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이버의 낭만도보 - '사육신묘ㆍ국립서울현충원ㆍ동작대교ㆍ용산가족공원ㆍ국립중앙박물관 이어걷기' 이야기
맥가이버의 낭만도보 - '사육신묘ㆍ국립서울현충원ㆍ동작대교ㆍ용산가족공원ㆍ국립중앙박물관 이어걷기' 코스 노량진역→노량진119센터→사육신역사공원→의절사→사육신묘→사육신역사관/조망명소→노량진교회→래미안 트윈파크아파트
→배수지공원→노들역4번출입구→노들지구대→고구동산→중앙대후문→서달산잣나무길→숲속도서관→서달산생태다리→달마사
→현충원 흑석출입문→대한독립군무명용사 위령탑→애국지사묘→충열대→충혼당→충성분수대→국립서울현충원 정문→동작역
→동작대교 도강→용산가족공원 입구→연못→태극기공원→종각→불상정원→석조물정원→거울못/청자정→박물관나들길→이촌역
▼ 12시 50분 - 노량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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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시 57분 - 사육신역사공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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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살문
사육신묘[死六臣墓]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鷺梁津洞)에 있는 사육신의 묘.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8호
지정일 : 1972년 05월 25일
소재지 :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185-2
시대 : 조선시대
종류/분류 : 묘
조선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의 충절과 의기를 추모하여,
1691년(숙종 17) 이곳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우고,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서울시는 1955년 그 자리에 육각(六角)의 사육신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수축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만 묻혔으나,
1977∼78년 사육신묘역 정화사업 때 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의 가묘(假墓)도 추봉(追封)하였다.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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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묘[死六臣墓]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을 하다가 순절한 여섯 신하의 묘.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원래는 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시에서 1977∼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를 추봉(追封),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 묘가 있는 곳은 지난날 사형이 집행되던 곳이라는 말이 전하기는 하나,
사육신 중 박팽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했고,
유성원은 잡혀가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자인(自刃 : 칼로 자결함)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거열(車裂)을 당했으므로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정중히 장사지내 줄만한 사람도 당시에는 없었다.
박팽년의 유복자만이 겨우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고 하는데,
나머지 사육신의 아들들은 모두 교형(絞刑)을 당했고, 남은 가족들도 노비가 되었다.
또, 먼 일가나 이웃들도 국가적인 기휘(忌諱)를 받은 이들을 장사지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므로
이곳에 육신묘가 처음 마련된 과정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육신묘가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유씨지묘·이씨지묘·성씨지묘라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는데, 일찍이 민간에서 이 묘소를 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고 전해왔다.
이렇게 민간에서만 인정되어오던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다.
1679년(숙종 5)에 왕이 노량에 열무(閱武 : 군사 검열을 관람)갔다가
유사(有司)에게 명해 육신묘를 봉식(封植 ;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음)하였다.
1691년에는 왕이 김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량사장(露梁沙場)에서 열무를 하고 나서
관원을 보내 사육신묘에 치제(致祭)하게 했으며, 곧 이어 사육신을 숭장(崇奬)하였다.
한편, 1681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세워지고 1692년에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또, 이 때 박팽년의 7대 손인 좌익찬 숭고(崇古)가 육신묘를 수축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신묘가 공식화되어 사람들의 존숭을 받게 되었다.
그 뒤 1782년(정조 6)에 이르러 육신묘비인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다.
신도비의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찬하고, 글씨는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로 설치된 민절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1954년 서울시가 세운 6각(角)의 육신묘비가 있다.
비면 상단에는 김광섭(金光燮)이 짓고 김충현(金忠顯)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중·하단에는 손재형(孫在馨)이 쓴 육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가 각각 1면씩 새겨져 있다.
또,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의절사(義節祠)와 정문인 불이문(不二門)이 있는데,
모두 1978년 사육신 묘역의 정화 사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2시 59분 - 의절사 불이문을 들어서서,,,
▼ 신도비각
▼ 육각비
▼ 의절사
사육신[死六臣]
1456년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인물들 가운데 남효온의 <육신전>에 소개된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6명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 이후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현재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당시 함께 처형된 김문기의 묘도 조성되어 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사육신(死六臣)은 조선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6명을 가리킨다.
