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다.
맥가이버는 '산 따라 강 따라 길 따라' 걷는 것을 죽고사는 차원이 아닌 즐기는 차원에서 걷는다.
즉, 좋은 길을 걷다가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 감동 받고, 깨닫는 것을 즐긴다.
→매탄터→북장대터→북문(전승문)→제1군포터→제2군포터→제4암문(북암문)→수구→동장대 암문→봉암성 암문→벌봉 암문→벌봉(봉암)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위치한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국가 사적 57호로서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 문무왕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년)이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량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 |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 22년) 한남루를 세우고 1642년에 세운 객관인 인화관을 1829년(순조 29년)에 수리하였다.
관해로는 좌승당, 일장각, 수어청, 제승헌을 비롯하여,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 마구, 뇌옥, 온조왕묘, 성황단, 여단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지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 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외침에 의하여 정복당한 적이 없는 성이다.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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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광주시의 지질은 회색화강암과 편마암지대이며, 지형은 광주산맥의 영향권 안에 있다.
토양은 편마암계나 화강암을 母巖으로 하는 사질양토(砂質壤土)나 양토(壤土)이다.
남한산성은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내부는 약 350m의 구릉성 분지이다.
또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지방도에 걸친 연변은 약 8km에 이르는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높고 낮은 산이 많으며 좁고 긴 하천이 한강을 향하여 북 또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한편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은 문형산497m, 매지봉(400m), 검단산(542m) 등과
남북으로 주부(主部)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산릉들은 북동 방향으로 연결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 모양이 대략 남북으로 발달된 것은 부분적으로 좌수향(左手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평균 기온은 인접 도시와 약4。C 정도 낮은 기온차가 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1,400mm이며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로 봄과 늦가을에 많이 분포하며 탐방객의 산성이용에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산간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원성은 인조 2년(1624)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영역으로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의 규모와 면적에는 많은 이론이 있었다.
1 : 5,000 지형도를 기본으로 한 GIS측정 결과 산성의 둘레는 옹성을 포함하여 10,841.5m로 확인되었다.
『남한지』에서는 성벽 안 둘레는 6,290보로 17리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이고,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개소의 군포, 4개소의 장대가 있다고 하였다.
안 둘레는 7,853.6m이고, 바깥둘레는 9,108.5m이다.
그런데 최근 토지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정밀 측량을 한 결과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기존에 알려져 있던 것 보다 훨씬 큰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외곽 기단부나, 여장 안쪽 기저부, 여장 옥개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는 등 세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기준은 여장 옥개 중심선을 따라 측정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도 여장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량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옹성과 외성을 포함한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둘레가 12,355m이고,
폐곡선을 이루지 않는 한봉성을 제외한 성내부의 면적은 2,209,270㎡(약 668,303평)으로 확인되었다.
전체 둘레는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216,637㎡(643,307평)이다.
원성의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남벽과 북벽의 일부가 훼손된 채로 있다.
신남성의 두돈대에 각각 홍예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남옹성2의 포루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1개소 있다.
암문은 기록과 마찬가지로 16개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치는 각 남옹성과 연주봉 옹성에 1개소 및 봉암성에 1개소 등 5개소가 설치되었다.
현재 포루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면 확인 가능한 포루는 모두 28개소이다.
또한 성내의 물을 성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수구문은 동문 근처에 1개소가 있었으며, 28개의 수구가 확인되고 있다.
남한산성의 규모와 면적
명칭 | 길이(m) | 면적(㎡) | 비고 |
---|---|---|---|
원성 | 7,545 | 2,126,637 | 인조 2년(1624년) 수축 |
남옹성1 | 426 | 2,381 | 인조 16(1638)·정조 3년(1779)증개축 |
남옹성2 | 318 | 3,583 | 인조 16년(1638)추정 |
남옹성3 | 125 | 839 | 인조 16년(1638)추정 |
장경사신지옹성 | 159 | 1,447 | |
연주봉옹성 | 315 | 865 | 인조 2년(1624)원성 수축시 축성 |
소계 | 8,888 | 2,135,752 | |
봉암성 | 2,120 | 7,137 | 숙종 12년(1686)신축, 숙종 31년(1705) 두개의 포루 증축 |
한봉성 | 1,093 | 2,142,889 | 숙종 9년(1693)신축 |
소계 | 3,213 | 7,137 | |
신남성동돈대 | 134 | 998 | 숙종 5년(1719)신남성 신축 |
신남성서돈대 | 121 | 2,379 | 영조 9년(1753)신남성 두 개의 돈대 구축 |
소계 | 255 | 2,145,268 | |
합계 | 12,356 |
- 남한산성 홈에서 가져옴 -
자세한 이야기는 맥가이버의 블로그 사진후기로 대신한다.
