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지: 전남 장흥 천관산(723m)

■ 산행일시: 2011년 11월 20일(일)

# 호남 5대 명산 천관산에서 느껴보는 가을의 끝자락

천관산은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1시간 30여분이면 정상에 닿아 노약자와 어린이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가족공원과도 같은 느낌의 산으로, 북으로는 광주의 무등산을 비롯해 영암의 월출산과 인근의 제암산이 보이며 남쪽으로 남해의 다도해와 멀리 제주도의 한라산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1998년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전망대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천관산자연휴양림에서의 야영은 그 운치를 더해준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수많은 등산객들이 빼곡히 줄지어 오를 만큼 북적이는 탓에 산과 마을을 잇는 산길마다 울긋불긋 오색 향연의 축제가 벌어져 넓디 넓은 주차장도 몸살을 앓는다. 정상부엔 전국에서 손에 꼽힐 규모의 억새평원이 펼쳐지고 봉우리마다 기암이 자리하고 있어서 볼거리를 더해 준다.

   
 
매년 가을 열리는 억새축제를 피해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나름의 매력으로도 충분히 가 볼만한 산으로 서울 세종로 광화문 한복판에 설치된 도로원표(道路元標)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정동(正東)은 정동진(正東津)이고, 정북(正北)이 가장 춥다는 중강진(中江鎭)이다. 그리고 정남진(正南津)인 장흥(長興) 땅에 솟은 천관산은 기암과 억새와 다도해의 푸른 바다를 품고 있어서 3박자를 갖춘 산이라 할 수 있겠다. 신산(神山)이라고도 불리던 천관산은 지제산(支提山) 또는 천풍산(天風山)이라고도 하였는데, 첩첩이 쌓인 기암괴석이 천자의 면류관 형상을 하고 있는 데다가 천관보살이 살았다 하여 천관산(天冠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속하는 천관산에는 6개 동천(洞天)과 44개 영봉(靈峰) 그리고 36개 석대(石臺)가 있고, 옛날에는 89암자가 있어 28명의 대사를 배출했으며, 금강산 다음의 명산이었다고 천관산기(天冠山記)는 기록하고 있다.

# 절경의 기암과 어우러진 억새평원

축제는 끝이 났고 사람들은 떠났다. 휑한 주차장에 덩그러니 놓인 몇 대의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지만 몇 주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이다. 허허롭게 서 있는 장승 옆 등산 안내판을 보기 전에 먼저 반기는 것은 호남제일 지제영산(湖南第一 支提靈山)이라 적힌 커다란 안내석이다. 간편하게 몸풀기를 하고 정상부인 연대봉으로 가기 위해 산길로 접어든다.

   
 
방송의 힘인가. 1박2일에 소개됐던 탓에 '이승기 길'과 '강호동, 이수근 길'이 기존의 안내판에 나란히 붙어서 길을 안내하고 있다. 재밌는 현상으로만 생각하고 복잡한 계산은 배낭에 집어넣고 다시 길을 간다.
일찍 오르려면 양근암 코스(2.3㎞)를 택할 것이고 조망과 구경거리를 찾는다면 환희대(3.6㎞) 방향을 따르면 된다. 선택은 각자의 몫으로 등산객들도 같은 버스를 타고 왔어도 갈 길은 제각각이다. 그렇게들 갈 길을 찾아가고 나도 길을 따라 오른다.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사각거리는 낙엽이 정겨운 길을 얼마나 올랐을까. 종봉, 천주봉, 관음봉, 선재봉, 대세봉, 석선봉, 돛대봉, 구룡봉, 갈대봉, 독성암, 아육탑 등을 비롯해 수십 개의 기암괴석과 기봉이 꼭대기 부분에 삐죽삐죽 솟은 모습을 보며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과 섞였다. 마땅한 바위 하나를 골라 앉아 눈앞에 펼쳐진 남해바다를 눈에 두고 있는데 추수가 끝난 관산읍 벌판이 공허한 하늘처럼 다가온다. 푸른 바다며 너른 벌판이며 하늘이 모두 비어있는 듯 허한 상태로 떠다니는 듯하다.

