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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탐방후기☞/♣ 남한산성

[20110123]산들걷기와 함께 눈내리는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 3부

by 맥가이버 Macgyver 2011.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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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1월 23일(일)  
산들걷기와 함께 눈내리는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산들걷기와 함께 눈내리는 남한산성 일주' 코스
 
마천역→거여중앙교회→등산로 삼거리→성불사→전망터→금암산 갈림길→산불감시초소→연주봉 옹성→서문 전망데크→서문(우익문)
→매탄터→북장대터→북문(전승문)→제1군포터→제2군포터→제4암문(북암문)→수구→동장대 암문→봉암성 암문→벌봉 암문
→벌봉(봉암)
→봉암성 암문→동장대 암문→동장대터→남한산성 군포지→제2암문(장경사 신지옹성 암문)→장경사 신지옹성→장경사→장경사 일주문
제1암문(장경사암문)→송암정터→동문(좌익문)→동문교→수문→시구문/제11암문(동암문)→제3남옹성→제2남옹성/남장대터→제1남옹성
남문(지화문)→영춘정→청량당→수어장대→수어서대→무망루→병암(병암남성신수비)→서문(우익문)→청운사→등산로 3거리→마천역
 
▼ 아래 남한산성일주 코스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위치한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국가 사적 57호로서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 문무왕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년)이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량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 22년) 한남루를 세우고 1642년에 세운 객관인 인화관을 1829년(순조 29년)에 수리하였다.
관해로는 좌승당, 일장각, 수어청, 제승헌을 비롯하여,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 마구, 뇌옥, 온조왕묘, 성황단, 여단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지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 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외침에 의하여 정복당한 적이 없는 성이다.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광주시의 지질은 회색화강암과 편마암지대이며, 지형은 광주산맥의 영향권 안에 있다.

토양은 편마암계나 화강암을 母巖으로 하는 사질양토(砂質壤土)나 양토(壤土)이다.

남한산성은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내부는 약 350m의 구릉성 분지이다.

 또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지방도에 걸친 연변은 약 8km에 이르는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높고 낮은 산이 많으며 좁고 긴 하천이 한강을 향하여 북 또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한편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은 문형산497m, 매지봉(400m), 검단산(542m) 등과

남북으로 주부(主部)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산릉들은 북동 방향으로 연결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 모양이 대략 남북으로 발달된 것은 부분적으로 좌수향(左手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평균 기온은 인접 도시와 약4。C 정도 낮은 기온차가 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1,400mm이며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로 봄과 늦가을에 많이 분포하며 탐방객의 산성이용에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산간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남한산성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원성은 인조 2년(1624)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영역으로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외에 외성으로는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고, 남쪽에 신남성이 있는데 이곳에는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의 규모와 면적에는 많은 이론이 있었다.

 
『광주군지』에는 8km 정도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1 : 5,000 지형도를 기본으로 한 GIS측정 결과 산성의 둘레는 옹성을 포함하여 10,841.5m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남한산성에 대한 정확한 측량이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지』에서는 성벽 안 둘레는 6,290보로 17리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이고,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개소의 군포, 4개소의 장대가 있다고 하였다.
안 둘레는 7,853.6m이고, 바깥둘레는 9,108.5m이다.

그런데 최근 토지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정밀 측량을 한 결과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기존에 알려져 있던 것 보다 훨씬 큰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성벽의 둘레를 측량하는 방법은

성벽외곽 기단부나, 여장 안쪽 기저부, 여장 옥개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는 등 세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기준은 여장 옥개 중심선을 따라 측정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도 여장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량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옹성과 외성을 포함한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둘레가 12,355m이고,

 폐곡선을 이루지 않는 한봉성을 제외한 성내부의 면적은 2,209,270㎡(약 668,303평)으로 확인되었다.

 
그중 원성은 대부분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까지 축성된 것으로

전체 둘레는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216,637㎡(643,307평)이다.
원성의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남벽과 북벽의 일부가 훼손된 채로 있다.

 
성 내부의 구조물로는 동·서·남·북 방향의 4곳에 성문이 있고,

신남성의 두돈대에 각각 홍예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남옹성2의 포루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1개소 있다.

암문은 기록과 마찬가지로 16개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치는 각 남옹성과 연주봉 옹성에 1개소 및 봉암성에 1개소 등 5개소가 설치되었다.
 