맥가이버가 '때론 함께, 때론 홀로' 산행이나 여행, 도보를 하면서 후기를 주로 사진으로 작성함은
인간의 기억력이 유한함을 알기에 훗날 그 당시의 풍광과 그리고 함께 했던 님들과의 추억을 되살리고자 함이고,
인간의 만남이 또한 유한함을 알기에 어떤 연유로 비록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추억 속에서 함께 하고자 함이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걸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하는 무능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든다면 누군가가 같은 길을 걷고자 할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 '산들걷기와 함께 눈내리는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 4부를 시작하며...
▼ 14시 24분 - 송암정터과 대부송
▼ 대부송
▼ 14시 26분 - 동문을 향하여...
▼ 14시 29분 - 동문이 보이네...
▼ 동문 문루
▼ 14시 26분 - 동문(좌익문)
동문(左翼門)
동문은 산성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문과 함께 가장 사용빈도가 높았던 성문 중의 하나이다.
이 성문은 선조 때에 이미 보수하였고 인조 2년 새로 수축된 이후, 정조 3년(1779) 성곽 보수시에 이 성문도 보수하였다.
이때 다른 문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동문을 '좌익문' 이라 한 것은 국왕은 남면(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동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이다.
성문은 홍예식이며, 폭은 310cm, 높이는 400cm 이다.
홍예는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돌을 쌓아서 구축하였다.
홍예 안쪽에는 두께 12cm의 목재 판문을 달고 겉에는 가로 31cm, 세로 16cm의 철린을 붙여 보강하였다.
문 뒷면에는 가로 40cm, 세로22cm의 장방형 홈을 파서 장군목을 걸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성문의 육축(陸築)은 크고 정교하게 가공된 무사석(武砂石)쌓기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동문의 경우 일반 성돌에 비해 오히려 덜 가공된 약 2배 정도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성돌의 형태나 축성상태를 보면 개구부의 바깥쪽에서 보았을 때 홍예의 좌측 부분이 여러 번 수축되었음이 확인된다.
성문의 여장은 타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연결한 평여장이며 총안도 설치되지 않았다.
성문 좌측 부분은 경사가 급해 계단으로 처리된 부분의 여장은 가운데에 한 개의 총안이 있는 층단형 여장이며,
우측은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는 성벽과 평행하여 옥개정상부도 사선을 이루도록 하였다.
문루는 단층이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양식으로 용머리는 망와로 마감하고 문루의 천정은 연등천정을 하였다.
기둥 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며 그 위에 굴도리 가구(架構)를 둘렀다.
다른 문에 비해 동문은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있기 때문에
성문은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14시 33분 - 동문교를 건너...
▼ 14시 33분 - 남한산성의 수문
▼ 2005년 7월에 객산을 거쳐 벌봉에 올라 남한산성을 일주하고, 은고개로 하산하던 날에 발견한
이 수문에 대한 안내에 '수문' 일명 '시구문'이라고 되어 있기에...
- 이것은 잘못이다. -
- 수문으로 시체를 내보내는 일이 있을 수 없고, 있었서도 안되는 일이다.
어느 누가 수장이 아닐진데 시체를 물에 넣는다 말인가?
라는 글을 올렸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안내판도 달라졌고 수문을 시구문이라고 설명한 부분도 없어졌네...
▼ 수문
▼ 14시 33분 - 제11암문(동암문) / 시구문으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 동문을 돌아보니..
▼ 오늘 남한산성일주를 주최하신 에움길님과 화란님 부부
▼ 에움길님
▼ 14시 52분 - 암문 위를 지나..