바다와 하늘의 구분 없이 떠다니다가 억새를 뒤흔들고 지나온 바람에 문득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느긋하게 올라 쓸쓸한 벌판을 지나 가을이 머문 바다를 바라보다 하루를 다 보낼 판이다. 제암산에서 삼비산을 거쳐 존재산으로 뻗은 호남정맥은 바다에 닿을 듯하면서도 기운차게 뻗어나간다. 고흥 소록도와 거금도는 돛단배처럼 느껴지고, 완도 청산도와 보길도는 고래 등을 닮았다. 그 외에도 거금도, 금당도, 금일도, 생일도, 신지도… 등 이름도 생소한 섬들이 즐비하다.

   
 
억새 명산 가운데 명성산은 전쟁 중 폭격으로 나무들이 없어져 억새평원이 생겼고, 천관산은 고려 때 일본공략에 나선 여몽연합군이 군선건조를 위해 산의 수림이 크게 남벌당해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때도 군선건조와 왜인들의 방화약탈로 다시 울창한 수목과 사찰들이 큰 수난을 겪었으며, 일제강점기부터는 일본 회사들의 건축재 반출사업으로 산이 크게 헐벗게 되어 억새군락을 이뤘다고 한다.

억새군락 하나에도 역사가 있고 아픔이 있어서인지 유독 을씨년스런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애처롭게 보인다. 가던 걸음을 얼마 못 가 다시 멈춘다. 암릉 9개가 하나의 암봉군(岩峰群)을 이룬 구정봉(九頂峰)을 비롯해 관세음보살이 불경을 실은 돌배의 돛대라는 석선봉(石船峰), 아홉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구룡봉(九龍峰) 등 크고 작은 기암들 때문이다.

# 하늘빛과 바다가 하나되는 연대봉

천관산 정상인 연대봉(烟帶峰·723m)에 섰다.

옛날에는 옥정봉(玉井峰)이라고도 했으나, 연기가 피어오른다 하여 봉수봉(熢燧峰) 또는 연대봉으로 불렀다 한다. 1986년에 복원했다는 동서 7.9m, 남북 6.6m, 높이 2.3m의 봉화대가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며 설치되어 있다. 봉화대는 왜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고려 의종 3년(1149년)에 처음 쌓은 후 낮에는 연기(熢)로, 밤에는 횃불(燧)로 나라의 위급을 연락하던 통신수단이었다. 지금은 기념물처럼 기념사진의 배경노릇이 유일하지만 이 길 저 길에서 오른 사람들로 다소 북적이는 연대봉을 지나 본격적인 억새 구경에 빠져든다. 이미 한풀 꺾인 억새가 더 부서져라 사각거린다. 평원을 달리던 말의 영혼이라도 지나는 것일까, 유난히도 거센 바람에 더욱 부서질 듯 온 몸을 부딛힌다. 바람을 피해 억새밭 가운데에 앉았다. 억새 사이로 다도해가 어른거린다. 흔들리는 억새처럼 바다도 흔들리고 하늘을 떠가는 구름 같은 섬들이 바다에서 방황하듯 보인다. 봄이었다면 능선을 가득 채운 진달래꽃 너머로 보았을 그림이다.

   
 
※ 산행안내

■ 등산로

장천재 ~ 양근암 ~ 정원석 ~ 연대봉 ~ 환희대 ~ (구룡봉) ~ 구정봉 ~ 금강굴 ~ 선인봉 ~ 장천재(4시간)

장천재 ~ 금강굴 ~ 구정봉 ~ 억새능선 ~ 연대봉 ~ 정원석 ~ 양근암 ~ 장천재(5시간)

■ 교통

경부고속도로-천안 논산 고속도로 천안JC-호남고속도로 산월IC-방촌삼거리-천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