파구 마천동과 하남시 간의 경계를 이룬다. 정상이 GPS로 151m밖에 안되는 구릉지이지만 그래도 임경업 장군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병자호란 때 천마산에서 용마가 나와 임경업 장군이 그 말을 타고 개농리에서 갑옷을 꺼내 입고 투구봉에서 투구를 쓴 뒤 전장에 출전했다고 전한다. 주변 일대에 산이 없어 얕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조망이 확 트였다. 정상엔 산불감시탑이 있어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천마산 맞은편엔 남한산성 자락인 금암산이 지척에 있다. 성곽은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 밑에 있는 골프장의 골프 치는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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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범바위산에서 내려오면 세곡3교를 지나 서울과 성남의 경계를 알리는 해치상이 있다. 오른쪽)시계종주 마지막 출발지점인 장지천 위의 장지교를 종주팀이 지나고 있다. 장지천 주변엔 다양한 야생화가 만발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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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을 내려와서부터 지겨운 주택가와 아스팔트길이 연속된다. 남천초등학교 후문을 지나 개나리어린이집에서 우회전해서 한스세븐빌에서 잠시 구릉지로 올라간다. 누에머리공원 관리사무소로 내려와 거여초등학교 뒷담을 끼고 돌아 고덕동 도로를 따라 나온 뒤 서하남IC 입구 사거리에서 일자산 방향으로 들어간다.
이곳이 강동그린웨이 출발지점이다. 강동그린웨이는 일자산공원에서 출발해서 허브천문공원~길동생태공원~명일근린공원~방죽근린공원~샘터근린공원을 거쳐 고덕산 등산로까지 10㎞가 넘는 길로서, 구청에서 직접 조성한 걷는 길이다.
강동그린웨이 일자산공원 첫 쉼터엔 한국생활안전연합에서 서울시 보행환경 실태를 조사한 결과 ‘강동구가 걷기에 최적’이라는 발표를 커다란 이정표에 붙여 놓고 있다.
일자산은 강동구 둔촌동과 하남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높낮이가 거의 없이 일자처럼 생겨 이름 붙여진 야산이다. ‘강동구가 걷기에 최적’이라는 이정표 바로 옆에 둔촌동의 유래에 대한 안내판도 있다.
‘이집(李集·1327~1387) 선생은 고려 말에 등용된 대학자로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과 더불어 절개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공민왕 17년(1368) 신돈의 실정탄핵을 계기로 신돈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 일시 은거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은거 동안의 고난을 자손 후시까지 잊지 않기 위해 호를 둔촌(遁村)으로 바꾸었다. 현재 둔촌동의 동명 유래는 이집의 호인 둔촌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동그린웨이는 정말 걷기 좋게 돼 있다. 공원을 빠져나가더라도 차도 옆 인도엔 타탄에 강동그린웨이 표시를 해놓아 걷기도 편하고 찾기도 쉽게 단장했다.
근린공원을 거쳐 고덕산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한강 야경으로 특히 유명한 곳이다. 정상을 향해 가는 오른쪽 한강변에 뵈는 어마어마한 별장은 영화배우 신영균씨의 소유라고 한다.
비릿한 밤나무꽃 냄새가 어디서 난다. ‘아, 그렇지. 밤나무꽃이 필 무렵이 됐구나’ 싶다.
고덕산은 고지봉이라고 하며, 정상은 응봉, 매봉이라고 한다. 정상이라 해봤자 GPS로 해발 100m밖에 안된다. 삼각점이 있는 정상에서는 한강이 바로 조망되고, 약간의 체육시설이 있어 시민들의 운동과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잠시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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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그린웨이 길은 걷기 좋게 단장
지나온 길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서울시 경계를 찾아 지하철 광나루역에서 지난 한겨울 눈 내릴 때 시작한 종주가 이젠 거의 끝이 보이는 지점에 왔다. 한강이 바로 눈앞에 있다. 감회가 새롭다.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선사주거지로 향했다. 너무 많이 걸어 발바닥이 화끈거렸다. 고덕산 끝자락엔 광릉약수터와 함께 바로 그 옆에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광주 이씨 광릉부원군 이극배의 묘소와 그 후손들의 묘소가 있다. 서울시 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된 곳이다.