포루는 각 남옹성과 장경사 부근의 옹성 및 장경사 신지옹성, 연주봉 옹성, 한봉성 등 7개소에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 포루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면 확인 가능한 포루는 모두 28개소이다.

 

또한 성내의 물을 성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수구문은 동문 근처에 1개소가 있었으며, 28개의 수구가 확인되고 있다.

 

남한산성의 규모와 면적 

규모와 면적
명칭 길이(m) 면적(㎡) 비고
원성 7,545 2,126,637 인조 2년(1624년) 수축
남옹성1 426 2,381 인조 16(1638)·정조 3년(1779)증개축
남옹성2 318 3,583 인조 16년(1638)추정
남옹성3 125 839 인조 16년(1638)추정
장경사신지옹성 159 1,447  
연주봉옹성 315 865 인조 2년(1624)원성 수축시 축성
소계 8,888 2,135,752  
봉암성 2,120 7,137 숙종 12년(1686)신축, 숙종 31년(1705) 두개의 포루 증축
한봉성 1,093 2,142,889 숙종 9년(1693)신축
소계 3,213 7,137  
신남성동돈대 134 998 숙종 5년(1719)신남성 신축
신남성서돈대 121 2,379 영조 9년(1753)신남성 두 개의 돈대 구축
소계 255 2,145,268  
합계 12,356    

 

- 남한산성 홈에서 가져옴 - 

 

 

  맥가이버의 '산들걷기와 함께 눈내리는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이야기 

 
남한산성은 그간에 '남한산성일주', 그리고 하남의 산이나 분당의 산과 연계산행을 하면서 십 여차례 다녀온 적이 있는데,
한겨울에는 간 적이 없어서 남한산성의 겨울 모습을 보러 가려고 하던 차에 마침 오늘 산들걷기에서 '남한산성일주'를 한다기에...
때마침 낮부터 눈도 온다니 잘되었다 싶어 '산들걷기(에우길님과 화란님 공동주최)에 함께 한다는 참가글을 달고 마천역으로 향한다.
  
'모든 만남은 걷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풍광을 보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
 
'산들걷기와 함께 눈내리는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기억력이 유한함을 알기에 훗날 그 당시의 풍광과 그리고 함께 했던 님들과의 추억을 되살리고자 함이고,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산들걷기와 함께 눈내리는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 3부를 시작하며...

 

▼ 12시 44분 - 벌봉 정상(515m)에 올라...

 

 

▼ 벌봉 정상 아래 치성터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 13시 28분 - 점심식사를 마치고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 이처럼 눈이 내려서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네...

 

 

 

 

 

 

 

 

▼ 13시 32분 - 다시 봉암성 암문을 거쳐 동장대 암문으로 들어서기 위해 출발...

 

 

 

 

 

 

 

 

 

 

 

 

 

▼ 13시 42분 - 봉암성 암문을 통과하여...

 

 

 

 

▼ 13시 44분 - 동장대 암문으로 들어서고...

 

 

 

▼ 13시 46분 - 동장대터에 올라서서...

 

 

 

▼ 무너진 여장...

 

 

▼ 13시 47분 - 장경사신지옹성을 향해...

 

 

▼ 13시 49분 - 남한산성 군포지

 

 

 

 

 

 

 

 

 

▼ 13시 54분 - 장경사신지옹성 암문을 통과하여...

 

 

▼ 장경사신지옹성

 

 

 

 

▼ 장경사신지옹성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 13시 58분 - 다시 장경사신지옹성 암문을 통과하여...

 

 

▼ 장경사를 향하여...

 

▼ 장경사신지옹성을 돌아보니...

 

 

 

 

 

 

 

 

 

 

 

▼ 14시 07분 - 장경사에 들러서...

 

 

 

 

▼ 장경사

 

 

 

 

 

 

 

▼ 14시 14분 - 장경사 일주문

 

 

 

▼ 장경사 쉼터

 

 

 

▼ 14시 17분 - 장경사 암문을 지나..

 

 

 

 

▼ 장경사를 내려다 보니...

 

 

 

 

 

 

 

 

 

▼ 송암정터와 대부송이 보이고...

 

▼ 14시 24분 - 송암정터과 대부송

 

 

▼ 송암정터  

 

▼ 대부송

 

▼ 14시 26분 - 동문을 향하여...

 

☞ 여기서 '산들걷기와 함께 눈내리는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 3부를 마치고...

 

 

 

2011년 01월 23일(일)
산들걷기와 함께 눈내리는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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