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스님은 산을 내려가기에 앞서 주지실로 향했다.
"흠 ! 주지스님 안에 계시는가?"
"..........."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처마 밑 풍경만이 앙증맞은 몸체를 흔들며 화답했다.
한암스님은 간들간들 흔들리며, 맑고 투명하게 공중에 부서지는 풍경소리를
묵연히 바라보다가 다시 주지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보시게, 주지스님!"
그제서야 삐걱하고 문이 열리며 적석사 주지스님이 고개를 내밀었다.
주지 스님은 밖에 서있는 한암스님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 아이고, 스님! 아니 행장은 왜 꾸리셨습니까요?"
"지나가던 객승 잘 쉬었다 가네."
"아이고, 스님! 아, 며칠 더 쉬시면서 법문도 좀 들려주시고 그러실 일이지,
아, 왜 이리 일찍 떠나려 하십니까요?"
"법문은 무슨 법문!
이 좋은 산천경계에 풍경소리가 저절로 들리거늘 달리 또 무슨 법문이 필요하겠는가."
"아유, 스님 그래도 그렇지요."
그러나 한암스님은 주지스님의 만류를 귓전으로 흘리며 다시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에 눈길을 주었다..
"으음, 저 풍경소리 듣고 계시는가?"
"아. 예, 스님"
"저 소리는 있다고 할 것인가, 없다고 할 것인가?"
"예, 방금 울렸으니 있다고 하겠습니다."
"음, 지금은 울리지 않지 않는가."
한암스님의 칼날 같은 물음에 정곡을 찔린 적석사 주지는 당황하여 온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예에. 저 지금은 울리지 않으니 없다고 하겠습니다."
"어허, 이사람! 다시 또 풍경이 울리지 않았는가!"
한암스님의 목소리에는 얼음을 쪼개는 듯한 냉정함이 어려 있었다.
석사 주지는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쩔쩔매기만 할 뿐 이었다.
사실 한암스님과도 같은 대선지식의 깊고도 높은 선지를 꿰뚫기에는 주지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파랗게 질린 적석사 주지는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하, 하오면 스님!"
"허허허, 풍경소리는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꽃이나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다 그와 같으이."
적석사 주지는 한암스님의 거리낌 없는 웃음 앞에서 말없이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곁에서 두 스님의 대화를 지켜보던 성관 수좌도 어리둥절한 눈길로 스님께 여쭈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저 역시 못 알아 듣겠사옵니다, 스님."
"저 쇠붙이가 풍경으로 만들어진 인연, 처마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인연,
거기에 살랑살랑 바람을 만난 인연, 그 밑에서 우리가 들어준 인연,
인연들이 모이면 소리가 있으되 인연이 흩어지면 소리가 없으니,
세상 모든 이치가 다 이와 같다 할 것이야.
자, 이제 그만 우리는 내려가 보자꾸나."
☞ 고승열전 한암 큰 스님편 <바구니에 물을 담고 달려간들 무엇하리>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