들판을 가로질러 선사주거 유적지에 왔다. 약 6000년 전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유적으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밝혀진 신석기 시대의 최대 집단취락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농경문화 시작을 입증하는 한국선사문화 이해에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1979년 7월 국가사적 제267호로 지정됐다.
선사주거지에서 토끼굴을 지나 한강 광나루유원지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다. 그러나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걸을 힘도 없다. 길이니까 본능적으로 발이 옮겨지는 느낌이다. 발바닥부터 발목까지 아프기 시작한다. 그래도 끝내야지.
한강 광나루유원지는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분위기라 조금 힘이 났다. 석양에 반짝이는 갈대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눈이 부셨다. 아름다운 경관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힘든 것도 잠시 잊었다. 이정표가 하나 보였다. ‘암사동 생태경관보전지역’이라고 적혀 있다.
한강 연안에 형성된 퇴적부에 독특한 육상 및 연안 생태계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부가설명을 하고 있다. 수변을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버드나무 군락과 갈대 군락이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일부러 그 옆으로 한참 걸었다.
이젠 마지막 광진교로 올라갔다. 이 다리만 건너면 서울시계종주 끝이다. 다리 길이는 1㎞가 더 됐다. 왜 그리도 길게 느껴지는지. 다리 중간에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지이며 한강 조망지인 ‘리버뷰 8번가’도 있어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리버뷰 8번가에서는 발아래로도 한강을 조망할 수 있다.
마침내 광나루 비석에 도착했다. 무려 30㎞를 걸은 날이다. 태어나서 하루에 이렇게 많이 걸은 날은 처음인 것 같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하지 않는 이상 이같이 걸을 일은 없을 것 같다.
[ 서울시계종주를 마치며 ]
산전수전 겪으며 1회 평균 20㎞씩 서울시계 한 바퀴 돌아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2월 서울시계종주를 거인산악회와 54트레킹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시작하기로 했다. 첫 출발지는 아차산 광나루역. 그곳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서울시계를 한 바퀴 돌기로 뜻을 모았다. 모두 두툼한 등산재킷에 모자와 장갑, 마스크까지 완전무장하고 모였다. 아차산,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등을 차례로 거쳐 갔다.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즉 한 달에 두 번씩 어김없이 걸었다. 애초 대략 140㎞쯤 된다고 한 서울시계종주는 걸을수록 길이가 늘어났다. 5구간부터는 한번 걸을 때마다 보통 20㎞ 이상씩이었다. 무슨 극기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할 여유도 없이 오로지 걸을 뿐이었다. 걷는 사람들에게는 머리 비우고 걷는 게 좋을지 모르지만 이것저것 살펴보고 물어보고 취재하는 사람에게는 ‘이게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시작한 일정을 그대로 마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을 바꾸지 못하면 그 상황을 즐길 수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먼저 가서 살펴보고 물어보며 따라붙었다. 그렇게 하기를 10회, 헤맨 거리를 빼고 무려 197.3㎞를 완주하며 취재했다. 1회에 평균 20㎞다. 평지는 1시간에 평균 4㎞, 산길은 2㎞ 걷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산길, 평지 상관없이 오전 9시 내지는 10시에 모여 출발했다. 저녁 도착시각이 고무줄같이 늘었다 줄었다 할 뿐이었다. 눈 쌓인 산길을 걷기도 하고, 비를 맞으며 하천을 건너기도 하는 등 산전수전 겪으며 무사히 마쳤다.
서울시계종주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서울시에서 마침 서울 외사산 트레킹 코스 200㎞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동 용마산, 서 덕양산, 남 관악산, 북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역사·문화·생태 트레킹 코스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외사산 트레킹 코스는 서울시계종주와 중복되는 노선과 우회하는 노선이 반반 정도 된다고 한다. 우회하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서울권을 벗어날 때는 다른 시군과 업무협조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에 작업이 크게 지연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계종주를 먼저 마친 입장에서 서울외사산 트레킹 코스를 문화유적지와 아름다운 산수 경관을 찾아 연결한다면 그 어떤 걷는 길보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계종주는 54트레킹동호회와 거인산악회가 없었다면 아마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끝까지 동행해 준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튼튼한 내 다리에도 감사할 뿐이다.
/ 글 박정원 부장대우 jungwon@chosun.com
사진 정정현 부장 rockart@chosun.com
자료출처 : 월간 산 (http://s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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