▼ 14시 55분 - 제3남옹성
▼ 14시 55분 - 제2남옹성(남장대터)를 향해...
▼ 14시 57분 - 암문을 지나...
▼ 15시 01분 - 제2옹성(좌), 남장대터(우)에 도착...
▼ 잠시 간식시간을 갖고...
▼ 남장대터
▼ 제2옹성
▼ 제2남옹성
▼ 제2옹성 여장
▼ 제2옹성의 여장 근총안으로 본 제2남옹성
▼ 15시 06분 - 출발...
▼ 제1옹성 암문이 보이네...
▼ 15시 19분 - 남문(지화문)
남문(至和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cm 지점에 위치한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至和門으로 칭하였으며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구분된다.
홍예문은 높이 475cm, 너비 335cm, 길이 860cm로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문의 하부육축은 일부 성벽의 배부른 현상을 제외하고는 육축 높이와 홍예문 높이가 동문보다는 높게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의 문비도 두꺼운 판재에 30cm 크기의 철린을 촘촘히 박아 댄 육중한 모습이며
상하의 지도리석으로 위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는 원형 그대로이다.
문짝의 뒷면에는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방형 장군목 홈이 측벽의 좌우에 각각 파여져 있다.
성문 통로의 바닥은 바깥쪽으로 경사가 심하며 통로 위의 천장은
동문의 경우와 같이 회벽이 홍예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회벽칠로 둥글게 막아져 있다.
다른 성곽의 성문에서는 주로 판자널로 천장을 막고 별화단청을 한 천판을 형성하는 것이
통례임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주초석을 대부분 새로 보충하여 문루를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문에 비해 비교적 그 규모가 크고
장초석을 사용하여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약간 더 높게 지어졌다.
또한 건축양식으로 비교하면 동문보다는 공포와 가구구조, 처마부분 등에서 비교적 형식을 갖추어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기단은 양 측면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생략되어 있다.
향후 보수시에 기단이 설치 되어야 할 것이다.
화강석 장주초석 위에 세워진 기둥은 건물규모에 비하여 비교적 굵으며 약한 민흘림이 있다.
도리는 굴도리가 사용되었으며 공포는 주두, 소로, 초익공을 갖춘 익공계 양식으로 꾸며 졌다.
고주없이 대량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도리를 받는 5량가 형식으로서
퇴량이 없이 측면쪽에만 대량 위에 충량 2본씩이 걸쳐져 외기중도리를 받는 구조이다.
건물 내부의 천장은 연목의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정이며 외기반자쪽만 판재로 막아 대었다.
문루는 팔작지붕이며 용머리는 망와로 마감하였으나 내림마루에는 망새대신 용두를 장식하였다.
누대의 천정 양식은 연등 천정 양식이다.
주춧돌은 가로 50cm, 세로 50cm, 높이 110cm의 장주 초석을 사용하였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
▼ 남문(지화문) 문루에서 잠시 휴식...
▼ 남문 밖은...
▼ 15시 26분 - 이제 영춘정을 향해 출발...
▼ 남문을 돌아보니...
▼ 15시 36분 - 여기가 432고지인 듯...
☞ 여기서 '산들걷기와 함께 눈내리는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 4부를 마치고...
-▥☞ 1부[마천역→등산로3거리→성불사→산불감시초소→연주봉옹성→서문 전망데크→서문→매탄터]는 여기를 클릭.☜▥-
-▥☞ 2부[매탄터→북장대터→북문→제1군포터→북암문→동장대 암문→봉암성 암문→벌봉 암문→벌봉]는 여기를 클릭.☜▥-
-▥☞ 3부[벌봉→봉암성 암문→동장대 암문→동장대터→장경사신지옹성→장경사→장경사 일주문→송암정터]는 여기를 클릭.☜▥-
-▥☞ 4부[송암정터→동문→동문교→수문→시구문(동암문)→제3남옹성→남장대터→제1남옹성→남문→432고지]는 여기를 클릭.☜▥-
-▥☞ 5부[432고지→영춘정→청량당→수어장대→수어서대→무망루→병암→서문→청운사→등산로 3거리→마천역]는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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