‘병자사화(丙子士禍)’라고도 불리는 당시의 사건에서 이들 외에
권자신(權自愼)ㆍ권저(權著)ㆍ김문기(金文起)ㆍ박중림(朴仲林)ㆍ박기년(朴耆年)ㆍ박대년(朴大年)ㆍ박인년(朴引年)
ㆍ박쟁(朴崝)ㆍ성승(成勝)ㆍ성삼고(成三顧)ㆍ송석동(宋石同)ㆍ심신(沈愼)ㆍ윤영손(尹令孫)ㆍ이유기(李裕基)ㆍ이의영(李義英)
ㆍ이호(李昊)ㆍ이휘(李徽)ㆍ조청로(趙淸老)ㆍ최득지(崔得池)ㆍ최사우(崔斯友)ㆍ최치지(崔致池)ㆍ허조(許慥)ㆍ황선보(黃善寶)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화를 입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은 왕권 강화를 꾀한 세조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세종 때에 설치된 집현전(集賢殿) 출신의 유학자들로 문종의 즉위 이후 대간(臺諫)으로
조정에 진출했으며, 신권(臣權)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여론정치를 지향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단종이 즉위한 후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 등 소수 대신(大臣)들의 권한이 강화되자 이에 반발하여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권력 장악을 직ㆍ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래서 권자신(權自愼)ㆍ성삼문(成三問)ㆍ이휘(李徽) 등은 계유정난 이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조가 1455년 단종에게 양위(讓位)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뒤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를 폐지하고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왕권의 전제화를 꾀하자 이들은 단종 복위를 명분으로 세조를 제거하고 관료지배체제를 실현하려 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
성승ㆍ유응부ㆍ박쟁이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別雲劍)으로 참여하게 된 것을 이용해
세조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연회 장소가 좁아 별운검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거사를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성삼문을 통해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된 김질(金礩)이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계획을 주도한 성삼문ㆍ이개ㆍ하위지ㆍ박중림ㆍ김문기ㆍ성승ㆍ유응부ㆍ윤영손ㆍ권자신ㆍ박쟁ㆍ송석동ㆍ이휘 등은
1456년 7월 10일(음력 6월 8일)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조정의 신료(臣僚)들이 모두 입회한 상태에서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친자식들도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으며,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가 되었고, 가산도 모두 몰수되었다.
사육신의 유래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당시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목숨을 끊은 사람은 70여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6명을
특별히 ‘사육신(死六臣)’이라고 기리게 된 것은 이른바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지는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秋江集)≫에 수록된 ‘육신전(六臣傳)’에서 이들 여섯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사육신은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배되었고, 사대부들은 그들의 신원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성종 때에는 그들의 후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禁錮)된 것을 풀어 주었으며,
숙종 때인 1691년에는 사육신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지어 이들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영조 때에는 김문기ㆍ박중림 등의 관작도 회복되었다.
정조 때인 1791년에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울 때 세종의 아들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해
탄압을 받은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충절도 사육신 못지않으므로 함께 모셔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화의군 말고도
사육신에 못지않은 사람들을 모두 함께 배향(配享)하기로 하여 규장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작성했다.
이때 육종영(六宗英)이라 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ㆍ화의군ㆍ한남군(漢南君)ㆍ영풍군(永豊君)ㆍ이양(李穰)까지 왕실의 종친 여섯 명을,
사의척(四懿戚)이라 하여
송현수(宋玄壽)부터 권자신(權自愼)ㆍ정종(鄭悰)ㆍ권완(權完)까지 왕실의 인척 네 명을,
그리고 김종서ㆍ황보인ㆍ정분(鄭苯) 세 재상을 삼상신(三相臣),
민신(閔伸)ㆍ김문기(金文起)ㆍ조극관(趙克寬)을 삼중신(三重臣),
성승(成勝)ㆍ박쟁(朴崝)을 양운검(兩雲劒)으로 하였다.
이외에 사육신과 그들의 가족, 허후(許詡)ㆍ허조(許慥)ㆍ박계우(朴季愚)ㆍ이보흠(李甫欽)ㆍ정효전(鄭孝全) 등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위패를 함께 안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등은 처형된 뒤에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정조 때인 1782년 이곳에는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그리고 1955년에는 신도비와 마주보는 위치에 육각의 사육신비가 세워졌다.
1978년에는 묘역을 크게 넓히고 의절사(義節祠)ㆍ불이문(不二門)ㆍ홍살문ㆍ비각(碑閣) 등을 새로 지어 단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성승의 묘가 훼손되어 전해지지 않아 원래 이곳에는 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의 묘만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하위지ㆍ유성원의 가묘(假墓)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한편, 1977년 김문기의 후손인 김녕(金寧) 김씨(金氏) 문중을 중심으로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2년 6월 6일조의 기사에서
성삼문ㆍ이개ㆍ유성원ㆍ박팽년ㆍ하위지ㆍ김문기 등 여섯 명에 중점을 두어 거론하고 있는 것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자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도 현창(顯彰, 밝혀 나타냄)하기 위해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도 함께 조성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자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는
김문기의 공적을 널리 알리되 종전의 사육신 구성에는 변경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는 김문기를 포함해 모두 일곱 명의 무덤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사육신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도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두산백과]
▼ 유응부의 묘
▼ 유성원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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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시 08분 - 사육신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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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시 21분 - 한국천부교 노량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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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시 28분 - 배수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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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시 32분 - 노들역 2번 출입구로 들어가서 4번 출입구로...
▼ 13시 35분 - 노들지구대
▼ 13시 36분 - 고구동산 가는 길
▼ 13시 46분 - 노량진근린공원 농구장&배구장
▼ 13시 51분 - 중앙대 후문을 향해...
▼ 14시 00분 - 중앙대 후문
▼ 14시 02분 - 중앙대 후문 옆 휀스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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